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노총각이 어느 날 요술 램프를 주웠습니다. 그러자 요정이 노총각에게 나타나 딱 한 가지의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말했습니다.
이에 노총각은 요정에게 한 가지 소원으로 무엇을 말할까를 생각해 보니 돈이 있어야 하겠고, 여자도 있어야 하겠고, 결혼도 해야 할 처지입니다.
마침내 이 총각이 욕심이 생겨 세 가지 소원을 순식간에 한마디로 말했습니다. 돈, 여자, 결혼이 소원입니다. 그 소원은 이후 즉각 이루어졌습니다. 정신이 돈 여자와 결혼했기 때문입니다.
솔로몬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을 때 우선 나라의 기강을 잡고 난 뒤 기브온에 있는 산당으로 가서 일천 번제를 드렸습니다. 이때 하나님께서 솔로몬의 꿈에 나타나셔서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솔로몬은 즉시 나의 하나님, 저를 왕으로 세우셨으나 모든 면에 부족하여 아이와 같습니다. 제가 이 백성을 잘 재판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십니다. 솔로몬의 기도가 하나님의 마음에 들어 지혜와 구하지 아니한 부귀영화까지도 주셨습니다(왕상 03:04~13).
사람은 장점이 모자라면 하나님께 기도하여 약한 부분을 채워야 합니다. 그 장점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어야 합니다. 만일 자기의 장점이 있는데도 믿음으로 활용하지 못하면 그 장점이 오히려 해가 될 수 있습니다.
지나온 인류 역사나 성경 인물 가운데 그런 사람이 더러 있었습니다. 오늘 말씀에 등장하는 니므롯이 바로 그런 부류에 속합니다.
자기의 장점을 하나님을 향한 선으로 활용하기보다 오히려 대적하였습니다. 결과는 하나님과 맞서는 인본주의 원조가 되었습니다.
어떻게 해서 니므롯이 그런 사람이 되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그래서 말씀 제목을 「장점을 인본주의로 사용한 니므롯」이라는 제목으로 정하고 강론하겠습니다.
1. 니므롯의 인적 사항을 보겠습니다. |
08 구스가 또 니므롯을 낳았으니 그는 세상에 첫 용사라.
니므롯(נִמרֹד)이 누구입니까? 함의 큰아들 구스가 낳은 함의 손자입니다. 이 니므롯은 경건을 배경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배교자입니다.
그의 할아버지 함도 노아로부터 내려온 신앙의 길을 이탈하였습니다. 그 불경건이 함의 손자 니므롯에까지 내려갔습니다(창 10:08, 대상 01:10).
성경에 나온 모든 사람의 이름에는 고유의 의미가 있습니다. 그런데 니므롯이란 이름은 반역하다, 배교하다. 대적하다. 이런 뜻입니다.
조상 대대로 섬겨 오던 여호와 하나님을 대적하여 반역자요 배교자가 된 사람이라는 의미가 됩니다. 니므롯은 하나님을 대적한 사람입니다.
노아의 증손자 니므롯에 대하여 창세기의 저자 모세는 세상에 첫 용사라고 설명을 덧붙였습니다. 용사(ר 깁보르)는 영웅이라는 뜻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용감한 사냥꾼(ד ר 깁보르 차이나)이라는 의미입니다(09).
우리는 용사 즉 영웅 하면 역사에 길이 빛나는 훌륭한 인물을 머리에 떠올립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한 국가와 한 세대를 망치는 폭군도 있습니다.
자칭 영웅이라 칭한 사람들 이를테면 히틀러나, 무솔리니, 스탈린 같은 포악한 정치가가 이에 속합니다. 니므롯과 오늘 말씀을 연결해 보십시오. 무엇인가 반역을 하는 사람,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 폭력계의 대부라는 그런 이미지가 느껴집니다.
09 그가 여호와 앞에서 용감한 사냥꾼이 되었으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아무는 여호와 앞에 니므롯같이 용감한 사냥꾼이로다. 하더라.
이 니므롯에 대하여 그가 여호와 앞에서 용감한 사냥꾼이라고 표현합니다. 이 09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사람으로 느껴집니다.
그러나 용감한 사냥꾼은 짐승을 능숙하게 잡는 사냥꾼이라는 의미입니다. 황량한 땅에 들짐승이 번성하여 사람을 해치는 일이 허다할 때 니므롯은 뛰어난 사냥술로 이런 짐승을 물리쳤다는 뜻입니다. 당연히 사람으로부터 명성도 얻었겠지요.
여기서 니므롯에 대하여 여호와 앞에서 용감하였다는 문구를 잘 보셔야 합니다. 니므롯이라는 단어가 없으면 하나님을 위한 용감한 장수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니므롯이 붙어 있는 문구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의미입니다. 니므롯이 자기의 능력을 과시하기 위해 하나님과도 한판 붙어보자는 교만을 풍깁니다. 강력한 폭군이라는 입니다.
John Calvin. 본문 말씀을 주해하면서 하나님 앞에서라는 말은 하나님과 맞먹는 자세로 행세한 영웅을 의미한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09절 말씀을 다시 조명해 보겠습니다. 속담에 이르기를 아무는 여호와 앞에 니므롯같이 용감한 사냥꾼이로다. 하더라.
니므롯이 얼마나 무례하게 굴고 폭력을 행사하였으면 후세 사람들이 니므롯을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에 빗대겠습니까? 안 좋은 쪽으로 속담의 원조가 되었습니다.
그의 후손에게 큰 불명예를 남겼습니다. 니므롯이야말로 위험한 영웅입니다. 하나님을 등지는 나라를 세워 반역하는 자들의 시조가 된 일이 자랑스럽습니까?
한 마디로 불행입니다. 사람을 무력으로 다스려야 직성이 풀립니까? 진정한 영웅이 아닙니다. 자기를 최고로 여기는 사람은 언제나 이웃에게 큰 피해를 남깁니다.
2. 자기의 장점을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에 쏟았습니다. |
10 그의 나라는 시날 땅의 바벨과 에렉과 악갓과 갈레에서 시작되었으며. 11 그가 그 땅에서 앗수르로 나아가 니느웨와 르호보딜과 갈라와 12 및 니느웨와 갈라 사이의 레센을 건설하였으니 이는 큰 성읍이라.
앞서 니므롯의 이름 뜻이 배교하다. 대적하다. 라는 의미가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나는 반항아다. 그런 말입니다.
왜 니므롯이 이런 이름의 뜻을 가지게 되었습니까? 충분히 짐작할 수 있는 근거가 하나 있습니다. 노아가 함과 그 아들을 향한 예언을 돌이켜 보면 됩니다. 가나안은 그의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한다(창 09:25, 26)는 예언입니다.
그 예언에 대한 거부감으로 뭐야 나보고 형제들의 종이 되라고, 웃기네, 난 그런 것을 절대 용납할 수 없다고. 두고 봐, 난 절대로 그렇게 살지 않을 거야, 하나님이 날 그렇게 만든다고. 그러기 전에 내가 하나님을 먼저 배반하고 강력한 나라를 만들어 온 세상을 호령하겠다고 작정했을 것입니다
이런 의도가 그 이름 속에 깔린 것 같습니다. 그래서 니므롯은 자기의 힘이나 능력, 가지고 있는 강점을 안 좋은 쪽으로 사용하였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쪽으로 사용하여 인류 역사의 첫 제국을 건설하였습니다. 사냥꾼이 무슨 나라를 세우느냐 하시겠지요.
고대에는 사냥을 아주 잘하는 사람은 한 사회에서 영웅 대접받으며 자연스레 통치자가 되었습니다. 사나운 동물들로부터 백성을 지키는 것이 중요한 과제입니다. 이런 맹수를 몰아내는 사람은 많은 사람을 동원할 수 있는 권리를 갖게 마련입니다.
마침내 니므롯은 사람을 동원하게 되었습니다. 자기의 능력으로 맹수를 제압하여 인기를 누리자 많은 사람이 자기들을 지켜주는 니므롯을 지도자로 믿고 따랐습니다.
니므롯은 그 여세를 몰아 대제국을 건설하였는데 그 나라가 바벨입니다. 이 시날 땅의 바벨(혼잡)에 대해서 보겠습니다. 바벨론은 신 바벨론과 구 바벨론으로 나누어집니다.
니므롯이 세운 바벨론이 구 바벨론 바로 처음 바벨론입니다. 신 바벨론은 북이스라엘이 앗수르에 멸망한 후 유다 왕국을 무너뜨린(B.C.586) 바벨론입니다.
바벨론(Babylon)은 동쪽은 티그리스, 서쪽은 아라비아 사막, 남쪽은 페르시아만, 북쪽은 앗수르 땅으로 둘러싸인 열대성 기후의 넓은 지역입니다.
10~12절을 보면 니므롯이 세운 바벨론 지역이 얼마나 크고 넓은지 짐작 정도는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이라크의 동부 지역을 바벨론으로 봅니다. 성경은 바벨론에 특징을 세 가지로 말합니다.
①우상숭배와 점술이 유행합니다. 모든 점술의 기원에 관한 책을 보면 뿌리가 있는 책은 모두가 바벨론을 기원으로 잡고 있습니다.
②폭력이 난무하고 무력을 숭배합니다. 절대왕권을 표방하고 백성들을 노예화하는데 이런 의미에서 니므롯은 하나님 앞에서 특이하고 잔인한 사냥꾼입니다.
③화려하고 음란합니다. 니므롯 자기 어머니하고 살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바벨론의 모든 종교의식은 음란입니다. 남성 동성애 homo와 여성 동성애(lesbian)의 시초가 바벨론입니다.
바벨론을 간략히 요약하면 포악한 절대왕권의 시초요 하나님의 뜻과 질서를 깨뜨리기로 작정한 나라입니다. 성경은 이런 바벨론을 사탄의 왕국과 비교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대적하고 성도들을 핍박하는 세력의 상징적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3. 니므롯의 인본주의는 큰 혼란을 가져왔습니다. |
창 11:04 또 말하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아라랏 산에 머문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들과 그 자손은 동방으로 이동하였습니다(창 11:02). 마침 시날 평지를 만나서 거기에 정착하였습니다. 그들은 시날 평지에서 큰 성읍과 높은 탑을 쌓을 계획을 세우고 일을 시작했습니다.
이런 일을 보아 고대인들은 하나님을 떠난 후에 각자 자기가 섬기는 우상을 만들었습니다. 또 자기가 경배하는 우상이 하나님을 능가하기를 원했습니다.
가능하면 최고층의 탑을 쌓기를 원했습니다. 이런 일을 하는 목적은 권력자들의 이름과 명예를 크게 높여 신의 수준에 이르기 위함입니다.
고대 여러 국가를 건설한 니므롯도 바로 신의 위치에서 하나님을 대적하였습니다. 그 반역 행동이 어떻게 구체화하였는지를 바벨탑을 보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고고학자들이 바벨론의 옛 성터에서 7층짜리 신전을 발견했습니다. 이 바벨탑을 세우는데 무려 7천5백만 개의 벽돌이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이 지구라트(ziggurat) 규모는 가로와 세로, 그리고 높이가 약 91.2m에 달하는 피라미드 모양의 구조입니다. 이 지구라트를 조사해 보니 최상부에 직사각형의 제단을 설치하여 여러 신을 숭배하는 행위의 흔적이 나왔습니다.
이는 그 사당(祠堂)이 신을 섬기는 신전이었기 때문입니다. 대다수 성경학자는 이 바벨탑을 쌓는 사건의 주동자를 니므롯으로 봅니다.
고고학자들도 바벨 남쪽 유프라테스강 서편 언덕에 흔적이 남아 있는 빌스 니므롯이라는 명칭의 일곱 층계로 된 탑을 바벨탑으로 짐작합니다.
그러면 노아의 증손자인 니므롯이 성과 탑을 건립하고자 한 동기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향해 그들이 건설한 그 탑으로 자기들의 이름을 내고, 또 흩어짐을 면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에게 땅을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을 정복하라고 하셨습니다(창 01:28).
왜 지구라트를 곳곳마다 쌓아야 합니까? 자기들 힘을 너무 믿은 나머지 신보다 자기들 힘이 더 위대하다고 생각한 니므롯의 공명심 때문입니다.
인간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 자기를 높이는 일은 하나님 앞에 악한 일입니다. 홍수 심판으로부터 구원받은 이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과 감사로 올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 은혜를 잊고 자기들 이름을 높이는 세속주의로 추락하였습니다.
어디에서든 상석에 앉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인간관계에 균열이 생깁니다. 때로는 친구와의 사이에 갈등도 일어나는 것 아닙니까?
신앙인들에게 가장 높임 받고 귀히 여김을 받아야 할 이름은 주님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주님보다 자기의 이름을 나타내려는 허영심이 강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군림하고 카리스마 같은 경의를 받고 싶어 하는 곳까지 나아갑니다. 이는 이기심에 뿌리박은 비뚤어진 자존심의 표출일 것입니다.
한국 사람들은 자존심이 특별히 강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 배경에는 출세 지상주의 사고방식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출세해야 한다는 강박 관념을 가지고 삽니다. 명함에 온갖 자질구레한 감투까지 다 새겨 넣는 것도 같은 이치입니다.
직원이 몇 안 되는 개인 공장을 차려 놓고도 사장, 공장장, 전무, 상무, 부장, 과장 대리 자리를 하나씩 차지하여 허세를 부립니다.
그릇된 허영심과 자존심에서 벗어나려면 좀 더 겸손함을 배워야 하지 않겠습니까? 자기를 낮추는 사람만이 진정 하나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길 수 있습니다.
눅 14:11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
허영심이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과 등을 지는 길로 나갑니다.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하나님을 떠난 삶은 물을 저축지 못할 터진 웅덩이와도 같습니다.
렘 02:13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 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김삼일 가족 여러분, 나를 하나님께서 모른다고 외면하시면 나의 영원한 불행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잊고 살면 이보다 더 불행한 삶이 어디 있습니까? 니므롯이 이런 삶을 모르고 욕심을 부리다 그만 때가 되어 한 줌의 재로 돌아갔습니다.
우리는 니므롯과 같은 불행한 삶보다 하나님만 높이며 자랑하되 교만과 허영과 자랑은 언제나 우리가 경계해야 할 일임을 명심합시다.
한때 세계를 주름잡았던 권투왕 무하마드 알리라는 사람을 잘 아실 것입니다. 그는 현재 파킨슨병에 걸려 투병 중입니다. 이 병 때문에 지난번 애틀랜타 올림픽 때 성화를 점화하러 나와서는 제대로 점화를 못 할 정도로 덜덜 떨었습니다.
왕년의 전성기에 내가 최고로 힘이 세다. 세상에서 제일 강한 자다. 하고 큰소리치던 사람이 알리입니다.
그런 사람이 덜덜 떨면서 성화도 겨우 점화할 만큼 약한 자가 되었습니다. 그가 기자 회견을 하면서 사람보다도 하나님이 더 강하심을 증명하기 위해 제가 이 병에 들었습니다.
교만하여 자기가 최고라고 생각하면 그곳에는 하나님께서 머무실 공간이 없습니다. 자기의 장점을 자기만을 위해 사용하면 하나님과 맞서기가 쉽습니다.
낮아져서 겸손의 자리로 들어갈 때 하나님께서 은혜와 복을 주십니다. 나의 삶을 니므롯 같은 자처럼 되지 않기 위해 삶의 에너지를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일에 던지십시오.
'은혜의 강단 > 2014년 말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 마음을 잘 지킵시다.(잠 04:23) (0) | 2014.03.15 |
---|---|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에 있습니다.(전 09:01~10) (0) | 2014.03.08 |
포도원을 허는 여우를 잡읍시다.(아 02:10~15) (0) | 2014.02.22 |
하나님 언제까지 침묵하십니까? (합 01:01~11) (0) | 2014.02.15 |
들러리의 기쁨을 누리는 세례 요한.(요 03:22~30) (0) | 2014.02.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