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단/2014년 말씀

들어야 할 말, 안 들어야 할 말.(왕상 12:06~17)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14. 5. 17. 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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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416일 일어난 세월호의 참사로 인해 국민들 가슴이 멍들어 있습니다. 생각할수록 가슴 아픈 일 아닙니까? 침몰하는 세월호의 현장에서 긴급히 대피하십시오. 이 말만 하였더라도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런데 승객 여러분, 객실에서 제 자리만 지키세요. 라는 방송을 듣고 그대로 있던 사람들은 참변을 당했습니다. 만약 사고 발생 직후 승객들에게 구명동의를 제공하는 등의 안전조치와 함께 신속한 탈출을 이끌었다면 대형 참사는 막을 수 있었을 것이나 그렇게 하지 못했으니 사고 공화국이라 부릅니다.

 

그러고 보면 들어야 할 말이 있고 안 들어야 할 말이 있습니다. 우리 인생길 역시 들어야 할 말을 듣지 않고 안 들어야 할 말을 듣는다면 낭패를 만날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파장을 일으키는 것이 방사능의 누출이라고 합니다만 이보다 더 심각하면서도 광범위하게 영향을 주는 것이 바로 말입니다.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어떻게 전하느냐? 그 말이 상대의 귀에 어떻게 들리느냐에 따라서 인생의 행불행이 결정이 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내 삶의 유익이 되는 좋은 말을 듣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반대로 나를 병들게 하고, 사실을 왜곡시키는 말은 나와 함께하는 다른 사람에게도 고통과 아픔을 주게 됩니다. 그래서 좋은 말을 듣는 것이 복입니다.

오늘 말씀은 솔로몬 왕의 뒤를 이은 르호보암이 왕위에 오르면서 신하들의 자문을 받아 정책에 반영하는 계획을 선포하는 과정에서 나라가 분열이 되고 말았습니다. 남북으로 나누어지는 분열의 비극을 맞고 말았는데 정말 안타까운 일이지요. 여러분, 왜 이런 결과가 오게 되었는지를 오늘 말씀으로 진단해 보겠습니다.

 

 

 1. 들어야 할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13 왕이 포학한 말로 백성에게 대답할 새 노인의 자문을 버리고.

 

이스라엘의 제 3대 왕 솔로몬이 세상을 떠난 후 르호보암이 왕위에 오르는 과정에서 이스라엘 전체의 암묵적 동의가 필요한 시점입니다. 이런 과정에서 솔로몬 왕 당시 반 강제로 국가의 부역에 동원되었던 일로 많이 지쳐 있는 백성들을 대변하여 여로보암 장군이 르호보암 왕에게 나와 국가에 대한 세금과 부역을 좀 가볍게 해 주시면 전적으로 충성을 다 하겠습니다. 라는 청원을 합니다.

이에 르호보암은 삼 일만 기다리라 하고선 주변 사람들에게 여로보암의 청원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를 상의하는데 먼저 나이가 많은 원로 신하들에게 물어봅니다. 그러자 그들은 선왕의 유지를 따라 지금은 백성들의 고통을 들어 주는 것이 좋겠다고 조언을 합니다. 국가에 대한 세금과 노역을 좀 가볍게 해 주자는 셈이죠.

 

다음으로 르호보암은 자기와 함께 자라면서 호흡을 맞춘 40대의 젊은 신하들에게 자문을 구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원로들의 생각과 달리 백성들에게 더욱 혹독한 부역과 세금을 부과해야 한다고 조언을 합니다. 왜 이런 조언을 하는 겁니까?

이들이 왕과 함께 자랐다고 했으니 아무래도 왕과 코드가 잘 맞는 스타일 아닙니까? 이들의 자문은 르호보암도 솔로몬 왕과 같은 강력한 카리스마를 갖추기 위해서는 백성들을 완전 장악하고 이전보다 더 많은 부역과 세금을 부과하여 정치자금을 확보해야 된다고 판단 한 것입니다.

 

두 그룹의 조언을 듣고 권력지향적인 르호보암은 카리스마를 확보하는 정책, 백성들이 전적으로 굴종하다시피 복종하게 하는 정책으로 눈을 돌립니다. 이렇게 되려면 아무래도 코드가 잘 맞는 젊은 그룹의 조언을 정책에 반영하여 백성들을 더욱 혹독하게 다루는 강경책을 택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런데 백성들이 르호보암 왕의 정책에 잘 따르기만 하면 별 문제가 없지만 더 고통스러운 정책을 펼치겠다. 하니 즉각 민심 이반 현상이 일어납니다. 유다와 베냐민 지파를 제외한 북쪽 열 지파가 자기들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는 여로보암을 중심으로 유다 왕국과는 결별을 하고 떠납니다.

 

왕의 잘못 된 판단이 이스라엘 역사를 바꾸고, 이스라엘 공동체를 분열시키는 중요한 갈림길을 만들고 말았습니다. 들어야 할 말을 듣지 않은 결과입니다. 우리의 인생살이도 그렇습니다. 혹 내 영이 살기 위해서, 내 믿음이 회복되기 위해서 꼭 들어야 할 말이 있습니까? 그러면 마땅히 들어야 합니다. 들어야만 살기 때문입니다.

 

14 어린 사람들의 자문을 따라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는 너희의 멍에를 무겁게 하였으나 나는 너희의 멍에를 더욱 무겁게 할지라.

 

왜 들어야 할 말, 국가의 안위와 직결되는 말을 듣지 못하여 국가가 남북으로 분열되는 아픔을 맞게 됩니까? 왜 이런 비극이 옵니까? 무엇보다 기도가 없기 때문입니다. 05절에 보면 삼일 간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이 기간 동안 원로들의 조언과 젊은 그룹들의 조언, 또 아버지 솔로몬 왕의 남긴 유언과 현재 백성들의 민심 상태를 놓고 하나님께 기도를 하였더라면 현실적인 답이 나왔을 것입니다그런데 그런 신령한 쪽의 답 보다는 정치적인 이익으로만 판단하여 백성들 전체를 힘들게 하고 있으니 이는 믿음의 감각이 무디어진 탓 아니겠습니까?

 

솔로몬 왕의 치세를 보면 큰 업적을 남기는 일들을 많이 하였으나 말년에 산당을 짓고 우상숭배를 하면서 주변 사람들에게 기도하는 모습을 남기지 못했습니다(왕상 11:04~09). 르호보암도 왕이 되는 과정에서 아버지의 말년의 믿음이 흐트러진 모습을 봄으로 인해 이렇게 기도보다는 인간적인 생각으로 판단을 하여 큰 불행을 초래한 것 같습니다.     

 

 

 2. 안 들어야 할 말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14 어린 사람들의 자문을 따라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는 너희의 멍에를 무겁게 하였으나 나는 너희의 멍에를 더욱 무겁게 할지라...

 

르호보암은 원로들의 말을 들을 것인가? 아니면 젊은 층들의 말을 들을 것인가에 대한 갈림길에서 그만 젊은 그룹들의 말을 선택합니다. 르호보암이 젊은 사람들의 조언을 선택함으로 국가적으로 엄청난 후유증을 앓으면서 분열을 가져왔습니다.

왕이 국가의 정책을 세우고 집행하면서 꼭 어느 한쪽의 말만 듣고 반영한다고 해서 그것을 문제라 단정 지울 수는 없습니다. 때로는 정책들이 서로 공존 할 수 없는 경우도 있고, 어느 한 쪽을 버리고 한 쪽은 선택해야 하는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이때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찾는 일입니다. 르호보암은 하나님이 원하는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도 그렇지를 못하고 또 국가의 기본이 되는 충성심 많은 원로급 신하들의 말도 배척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있는 삼일이라는 충분한 시간이 있음에도 그 시간을 사람의 소리를 듣는데 귀를 기울였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르호보암에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은 무엇일까요? 07절에 보면 그 답이 나옵니다.

 

07 대답하여 이르되 왕이 만일 오늘 이 백성을 섬기는 자가 되어 그들을 섬기고 좋은 말로 대답하여 이르시면 그들이 영원히 왕의 종이 되리이다 하나.

 

여기서 왕이 백성의 종이 되어 섬긴다는 말은 여호와 신앙에 입각한 이스라엘의 전통적이고도 이상적인 군주관이 반영된 말입니다. 르호보암이 백성들의 봉사자로서 아버지 솔로몬 왕이 저지른 부패를 먼저 하나님 앞에서 청산하고, 원로 신하들의 말속에 담긴 솔로몬의 유언을 놓치지 않았다면 이스라엘의 역사와 그의 생애는 크게 달라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르호보암은 그렇게 하지 않고 내 귀에 맞는 소리만 하는 젊은 층의 말을 더 신뢰합니다.

 

반드시 물리쳐야 할 말, 안 들어야 할 말을 듣고 정책에 반영시키려 한 르호보암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축하를 받지 못한 왕이 됩니다. 성도 여러분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어떤 이야기를 가장 많이 들었습니까? 하루의 일과 중에는 어떤 이야기를 많이 주고받습니까?

꼭 들어야 할 말은 듣고 안 들어야 할 말은 배척하였습니까? 반드시 들어야 할 말을 듣는 것이 행복한 일이며 나와 주변의 모든 사람이 복을 받는 길입니다. 이제부터라도 잘 듣는 것이 중요하며, 안 들어야 할 말은 안 듣는 것은 더욱 중요합니다. 반드시 물리쳐야 할 말이라면 물리치는 믿음의 용기로 이겨내십시오.

 

25:11 경우에 합당한 말은 아로새긴 은 쟁반에 금 사과니라.

 

복을 받는 사람의 특징은 그들이 어디를 가든지 항상 복된 말을 하며, 복된 말만 듣습니다. 그런데 복이 되지 않는 말, 서로에게 파멸이 되는 말을 내가 들었습니까? 혹 내 뱉었습니까?

그럴 때는 오늘 내 귀가 복이 없구나, 내 입도 복이 없구나. 라고 여기십시오. 방사능 피해는 방사능이 오염된 지역에 가지 않거나 피하기만 하면 되지만 말은 일정한 지역 개념이 없어 피할 수 없고 또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들리게 마련입니다. 이럴 때 내가 들어서 안 될 말이라면 잘 차단을 하고, 안 들어야 할 말을 들었다면 속히 생각에서 비워 버리십시오. 삶에서 유익이 되는 좋은 말을 듣는 것은 대단한 가치가 있습니다.

 

반대로 나를 병들게 하고 사실을 왜곡시키는 말을 듣는 것은 나 자신뿐 아니라 함께하는 다른 사람에게도 고통과 아픔을 안겨 줍니다. 좋은 영향력을 미치고자 하는 마음으로 말을 하면 상상할 수 없는 창조적인 힘을 발휘하겠지만 나쁜 영향력을 미치고자 말을 한다면 상대에게 일평생 영향을 줄 수 있습니다.

 

 

 3. 잘 못 듣고 행하면 모두가 파멸입니다.

 

16 온 이스라엘이 자기들의 말을 왕이 듣지 아니함을 보고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다윗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 이새의 아들에게서 받을 유산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너희의 장막으로 돌아가라 다윗이여 이제 너는 네 집이나 돌아보라 하고 이스라엘이 그 장막으로 돌아가니라.

 

우리는 일을 행하기에 앞서 복되고 유익한 것,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음성 듣기를 기도를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것은 중요한 순간에 어떤 결정을 내리며 어떤 말을 들을 것인가를 결정하는 중요한 바탕이 되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들어야 할 말이 있고 듣지 말아야 할 말이 있는데 이것을 잘 분별하면 모두에게 유익이 올 것이나 그렇지 못할 때는 모두에게 큰 손해나 파멸이 올 수 있습니다.

 

첫째 파멸은 르호보암에게 왔습니다. 그는 분별력 없이 사람의 생각을 기준으로 듣고 행하려 하다 그만 자신의 삶이 불행한 결과를 맞고 말았습니다.

17 그러나 유다 성읍들에 사는 이스라엘 자손에게는 르호보암이 그들의 왕이 되었더라.

 

르호보암은 세겜에서 이스라엘 열두 지파 전체의 추대로 솔로몬과 같은 막강한 왕권을 구축하겠다는 큰 꿈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계획이 르호보암이 들어서는 안 될 말을 듣고 그대로 정책에 반영하겠다는 선언과 함께 물거품이 되고 맙니다.

왜냐하면 북부 쪽의 열 지파가 분열되어 나가면서 남쪽의 유다와 여기에 붙어사는 베냐민 지파로만 구성되는 작은 소왕국 유다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무엇을 듣느냐? 어떤 말을 하느냐에 따라 내 영혼이 살기도 하고 죽기도 함으로 소망과 믿음과 사랑의 말씀을 자주 듣고 또 전해 주어야 합니다.

 

둘째 파멸은 북쪽 열 지파에게 왔습니다.

16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다윗과 무슨 관계가 있느냐? 이스라엘이 그 장막으로 돌아가니라.

 

북쪽 열 지파가 결정적으로 다윗 왕조와 결별을 하게 되는 순간입니다. 다윗 왕조로부터 아무 혜택도 받을 게 없다는 겁니다. 이제 목숨을 걸고 충성을 할 필요가 없다고 하나 그래도 시간을 가지고 정치적 타협점을 찾아서 조율하면 어느 정도 봉합을 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런데 이런 말을 여과 없이 내 뱉는 것은 오래 전부터 북부 쪽 사람들이 소외 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뿌리 깊은 파벌 의식의 표현입니다.

그러므로 16절은 떠나가는 북부 쪽 사람들의 불신앙적인 상태를 표현하는 구절입니다. 그들이 다윗과의 관계를 끊겠다는 말은 다윗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을 저버리는 일로서 아무리 화가 나도 이런 막말은 함부로 해서는 안 될 말 아닙니까? 이어 20절을 보면 북부의 열 지파가 자기들의 마음에 맞는 여로보암을 왕으로 추대하여 북 왕국 이스라엘을 세우는데 이 일 자체를 놓고 굳이 잘 못 되었다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문제는 다른 방향에서 발생합니다. 새롭게 수립 된 북 왕국의 여로보암 왕은 체제 정비를 위해 우선 북부 열 지파들의 정치와 종교의 중심지인(01) 세겜으로 수도를 정합니다. 그런데 여로보암의 마음을 불안하게 하는 요소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다윗 때부터 신앙의 중심지로 자리 잡은 예루살렘의 종교적 기능 때문입니다(27; 삼하 06). 그래서 여로보암은 남 왕국과의 철저한 분리를 위해서 어떤 종교적 구심점을 마련할 필요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여로보암의 우상 숭배(27~33) 정책입니다.

 

왕하 12:28 이에 계획하고 두 금송아지를 만들고 무리에게 말 하기를 너희가 다시는 예루살렘에 올라갈 것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의 신들이라 하고 29 하나는 벧엘에 두고 하나는 단에 둔지라. 30 이 일이 죄가 되었으니.

 

이런 여로보암의 우상 숭배 정책은 경건한 신앙인들에게 중대한 도전으로 다가왔고 상당수의 무리들이 신앙의 자유를 위해 목숨을 건 대탈출을 시도합니다(대하 11:13~16). 순간의 고난을 인내로 조화시키지 못함이 다 죄가 됩니다. 그래서 내 영혼에 건강함을 주며 생명을 주는 이야기를 듣는 것이 중요합니다. 가끔은 마음이 상해도 믿음의 언어를 나누십시오. 믿음으로 영혼이 부요해지는 복된 말씀을 주고받는 것은 인생의 성공으로 가는 길목일 수가 있습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북아메리카 카리브해상에 있는 자메이카(jamaica)란 섬나라가 있습니다. 한 때는 영국의 식민지생활을 하면서 노예무역의 중심지가 되었는데 1962년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하면서 노예제도를 공식적으로 폐지시켰습니다.

그러나 산지 구석진 곳에 살던 노예들 중 일부는 이 소식을 듣지 못해 자신들의 신분이 법적으로 자유로워 졌는데도 계속 노예로 살았습니다. 주인들이 고의적으로 이 소식을 전해 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미 노예에서 해방이 되었지만 들어야 할 소식을 듣지 못함으로 계속 노예생활로 많은 고생을 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오늘 나의 삶에 진정한 변화가 없이 옛 생활이 반복되고 있다면, 아직도 하나님 자녀 삼으신 예수님의 복음을 어떤 의미에서는 아직 듣지 못한 것 아닙니까? 이 분명한 소식을 듣지 못할 때 우리는 자메이카의 노예처럼 변화된 신분을 알지 못하고 옛 모습 그대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실패와 위기를 통해서 들려오는 말, 고통과 아픔이 들려주는 말이 내게 들릴 때 자신의 삶을 다시 점검하여 믿음으로 바로 서는 기회를 만들 수 있습니다.

축복을 심으면 복을 거둡니다. 칭찬을 심으면 금 같은 존귀한 사람을 얻습니다. 용서를 심으면 용서를 거둡니다. 좋은 씨가 심긴 밭에서는 좋은 열매가 익어갑니다. 씨가 좋아야 좋은 열매를 거둘 수 있습니다. 흥을 심으면 흥을 거둡니다.

입술의 열매는 씨를 심은 양()대로 거두는 법입니다. 오늘 말씀도 좋은 말을 들어야 함에도 듣지 않고, 안 좋은 말은 듣지 않아야 함에도 들음으로 인해 자신이 파멸하고, 주변의 사람들이 파멸하고, 국가가 파멸하는 예를 보여주는 메시지입니다. 이제부터 들어야 할 말, 안 들어야 할 말 잘 분별하여 은혜생활 복된 생활 누리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