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단/2013년 말씀

<맥추감사주일>여러분 감사하며 삽시다.(시 136:01~26)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13. 6. 29.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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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한 부흥사가 집회를 인도하기 위해 버스를 타고 가는데 한 뚱뚱한 흑인 여자가 아이를 다섯이나 데리고 올라와서 옆에 앉는 겁니다. 그리고는 이 부흥사를 자꾸 밀어내는데 거기에다 아이들은 떠들고, 냄새는 나고 흑인 여인의 고함소리는 어찌나 크든지 견디기가 무척 힘이 들었습니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감정 폭발 직전 갑자기 그의 마음에 하나의 물음이 떠올랐습니다.

이럴 때에도 감사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이 부흥사가 한참이나 생각하다가 감사의 조건을 찾아 표현하기를 하나님, 이런 여자가 내 마누라가 아니어서 감사합니다.

 

사람들은 육신적으로 좀 편하면 세상적인 면으로 감사를 잘 합니다. 2013년 전반기 6월까지를 돌아보는 주일입니다. 심령의 감각이 살아만 있으면 얼마든지 감사거리를 발견하여 다음주일 맥추감사주일에 감사로 표현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감사하는 마음을 순간순간마다 떠올리기만 하면 감사가 충만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01~26절까지 매절마다 감사거리를 안내합니다. 저는 이 많은 감사거리 가운데서 3가지의 감사를 메시지로 전하겠습니다. 함께 은혜 받는 시간되기를 원합니다.

 

 

 1. 불행한 과거의 처지를 벗어나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23 우리를 비천한 가운데에서도 기억해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비천한 가운데에서도. 여기 비천하다는 말은 요셉이 애굽에서 총리로 재직하는 동안 이스라엘은 좀 귀한 대우를 받다가 요셉의 사후 노예의 처지로 전락한 약 400년 세월을 말합니다. 노예의 처지로 전락되자 즉각 국고성을 쌓는 현장에 중노동자로 동원되어야 했던 그 세월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비참한 생활이었습니까?

 

01:11 감독들을 그들 위에 세우고 그들에게 무거운 짐을 지워 괴롭게 하여 그들에게 바로를 위하여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건축하게 하니라.

 

나라를 빼앗기고, 주권을 빼앗기고, 남의 나라에 포로가 된 사람들의 비참함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들이 어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인격적으로 무시를 당하고, 때로는 짐승 정도의 대우와 멸시를 받는 생활, 그야말로 서러움과 눈물의 빵을 먹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스라엘만 그러했겠습니까? 세계 역사를 보면 많은 나라들이 외세의 침략으로 그런 처지의 일을 겪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도 지난 일본 강점기 36년 동안 그렇게 고난을 당했던 때가 있었습니다.

 

23절 말씀은 이스라엘이 그런 비천한 환경에 놓여있을 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출애굽하게 해 주심에 대하여 감사와 찬양을 올리는 부분입니다. 그러나 육신의 불행한 처지에서 탈출한 것 보다 더 중요하고 가치 있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죄로 인해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나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대속의 제물로 삼으셔서 구원해 주신 일입니다.

이 놀라운 일을 바울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 내어 아들의 나라로 옮기신 일 곧 죄 사함을 얻은 것이라고 했습니다(01:13~14). 성도는 이 구원의 자리에 들어오지 못했던 과거의 불행한 처지, 죄인의 길에서 방종하며 지내던 때를 지금 은혜의 자리로 인도하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오늘날 대다수 신앙인의 특징이 무엇인 것 같습니까?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는 성숙한 신앙인이 되는 일에 무기력한 자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에 감사하라는 말이 무려 142번이나 나오는데 감사라는 단어의 의미가 신약에서는 하나님을 찬양한다, 기뻐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는 감사와 찬양과 기쁨이 하나의 관계를 맺으면서 같이 다녀야 하는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감사를 믿음생활의 열쇠로 여기는 생명의 구원선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만일 감사를 생활화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믿음의 길에서 이탈되어 가는 증거이며, 감사가 생활화 된다면 그때부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 있는 믿음이라고 말해도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감사의 표현은 예배와 찬양과 예물로 나타나며, 은혜를 깨달으면 깨달은 그 때로부터 믿음의 눈으로 하나님을 바라보며 감사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즐거이 감사하는 마음은 찬양과 경배 그리고 예물을 구원의 은혜에 보답하는 기쁨의 제사로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과거의 불행한 시절에서 하나님의 은혜의 자리로 돌아 왔다면 날마다 감사의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나, 큰 은혜를 받았음에도 계속 불평하며 산다면 오히려 원망의 울타리에 갇히고 말 것입니다. 계속 원망의 생활을 합니까? 속히 그 불행의 처지에서 탈출하십시오.

 

 

 2. 대적에게서 건져 주심을 감사합니다.

 

24 우리를 우리의 대적에게서 건지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대적에게서. 여기 대적이란 메소포타미아 남쪽의 고대 왕국이었던 바벨론(Babylonia) 제국을 말합니다. 이 바벨론은 이스라엘을 멸망시키고(B. C. 586), 예루살렘 성전을 불살랐으며, 백성들을 쇠사슬에 묶어 전쟁 포로로 데려간 나라인데 24절 말씀을 보십시오.

우리를 우리의 대적에게서 건지신 이에게 감사하라고 하는데 그 건지신 분이 누구입니까? 하늘의 하나님이십니다(26). 그러면 하나님 하면 될 것을 왜 부가적으로 하늘이란 명칭을 붙여서 하늘 하나님으로 표현하고 있을까요? 일반적으로 시편 기자들은 주로 하나님의 땅 위의 사역을 설명한데 비해, 마지막 26절은 하나님은 하늘과 땅 즉 천지만물을 모두 주관하시는 분임을 강조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건지신 이. 이스라엘이 바벨론으로 끌려가서 노예생활을 한지 70년 만에 고레스 왕의 칙령(勅令)을 통하여 다시 고국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26절은 포로에서 돌아 온 자체의 감사보다는 포로생활을 마무리 하고 고국으로 돌아오게 하신 그 하나님께 감사를 하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감사의 생활하기를 원하시는데 비해 우리는 그렇게 감사가 뒷받침되는 생활을 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한 번 생각해 보셨습니까? 깨달음이 있는 인생,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인생이 귀한 존재이며,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믿음의 눈으로 볼 수 있는 분이라면 은혜의 자리를 잘 지켜나가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좋은 보석도 그 진가를 모르면 의미가 없듯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은혜의 자리로 인도해 주신 그 은혜를 감사하지 못한다면 감사의 불감증에 걸린 것 아닐까요? 이제는 나의 대적자를 제압해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 분께 진정한 감사를 올리는 자리에 서야 합니다. 앞날에도 나의 대적자를 물리쳐 줄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믿음의 성숙은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요? 내가 잘나고 능력이 있어서 대적자로 표현되는 그 많은 사탄의 계략을 물리친다고 생각합니까? 나의 힘이 대단해서 사고와 어려움을 당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노리는 사탄의 손길에서 건져 주시기 때문에 안전하게 지낼 수 있는 겁니다.

그러면 당시의 세계를 호령하던 바벨론의 권세에서 이스라엘을 해방시켜 주신 하나님은 오늘 현실의 나에게는 어떤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까 바로 죄악의 권세, 사탄의 권세에서 구원의 자리로 인도해 주십니다. 내가 상대하기에는 벅찬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이 나를 건져 주셨다면 이 일이야 말로 최고의 감사거리입니다.

 

우리는 대적자로부터 날마다 공격을 받고 시련 가운데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이 대적자의 손길에서 건져 주시기 때문에 든든하게 살아갑니다. 그 은혜의 지속적인 사랑 때문에 앞날에도 안전하게 살아 갈 수 있습니다.

일회성으로 지나가는 은혜나 축복이나 사랑은 그렇게 큰 가치가 없지만 하나님의 지속적인 사랑과 은혜는 휴대전화의 건전지처럼 방전되거나 중단되지 않습니다. 세상끝날까지 영원히 계속되는 은혜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는 한 영원한 복이 됩니다.

 

08:31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3. 육신의 양식을 주심을 감사합니다.

 

25 모든 육체에게 먹을 것을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감사는 마음의 문제입니다. 상대방과 비교하여 낮다고 여기니 불행이 오는 것이고, 모든 게 충분한데도 결핍되었다고 생각하므로 한숨과 원망이 심령에 자리를 잡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생명체가 먹을거리를 받아야 생명이 유지되기 때문에 세상을 창조하는 과정에서 모든 생명체에 먹을거리를 넉넉히 주셨습니다.

 

01:29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 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

 

사람의 기쁨 중에 먹는 기쁨이 제일이며, 행복 중에 포만감이 제일 큰 행복이라고 말을 합니다. 사실, 좋은 음식을 배불리 먹을 수 있다면 그것은 최고의 행복입니다. 오늘 우리의 현실에서 아프리카 쪽으로 눈을 좀 돌려 봅시다.

특히 아프리카 내전으로 고통을 당하는 나라들 짐바브웨, 에티오피아, 소말리아, 수단, 라이베리아 등 이들 나라 사람들은 매일 매일 굶주림과 질병으로 눈물을 흘립니다. 못 먹어서 죽어가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입니다.

어제 저는 아프리카 서부지역 라이베리아의 시골 35백 명 정도의 사람들이 모여 생활하는 최 하층민들의 기사를 읽었습니다. 이곳은 세상에서 가장 어린 노동자들이 모여 일하는 곳으로서 세 살짜리 아이들도 젖병에서 손을 떼기만 하면 망치를 들고 하루 종일 자갈을 깨러 나갑니다. 하루 열 시간이 넘도록 망치로 자갈을 깨야만 가능한 한 끼의 식사 정도, 게다가 우기를 만나면 자갈 사가는 사람이 없어 그 마저도 할 수 없는 상황인데 마음이 많이 아팠습니다.

 

이 자리에 있는 여러분의 환경을 보십시오. 먹는 일에 벌벌 떨며 못 먹어서 괴로움을 당하는 일이 있습니까? 아무래도 그런 일은 별반 없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많이 먹어서 살이 찌고 배가 나와서 고민하는 정도입니다. 요즘은 성도들끼리 만나 식사 함 합시다. 해도 거기에 큰 매력을 가지는 분들이 그렇게 많지 않는 것 같아요. 일용할 양식으로 고민하지 않는다면 나는 복된 인생이구나, 하고 생각하십시오.

 

25절을 다시 봅시다. 모든 육체에게 먹을 것을 주신 이에게 감사하라. 사는 동안 한 끼라도 없어서 굶주리지 않도록 은혜로 채우시는 하나님께 진정으로 감사합니까? 사람들은 감사보다는 오히려 육신의 양식이 넉넉하니 감사를 잊고 살아가는 경우가 더 많습니다. 언제든지 늘 배부르게 먹을 수 있으니 그만 감사를 잊어버린 것이지요.

 

미국에서 경건한 청교도 신앙을 가진 한 농부가 무신론적인 사고를 가진 어떤 지성인과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식탁에 주문한 맛있는 음식이 나오자 경건한 농부는 항상 하던 습관대로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리자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지성인이 농담조로, 그런 기도는 18세기 사람들의 낡은 유물이니 내어 버리는 것이 어떻겠소? 하며 은근히 거부를 합니다. 농부는 할 수 없이 혼자 감사의 기도를 드린 다음 식사를 하면서 그 지성인에게 사실 우리 집에 당신 같은 식구가 하나 있다고 말을 했습니다.

<!--[if !supportEmptyParas]--><!--[endif]-->그러자 그 지성인은 다행한 일이로군요. 내 동료가 있어서 참 기쁩니다. 누군가요? 대학에 다니는 자제분인가요? 하고 묻자, 농부가 아니오, 우리 집 돼지 놈이지요. 이놈은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주어도 감사를 하지 않는 미련한 놈이랍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내가 살아있기 때문에 주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을 하라고 나의 생명을 연장시켜 주셨고, 각종 사명의 직분을 주셨기 때문에 하는 겁니다. 내가 건강하기 때문에 주님의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님의 일을 하라고 건강을 주셨고, 지혜와 재능과 물질을 주셨기 때문에 하는 겁니다.

 

미국에 있는 교단 중 그리스도연합교단에서는 교인들에게 하루에 열두 번 감사할 것을 강조한다고 합니다. 아침, 새로운 시간을 주심을 감사, 아침 식사에 음식 주심을 감사, 일터에 가면서 움직일 수 있음에 감사, 일하는 보람에 감사,

일하면서 비판이나 압력을 받을 때는 도전을 주심에 감사, 일하면서 칭찬 받음에 감사, 점심에 대화할 수 있는 동료가 있음을 감사, 일과 후 작은 성취에 감사, 집에 돌아온 후 가족을 보며 감사, 신문, TV를 보면서 여가를 주심에 감사, 침대에 들어가면 잠을 주심에 감사, 꿈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생명 주심을 감사.

 

유대인들 사이에 전해오는 명언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현명한 사람은 누구인가? 모든 사람에게 늘 배우는 사람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은 누구인가? 자기 자신을 이기는 사람이다. 이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은 누구인가? 자기가 가진 것으로 만족하는 사람이다.

만족은 감사를 낳습니다. 우리가 모든 일에 감사하며 산다면 우리의 삶이 이토록 메마르지는 않을 것입니다. 너무 큰일에만 감사하려 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주위에 있는 모든 것들 속에서 만족을 느낄 수 있으며 또 얼마든지 감사할 수 있습니다.

 

시 116:12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