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단/2016년 말씀

나는 질그릇에 보배를 담은 삶입니까?(고후 04:07~11)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16. 2. 6.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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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성마비 시인 송명희(1963,6,23) 하면 많이 알려진 인물입니다. 그런데 이 분이 장애인이 된 것은 아홉 달 만에 난산하면서 의사의 부주의로 소뇌를 건드렸기 때문입니다.

의사는 며칠 내로 죽을 것 같다는 선고를 하였고, 닷새가 지난 초저녁에 숨졌다가 새벽녘에 다시 소생을 한 후 뇌성마비 지체 장애자가 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태어는 났지만 울지도 몸을 가누지도 못하였고, 집안이 너무 가난하여 병에 대한 아무런 대책을 세워주지 못하였습니다.

11세에 독학으로 한글을 배우고 왼손으로 그림을 그리며 화가의 꿈을 가졌지만, 그것도 여의치 않자 하나님과 어머니를 원망하기 시작하였습니다. 17살 되던 해에 모태신앙인 그녀가 하나님을 만나 성령님으로 거듭나게 되면서 성경을 읽기 시작하여 삼십여 차례 통독을 하였고, 매일 5시간 기도하면서 주님의 은혜를 체험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연약한 자신에게 주님의 음성을 들려주신 기쁨과 감격에 사로잡혀 울던 그때의 은혜로운 심정을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주님께서 문학에는 전혀 소질이 없던 나에게 문학을 가르치셨고, 예술성을 불어넣으셨다. 시를 불러주시고 성경을 알려주셨다. 그 누구도 나와 말하지 않았고, 아무도 나에게 성경을 알려주지 않았지만 주님이 함께 하셨고 주님이 하나하나 알려주셨다. 나는 주님이 불러주시는 대로 노트에 시를 썼다. 그 비밀스런 은혜의 말씀을 알고 얼마나 울었는지, 나는 주님과 울고 웃으면서 그렇게 살았다.


송명희 시인은 그릇으로 치자면 깨어진 질그릇과도 같은 인생입니다. 어떤 그릇이든지 그릇의 가치는, 어떤 모양을 하고 있느냐? 어떤 재료를 가지고 만들었는가? 어디에 사용되는 그릇인가를 기준으로 논합니다.

그릇의 가치는 그 그릇에 무엇을 담고 있느냐? 가 중요합니다. 인생의 가치가 무엇입니까? 질그릇 같은 인생에 보배로운 예수님을 모시면 됩니다. 그래서 말씀의 제목을 질그릇에 보배를 담은 삶입니까? 로 정했습니다. 함께 은혜 받는 귀한 시간되기를 축원합니다.

 

   

   

  1. 사람은 모두가 질그릇 같은 자입니다.

 

0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사람을 가리켜 아담이라고 합니다, 아담이란 불그스름한 흙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흙으로 빚어진 우리 사람은 질그릇 같이 약하고, 깨어지기 쉽고, 천한 자입니다. 과학자들이 흙의 구성 원소와 사람의 구성 원소를 함께 분석해 보았습니다.

흙은 산소, 규소, 알루미늄, , 칼슘, 나트륨, 칼륨, 티타늄, 수소, , 구리, 크롬, 니켈, , 아연, 망간, 주석, 우라늄, 텅스텐, , 수은, , 백금 등이었습니다. 사람은 약 27종의 원소가 나왔는데 산소(65%), 탄소(18%), 수소(10%), 질소(3%), 무기질(4%)입니다. 사람의 몸속에도 흙 속에 들어 있는 성분이 다 들어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사람을 질그릇에 비유하였습니다. 질그릇이란 흙으로 구워 만든 그릇으로서 아직 유약(釉藥)을 바르지 않았기 때문에 윤기도 없고 깨어지기 쉽습니다. 사람을 질그릇이라고 하는 것은 그만큼 연약하다는 표현입니다. 그러면 이런 생각이 들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귀한 다이아몬드나 그와 비슷한 것들이 있는데도 왜 흔한 흙으로 만드셨는가 말입니다. 거기에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를 막론하고 연약한 육신, 연약한 인격자이며, 조금만 소홀히 하면 깨어지기 쉬운 육체를 가진 아주 약한 자임을 나타내려 함입니다.

 

바울은 이런 창조 원리 아래서 사람은 한 없이 연약한 존재, 전능자의 도움이 없이는 잠시라도 살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닫고 질그릇에 비유합니다. 깨어지기 쉬운 그릇, 부서지기 쉬운 그릇이니 조심해서 다루라는 뜻입니다.

질그릇 같은 우리 사람은 흘러 지나가는 말에도 상처를 잘 받고, 작은 질병에도 쉽게 무너지고, 사업이 조금만 잘 못되어도 고민에 휩싸이는 존재입니다. 그러니 질그릇 같은 여러분들 너무 대단한 체 하지 맙시다. 다 별 것 아닌 자들임을 알아야 합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부름 앞에서 하나님, 나 같은 게 감히 라고 고백할 때(03:11) 지도자가 되었고, 다윗도 나는 사람의 비방 거리요 백성의 조롱거리(22:06) 라고 고백할 때 성군이 되는 복을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바울도 자신을 질그릇으로 깨달을 때 위대한 사도가 되었고, 베드로도 주님 나는 죄인입니다(05:08). 라고 자신의 죄인 됨을 고백할 때 큰 인물이 되었습니다.

 

05:08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에 엎드려 이르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

 

기독교의 신앙은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는데서 부터 시작되며, 사람은 자신이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알 때부터 전능자이신 하나님을 찾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은 우리 모두가 질그릇 같이 깨어지기 쉬운 존재임을 인정하는 순간부터 출발이 됩니다. 나는 별 수 없는 존재라고 깨닫는 순간부터 은혜의 길이 열립니다. 사람은 아무리 위대하게 보여도 영혼 떠나면 그 순간에 모든 것이 물거품으로 끝나는 존재입니다.

 

 

 2. 질그릇에 보배를 담으면 복된 인생이 됩니다.

 

0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요즘은 질그릇을 그저 준다고 해도 가져갈 사람이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우리 아파트 쓰레기장에 가끔 괜찮은 그릇들이 나오는데 저는 그것을 놓고 한참이나 고심합니다. 가져갈까? 말까? 그러다 집이 좁아서 포기를 합니다. 조선시대의 그릇들을 보면 거의 흙으로 만들었습니다. 그 질그릇들이 별 볼품없는 그릇도 있고, 대단한 가치가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고가로 책정되는 그릇들은 대개 왕실에서 사용한 것들입니다. 진품명품 프로그램에서 보면 같은 등급의 질그릇이라도 왕실에서 사용했느냐 서민들이 사용했느냐에 따라 가격이 수억 원에서 수십만 원으로 구분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왕실에서 사용하였다는 인증 글 하나로 국보급이나 보물급으로 지정되어 잘 모셔져 있는 것을 보면 질그릇의 용도가 무엇이냐? 누가 사용하였느냐 따라 격이 달라짐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질그릇에 대한 비유가 종종 나옵니다. 그런데 그 비유가 구약성경에서는 주로 깨어지기 쉬운 속성에 초점이 맞추어져(22:15; 렘애 04:02) 있고, 신약성경에서는 어떤 그릇이든 주인이 쓸 수 있도록 깨끗이 해야 한다는 점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딤후 02:20). 그리고 구약과 신약의 공통점은 질그릇의 가치가 보잘 것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질그릇은 그 속에 무엇이 담겨져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바울은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다고 표현합니다. 보배와 질그릇, 상상하기 힘든 대조적인 말입니다. 어느 누가 보배를 보배 함에다 보관하지 질그릇에다 보관한다는 말입니까? 그러나 바울은 우리는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바울이 말하는 보배가 무엇을 말하는지 영적 차원에서 생각해 봅시다. 보배는 값없이 받은 생명의 복음과 생명의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복음은 믿는 자로 하여금 영생에 이르는 구원의 길, 지옥 갈 자가 천국을 가게 되는 최고의 소식입니다. 우리 모두 이 복음을 보배로 여기고, 전하는 일에 생명을 걸어야 합니다.

 

보배를 담은 사람은 날마다 이런 고백을 합니다. 주님은 나의 전부입니다. 나는 주님만 믿고 따라갑니다. 주님 손에 나의 모든 문제를 올려드립니다. , 우리는 세상의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는 보배를 담은 사람입니다. 자부심을 가지십시오. 연약한 질그릇 인생이지만 그 속에 보배를 담은 사람은 어떤 일을 만나도 낙심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습니다. 보배이신 주님의 힘 실어주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08 우리가 사방으로 우겨 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인생은 그릇입니다. 그러면 지금 여러분은 마음에 무엇을 담고 있습니까? 귀한 금 그릇도 독을 담고 있으면 독그릇이 되는데 여러분은 무엇을 담고 있느냐 말입니다. 질그릇은 무엇을 담고 있느냐에 따라 가치가 달라지듯 우리는 사람을 살려내고 자유하게 하는 보배를 담고 있는 자부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세상생활이 너무 바쁘다보니 내 안에 엄청난 보화가 있음을 깨닫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그것을 누리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있는 보배를 들여다보십시오. 기도로 들여다보고, 말씀으로 들여다보고, 명상하는 시간으로 들여다보십시오. 이렇게 자기를 들여다보아야 심령이 살아납니다.

 

 

 3. 나는 보배를 담은 복된 인생입니까?

 

0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라는 말을 나는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라고 적용하고 읽으십시오. 우리라는 3인칭을 1인칭으로 말입니다. 나는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제부터 우리라는 말을 나라는 말로 바꾸어 메시지를 전하겠습니다. 내가 이런 고백을 함으로서 복된 인생이 됩니다. 다른 사람이 아무리 그 속에 보배를 담고 산다 할지라도 그것은 나와 상관없습니다.

유대인 사회에서는 특별히 보배롭게 여기는 세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베냐민지파에서 태어나는 것입니다. 낳은 지 팔일 만에 할례를 받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으로서 율법을 지키며 물질의 안정을 누리는 삶입니다.

이 세 가지 스펙을 갖춘 사람은 보배로 여김을 받고, 어디를 가든지 존경과 함께 상석에 앉는 대우를 받았습니다. 이 정도면 최고의 대우를 받는 삶인 만큼 선망의 대상입니다. 바울은 빌립보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자신이 이 세 가지를 갖추었다고 말합니다.

 

03:04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05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그러나 바울은 참 보배인 예수님과 그 복음을 위해서는 유대인 사회에서의 장점과 세상의 그 어떤 것도 다 배설물처럼 버린다고 고백을 합니다(03:07,08). 왜 그렇게 버리는 겁니까? 거기에는 구원이 없고, 행복이 없기 때문입니다.

참 행복은 세상적인 조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보배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가 다 질그릇 같은 인생이고, 내가 질그릇 같은 존재입니다. 나를 한 번 돌아보십시오. 얼마나 연약한 질그릇입니까?

살짝 스쳐만 가는 말에도 상처를 잘 받고, 사탄의 유혹에 단번에 넘어지고, 온갖 질병들 앞에 속수무책이고, 아무리 몸매를 가꾸어도 세월 앞에 늙음과 죽음을 막을 수 없는 자입니다. 이런 자가 큰 소리를 칠 게 뭐가 있습니까?

그러나 내 속에 보배이신 예수님이 주인이 되어 내 인생을 이끌어 가시면 그때는 목에 힘을 주어도 됩니다. 그 보배로운 주님의 능력을 힘입어 상처 잘 받는 내 마음의 섭섭병도 이기고, 온갖 죄에 대한 사탄의 유혹도 이기고, 질병도 이기고, 마지막엔 영생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03장을 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오후 세 시에 성전에 기도하러 가다 성전 입구에서 구걸을 하여 생활하는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나면서부터 못 걷게 된 장애인인데 이 사람이 베드로에게 구걸을 요청합니다. 그때 베드로는 세상적인 물질 대신 그가 가지고 있는 아주 귀한 것을 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03:06 베드로가 이르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이것을 네게 주노니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 걸어라.

 

보배이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앉은뱅이가 일어났습니다. 걸었습니다. 뛰었습니다.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모든 것을 고치는 능력이 있습니다. 나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원을 받았고, 예수님으로 이름으로 고침을 받았으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행복을 누립니다. 구약시대 다윗도 골리앗을 물리칠 때 다윗의 지혜와 힘과 무기가 아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이었습니다(삼상 17:45). 보배로운 이름이 가는 곳에 문제가 해결이 되고 기적들이 일어납니다.

 

이집트의 카이로 박물관에 가면 수 천 년 전에 죽은 사람의 시체를 화려한 진열대에 안치한 것을 볼 수 있고, 북한에는 금수산기념 궁전에 김일성의 시신을 특수 처리하여 보관하고 있는데 89천만 달러를 들여서 만들었다고 합니다. 과연 그런 것들이 보배입니까? 질그릇에 담긴 보배와는 달리 지극히 헛된 것에 속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인도에서 선교사역을 하던 스탠리 존스 선교사(E. Stanley Jones. 1884~1972)69살에 중풍에 걸려서 쓰러졌습니다.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고 있는 가운데 모든 의사들이 말합니다고령인데다 뇌혈관이 터졌기 때문에 다시 일어나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 스탠리 존스 선교사는 주님의 능력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방에 들어오는 간호사나 의사를 보고 첫 인사를 안녕하십니까? 라고 하지 말라. 반드시 나를 보면 먼저 스탠리 존스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어나라. 이렇게 해 달라고 부탁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의사와 간호사들은 스탠리 존스 선교사가 시키는 대로 그를 볼 때마다 스탠리 존스 예수님의 이름으로 일어나라. 이렇게 명령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계속 반복적인 명령을 하던 중 놀랍게도 스탠리 존스 선교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건강을 회복하여 선교지 인도로 돌아가서 20년 동안 더 사역을 하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참 보배이신 예수님의 손에 붙잡히는 순간부터 보배를 가진 질그릇이 되어 인생의 가치가 달라지는 삶을 살게 됩니다. 세상의 것은 아무리 많이 가져도 만족이 없고 근심만 더 할 뿐입니다. 그러나 보배이신 주님이 내 속에 거하시면 그때는 풀리고 열리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여러분의 말과 행동에서 생명의 향기가 나온다면 생명의 주님이 들어 있는 증거입니다. 살면서 꼭 피해야 할 것 하나가 있습니다. 어두운 환경에 동화되는 일입니다. 환경을 탓하지 마십시오. 이 세상에 자신이 원하는 환경에 맞춤형으로 태어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그런 환경에 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환경에서도 내 속에 보배이신 주님을 모시고 살면 분명히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히브리서 말씀을 인용하면서 오늘 말씀을 마칩니다. 심령에 잘 새기기를 축원합니다.

 

13:05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라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06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 하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