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단/2014년 말씀

이제 나는 새로운 피조물입니다.(고후 05:17)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14. 8. 30. 1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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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대문호 괴테(Johann Wolfgang von Goethe. 1749,8,28~1832,3,22)는 그의 작품 파우스트에서 탈피(脫皮)하지 못하는 뱀은 죽는다는 글을 남겼습니다. 옛날이라 할까요? 그때는 산과 들을 다니면서 뱀이 벗어놓은 허물을 더러 보았습니다.

뱀은 살아남기 위하여 정기적으로 그 질긴 껍질을 벗으면서 새로운 껍질로 바꾸어 생존합니다. 그런데 뱀이 혹 상처를 받아 피부가 손상되거나, 독이 든 쥐를 먹어서 병이 들면 그때는 껍질을 벗지 못하는 병에 걸립니다. 그렇게 되면 뱀은 그만 자기 껍질에 갇혀서 죽고 맙니다.

 

뱀이 껍질을 벗는 것은 자신의 생존과 관계가 되듯 사람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물론 뱀처럼 외적인 피부의 껍질을 벗는 것은 아닙니다. 마음의 껍질, 습관의 껍질, 고정관념의 껍질이라 할까요?

흔히 정치인들이나 관료들이 위기를 만났을 때 타개책으로 사용하는 혁신이나 환골탈태를 예로 들 수 있습니다. 금년에는 더운 여름이 아니라 비가 자주 와서 시원한 여름이었지 않습니까? 이 여름이 지나고 9월 가을을 맞았는데 무척 시원한 계절입니다.

7,8월 나를 무기력하게 했던 계절이 지났으니 그동안 몸에 배어 있는 안일하여 불신앙화 된 허물, 그릇된 생각의 껍질을 오늘 말씀을 통하여 벗어버리기를 축원합니다. 동시에  나 자신의 영적인 생활에 비추어 볼 때 내가 벗어야 할 껍질은 무엇인지를 생각해 봅시다. 구약성경 예레미야서 0404절에 다음 같은 말씀이 나옵니다.

 

04:04 유다인과 예루살렘 주민들아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

 

바로 우리 영혼의 껍질 벗기기를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마치 뱀이 살아남기 위하여 껍질을 벗고 새 출발을 하듯 우리 모두가 그렇게 하여야 합니다. 그러면 내가 벗어야 할 껍질은 무엇일까를 오늘 말씀을 통하여 점검하면서 벗어져야 할 것들이 잘 벗어져 홀가분한 마음으로 9월을 열어가기를 바랍니다.

 

 

 1. 나는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까?

 

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사도 바울은 그의 서신서에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έν χριστω)) 라는 말을 52회나 사용합니다. 교회 안에서가 아닌 그리스도 안에서를 강조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나와 하나님 사이의 화목을 위해 중보자로 역할을 하신 분이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 라는 말은 예수님을 믿는 것을 넘어서서 예수님과 동고동락한다는 뜻이 있습니다. 옛사람이 그대로 살아난 것이 아니라, 새로운 존재로 자리 잡은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겉모습은 그리스도 밖에 있을 때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나 별반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자리를 잡으면 마음과 말과 행실이 새롭게 바뀝니다. 이전에 좋아하던 것들이 이제는 하찮게 보이고, 대신 믿음생활이 즐겁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살아가는 것이 보람되고 행복하게 느껴집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런 고백을 합니다.

 

14:0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우리나라 복음의 초창기 시절에는 목회자들도 귀했고, 성경도 귀했습니다. 그나마 선교사님들의 발길이 닿는 곳에는 교회가 세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한 교회만을 돌볼 수 없던 선교사는 그 마을에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 가운데 성경을 읽고 좀 활동적인 사람을 조사로 임명해 놓고 여러 마을로 다니며 전도를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선교사님은 몇 달에 한 번씩 교회를 순방하였는데 그 당시에는 전기불이 없어서 저녁예배 시간에 조사들이 가물거리는 호롱불 밑에서 돋보기를 끼고 성경을 읽기도 했습니다. 어느 산골 교회에서 조사가 시편 23편을 읽는데 호롱불이 가물가물해서 글씨가 잘 안 보이자 이렇게 읽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 자르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다. 이렇게 읽고 보니 너무나도 의미심장한 말이 되었습니다. 이어서 조사가 비장한 각오로 설교를 합니다. 여호와께서 나의 목을 자르셔도 저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저는 죽어도 좋습니다.

그러자 교인들도 모두 손을 들며 나도요. 나도요. 여호와가 나의 목을 자르셔도 주님을 따르겠나이다. 라고 했습니다. 여호와가 나의 목을 자르셔도 좋습니다. 주님의 일을 하다가 여호와가 나의 생명 거두어 가셔도 좋습니다. 이것이 130여 년 전 그리스도 안에 있던 사람들의 고백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의 부흥은 우리의 꿈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뜻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꿈은 그냥 꾼다고만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 꿈을 이루기 위한 우리의 구체적인 목표와 행동들이 있어야지 그렇지 않으면 몽상이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 내가 먼저 주님께 영혼을 올려드려야 합니다. 그냥 때가 되면 되겠지, 절대로 안 됩니다. 그런 생각은 그리스도 밖에 있는 몽상가들이 가지는 사고이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내가 전도하는 일, 부흥을 이루는 일에 몸을 던집니다.

 

우리 가운데 대부분 사람들이 믿음생활을 아주 쉽게 하려고 합니다. 구원의 감격이나 은혜, 뜨거운 열정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말입니다. 부흥이나 전도는 목회자가 해야 된다고 여기고요. 대신 교회가 침체가 되는 일에 불평이나 비평을 하는 일은 자기의 몫으로 알고 잘 합니다. 여기서 하나 확인하고 넘어가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의 터전을 잡은 분들은 부흥을 위한 모든 일들을 남이 아니라 나의 몫으로 알고 하나님께 눈물로 나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2. 나는 그리스도 밖의 생활을 다 버렸습니까?

 

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흔히들 인간의 본성은 잘 바뀌지 않는다는 말을 합니다. 인격을 수행하여 어느 정도 변화를 꾀하기도 하지만 사람은 결국 자기중심으로만 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기적인 사람에게 이웃에게 유익을 주는 꿀벌 같은 존재가 되라고 변화를 요구하는 것은 어쩌면 무리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또 제 버릇 개 못 준다는 속담도 있습니다. 사람들이 사소한 허물도 고치기 힘들어 하기 때문에 작심삼일이라는 말도 쓰고요. 이런 사람에게 성화의 삶을 기대한다면 역시 무리일지 모릅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을 믿기 전 나의 모습들은 다 지나갔습니다. 또 믿고 난 후 내가 믿음생활을 잘 하였습니까? 이것 역시 지난 일로서 과거의 믿음은 훗날 하나님 앞에 설 때에 칭찬과 상급의 기준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믿음에서 진보가 없다면 그 과거의 믿음 때문에 책망과 심판의 기준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믿음의 성도는 날마다 새로워지는 은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갱신이 없는 정체 된 믿음은 생명력을 잃어버린 죽은 믿음과 같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태어난 사람이기 때문에 이전의 삶은 이미 지나갔고, 또 이전의 삶은 더 이상 우리에게 영향력을 끼칠 수도 없습니다. 지금까지 자신의 육신적인 성공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 가리지 않는 삶을 살았습니까?

그러면 이제부터는 좀 손해가 와도 불신앙의 요소를 내려놓고 살아야 합니다. 떠나보내야 할 옛것을 붙잡고, 그것을 내려놓지 못하여 계속 옛사람 소속으로 남으려는 분들이 있습니다만 그래도 멀리 던져버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삶의 방법이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이후 가장 예수님 닮은 사람이라면 어거스틴(Saint Augustine, 354.11.13~430.8.28)을 들 수 있습니다. 그가 한 때는 방탕아로서 14살에 사생아를 낳기도 했는데 그럼에도 어머니 모니카의 끊임없는 기도로 결국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어머니의 기도로 새 사람 된 유명한 사람이죠? 그가 새사람이 되었는데도 죄의 욕망이 그를 사로잡아 올 때가 종종 있었습니다. 그럴 때 그는 팔뚝의 살점을 물어뜯으면서 처절할 정도로 죄와 싸우며 이런 말을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죄와 이렇게 싸워야 한다.

 

예수님의 속죄를 통해서 우리에게 새 생명이 주어졌고, 주님과 함께 십자가에 죽으므로 주님과 함께 새롭게 살아가는 의미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밖에서 즐기던 것들을 다 던져버리는 삶을 통해서 인생의 의미를 깨닫게 되고, 앞으로 나아갈 삶의 목표를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나 자신이 얼마나 소중하고 존귀한 존재인지도 깨닫게 되고요. 이런 깨달음을 다짐하고 결단을 하는 액션이 오늘의 예배입니다. 그리스도 밖에서 머물며 즐겼던 것을 내려놓기를 원합니까? 그러면 성 프란시스의 평화의 기도라는 기도문을 나도 고백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 저를 당신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두움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 되게 하소서.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여 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신을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 미움을 앞세우면 상대편의 장점이 사라지고, 사랑을 앞세우면 상대편의 단점이 사라집니다.

 

 

 3. 나는 새로운 피조물입니까?

 

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새로운 피조물. 구원의 주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분과 영적인 연합을 통하여 새롭게 태어나는 상태를 상징하는 용어입니다. 이 연합의 비밀을 사도 요한은 포도나무와 그 가지의 관계로 설명을 하였습니다(15:01~07).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은 내가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각고의 노력을 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완전히 새롭게 창조하므로 가능합니다.

즉 새로운 피조물이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삶으로 살아가는 사람, 그러니까 옛사람은 지워지고 믿음으로 새롭게 태어난 신앙인을 지칭합니다.

 

또 새롭게 태어나는 방법을 설명하는 구절이 있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다는(01:12) 구절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겉모습은 믿기 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속사람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생각이 새롭게 되고, 말이 새롭게 되고, 행실이 새롭게 되는 것으로 말입니다. 이때부터 이전에 좋아하던 것들이 하찮게 보이고, 대신 주님의 일을 해도 마냥 행복하고 즐겁기만 합니다.

불평과 원망이 떠나면서 감사가 다가오고요. 그래서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난 사람의 특징은 불평 뚝하고, 원망 뚝하고 살아갑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태어난 사람은 자신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서 사는 것을 즐거워합니다.

 

그러면 새로운 피조물로 태어난 사람의 삶의 원리를 볼까요? 무엇보다 삶의 가치관의 전환이 이루어집니다. 가치관의 전환이란 세상의 것을 어떤 눈으로 보는가? 어디에 영적 값어치를 두고 살아가느냐? 하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몸은 영혼과 육체로 나누어져 있지 않습니까?

보통 그리스도 밖의 사람들은 육신적인 생활에 올인하면서 살아가지만 새롭게 태어난 사람은 영적인 일에 집중하면서 살아갑니다. 새로운 피조물로 태어난 사람의 삶의 원리는 삶의 목적의 전환이 이루어집니다. 세상 사람들의 살아가는 목적이 뭡니까?

더 출세하고, 더 잘 살고자 함입니다. 세상적인 이런 여러 것들을 얻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기울입니다만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은 그런 것에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교회와 복음 확장을 위한 일에 올인 합니다.

 

한 소년이 있습니다. 가을 날씨가 좋아 기분 좋게 언덕을 올라가다 길에 튀어나와 있던 돌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소년은 이런 돌덩이가 왜 사람들 다니는 길에 있지? 하면서 삽으로 돌부리를 캐내기 시작했습니다.

서서히 파헤쳐 나가자 점점 돌의 크기가 드러나는데 보이는 부분은 사실 큰 바위의 일부분일 뿐 무척이나 컸습니다. 그럼에도 소년은 다시는 다른 사람들이 돌부리에 걸리지 않도록 파내야겠다고 결심을 하고 정의감으로 거대한 돌에 달려들었습니다.

그러나 다 끝내기도 전에 해가 뉘엿뉘엿 지기 시작합니다. 소년은 안 되겠다. 포기하자. 하면서 파놓았던 흙으로 돌이 있던 자리를 덮기 시작했습니다. 소년이 걸려 넘어졌던 돌부리도 흙에 덮여 보이지 않게 되자 소년은 중얼거립니다. 왜 처음부터 이 방법을 생각 못했지?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난 사람은 파헤치는 일 보다 덮는 일을 더 좋아 하여야 합니다. 남의 허물을 파헤치는 수사관적인 그런 날카로운 장점을 덮는 일로 전환하면 얼마나 아름답겠습니까?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원숭이 효과(Monkey Effect)란 말이 있습니다. 원숭이들은 고구마를 좋아하기 때문에 산기슭에 있는 고구마 밭에 원숭이들이 떼로 몰려와 고구마를 넝쿨째로 파내어서 먹어치우곤 합니다. 농민들에겐 큰 골칫거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한 번은 한 원숭이가 고구마를 개울물에 씻어 먹자 그런 모습을 지켜 본 다른 원숭이들도 흉내를 내면서 같이 물에 씻어 먹었습니다.

그렇게 하는 원숭이들이 자꾸 늘어나게 되었는데 그렇게 늘어나는 숫자가 어느 단계에 이르게 되면 물리학에서 말하는 임계점(臨界點)을 넘어서게 됩니다. 임계점을 넘어서는 단계에 이르면 그런 모습을 보지 못한 먼 곳에 있는 다른 원숭이들도 고구마를 씻어 먹게 됩니다. 이런 현상을 일컬어 원숭이 효과라 합니다.

 

이런 현상이 원숭이에게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새로운 피조물 효과로 말입니다. 사람이 한 곳에서 선한 일을 계속하면 주위의 사람들이 그런 일을 따라하게 됩니다.

그렇게 따라하는 사람이 늘어나 임계점에 다르게 되면 다른 곳에 있는 사람들도 그런 선한 일을 계속 따라 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다른 사람도 동참하게 하는 새로운 피조물 효과로서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바로 삶의 가치관의 전환과 목적관의 전환을 이루어서 말입니다.

여기에서부터 전도가 있고, 부흥이 있고, 복음의 열정이 끓어오르는 것입니다. 이 일에 여러분이 앞장을 서서 믿음의 동력을 불어넣기를 축원합니다.

 

12:03 지혜 있는 자는 궁창의 빛과 같이 빛날 것이요 많은 사람을 옳은 데로 돌아오게 한 자는 별과 같이 영원토록 빛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