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공생애 삼년 동안 열 두 제자를 중심으로 일을 하셨고, 또 필요할 때는 칠십 제자들도 전도대원으로 활용하셨습니다. 성경의 기록에는 가려 있지만 여러 사람들이 굳이 제자의 자격은 아니어도 예수님 곁에 머물면서 섬기는 일을 하였습니다. 놀라운 기적들이 많이 나타나다보니 사람들의 눈에는 예수님 곁에 있는 제자들이나 섬기미들이 상당히 부럽게 여겨졌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제자 지망생들이 수시로 예수님께 나와서 면접을 받기도 했는데 오늘 말씀이 그런 류의 내용입니다. 예수님께 나온 세 부류의 사람들을 보십시오. 그들은 예수님이 누구이가? 오랫동안 기다리던 메시야인가 하는 일에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단지 예수님을 따르면 혹 세상적인 반대급부로서 명예나 물질, 권력이나 인기 등을 얼마나 누릴 수 있을 것인가를 목적으로 예수님께 나와서 면담을 합니다. 예수님에 대해 다소 이해를 했다면 당시의 이스라엘을 로마제국으로부터 해방 시킬 수 있는 정치적인 메시야 정도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세 사람이 차례로 예수님께 나아와 저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든지 따라 가겠나이다. 라고 말하면서 제자의 길을 지망합니다. 그러면 제자 지망생들이 어떤 마음과 각오를 가지고 주님께 나왔는지를 주님과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통해서 살펴보겠습니다. 그래서 설교 제목을 주님을 따르는 길입니까? 로 정하였습니다.
1. 첫째 지망생은 세상적인 영광을 구합니다. |
57 길 가실 때에 어떤 사람이 여짜오되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
이 사람의 신분을 마 08:19절은 서기관(書記官)이라고 밝힙니다. 서기관은 율법을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사람으로서 구약 성경을 줄줄 외울 정도입니다. 서기관이 주로 하는 일은 성경을 옮겨 적는 일인데, 인쇄술이 나오기 전이었으므로 일일이 손으로 적어야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바르게 적었는지, 오자나 탈자는 없는지 까지 세밀히 점검하는 일까지도 하다 보니 그들이 옭겨 적은 사본 성경이 모두 몇 글자인지까지도 알고 있었습니다.
이런 서기관이 되기 위해서는 다섯 살부터 열세 살까지 율법 교육을 받고, 그리고 서른 살이 되어서는 직접 성경을 가르치는 일을 합니다. 뿐만 아니라 유대 사회에서 법을 다루는 법관의 역할까지 담당하다가 인정을 받으면 그 다음 단계인 최고위층 산헤드린 공회의 의원도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에서 서기관은 약 6,000명 정도였는데 이런 특권층이 주님을 따르겠다고 자발적으로 주님께 나온 것은 특별한 일입니다. 이 서기관이 예수님께 뭐라고 말을 합니까? 예수님이 어디로 가시든지 따르겠다고 합니다.
예수님께 대한 신앙을 갖겠다는 정도가 아니라 열 두 제자들처럼 예수님을 수행하며 섬기는 제자가 되어 보겠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사실 평범한 사람 여러 명 보다 이런 서기관 한 명이 주님의 제자가 된다면 세상 사람의 보는 관점에서는 훨씬 나아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 서기관이 주님을 따르겠다고 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한참 인기를 끄는 예수님의 무리에 속하고 싶어서일까요? 아무래도 이 서기관을 향한 주님의 말씀으로 보아 예수님을 따르고자 하는 목적은 세상적인 영광에 있는 것 같습니다. 58절을 한 번 읽어 보겠습니다.
58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하시고.
어느 누구도 선뜻 주님을 따르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는데 비해 자발적으로 나선다는 것은 매우 칭찬할 만한 일입니다. 그런데 이 서기관이 예수님으로부터 전혀 뜻밖의 말씀을 듣습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집이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도다.
이 말은 제자로서 삶은 자기 부정과, 희생과, 고난의 길이라는 것을 알려주십니다. 오늘 말씀에 앞서 51~56절의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기 위해 사마리아 땅을 통과하는 중이었습니다. 그때 유대인과 등을 돌리며 살아가는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과 그 일행에 대한 통행을 강력히 막아섰습니다.
이런 사실을 방금 보았으면서도 제자의 길을 지망한 것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기만 하면 당장 정치적 메시야로서 독립국을 선포하게 될 것이라는 기대감 때문이 아닐까요? 그렇게만 되면 예수님은 이스라엘의 왕이 되며, 자신도 초대 내각에서 서기관의 신분보다 훨씬 더 큰 한 자리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지망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세상에서 권력이나 부, 명예 같은 것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세상의 부귀영화를 구하는 것 보다는 오히려 고난의 길임을 말씀하십니다.
눅 09:23 또 무리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2. 둘째 지망생은 육적인 일을 신령한 일보다 앞세웁니다. |
59 또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르라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두 번째 제자 지망생을 마 08:21절에는 제자 중의 한 사람이라고 소개합니다. 이 사람은 이미 주님을 따르고 있던 사람인데 예수님은 그에게 좀 더 확실하게 주님을 따르는 생활, 믿음의 생활을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자 이 사람이 나로 먼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라고 합니다. 나를 따르라 하심에 대한 상당한 설득력 있는 거절입니다. 이 사람은 부친을 장사한 후에 주님을 따르겠다고 하는 만큼 인간적으로 볼 때 지극히 당연한 거절에 속합니다.
장례식은 출생과 결혼과 더불어 삼대 인륜대사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에 있어서 죽은 이에 대한 예우를 갖춘 장례식은 가정적, 종교적, 사회적 영역에서 매우 중요한 의무 가운데 하나로 인정하였습니다.
율법을 공부하는 일, 성전 예배, 유월절 제사, 할례 시행 등 그 어떠한 것보다 우선권을 가졌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의 현재 말하는 의도를 보면 주님을 따름에 있어서 핑계를 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버지가 현재 죽은 것이 아닙니다.
죽었다면 이 사람이 여기 있지 않았을 것이니까요? 아마 나이가 좀 많아서 곧 세상을 떠날 정도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주님께 제가 지금 주님을 따르면 앞으로 아버지의 장례를 누가 치릅니까? 조금만 여유를 주시면 장례식 다 마치고 와서 따르겠다는 겁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입니다.
60 이르시되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 하시고.
60절 말씀을 문자적으로만 보면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란 말은 얼른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또 해석을 잘 한다 해도 예수님이 자신을 따르겠다고 말하는 자에게 아버지의 장례식을 막은 비윤리적인 말씀으로 비칠 수가 있습니다. 이미 죽은 사람이 죽은 자기 아버지를 장사지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60절을 어떻게 해석해야 좋을 것 같습니까?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여기 죽은 자란 영적으로 죽은 자 곧 하나님의 나라와 관련 없는 자를 의미합니다. 그렇다고 이 말을 보편적 행위 규범으로 해석하여 주님의 일을 위하여 가정에 대한 의무를 저버려도 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서도 안 됩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을 따르는데 있어서 아버지의 장례식도 하지 말라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장례식 때문에 예수님을 따르는 일을 보류하겠다는 이 사람의 의도는 우리가 생각하는 3일장이나 5일장의 장례식이 아니라 다른 두 가지의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①아버지가 아무래도 곧 돌아가실 것 같으니 조금 기다렸다가 장례식을 치르고 난 후 주님을 따르겠다는 말로서 사실은 기약도 없는 기간입니다. ②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일 년 쯤 지난 뒤에 따르겠다는 그런 말입니다.
왜 일 년이냐 하면, 유대인들은 매장을 한 후 일 년이 지난 다음 육신이 썩어 뼈만 남게 되면 아들이 다시 와서 뼈를 상자에 넣어 무덤에 넣고 다시 장사를 지냅니다. 그래서 그때까지는 주님을 따를 수 없다는 유예의 기간을 요청한 것 같입니다.
이런 생각을 아신 주님은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즉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로 하여금 육체적으로 죽은 사람들을 장사 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즉 세상의 일은 세상 사람들에게 맡기고, 오직 성도들은 하나님 나라의 일에 전심전력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이면 무난할 것 같습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일도 하나님 나라의 일보다 앞설 수 없으며, 죽은 자를 장사하는 일보다 더 시급하고 중요한 일은 영적으로 죽어있는 자들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을 믿는데 있어서 결정적인 우선순위를 세상의 일과 하나님의 일 중 어디에 둘 것인가에 대한 자세의 문제로서 주님을 따르는 길에는 모든 인간적인 생각을 내려놓으라는 의미입니다.
3. 셋째 지망생은 인간의 정을 주님보다 더 앞세웁니다. |
61 또 다른 사람이 이르되 주여 내가 주를 따르겠나이다마는 나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
먼저 내 가족을 작별하게 허락하소서. 61절에 기록된 단어와 어구의 사용을 볼 때 이 사람이 한 말은 단순히 이별의 인사가 아니라 집에 가서 부모님과 형제들에게 자기가 떠나도 좋은지 물어보고 좋다고 하면 그때 주님께 오겠다는 것입니다. 작별 인사를 하면 당연히 가족의 만류가 있겠지요? 그 만류가 재산분배나 결혼 등으로 인한 것이라면 그 인정 앞에서 주님을 따르고자 하는 각오가 충분히 묶일 가능성이 있는 사람입니다.
또 주님을 따르는 길이 어떤 전쟁터에 죽으러 가는 것처럼 생각하고 이별을 하고자 한다면 그 이별이 인간적으로는 마땅해 보입니다. 그러나 어느 부모가 신령한 세계를 알지 못하는 이상 아들이 자신과 비슷한 또래의 사람을 따라 이곳저곳을 떠돌겠다고 하는데 쉽게 허락을 하겠습니까?
우리가 전도하면서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을 것입니다. 집안 때문에, 시부모 때문에, 가족과 의논해보고, 완고한 어른이 곧 돌아가시면 그때 가서 등. 그렇게 이야기 하는 사람들 치고 믿음의 자리에 들어온 사람 별로 없습니다. 결국 세 번째 사람도 주님을 따르는 일에 한결같이 결단력이 없는 우유부단한 행동을 보입니다.
62 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지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
예수님은 전통적으로 전해 내려오는 농경문화의 산물인 격언적 문구를 믿음의 망설임, 우유부단한 행동을 하는 자에게 적용하십니다. 손에 쟁기를 잡고 밭을 가는 자의 목적은 곧은 고랑을 내는 일 아닙니까? 만일 농부가 자기의 하는 일 외에 다른 일에 관심을 두고 뒤를 돌아본다면 고랑은 곧게 될 수가 없듯이, 믿음의 길을 가려면 세상일을 돌아보지 말고, 이 생각 저 생각 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창세기 19장에 소금 기둥이 된 여자가 있습니다. 롯의 아내인데 왜 그렇게 되었는지 아시지요. 하나님의 천사가 소돔 성을 떠나면서 뒤를 돌아보지 말라 했는데도 그 곳에 쌓아놓은 재물이 불타 없어지는 것이 안타까워 돌아보다 그렇게 되었습니다.
창 19:17 그 사람들이 그들을 밖으로 이끌어 낸 후에 이르되 도망하여 생명을 보존하라 돌아보거나 들에 머물지 말고 산으로 도망하여 멸망함을 면하라. 26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았으므로 소금 기둥이 되었더라.
예수님도 롯의 처를 기억하라고 하셨으며(눅 17:32), 주님을 따르는 자는 쟁기를 잡은 농부와도 같이 뒤를 돌아보지 말아야 할 것을 일러 주십니다. 우리는 주님의 일꾼으로서 딴 생각을 할 필요가 없습니다.
뒤를 돌아본다는 것은 과거에 미련을 두는 것 곧 세상에 미련을 두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족 작별 중요하고, 가족을 책임지는 것 역시 중요한 일이나 주님을 따른다고 하면서 이것저것 다 걱정하고 있으면 그것은 마치 쟁기를 잡은 사람이 뒤를 돌아보는 것과도 같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이미 믿음의 쟁기질을 하는 사람으로서 앞만 바라보고 믿음의 전진을 하는 일만이 놓여있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자는 이 목적의식을 잊어서는 아니 됩니다. 기회는 찾고 기다리는 자에게는 주어지나 그러나 미루는 자에게는 주어지지 않습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
눅 05:27 그 후에 예수께서 나가사 레위라 하는 세리가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나를 따르라 하시니 28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일어나 따르니라.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가장 중대한 결단이 필요하며, 옳다고 믿는 바를 위해 결단하는 우리의 신앙의 용기 위에 주님은 귀중한 일거리를 맡겨주십니다.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은 이미 주님을 따르기로 결단한 것만큼 어떤 믿음의 장애물이라도 넘어갈 수 있는 각오를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한 젊은 부부가 새 동네로 이사를 왔습니다. 다음 날 아침식사를 하다가 옆집 아주머니가 빨래 너는 것을 보고 아내가 남편에게 말합니다. 빨래가 저게 뭐야, 빨래를 제대로 할 줄 모르는군. 세제를 좋은 것으로 써야 하는데 하며 혀를 찹니다. 그러나 남편은 밖을 쳐다보며 아무 말을 하지 않습니다.
이웃집 여자가 빨래를 널 때마다 그 새댁은 옆집 여자가 빨래를 잘 못한다는 핀잔을 늘 늘어놓기만 합니다. 약 한 달이 지난 어느 날 아침에 옆집 빨래 줄에 깨끗하게 세탁된 빨래가 널린 것을 보고 아내는 깜짝 놀라 남편에게 말합니다.
여보, 여보, 옆집 여자가 오늘은 빨래를 제대로 했네. 누가 가르쳐 주었을까? 그러자 남편이 말하기를, 응, 오늘 아침에 좀 일찍 일어나서 우리 집 창문을 좀 닦았지,
예, 인생도 이와 같이 우리 마음의 창문이 얼마나 깨끗한가에 따라 사람이 다르게 보이기도 하며, 사명도 다르게 보이기도 합니다. 영국의 신앙 격언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하늘에서 면류관을 쓴 자 중에 이 땅에서 가시관을 쓰지 않은 자는 하나도 없다.
무슨 말입니까? 이 땅에서 주님을 위해 가시관을 쓴 사람은 하늘에서 면류관을 쓰게 된다는 뜻입니다. 때로는 죽을 고생을 할 때도 있습니다. 말로 표현키 어려운 고난을 당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흔들리지 말고 믿음으로 극복하고 믿음으로 전진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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