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단/2011년 말씀

나도 허물을 회복하였습니다(행 13:13,14, 딤후 04:11).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11. 9. 3. 1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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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모가 큰 교회를 담임한 어느 목사님이 운전하는데 갑자기 택시가 끼어들었습니다. 그러자 화가 난 목사님이 즉시 쫓아가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욕을 합니다.

그런데 그 택시 기사가 잠잠히 있다가 이렇게 말을 합니다. 목사님, 실수해서 죄송합니다. 목사님은 당황하면서 교회에 다니십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택시 기사가 저 목사님 교회 성도입니다. 하고 말합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목사님은 너무나 부끄러워 자기 행동을 크게 후회하였다고 합니다.

 

우리는 남의 잘못에 대해 좀 더 넓은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고후 06:13). 남의 허물에 대하여 비난하기보다는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눅 6:27, 28, 막 11:25).

사람의 허물을 사람에게 말하면 비판이고 하나님께 말하면 기도가 됩니다. 사람은 허물없이 나름대로 건전한 삶을 살기를 다짐합니다.

그런데도 실수에 실수를 거듭하고 상대방에게 본의 아니게 폐를 끼칩니다. 성도의 삶은 하나님의 영광을 우선으로 삼고 교회에서 덕을 세워야 하며 성도 간에는 믿음의 품격이 있어야 합니다.


허물과 실수는 그 일보다 이로 인한 후유증이나 결과가 무섭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행 심사에 특별히 유의하여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보십시오. 마가복음의 저자 마가에 대한 큰 허물이 나옵니다. 그 허물로 인하여 바울과 바나바가 서로 헤어지는 후유증을 남기고 맙니다.

우리는 마가의 허물을 통해 나는 그런 식으로 안 살아야지 하는 각오를 해야겠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 제목을 「나도 허물을 회복하였습니다」로 정했습니다. 은혜의 시간 되기를 축원합니다.

 

 

1. 마가의 인적 사항을 살펴보겠습니다.

 

행 12:25 바나바와 사울이 부조하는 일을 마치고 마가라 하는 요한을 데리고 예루살렘에서 돌아오니라.

 

마가는 사도행전 13장에서 안디옥교회로부터 바울과 바나바가 선교사로 파송을 받았을 때 선교사의 수행원으로 발탁된 사람입니다.

마가가 선교사를 수행하는 일에 참여하게 된 데에는 나름대로 신앙의 장점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 장점을 말하지 않습니다.

적어도 기도의 깊이, 전도의 열정, 충성의 흔적 등 신앙의 굳은 결의와 각오 등이 있었을 것으로 봅니다. 마가는 편모슬하(偏母膝下)에서 성장한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70인 제자 중의 한 사람이었을 것으로 짐작하고 또 베드로의 믿음의 아들입니다(벧전 05:13).

 

역사가 유세비우스(Eusebius of Caesarea) 기록에 의하면 마가는 애굽에서 알렉산드리아교회를 세운 뒤 거기서 감독으로 일하다 순교하였다고 합니다.

행 12:12에 의하면 마가의 본래 이름은 요한입니다. 사회생활의 편리를 위해 로마식 이름인 마가를 사용하였는데 당시에는 웬만한 사람은 2가지 이름을 사용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통상 그를 마가 요한이라고 부릅니다. 

 

①마가의 어머니 마리아의 다락방이 유명합니다(행 12:12). 이 다락방은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을 베푸신 장소이고 120여 명의 성도가 모여 기도하던 공간입니다.

후에는 예루살렘교회 역할을 하였습니다. 120여 명이 모일 수 있는 다락방이면 마가는 그의 어머니의 배경 아래 부유하게 자랐다고 볼 수 있습니다.

 

②마가복음을 기록했습니다. 마가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는 아니면서도 복음서 중 두 번째의 성경을 기록한 인물인데 이 마가 요한이 행 12:25에 처음 등장합니다.

바나바와 사울이 부조하는 일을 마쳤다는 말은 예루살렘교회가 기근(饑饉)으로 곤경에 처했을 때 안디옥교회가 구제 헌금을 모금하여 이 두 사람에게 맡겨 처리했다는 뜻입니다.

이 일을 마치고 안디옥교회로 돌아올 때 마가를 데려왔습니다. 바나바가 마가의 어머니 마리아 부탁 때문인 것 같습니다. 마가는 바나바의 생질(甥姪)로서 (골 04:10) 그의 행적이 행 13:05에 나옵니다.

 

향 13:05 살라미에 이르러 하나님의 말씀을 유대인의 여러 회당에서 전할 새 요한을 수행원으로 두었더라. (1차 선교를 나설 때의 기록)

 

 

2. 마가가 큰 허물을 남겼습니다.

 

13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 바보에서 배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니 요한은 그들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마가가 무슨 이유인지 알 수 없지만, 선교의 대열에서 이탈하고 맙니다. 밤빌리아의 수도 버가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이 부분을 여러 각도에서 생각해 봅시다.

분명히 마가는 자기 뜻과 맞지 않는 여러 힘든 일을 만난 것 같습니다. 선교 현장이니 힘든 일이야 안 있겠습니까? 그것도 낯선 이국땅이니 고향 생각도 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선교 현장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그런데 그만 돌아서고 말았습니다. 단단한 결심을 하고 수행원으로 따라나섰을 터인데 왜 마가가 갑자기 예루살렘 집으로 돌아가고 말았습니까?

자기 한 사람이 돌아서면 선교의 일에 큰 지장을 줄 터인데 말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마가가 되돌아간 이유를 추적해 보겠습니다.

 

①바울 선교팀이 바보에서 전도를 마친 후 배를 타고 280km를 지나 앗달리아(행 14:25) 항에 상륙하였습니다. 이어서 육로로 20km를 걸어서 버가에 도착하였습니다.

13, 14절에 마가가 돌아간 지역 버가에서부터 이후의 목적지를 살피면 처음에는 해안 길을 따라가다 고원지대로 올라가는 코스입니다.

이 해변에서 고원지대로 올라가는 길은 세계에서 가장 험난한 길 중의 하나입니다. 거기다 도둑과 강도가 들끓는 소문이 자자한 곳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이 험한 길을 올라가려고 할 때 마가가 육신의 위험과 두려움을 감당하지 못하여 되돌아갔다는 뜻입니다.

 

갈 04:13, 14절에 의하면 바울이 그곳에 도착하였을 때 지역 풍토병인 말라리아 병을 앓고 있었음을 암시하는 말이 나옵니다. 지금 인도자가 지쳐 있고 거기다 병까지 겹쳤습니다.

마가 자신도 수행원으로서 나아갈 험산 준령 길을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 되돌아간 것으로 짐작됩니다. 부유한 가정에서 고생 한 번 안 하고 자랐기에 막상 눈앞의 고난 앞에서 출발할 때의 굳은 각오가 사라졌습니다. 마가는 주님으로부터 받을 영광만 바라본 사람으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②마가가 돌아간 일을 놓고 볼 때 또 하나의 짐작되는 일이 있습니다. 외숙부 되는 바나바가 선교의 주도권을 잃어버린 것 때문입니다. 이방인이 율법 지키는 일로 의견 차이(갈 02:13)가 있었는데 이때 외숙부가 밀리자 그 불만 때문에 되돌아갔을 것이라는 짐작입니다.

김삼일 가족 여러분, 교회 일에는 헌신과 희생의 각오가 있어야 열매를 기대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안일한 생각으로는 열매를 맺을 수 없습니다.

 

교회에서 머리를 맛 대고 함께 의논하는 사람 중에도 처음에는 열심히 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바람과 같이 사라지는 마가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 주변에 마가와 같은 각오로 출발했지만 결국 데마와 같이 무너진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에게 전도하면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나도 한때는 교회 열심히 다녔고, 충성도 했고, 신앙의 의무도 잘 이행했습니다. 세례도 받았고, 서리 집사도 했고, 교사도 했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여러 사정이 있을 겁니다. 신앙의 기준을 사람을 보고, 믿고 따랐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처음에도 잘하지만, 끝에도 잘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남보다 잘하려 말고 이전보다 잘하기를 바랍니다. 혹 낙심할 수 있는 환경을 만나면 이것은 사탄이 나에게 주는 시험이구나. 이 시험은 이겨내겠다는 각오를 하십시오.

 

 

3. 마가의 허물 때문에 바울과 바나바가 헤어졌습니다.

 

행 15:37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38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39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선교지에서 마가가 이탈한 일로 다음 선교에 큰 후유증을 남겼습니다. 한 번의 허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헤어지는 결과가 되었기 때문입니다(행 15:36~40).

마가가 비록 도중하차했지만 1차 선교를 잘 마친 바울과 바나바는 선교지의 소식이 몹시 궁금했고 그들도 만나고 싶었습니다. 잘 믿고 있는지, 혹 시험에 들지는 않았는지 말입니다.

그 선교지를 다시 방문하고 싶어서 바울은 바나바에게 다시 선교를 떠나자고 제안합니다. 그런데 수행원을 누구로 할 것인가에 대한 의견 차이로 바나바와 바울이 서로 심히 다투어 갈라서고 맙니다.

 

바나바는 마가의 전력을 알면서도 회복할 기회를 주기 위하여 데리고 가고자 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강력하게 마가를 거부함으로 두 사람이 갈라서고 말았습니다.
바울의 눈에 비친 마가는 변절자입니다. 앞으로 또 어떤 지장을 받을지 모르니 수행원으로 적합하지 않다는 겁니다. 선교는 재미로 하는 게 아니지 않느냐는 논리입니다. 예, 다툼을 일으키는 일에 혹 내가 불씨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성도 여러분, 나의 허물은 무엇입니까? 사명 의식이 부족하고, 시련을 이기지 못하는 일로 인해 전체의 문제를 일으키는 것은 아닙니까?

 

나 때문에 공동체가 시끄럽고 요란하지는 않습니까? 우리 모두 힘을 모아 주님의 일을 해야 할 때임을 아십시오. 나 하나쯤이야 하는 무관심은 공동체에 어려움을 줄 수 있습니다.

요즘은 없어졌지만, 과거엔 성적 표시를 이렇게 하였습니다. 秀, 優, 美, 良, 可. 이 등급 때문에 많은 학생이 시달렸을 것입니다. 특히 양, 가 집의 학생들은 얼마나 불안하고 고통스러웠겠습니까? 그런데 이 말의 정확한 뜻을 알고 있습니까? 수, 우, 미, 양, 가의 의미를 보면 이렇습니다. 

 

秀(빼어날)는 빼어나다는 것이고, 優(넉넉할)는 넉넉하다는 뜻이며, 美(아름다울)는 아름답다는 뜻인데 성적이 중간밖에 안 되는데 뭐가 아름답다는 것일까요? 또 良(좋을)은 양호하다는 의미니 그런대로 잘했다는 뜻이며, 可(옳을)는 그만하면 됐다, 가능성이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고 보면 수, 우, 미, 양, 가 모두가 고만고만하여 그다지 의미의 차이가 심각하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옛 선생님들의 성적 표시 방법은 그 누구도 포기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결국에는 좋은 결과를 낼 수 있다는 사랑의 뜻을 담고 있습니다. 성적의 허물을 안고 가겠다는 의미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딤후 04:11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세월이 흘러 바울은 그의 마지막 편지 디모데후서에서 마가를 등장시킵니다. 옛정을 생각해서 한번 만나자는 것이 아닙니다. 꼭 필요한 인물로 평가합니다.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순교를 앞두고 있을 때 왜 마가를 갑자기 등장시킵니까? 이는 이탈자로서의 허물을 충분히 회복할 만한 일이 있었음을 짐작게 합니다.

사실 마가 요한은 그 일 후 약 15년 동안 역사의 표면에서 가려 있었습니다. 그동안 어디서 무엇을 하며 지냈는지에 대한 기록이 없습니다.

바울이 몬 01:24 절에서 나의 동역자 마가라고 소개하고, 골 04:10 절에서는 나와 함께 갇힌 마가로 간단히 표현합니다. 자신의 선교 대열에 마가를 동참시켰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으로 보아 마가는 전날의 그 허물을 어떻게든 회복하여 바울로부터 신뢰를 회복하고 좋은 관계를 다시 설정한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 모두 살다 보면 다툴 때가 있습니다. 사람은 약하기 때문입니다.

일단 다투거든 다투게 된 그 문제만 가지고 이야기하십시오. 그 사람의 은밀한 허물은 안고 가야지 누설하면 안 됩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허물과 실수를 통해서 많은 것을 경험하고 배우며 새롭게 다듬어지기 때문입니다.

 

잠 25:09 너는 이웃과 다투거든 변론만 하고 남의 은밀한 일은 누설하지 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