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의 이야기 가운데 하늘을 나는 말이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왕의 노여움을 사서 사형을 선고받았는데 이 사람이 왕에게 왕이여, 제게 일 년의 여유를 주시면 왕이 가장 아끼시는 말을 훈련시켜 하늘을 날게 하겠습니다.
일 년이 지나도 하늘을 날지 못한다면 그때 가서 저를 죽이십시오. 하고 말하자 왕은 이 탄원을 받아 들여 그 죄수에게 그렇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동료 죄수들이 이 사람에게 아니 자네, 말이 어떻게 하늘을 날 수 있다는 건가? 하고 묻자 그는 이렇게 태연히 대답을 합니다. 일 년 안에 왕이 죽을지도 모른다. 혹은 내가 죽을지도 모른다. 또 그 말이 죽을지도 모르지 않는가? 일 년 이내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미래의 일을 누가 알겠나? 일 년 뒤에는 말이 정말 날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거든.
이 이야기는 사람은 숱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어떤 절망의 상태에서도 체념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줍니다. 비록 지금은 말이 하늘을 날 수 없더라도, 마지막 한 수, 희망이라는 수가 사람에게는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은 회당장 야이로가 예수님께 나아와 고하기를, 선생님, 제 딸이 거의 죽게 되었는데 한 번 오셔서 안수 기도를 받기 원합니다. 이런 청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이 회당장을 따라 집으로 가는데 가는 도중에 예상치 않는 문제가 발생하여 많은 시간이 지체되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회당장은 병든 딸이 그만 죽었다는 절망적인 소식을 듣습니다. 이때 주님은 실의에 빠져 있는 야이로에게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36) 하십니다. 크게 힘이 되는 귀한 말씀인데 오늘 이 말씀을 나에게 주시는 은혜의 말씀으로 받기를 원합니다.
1.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린 회당장 야이로를 보십시오. |
22 회당장 중의 하나인 야이로라 하는 이가 와서 예수를 보고 발아래 엎드리어.
환자 자신이 예수님께 간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아버지가 열두 살 먹은 어린 딸을 대신해서 예수님께 살려 달라고 청원하는 장면입니다. 신분이 회당장인 야이로는 열두 살 먹은 외동딸(눅 08:42)이 아프지 않았다면 아무래도 예수님 앞에 나오지 않았을 사람입니다. 이 야이로는 가버나움에 있는 한 회당의 장인데 당시 회당의 조직은 회당장, 핫잔(Hazzan. 서열 2위), 교역자인 랍비 그리고 평신도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좀 더 큰 회당은 회당장이 셋이 있어서 그 대표직을 윤번제로 돌아가면서 맡았습니다. 그러고 보면 이 야이로는 상당히 큰 회당의 회당장임을 알 수 있습니다. 회당장은 유대사회에서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라 아주 유능한 인물에게 이 직위가 주어지기 때문에 이 직책을 가진 자는 그 사회에서 상당한 존경을 받는 사람입니다.
이런 신분을 가진 야이로, 유대교에 철저히 헌신하는 사람이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려 딸의 병을 고쳐 달라고 간절히 청을 올리고 있는데 이런 장면을 나름대로 한 번 연상해 보십시오.
당시의 종교적인 상황으로 보아 거의 있을 수 없는 일 아닙니까? 또 예수님은 당시 정통 랍비 출신도 아닌 사람들에겐 단지 목수의 아들로 알려져 있을 뿐입니다. 그럼에도 유대교를 대표하는 지도층 인사 회당장이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렸으니 이 놀라운 일 속에는 야이로가 중대한 소원을 가지고 있음을 능히 짐작 할 수 있습니다.
23 간곡히 구하여 이르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 하거늘.
예수님께 찾아온 야이로의 목적을 밝히는 구절입니다. 야이로의 어린 딸이 죽음의 문 앞에 다다른 절박한 상황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야이로는 예수님이 자기 집에 오셔서 죽어가는 딸에게 안수 기도 한 번 해 주시면 회복될 것 같다는 자기의 믿음을 고백합니다.
이런 절박한 상황을 만난 야이로에게 어느 유대교인이 자기의 딸을 살려낼 수 있겠습니까? 한 사람도 없습니다. 예수님이 아니고는 해결할 자가 없는 줄 알아 지금 자존심과 체면을 완전히 내려놓고 죽어가는 외동딸을 살려 달라고 전적으로 매어 달리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이 회당장은 예수님께 나아가기만 하면 어떤 문제라도 풀 수 있다는 신뢰를 가지고 나온 유대인으로서는 보기 드문 믿음의 사람입니다. 사실 부모님은 다 아이의 숨이 넘어가는 상황을 만나면 자기가 대신 죽고 아이를 살려내고 싶은 정도의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간구에 대하여 예수님이 어떻게 반응을 하시는지 다음 24절 말씀을 주목 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24 이에 그와 함께 가실 새 큰 무리가 따라가며 에워싸 밀더라.
그는 예수님을 만나서 함께 걸어갑니다. 아직 놀라운 사건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야이로는 예수님께서 자기의 집에 함께 가 주시는 것만으로도 대단히 흥분이 됩니다. 동시에 예수님 곁에 열 두 제자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동행을 합니다. 이들은 예수님과 동행하는 일이 좋아서 서로 각축전을 벌입니다. 예수님께 더 가까이 접근하기 위해 몸까지 부딪히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런 즐거움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2. 예수님과 동행하는 길에도 고난은 찾아옵니다. |
35 아직 예수께서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회당장에게 이르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더 괴롭게 하나이까?
24절 말씀을 보면 재미있는 것은 예수님이 이 회당장 야이로와 같이 가면서도 침묵하시며 가고 있다는 점입니다. 예수님께서 야이로에게 직접 고쳐주겠다. 네 집에 가겠다는 말씀의 흔적이 전혀 보이지 않고 그저 말없이 야이로의 집을 향해 가는 중입니다.
이렇게 침묵의 걸음 속에서 그만 돌발적인 한 사건을 만나는데 열 두 해나 혈루증을 앓던 여자가 예수님께 나아오는 믿음의 모험으로 인해 고침을 받는 일입니다. 믿음의 차원으로 보면 회당장 야이로는 자신의 믿음 위에, 이런 놀랍고 신령한 은혜의 현장까지 체험하게 되었으니 큰 은혜와 복을 받은 것 아닙니까?
그럼에도 야이로는 이 사건으로 인해 오히려 고민에 빠집니다. 곧 자기 집 사람들이 방금 외동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왔기 때문입니다. 이제 야이로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처지입니다. 이미 12년간이나 혈루증 들린 여자가 갑자기 튀어나오는 바람에 시간을 허비하였고, 그 동안 자기의 딸은 죽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야이로는 혈루증 들린 여자 때문에 자기 딸이 예수님의 치료를 받지 못하고 죽었다고 오해하면서 그 여자를 많이 원망을 합니다. 너 때문에 내 딸이 죽게 되었다고 원망을 하는 것이 야이로의 믿음과 생각의 한계인데, 어쩌면 우리의 믿음이나 생활의 자세도 이럴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때 야이로가 주님, 괜찮습니다. 주님께서 함께 가시니 다 해결 될 줄 믿습니다. 라고 말했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그러나 아직 그 정도 수준의 믿음에는 도달하지 못했습니다.
야이로가 자기 딸을 살려야 한다는 이기적인 관점에서 눈을 돌려 좀 다른 영적인 차원으로 이 사건을 보았다면 더욱 좋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메시아이고 혈루증 여자의 행동에 나타난 그 믿음이 구원의 길인 것을 깨달을 수 있는 믿음 말입니다.
그런데 야이로는 그런 영적 차원보다는 예수님을 의사 선생님으로 이해하여 모시고 가는 중입니다. 사실 의사는 환자가 살아 있을 때나 필요하지 죽은 다음에는 소용이 없는 것 아닙니까? 어디 사람이 죽은 가정에서 의사를 부릅니까? 장의사를 부르지?
또 아무리 큰 병원이라도 환자가 숨을 거두면 그때는 의사도 손을 떼고 맙니다. 자신의 영역을 넘어갔다는 뜻이죠. 그러면 대신 누가 옵니까? 돈벌이를 하는 장의사가 찾아옵니다. 예, 우리의 인생길이 믿음의 길이라도, 주님과 함께하는 은혜의 길이라도, 능력이 충만하게 나타나는 길이라도 고난이 얼마든지 찾아 올 수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전도하면서 이런 말을 합니다. 교회에 나오기만 하면 고난과 시련이 물러가고, 또 풀기 어려운 문제도 당장 해결될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게 되기만 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큰 광풍과 같은 고난의 일들이 마음 놓고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얼마든지 찾아옵니다.
어떤 일들로 찾아오는지 한 번 살펴볼까요? 직장이나 일터에서는 뜻하지 않는 실직을 만나기도 하고, 가정에는 뜻하지 않는 시험이나 물질의 고통이 오기도 하고, 개인적으로는 건강을 자신했더니 뜻밖에 중병이 찾아오고, 사업에서는 부도를 만나기도 하는 것 등입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예수님께서 나의 인생을 주관하신다면 믿음이 파선하지를 않습니다. 침몰하지를 않는다는 말입니다. 염려를 내려놓으십시오. 사방의 어떤 어려운 난관이라도 넉넉히 이길 수 있음을 믿으십시오.
예수님과 함께하는 인생길에 고난의 풍파가 일어난다고 주님께서 나의 곁을 떠난 것이 아닙니다. 오직 고난을 통하여 온전히 주님만 바라보게 하시려는 섭리와 계획이 있습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상황을 만나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당장은 일이 잘못된 것 것처럼 보일 때도 있으나 그 뒤에 하나님의 계획하신 더 큰 뜻과 더 큰 은혜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롬 08: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 모든 고난은 믿음으로 해결합니다. |
36 예수께서 그 하는 말을 곁에서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하시고.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두려워 말라, 믿기만 하라는 2중 말씀은 모두 현재형으로서 그 같은 상태를 계속 유지하라는 명령입니다. 이는 곧 죽음의 소식을 들었을지라도 지금껏 나를 향해 가지고 있던 그 믿음을 계속 붙들라는 말씀입니다.
지금 야이로는 한 사람의 난치병을 고치신 예수님의 능력을 보았으면서도 자기의 딸이 죽은 일로 인해 그 은혜를 상실한 채 절망감 속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야이로에게 두려워하지 말라. 믿기만 하라고 힘을 실어주십니다. 열 두 해나 혈루증을 앓던 여자가 믿음으로 치유를 받았다면 네 딸도 능히 살아날 줄 믿으라는 메시지이죠.
롬 04:20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21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성도 여러분 두렵습니까? 불안하십니까? 주님 곁으로 오십시오. 주님께서 야이로에게 하신 말씀을 오늘 나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으십시오. 믿음으로 아멘 하십시오. 그러면 마음의 평안을 누릴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아무 일 없다 하시면 내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찬송가 401장, 주의 곁에 있을 때 맘이 든든하오니, 주여 내가 살 동안 인도하여 주소서. 주여, 주여, 나를 인도하소서. 빠른 세상 살 동안 주여 인도하소서.
막 04:39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지금 이 순간 주님께서 우리의 삶의 현장을 보시며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면, 고난의 바람과 고난의 풍파가 더 이상 활동하지 못하고 그대로 소멸될 줄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우리는 어떤 문제로 인해 슬퍼하며 괴로워합니까?
그것을 붙잡고 걱정하거나 염려하기에 앞서 먼저 주님 앞에 내어놓고 기도를 합니까? 아니면 사람의 생각으로 해결하려고 계속 고민하며 몸부림칩니까? 내게 있는 문제라고 내가 다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친히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셔야 모든 문제가 정리 됩니다.
41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이르시되 달리다굼 하시니 번역하면 곧 내가 네게 말하노니 소녀야 일어나라 하심이라.
드디어 예수님이 소녀의 손을 붙잡고 말씀하십니다. 달리다굼. 소녀야 일어나라. 원문에는 나의 딸이여 일어나라. 로 되어 있습니다. 이 소녀는 예수님과는 아무 혈연관계가 없지만 야이로의 문제는 곧 주님의 문제였고, 야이로의 딸은 주님의 딸이었기 때문에 딸이여 일어나라고 말씀 하십니다. 이제 야이로의 외동딸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는 걸어 다닙니다. 모든 사람이 놀랍니다.
성도 여러분, 다 때가 되면 죽는다는 사실을 알지요. 또 죽은 후에 마지막 그 날에 주님 앞에서 다시 살 것도 믿습니까? 이 놀라운 일을 예수님을 구주로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아무리 이야기해도 소용이 없고 오히려 비웃기만 합니다. 그들에게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영적 감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실을 믿고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
이에 그와 함께 가실 새(24)로 시작된 야이로를 향한 주님의 영적 프로그램은 마침내 죽음의 문제도 거뜬하게 해결하셨습니다. 신앙인의 복된 삶도 주님을 만나는 순간부터 시작됩니다. 교회에 나오는 날부터가 아니고, 세례 받는 날부터도 아니며, 주님을 만나는 날부터입니다. 그러나 주님과 동행하는 동안에 우리는 질병에도 걸리고, 왜 이런 고통을 허락하시는지 의아해 하는 상황을 만나기도 합니다.
신앙생활은 마냥 평탄한 꽃 길 사이를 거니는 산책 같은 것이 아니고 폭풍우도 불고, 또 골짜기도 있고, 넘어야 할 산도 있다고 생각하십시오. 그러면 그다지 실망을 않을 수 있습니다. 주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 그 길을 가신다는 사실을 믿으십시오. 우리가 두려움에 빠지고 신앙의 위기에 직면할 때마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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