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성경 소선지서 열두 권 중 첫 번째 성경 호세아서는 주전 760~724년경 북 이스라엘에서 사역한 선지자 호세아의 행적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 날은 하나님께서 이 선지자 호세아에게 아주 특별한 명령을 내립니다.
음란한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여 음란한 자식을 낳으라고(호 01:02). 이 명령을 놓고 어떻게 하나님께서 성적으로 문란한 여자를 하나님의 거룩한 선지자 호세아에게 아내로 맞으라 하는가? 이런 일은 도무지 하나님의 도덕적 특성과 신적 거룩함에 맞지 않는다고 하여 해석적인 부분에서 많은 논란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런 일을 명하실 때는 특별한 목적이 있음인데 그것은 호세아로 하여금 북 이스라엘이 우상숭배의 길로 나간 일에 대한 하나님의 심정을 체험케 위함입니다.
그리하여 호세아 선지자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음란한 여자 고멜을 아내로 맞이하여 세 자녀를 낳는데 그들의 이름이 이스르엘(아들), 로루하마(딸), 로암미(아들)입니다. 그리고 호 02:01절에 보면, 둘째 딸 로루하마에게는 루하마, 셋째 아들 로암미에게는 암미라는 새 이름을 주십니다.
로루하마는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는 자라는 뜻인데 이제는 긍휼을 여김 받는 자라는 뜻의 루하마로, 로암미는 내 백성이 아니라는 뜻인데 이제는 내 백성이라는 뜻의 암미로. 이 외에도 하나님은 특별한 사람에게는 새로운 이름을 주십니다. 아브람에게는 아브라함(창 17:05), 야곱에게는 이스라엘(창 32:28)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오늘 말씀도 바벨론 70년 포로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 특별한 새 이름을 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헵시바로 부르고, 이스라엘이 거할 터전은 쁄라로 부르고. 하나님께서 새로운 이름으로 주신 헵시바와 쁄라의 영적 의미가 무엇인지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1. 새 이름을 받기 전 이스라엘의 처지입니다. |
04 다시는 너를 버림받은 자라 부르지 아니하며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부르지 아니하고….
이스라엘은 먼저 북 이스라엘이 멸망하였고(B. C 722), 다음으로 남 유다가 강대국 바벨론 느부갓네살 왕에 의해 문을 닫았습니다(B. C 586). 그 결과는 성전이 완전히 전소되었고, 모든 성전 기물들이 탈취를 당하는 수모를 겪었으며(왕하 25:08~11), 백성들 가운데 좀 똑똑한 사람들은 거의 바벨론 포로로 잡혀갔습니다.
이스라엘은 이제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며 오랜 세월을 지내는 가운데 서서히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민족적 정체성을 잃고 고통스럽게 지냈습니다. 이때 이사야 선지자가 이스라엘을 향해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고국으로 돌아가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놀라운 복을 주실 것입니다. 라고 선포를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오늘 말씀 앞장 61장에서도 이스라엘아 너희는 치유를 받을 것이다, 자유를 얻을 것이다, 은혜의 날이 선포될 것이다, 슬픈 자들은 위로를 받고 기쁨이 슬픔을 대신할 것이다, 황폐하였던 곳을 다시 쌓을 것이다, 무너진 곳을 다시 일으킬 것이다,
보상을 받을 것이다, 영원한 기쁨을 누릴 것이다, 하나님과 영원한 언약을 맺을 것이다, 사람들이 이스라엘을 보고 여호와께 복 받은 자손이라고 인정하게 될 것이다 등 계속 감당할 수 없는 축복들을 선포하였습니다.
이 예언대로 B. C. 539년 10월 바벨론 제국을 정복한 고레스 왕이 이듬해인 B. C. 538년 이스라엘 백성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도 좋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성전을 건축해도 좋다는 선포를 함과 함께 성전 건축을 위하여 스룹바벨을 예루살렘의 총독으로 임명하고 다소의 물자까지 지원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스룹바벨은 대제사장 여호수아와 함께 이스라엘 백성을 데리고 바벨론에서 고국으로 돌아왔으니 이 얼마나 복된 일이며, 은혜로운 일입니까? 당시의 포로에서 돌아오는 자들의 감정이 어떠했는지를 기록해 놓은 시편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시 126:01 여호와께서 시온의 포로를 돌려보내실 때에 우리는 꿈꾸는 것 같았도다. 02 그 때에 우리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우리 혀에는 찬양이 찼었도다. 그 때에 뭇 나라 가운데에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큰일을 행하셨다 하였도다.
이렇게 부푼 꿈을 안고 고국으로 돌아온 이스라엘의 눈앞에 펼쳐 저 있는 성지 예루살렘은 그들의 기대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로 바뀌어 있습니다. 그 옛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던 웅장한 모습은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는 겁니다. 그러면 당시 포로의 처지에서 제외 된 자들이나 그 후손들은 어떻게 되어 있을까요? 이스라엘을 정복한 느부갓네살 왕의 민족말살 정책에 의해 예루살렘에 외국인을 유입시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긍심을 완전히 무너뜨려 놓았습니다.
하나님의 성민이라는 싹을 잘라 놓았다 할까요? 거기다 예루살렘 도성은 폐허가 되어 잡풀만 가득한 황무지로 변했고, 빈민굴과도 같았습니다. 성전 정비를 해야겠는데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을 대어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는 공황 상태입니다.
문제는 이렇게 기막힌 현실의 환경보다는 더 중요한 게 마음의 자세입니다. 포로생활에서 돌아는 왔지만 아직은 부정적인 사고방식, 과거의 쓰라린 노예근성 등 심리적인 장애가 있지 않습니까? 이런 패배주의적인 자세를 먼저 청산해야 합니다.
2. 이스라엘은 새로운 이름 헵시바와 쁄라를 받습니다. |
04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쁄라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이 결혼한 것처럼 될 것임이라.
헵시바는 나의 기쁨이 그녀 안에 있다는 뜻으로서 영적으로 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쁨의 대상으로 삼으시겠다는 겁니다. 유다 왕 히스기야의 아내 이름이기도 한(왕하 21:01) 이 헵시바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이스라엘을 지칭하는 용어입니다. 그리고 쁄라는 문자적으로 결혼한 여자라는 뜻이나 이 쁄라라는 용어 자체가 한 번 결혼을 했다가 버림을 받은 여자에게 사용되는 용어입니다.
비록 죄를 짓고 버림을 받기는 했지만 다시 용서함을 받은 이스라엘의 처지를 암시하는 것으로서 포로에서 돌아 온 이스라엘이 건설하게 될 예루살렘을 상징합니다. 여기서 이사야 선지자가 의도하려는 것은 04절을 잘 보시면 헵시바는 버림받은 자와, 쁄라는 황무지라는 말과 각각 대비를 시키고 있습니다.
즉 신랑이 신부가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르듯이, 하나님께서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을 사랑하는 신부처럼 좋아 하시겠다는 겁니다. 예루살렘이 남편으로부터 버림받은 여인처럼 아무도 돌보지 않는 황무지로 방치되어 있었지만 이제부터는 하나님이 친히 보호하시겠다고 하십니다.
그 약속의 표징으로 헵시바와 쁄라로 선언해 주시는데 그런 면에서 쁄라에 사는 헵시바라는 말은 이미 결혼한 신부처럼 이제부터 극진한 사랑으로 돌보시겠다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남편과 아내와 같은 그런 부부간의 관계로 이스라엘과 하나님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은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가장 피부에 와 닿는 표현으로 여겨집니다.
미국의 위마 의과대학에서 이런 실험을 하였습니다. 대학 병원에 강아지 한 마리가 있는데 여러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듬뿍 받았습니다. 누구나 이 강아지를 귀여워했고, 가까이 오면 쓰다듬어 주면서 먹을 것을 주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한 의사가 이 강아지를 대상으로 실험을 하면서 병원 내의 모든 사람에게 부탁하여 일주일동안 이 강아지에게 쏟던 사랑의 표현을 중단하도록 한 것입니다. 그래서 일주일동안 사람들은 강아지가 꼬리를 치며 반가이 다가와도 모른척하자 이상히 여긴 강아지는 더욱 반가이 따라다니지만 그럴수록 사람들은 발길로 툭 차버리고 애정을 끊었습니다.
일주일 후에 의사는 이 강아지의 혈액을 검사하면서 놀라운 결과를 밝혀내었는데 이 혈액이 탁하고 아드레날린이 증가하여 질병 상태에 있는 겁니다. 그 후 의사는 사람들에게 이전보다 더 사랑하라고 하였고, 사람들은 그렇게 사랑하기를 일주일동안 한 후 강아지의 혈액을 다시 검사해 보니 아드레날린의 양이 현저히 줄고 질병도 치료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기만 하면 모든 것이 다 풀리고 치료가 됩니다.
사 54:05 이는 너를 지으신 이가 네 남편이시라 그의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이시며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시라 그는 온 땅의 하나님이라 일컬음을 받으실 것이라.
여기서 우리는 이스라엘이 장차 누리게 될 헵시바와 쁄라의 선언 이전에 또 하나의 영광의 선언을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간과해서 안 됩니다. 03절을 읽겠습니다.
03 너는 또 여호와의 손의 아름다운 관, 네 하나님의 손의 왕관이 될 것이라.
직역하자면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왕관이란 뜻입니다. 그런데 03절은 다소 해석하기 힘든 구절입니다. 왜냐하면 왕관은 머리에 쓰는 것이 상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왕관이 손 안에 있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는 것은 손 안의 왕관은 하나님의 놀라운 보호를 받고 있는 사랑을 나타내는 표현입니다(신 33:03).
이어지는 말씀들을 보아 하나님은 다시는 이스라엘을 버리지 않고 보호하실 것이며, 더 나아가 이스라엘이 모든 이방의 민족들 앞에서 두드러질 것을 암시합니다. 더 넓게 적용하자면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손에 들려있는 면류관으로 해석 할 수 있습니다.
3. 나는 헵시바로, 우리 김해삼일교회는 쁄라가 되어야 합니다. |
04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쁄라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이 결혼한 것처럼 될 것임이라.
영적 의미에서 헵시바는 주님의 신부된 우리를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우리는 이미 주님과 믿음의 관계를 맺은 주님의 사랑 받는 신부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면에서 하나님께서 이 시간 우리 모두에게 친히 헵시바가 되시고, 쁄라가 되게 하심을 아멘으로 받으시기 바랍니다. 04절을 잘 보십시오. 지금 당장 헵시바와 쁄라가 된다는 말이 아니라 앞으로 헵시바가 되고 앞으로 쁄라가 되게 하실 것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헵시바가 되고 쁄라가 되는 것은 나의 역할입니다. 이제부터 우리가 머무는 곳, 자리를 잡은 곳은 더 이상 황무지가 아니라 복된 터전입니다. 말씀을 들으시는 여러분은 이제부터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믿음의 헵시바이며, 또한 여러분의 일터와, 우리교회는 이제부터 하나님의 쁄라입니다.
우리는 헵시바가 되게 하시며, 쁄라가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으로 지음을 받은 존재, 하나님이 제일 좋은 것으로 주시는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 하나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의 본래의 신분 말입니다.
엡 02:02 그 때에 너희는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03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하나님의 은혜로 헵시바가 되고 쁄라가 되는 것이지 나의 잘남과 능력으로 되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한 때는 우리도 바벨론 포로생활을 하였던 이스라엘처럼 사탄의 권세에 잡혀서 종노릇을 했던 때가 있었지 않습니까?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된 일인 만큼 겸손히 하나님께 순종하면 됩니다. 바울과 같이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는 고백 속에 복된 성도가 되고 축복의 터전이 됩니다.
고전 15:10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미국의 심리학자 셰드 헴스테더 박사는 사람은 하루 동안 약 5~6만 가지의 생각을 한다고 합니다. 굉장한 생각이죠. 그런데 그 많은 생각 중에 75% 정도는 부정적인 생각이라고 합니다. 사람의 생각은 관리를 하지 않고 그대로 두면 항상 부정적인 생각에 지배를 당하며, 또 부정적인 말일수록 오래 오래 한다고 합니다. 반면 긍정적인 말은 길게 하지 못한다고 하는데 그래서 긍정적인 말을 하려면 부단히 노력을 하면서 긍정적인 사고로 전환을 하여야 합니다.
물론 부정적인 생각이나 긍정적인 생각도 다 나름 근거가 있겠지만 이왕이면 이 좋은 10월에 긍정적인 믿음의 생각을 하면서 믿음의 헵시바, 믿음의 쁄라로 다듬어 나가시길 축원합니다.
여러분, 언론매체를 통하여 전달되는 공익 광고를 눈여겨보십시오. 어찌 되었던 결과를 낙관하는 형태로 이끌어 갑니다. 예를 들어 환경보호를 촉구하는 공익 광고를 보면 사람들이 태도를 바꾸기만 하면 금방 자연이 되살아 날 것처럼 암시를 하며,
경제발전에서 자연환경 파괴는 오랫동안 지속되어 왔음에도 사람들이 환경보호 운동을 시작하면 그 오염된 환경이 금방 파란 미소를 지을 것처럼 느껴지게 합니다. 이런 행동 촉구 지향적인 공익 광고의 긍정적인 힘은 정말 대단합니다. 이런 광고를 자주 대하면서 성도들은 믿음의 긍정적인 시각으로 바꾸는 지혜를 얻어야만 합니다.
막 09:23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
요즘은 자신의 나이보다 더 젊음을 가꾸고 자랑하는 시대입니다. 어떤 40대 중반의 여성은 긴 생머리에 착 달라붙는 청바지를 입고 스무 살 난 아들과 함께 밖에 나가는 걸 좋아합니다. 그러면 아들보고 여자 친구냐고 묻는다는데 그 소리 들으려고 아들과 나간다고 해요. 나이가 많아도 젊다는 소리를 듣는 것이 좋은 일이기는 하나 그렇게 젊어 보이는 것이 자연스럽고 무리가 없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얼굴에 주름이 지고 늙는 것이 싫어서 웃는 것도 제대로 웃지 못하고, 젊을 때 탱탱한 뺨이 늘어질까 봐 한 번도 옆으로 누워서 자 본 적이 없고, 목에 주름이 생긴다고 베개도 베지 않고 늘 똑바로 누워서 천장만 보고 잠을 잔다면 그 인생은 얼마나 힘든 인생을 사는 겁니까?
물론 사람들이 젊어지기 위해 운동을 하고 화장을 하는 것이 참 아름다운 일이지만, 어떤 외모 콤플렉스 때문에 자연의 순리를 어기고 거기에 집착한다면 그 정신은 오히려 문제 아닐까요?
우리는 예수님으로 인해 구원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헵시바이기에 외모에 목숨을 걸 것이 아니라 믿음의 모습을 가꾸는 일에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예배드리는 이 거룩한 곳을 하나님의 쁄라로 잘 가꾸는 일에 목숨을 걸면 됩니다.
오늘 본문에 네, 너라는 하나님께서 나를 지칭하는 2인칭이 15회나 나옵니다. 나를 위한 하나님을 표현하는 형태입니다. 이제 우리 모두 긍정적인 정신 에너지를 살려서 나는 믿음의 헵시바가 되고, 교회는 믿음의 쁄라가 되게 하는 일에 올인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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