首丘初心이란 고사성어가 있습니다. 여우가 죽을 때 그 머리를 자기가 태어났던 언덕으로 향한다는 뜻으로서 사람은 죽는 날까지 고향을 그리워함을 비유하는 말입니다. 또 흔히들 쓰는 말에 고향 까마귀만 보아도 반갑다는 말이 있습니다.
고향을 떠나 타향에서 살아가는 것이 외롭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어느 지역보다도 고향으로 불리는 나사렛 동네를 사랑하였습니다. 반면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뜻과는 달리 오히려 배척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은혜은혜 합니다. 그러나 은혜는 누구나 받는 것이 아니라 받을 자가 받습니다. 샘을 옆에 두고도 목마른 인생이 있는가 하면 가뭄이 와도 목마르지 않는 인생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로 은혜 받은 사람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은혜를 받아야 할 상황에서 은혜를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의 고향 나사렛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누구보다 예수님에 대해 잘 알았기 때문에 그것이 복이 되어야 할 터인데도 복이 되지 못했습니다. 큰 복을 받을 수 있는 조건을 가졌음에도 은혜를 걷어차고 말았습니다. 잘못된 지식이 저들의 영혼의 눈을 가린 결과입니다.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을 목수의 아들로 밖에 보지 못하는 선입관 때문입니다. 그러면 왜 큰 은혜를 저 버리게 되었는지를 오늘 말씀을 통해 살펴보겠습니다. 그래서 제목을 「고향사람이 예수님을 죽이려 합니다.」 로 정했습니다.
1. 예수님은 나사렛 회당으로부터 설교초청을 받았습니다. |
16 예수께서 그 자라나신 곳 나사렛에 이르사 안식일에 늘 하시던 대로 회당에 들어가사 성경을 읽으려고 서시매.
예수님은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지만 베들레헴을 고향이라 말하지 않습니다. 베들레헴은 조상들의 고향이고, 부모가 호적 하러 갔다가 거기서 태어났을 뿐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30년을 살아온 나사렛을 고향이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사역을 앞두고 성령님의 이끌림을 받아 유다 광야로 가서 40일 동안 금식하셨습니다. 이후 마귀로부터 세 번의 시험을 받았으나 말씀으로 물리쳤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성령님의 능력이 충만한 가운데 갈릴리로 돌아오셔서 여러 지방을 다니시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즉시 많은 능력들이 나타나자 사람들이 칭송하였습니다(14,15).
어느 안식일 날 예수님이 가버나움으로부터 도보로 30분 거리에 있는 고향 나사렛으로 가셨습니다.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자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예수님의 소문을 들은 나사렛 사람들이 크게 환영을 하였습니다. 16절 말씀으로 보아 나사렛의 회당장이 예수님께 설교를 요청한 것으로 보입니다. 나사렛 고향사람들은 예수님에게 설교할 기회를 배려한 셈입니다.
회당에서 설교를 하려면 랍비 급 정도 되어야 초청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지금까지 알던 모습과는 다른 카리스마 넘치는 예수님을 보고 설교를 요청하였을 것입니다. 오늘 설교를 이해하기 위해서 회당예배 방식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에는 기록이 없지만 유대 전통에는 유대인들은 5세가 되면 회당에 가는 것이 허락되었고, 13세가 되면 회당 출석이 생활의 일부분이 됩니다. 회당에 들어가면 먼저 개인 기도를 합니다.
다음으로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라는 쉐마(שְׁמַ֖ע. 신 06:04-09)를 공동으로 고백합니다. 이어서 테필라(Tephillah)와 쉐모네 에스레(Shemoneh Esreh)라는 열여덟 개의 간구로 이루어진 18기도문을 낭독합니다. 동시에 회중은 아멘으로 화답합니다.
이어서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성경을 낭독하는데 주로 몇 사람이 돌아가면서 아람어로 된 모세오경 중심의 성구집이나 다른 성경을 읽습니다. 성경봉독이 끝나면 다시 기도를 드리고, 회당장의 부탁을 받은 사람이 나서서 설교를 앉아서 합니다. 설교는 할 사람이 있을 경우에 하며(행 13:15), 만일 적임자가 없으면 카디쉬(Qaddish)라는 기도문을 함께 외우면서 회당예배를 마칩니다.
당시 사람들이 가장 즐겨 읽는 말씀은 메시야에 관한 본문입니다. 나라 잃은 서러움과 가난과 압제 아래 살던 유대인들에게는 유일한 위로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일반인들도 웬만하면 메시아 본문은 다 암송을 하고 있었고, 특별히 사 61:01-07절은 유대인들이 매우 좋아하는 본문입니다.
당시 성경은 양피지(羊皮紙) 두루마리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일반 사람들은 너무 비싸서 감히 가질 엄두를 내지 못하였습니다. 오늘날처럼 성경을 마음대로 읽는 사회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회당에 나와서 말씀을 듣는 것이 성경을 배울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습니다.
2. 설교를 들은 나사렛 사람들의 반응이 매우 안 좋습니다. |
28 회당에 있는 자들이 이것을 듣고 다 크게 화가 나서.
메시야로 점점 소문이 나는 예수님이 고향 나사렛 회당에서 설교를 한다니 많은 사람들이 기대감으로 모였습니다. 이때 설교 본문은 이사야서입니다. 이사야서는 워낙 분량이 많아서 여러 두루마리로 되어 있습니다. 회당 측에서는 특별히 자기들이 좋아하는 본문을 가져왔는데 당시 사람들이 잘 알고 암송하는 말씀입니다(사 61:01~03).
18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19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어서 예수님이 설교를 하시는데 회당에 모인 사람들 모두가 어떤 말씀을 전할 것인가? 라는 기대감으로 집중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첫 설교가 이렇습니다.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21). 이 설교를 듣는 모든 사람들이 깜짝 놀랐습니다. 희망을 주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18,19절은 그 옛날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생활에서 해방되어 돌아올 것을 예언한 말씀으로서 이미 페르시아 왕 고레스의 유대인 귀환령에 의해 성취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이 이 말씀을 설교의 주제로 삼은 것은 지난 역사의 성취뿐만 아니라 장차 오실 메시야 이신 예수님 자신에 관한 예언이기 때문입니다.
회당에 모인 사람들 모두가 예수님의 설교에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어떻게 목수의 직업을 가진 요셉의 아들이 랍비 교육도 받지 않고서도 이런 설교를 하는가? 라며 은혜로운 메시지를 놀랍게 여겼습니다(22; 마 13:54). 그런데 은혜를 받았으면 그 은혜를 순수하게 마음에 새기면 되지 않습니까? 그만 받은 은혜를 모두가 쏟아버리고 맙니다. 23절이 그 증거입니다.
23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반드시 의사야 너 자신을 고치라 하는 속담을 인용하여 내게 말하기를, 우리가 들은 바 가버나움에서 행한 일을 네 고향 여기서도 행하라 하리라.
예수님은 지금 회당에서 설교를 듣는 사람들의 속마음을 이렇게 간파하셨습니다. 당신이 메시야 이냐? 그러면 메시야임을 증명해 보아라. 지금 설교하는 것으로는 당신을 요셉의 아들 그 이상으로 인정할 수 없다. 당장 가버나움과 기타 등지에서 귀신을 쫓아내고 질병을 고쳤던 그런 권능을 행해보라. 그러면 우리가 믿어주겠다. 이렇게 요청할 것을 간파하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시면서 나사렛 사람들의 일그러지는 표정을 보셨지만 그 다음 반응이나 답변을 기다리지 않고 이어서 계속 말씀하십니다.
24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환영을 받는 자가 없느니라.
당신들이 요구하는 대로 가버나움에서 행한 이적들을 행한다 해도 당신들은 나를 환영하지 않을 것이다. 라고 당시의 속담을 인용하십니다. 서로의 생활이나 버릇, 습관 등 너무나 익숙하게 알고 있는 것은 오히려 선입관과 편견으로 인해 신뢰하기가 쉽지 않다는 뜻입니다. 차라리 모르는 것이 훨씬 더 유익 할 수 있습니다
3. 고향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이려 합니다. |
29 일어나 동네 밖으로 쫓아내어 그 동네가 건설된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리고자 하되.
고향 사람들이 회당에서 예수님의 설교를 통하여 처음에는 은혜를 받았는데 이내 받은 은혜를 쏟고 이제는 예수님을 동네 밖으로 끌고 가서 죽이려 합니다. 왜 이런 상황에까지 오게 되었습니까?
오늘 본문을 잘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인용하신 후 설교하신 주제는 이스라엘이 길고 긴 세월동안 기다려 온 메시야가 이제 왔다는 것과, 그 메시야는 예수님 자신이라는 말씀입니다.
메시야의 시대, 은혜의 시대를 예수님 자신이 열었다고 말씀하시자 나사렛 사람들은 받은 은혜가 순식간에 식어지고 말았습니다. 자신들과 꼭 같이 평범한 사람이고 그의 아버지도 별 볼 일 없는 목수이었는데 감히 목수의 아들이 메시야라 하며 메시야 행세를 하니 도무지 못 봐 주겠다는 겁니다.
이런 완악한 마음이 계속 진행되자 산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밀쳐 떨어뜨려 죽여야겠다는 생각에 까지 이르렀습니다. 은혜로 시작하여 험악한 분위기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 사이를 지혜롭게 빠져나왔습니다.
예배로 시작하여 재판으로 바뀐 이유가 무엇인 것 같습니까? 예수님의 설교를 은혜로 들은 사람들이 왜 돌변해서 예수님을 죽이려 합니까? 예수님께서 설교에서 인용하신 옛날 역사의 두 예화 때문입니다. 어떤 예화입니까? 엘리야 선지자 때 사렙다 과부의 궁핍함을 해결해 준 사건과(25,26), 엘리사 선지자 때 그 많은 나병 환자들 중 수리아 사람 나아만 장군만 고침 받았다는(27) 사건입니다.
그 두 사건과 나사렛 사람들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이 두 예화를 들지 않았으면 폭동까지는 발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두 예화를 보시면 긍휼의 베풂이 사렙다 과부와 나아만 두 이방인에게만 해당되었지 다른 경제가 어려운 사람들, 다른 병자들에게는 관계가 없는 사건입니다. 같이 경제 문제를 해결하고, 같이 질병의 치료를 해결 한 사건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의 설교에서 자기들은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를 입을 수 없고, 그 놀라운 구원 역사를 경험 할 수 없다고 받아들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지역, 모든 사람에게 이적을 베풀지 않으신다. 기적을 베푸는 지역과 그 대상은 한정 되어 있다. 구원이 임한 자들은 주님께 감동과 감사의 반응을 보인다. 하나님의 구원과 은혜의 역사에서 나사렛 사람들은 제외되었다.
이런 생각에 사로잡히니 마음이 심히 상해서 이성을 잃을 만큼 흥분하게 되었습니다. 안 그래도 예수님에게 신령한 카리스마가 있고, 성경 해석이 남다르고, 그의 말씀에 은혜와 감동이 있어도 목수의 아들이라는 것 때문에 메시야로 인정하기 어렵던 그들입니다. 그러던 차에 자신들을 무시하는 것 같은 설교 앞에서 폭도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사실 나사렛 사람들에게는 뿌리 깊은 열등감이 있습니다.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겠는가?(요 01:46) 라는 정도의 무시당하는 산골 동네, 뛰어난 정치인도, 학자도 나올 수 없는 낙후 된 지역으로 낙인찍혔습니다. 그런 서러움 가운데 있던 차에 예수님으로부터도 무시당하는 듯한 말을 들었습니다.
거기다 예수님이 읽으신 이사야서는 그들이 외우고 있던 본문과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마음대로 이리저리 편집하여 설교하였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이 가장 좋아하는 메시야 본문의 핵심인 이방에 대한 심판과 유대인에게 베푸시는 놀라운 축복과 상급이 쏙 빠져버렸습니다. 나사렛 사람들 관점에서는 그렇게 느껴졌지만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편협한 민족주의 시각을 탈피하여 온 세상의 시각에서 설교를 하였으니 충돌이나 오해가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
예수님은 많은 맹인의 눈을 뜨게 하셨습니다. 동시에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우리의 신령한 눈이 뜨이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육신의 눈은 밝지만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을 어리석은 맹인이라고(마 23:17) 책망하셨습니다.
그러면 신령한 면에서의 우리의 영안은 어떻습니까? 눈은 흔히 세 가지로 구분합니다. 첫째, 육안(肉眼)입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의 외형을 보는 기능입니다. 둘째, 지안(智眼)입니다. 문자나 사물의 이치를 분별하는 기능입니다.
셋째, 영안(靈眼)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분별하는 기능입니다. 영안은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와 성령님의 충만함으로 밝아집니다. 이 세 가지의 눈 가운데 가장 소중한 눈은 영안입니다. 육신의 눈이 밝고 공부를 많이 해서 높은 지식을 쌓았을지라도 영안이 어두워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삶의 가치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누구입니까? 예수님은 나에게 누구입니까? 그분은 여러분을 자유하게 하고, 영안을 뜨게 하고, 구원의 주님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 사실을 알고 깨달으면 은혜를 받습니다. 나사렛 사람들이 예수님에게 기대하는 것은 이적입니다. 그 동안 갈릴리 여러 지역을 다니면서 행했던 병 고치는 이적을 우리 동네에서 나타내보라는 기대입니다. 예수님이 메시야 됨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김삼일 가족 여러분, 은혜를 사모합니까? 그러면 하나님의 편에 서십시오. 신령한 눈을 밝혀주실 것입니다. 신령한 눈이 어두워지면 은혜를 받지 못합니다. 어쩌면 배교자의 자리에 들지도 모릅니다. 이런 자리 만나지 않도록 신령한 눈을 뜨고 은혜 받는 일에 전진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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