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미국 사람이 물건을 살 때 먼저 묻는 말이 이거 얼마입니까? 하고 값을 물어 보며, 독일 사람들은 이거 튼튼합니까? 하고 물어 보고, 프랑스 사람들은 유행에 민감하니 이거 최신 유행입니까? 라고 물어 봅니다.
그러면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거 진짜입니까? 라고 물어 봅니다. 얼마나 많이 속고, 얼마나 가짜가 많기에 물건마다 이거 진짜입니까? 하며 물어 보겠습니까? 참기름만 해도 진짜 기름이라는 말인데 거기다 진짜 참기름이라고 붙이고 팝니다.
참으로 우리의 주변은 가짜가 많고 가짜가 판을 칩니다. 그런데 가짜 교회도 하도 많아 우리가 영적 분별력이 없으면 영혼을 파멸시키는 곳으로 가기 쉽습니다. 가짜가 판을 치는 세상이니 정신 똑바로 차려야 합니다. 남의 말을 함부로 들어서도 안 됩니다. 그런데 믿음의 세계에도 가짜가 판을 칩니다. 지금도 판을 치고 있고, 그 옛날 복음의 초창기에도 판을 침으로 영적 혼란을 일으켰습니다.
디오드레베라는 사람이 겉으로는 잘 믿는 체 하면서도 속으로는 믿음과 상관없는 생활을 하여 공동체 생활을 흔들어 놓았습니다. 가짜 믿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왜 이런 가짜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까? 세상적인 마음, 인기위주의 으뜸 되고자 하는 마음을 내려놓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공동체에서 『으뜸 되기를 좋아하면』 이런 제목으로 강론하겠습니다. 은혜의 시간되기를 축원합니다.
1. 공동체 생활에서 목에 힘이 들어갑니다. |
09 내가 두어 자를 교회에 썼으나 그들 중에 으뜸 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가 우리를 맞아들이지 아니하니.
가이오와 함께 교회에서 믿음생활 하는 디오드레베, 이 사람에 대하여 특별히 알려진 것이 없습니다. 다소 짐작 할 수 있는 것은 이 디오드레베가 처음에는 교회에서 충성을 잘 하는 일꾼처럼 보여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은 것 같습니다. 사도 요한으로부터도 상당히 인정을 받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점점 교회 공동체가 커지고, 좋은 일꾼들이 세워지자 디오드레베의 교만한 마음이 발동하였습니다. 교만의 증거로서 요한이 디오드레베를 놓고 그들 중에 으뜸 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평가를 내렸기 때문입니다. 교회에서는 디오드레베가 나름 힘이 있는 사람처럼 여겨집니다.
그 예로서 요한이 보낸 순회 전도자들을 맞아들이지 않고, 그들을 접대하는 가이오를 교회에서 막 내 쫓는 경우를 보아서 그렇게 짐작 됩니다(10). 그러면 디오드레베가 왜 이런 악한 일을 벌입니까? 으뜸이 되고자 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디오드레베는 목회자가 없는 교회에서 스스로 교회의 대표성을 가지고 있다고 여겼고, 자기보다 앞 설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니 우월감이 생겼습니다.
마침 요한이 파송한 전도자들이 교회에 왔는데 자기를 통하지 않고 활동을 하자, 감히 내게 보고도 안하다니 이런 마음이 들면서 심기가 불편해졌습니다. 디오드레베의 이런 심기 때문에 전도자들을 누구하나 선뜻 나서 대접을 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이에 가이오가 나서서 전도자들에게 숙박을 제공합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합니다. 디오드레베에게 질투심이 발동한 것입니다.
이 질투가 무엇 때문에 일어납니까? 전도자들로 인해 자신의 기득권과 권위가 혹 무시당하는 것은 아닐까? 라는 염려 때문입니다. 앞서가려 하고, 인정을 받으려 하고, 높아지려 하고, 모든 일이 내 중심으로 되기를 원할 때 교만이 찾아옵니다. 이 교만은 알고 보면 인류를 파멸시키려는 사탄의 중요한 전략입니다.
약 04:06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교회생활의 연수가 조금씩 늘어 가면 자신도 모르게 디오드레베 속에 있던 그런 교만이 찾아옵니다. 믿음 관리 제대로 안 하면 분명 찾아옵니다. 이 교만이 내 속에 자리를 잡으면 이때부터 내 삶을 교만한 인생으로 이끌어 갑니다.
교만의 특징은 남들은 잘 알아차리지만 자신 만은 잘 모릅니다. 여러분, 이거 하나는 꼭 알아야 합니다. 겸손은 스스로 뼈를 깎는 각오를 함으로 갖추어지나, 교만은 본받으려 노력 안 해도 한 순간 내 마음에 자리를 잡는다는 사실 말입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 하면 종교 지도자들 아닙니까? 그들이 하나님을 잘 섬기려 하였지만 동시에 사람 앞에서 으뜸 되고자 하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이런 마음은 하나님을 섬기되 외식주의에 빠지게 됩니다. 왜냐하면 겸손함이 없기 때문입니다.
마 23:27 화 있을 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2. 선한 일 하는 자를 대적합니다. |
10 ….그가 악한 말로 우리를 비방하고도 오히려 부족하여 형제들을 맞아들이지도 아니하고 맞아들이고자 하는 자를 금하여 교회에서 내쫓는 도다.
10절을 잘 보시면 디오드레베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첫째는, 본서의 저자 요한의 사도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둘째는, 교회에서 요한을 비방하고 모략하는 일입니다. 셋째는, 요한이 보낸 전도자들을 대접하지 않고, 대접하는 성도들까지 내어 쫓은 일입니다.
개역성경에서는 저가 악한 말로 요한을 망령되이 폄론하였다고 합니다. 망령(妄靈)되다 는 늙거나 정신이 흐려서 말이나 행동이 정상을 벗어난 상태이고, 폄론(貶論)하다는 말은 헐뜯다 는 뜻입니다. 디오드레베는 그것으로도 부족하다고 했습니다.
디오드레베의 악한 모습이 어느 정도 인지 짐작되지 않습니까? 그는 교회를 자기 마음대로 이끌어 가려고 합니다. 거기다 전도자들을 배척하고, 전도자 접대하는 일을 금지합니다. 내 말을 안 들으려면 교회에서 나가라고 막 협박까지 합니다. 지도자급에 있으면서도 자기가 원치 않는다고 다른 사람들의 일까지 막으면 죄가 됩니다. 오늘 디오드레베의 문제는 바로 이런 것입니다.
자신이 주도하는 일은 좋게만 생각하고, 자기가 주장할 때는 문제가 없다고 여기다 다른 사람이 충성의 자리에서 봉사를 하면 그때는 그 일을 못 봐 주고 흔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말은 교회를 위한 일이라 하면서도 나쁜 방향으로 이끄는 선동자 디오드레베, 그의 이런 행동이야말로 공동체와 성도 모두를 힘들게 하는 일입니다.
맞아들이지도 아니하고. 단순히 전도자를 맞아들이지 않는 것 보다는 사도의 권위로 맞아들이라고 한 요한의 권면을 무시하고 거절합니다. 내가 남에게 베풀지 않으면서 남에게만 대접을 받고자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정신이 아닙니다.
자신이 어려운 환경에 놓여 있어도 이웃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실천하고, 이웃과 함께 사랑을 나누며 살아가는 모습을 하나님은 기뻐하십니다. 나그네로 지칭되는 순회 전도자들, 좁은 의미에서 낯선 손님이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우리 주변에 있는 일꾼들을 상징합니다.
창 18장에 아브라함이 폭염이 쏟아지는 한 낮에 지나가는 나그네를 잘 대접하여 아들 낳은 복을 받았고, 창 19장에서는 롯이 소돔 성에서 나그네를 잘 대접함으로 인해 소돔과 고모라가 불과 유황으로 멸망할 때 구원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나그네 대접을 소홀히 하지 말라 하셨고(마 25:38~40), 베드로도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이 없이 하라 하였고(벧전 04:09), 바울도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롬 12:13절) 하였습니다.
마 07:12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으뜸 되기를 좋아하는 사람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선한 일 하는 자를 못 봐 주는 것이고, 오히려 질투와 대적을 합니다. 이런 사람에게 물어 보십시오. 자기는 질투와 대적을 조금도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예, 자기는 영의 눈이 감겨서 대적하는 일을 하고도 깨닫지 못하나 남의 눈에는 질투와 대적하는 일이 잘 보입니다.
그래서 성도 여러분, 혹 내가 교회 안에서나 밖에서 성도를 비방하는 일, 대적하는 일을 하지 않는가를 돌아보아야 하고, 분열과 반목을 조장하지 않는지도 돌아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살피지 않고 그대로 두면 자칫 충성이 문제를 가져 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시 101:05 자기의 이웃을 은근히 헐뜯는 자를 내가 멸할 것이요, 눈이 높고 마음이 교만한 자를 내가 용납하지 아니하리로다.
3. 그 삶에 하나님이 없습니다. |
11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고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였느니라.
악을 행하는 사람의 인생에는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않습니다. 은혜의 생활에서 떨어져 살아갑니다. 영적 감각이 없습니다. 신령한 즐거움을 누리지 못합니다. 영적 부요한 삶을 누리지 못합니다. 마지막에는 패망의 길을 만납니다.
악을 행하는 디오드레베, 공동체에서 으뜸 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 선한 일 하는 자를 대적하는 디오드레베 이제 공동체에서 필요한 존재가 아닙니다. 필요가 없는 존재, 있어야 할 존재가 아니라 없어야 할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디오드레베와 같은 사람에 대하여 사도 요한은 분명한 선언을 합니다.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였느니라. 앞으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교회 공동체 안에 있었을지라도 영적 생명이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이라고 단정합니다.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였으면 어찌 됩니까?
일꾼이 아닌 방해꾼입니다. 요한은 10절에서 이런 방해꾼 디오드레베에게 곧 교회를 순방 할 것인데, 그때 행한 일에 대하여 사도의 권위로 징계를 하겠다고 선언합니다. 성도는 지도자가 주님의 권위로 축복을 빌어주어야 복을 받고 그 삶이 복 될 것인데, 복이 아니라 심판을 하겠다면 이런 삶이 바로 불행한 삶입니다.
11절이 아니라도 이미 디오드레베는 복은 고사하고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는, 하나님과 상관없는 축복 밖의 사람입니다. 진리 안에서 사는 자가 아닙니다. 오히려 진리를 위해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을 섬기지도 않고, 진리를 위해 사는 사람을 억압하고 말을 만들어 교회에서 쫓아내는 일에 사탄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면 사탄의 도구로 전락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예수님께서 화 있을 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라는 선언에서 알 수 있습니다(마 23:13,15,23,26,27,29). 바리새인들, 서기관들, 세상적 윤리관에서 보면 바르게 산 사람처럼 보이지만 영적 부분에서는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생활을 하였습니다. 사람 앞에서도 겉과 속이 다른 생활을 하였는데, 이들 교권자들이 왜 이런 삶을 살게 된 것입니까? 영으로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상관없는 삶을 산 디오드레베, 이 사람이 교회에 끼친 영향력이 어떠합니까? 세상 사람들이 교회에 대하여 나쁜 평을 하게 하였습니다. 교인들 간의 사랑의 교제를 단절시켰고, 믿음이 약한 사람들을 낙심하게 하였고, 성도들이 선교 헌금하는 일을 소홀히 하게 하였습니다.
이렇게 영으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과 대화를 하면 영적 답답함이 있고, 영적 소통이 안 됨으로 교제가 단절되고, 그냥 영적 절벽 같은 것을 느낍니다. 디오드레베를 보십시오. 겉으로는 하나님의 자녀인 것처럼 보일지라도 영적 공동체의 진정한 구성원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였기 때문에 항상 정죄하는 일, 다른 사람에게 아픔을 주는 일, 분란을 일으키는 일만 벌렸습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을 통하여 새롭게 각성과 도전을 받읍시다. 바로 초대교회 시절 교회에서 으뜸 되기를 좋아하던 디오드레베의 모습이 어쩌면 나의 모습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히 12:14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15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고….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
2016년 1월 14일 아침 9시 10분 쯤 대구광역시 남구 이천동 모 아파트에 사는 할머니 김 모 할머니(81)에게 이런 전화가 걸려왔습니다. 자신을 금융감독원 직원으로 소개하면서 지금 카드가 분실 돼 예금이 위험하니 현금으로 찾아 김치냉장고에 보관하세요. 곧 수사관이 갈 테니 집 주소와 출입문 비밀번호를 알려 주세요 라고 하자 할머니는 의심 없이 불러 주었습니다.
할머니는 은행으로 가서 통장에 들어 있던 8천만 원을 현금으로 찾아 김치냉장고에 넣어두었는데 다시 전화가 걸려와 관련 서류를 줄 테니 잠시 아파트 옆으로 나오라는 것입니다. 할머니는 아파트 옆에 나가 기다렸지만 아무도 나타나지 않자 이상한 생각이 들어 집에 돌아와 김치냉장고를 열어보니 8천만 원은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냉장고 보이스 피싱입니다.
오늘 우리가 만난 디오드레베는 악인 중의 악인이요, 가짜 믿음의 사람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11절에서 가이오에게 다시 사랑하는 자여 하고 부릅니다. 그리고 이렇게 권면을 합니다. 악한 것을 본받지 말라.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 다시 한 번 믿음의 점검을 해야만 하지 않겠습니까?
공동체에서 으뜸 되기를 좋아하는 모습, 교만한 모습, 질투하는 모습을 던져 버립시다. 어디에 던질까요. 여의도에 있는 분들에게 던져 주면 좋아 할 것 같습니다. 던져 버렸으면 믿음의 길로 달려갑시다. 복 받는 길에 서서 살아갑시다. 공동체에 힘이 되는 삶을 삽시다.
잠 16:18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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