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단/2010년 말씀

(부활주일)예수님의 부활은 새 힘을 얻게 합니다.(마 28:01~15)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10. 4. 3. 0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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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3대 독자를 잃은 한 어머니가 석가모니에게 찾아와 죽은 자기 아들을 살려 달라고 애원을 했습니다. 석가모니는 하도 기가 차서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다음과 같은 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부인, 내가 당신의 아들을 살려 드리지요. 그런데 조건이 하나 있습니다. 부인이 저 아래 동네에 가서 겨자씨 하나를 구해 오는 일입니다. 그 겨자씨는 아무도 죽음의 고통을 당해 보지 않은 한 집에서 구해 와야만 합니다.
그 부인은 한 가닥의 희망을 품고 이 집 저 집 모든 집을 다 찾아다니면서 겨자씨 하나를 구해 오려 하였으나 모든 노력이 헛수고였습니다.
부인이 돌아와 그런 겨자씨는
구할 수 없습니다고 고백을 하자 그때 석가모니는 다시 말하기를, 그렇지요. 죽음의 비애란 모든 집 모든 인생에게 다 임하는 것인데 그대의 아들이라고 왜 당하지 않겠습니까? 라고 말을 하자 발길을 돌렸다고 하는 일화가 있습니다.

 

키엘케골(덴마크의 실존철학자). 인생을 표현하기를 사형 선고를 받은 죄수들이 감방에 갇혀 있다가 한 사람씩 한 사람씩 교수 형장으로 끌려가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자신의 순번을 기다리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인생은 태어났으면 한 번은 죽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영생을 부여받은 존재이었는데 죄로 말미암아 영원한 생명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실상은 죽음에서 끝이 납니다. 그래서 죽음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이게 되지만 그러나 기독교는 죽음으로서 모든 것이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지 사흘 만에 살아나심으로 인해 우리의 영원한 삶의 길을 열어놓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가 오늘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심의 의미를 생각해 보면서 부활의 주님을 각자가 만남으로 인해 새힘을 얻는 복된 날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1. 예수님의 부활은 역사적 실제 사건입니다(01~06).

 


05 천사가 여자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06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예수님을 평소에 많이 사랑하고 따르든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여인들이 그 시체라도 보기 위해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그때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서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02) 그 형상이 번개와 같고 그 옷은 눈과 같이 희었다고 했습니다. 사람의 관점에서 볼 때 이는 대단히 놀라운 일 아닙니까?
꾸미려 해도 이렇게 자세히 그리고 생생하게 꾸밀 수가 있겠습니까? 이 사실을 누가복음의 저자 누가도 과학적 혹은 의학적으로
증명할 수는 없으나 사실로 나타난 일에 대해서는 부인 할 수가 없어서 당시 로마의 고관인 데오빌로에게 자세히 전해 올렸다고 했습니다(눅 24:01~07).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믿음이 있는 사람에게는 설명할 필요가 없지만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는 아무리 적절한 설명을 해도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이 놀라운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부인하는 자들은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이 그 분을 너무도 사모하는 나머지 환상을 본 것이라고 부정의 말을 합니다.
그러나 환상도 한 두 사람이어야지 제자들을 포함한 약 5백여 명 이상의 사람이 장소와 시간이 다른 곳에서 각기 부활하신 예수님을 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사람의 이성으로만 판단하여 부정하려는 사람에게 이렇게 권면의 말을 합니다.


살전 04: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17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18 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

 

한 아이가 학교에서 구구단을 배워 와서는 집에서 할아버지 앞에서 자랑을 합니다. 할아버지가 하도 기특해서 이렇게 물어 보았습니다. 얘, 3×4는 뭐지? 예 그것은 요. 12이에요. 오, 그래 잘 맞추는데 그러면 6×7은 뭐야? 42요. 그러면 13×12는 뭔데?
에이, 할아버지 이 세상에 그런 것은 없어요. 할아버지는 바보야.
이 아이의 말처럼 정말로 13×12 라는 수학 등식이 없는 겁니까? 156이라는 답과 함께 등식이 당연히 있지만 이 아이는 자기가 모르니까 그냥 없다고 하는 겁니다.

자신의 머리에 들어오지 않는 지식에 대한 거부는 이 어린아이뿐만 아니라 우리 어른들에게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우리도 머리로 이해하기 어려운 것에 대한 거부를 느낄 때가 많이 있는데 예수님의 부활 사건이 더욱 그렇습니다.

죽은 사람이 어떻게 다시 살아난단 말입니까?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 아닙니까? 그러나 성경은 그 사실을 있는 그대로 자세히 설명합니다.



 2. 예수님의 부활은 역동적인 삶을 살게 합니다(07~10).

 


08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빨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알리려고 달음질 할 새.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한결같이 예수님을 담대히 증거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이유는 나에게 있어서 너무도 감격스럽고 기쁜 일이라 전하지 않을 수 없는 감격이 끓어오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기쁜 소식이나 놀라운 소식 즉 뉴스거리를 접했다 싶으면 속히 다른 사람에게 알리려고 얼마나 안절부절못합니까? 전화기를 들고 이 소리 저 소리 장시간 통화를 하고, 또 사람을 만나게 되면 미처 안부도 물을 여유도 없이 왕수다를 떨기도 하겠지요?


천사로부터 예수님의 부활의
소식을 들은 후에 그 부활을 확인한 제자들은 모두가 다 부활의 복음을 전하다가 순교의 제물이 되는 삶을 살았습니다. 부활의 기독교는 그만큼 가치가 있는 복음의 종교입니다. 기독교가 오병이어의 기적이나 병든 자를 살리신 예수님의 사건 등이 없어도 이루어질 수 있으나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다시 사신 이 부활의 사건이 없다면 성립될 수 없습니다. 만일 부활이 없고 죽음이 인생의 끝이라면 여러분과 저를 포함한 그리스도인들처럼 제일 불쌍한 사람들은 없습니다. 이 좋은 시간에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도 안타까운 일입니다.


2009년 5월 23일 새벽
집 뒤 봉화산 부엉이 바위에서 투신한 고 노 전 대통유서가 컴퓨터에 파일로 공개됐는데 파일 제목은『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의 고통이 너무 크다.』입니다. 그 유서 전문을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너무 많은 사람들에게 신세를 졌다.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 앞으로 받을 고통도 헤아릴 수가 없다. 여생도 남에게 짐이 될 일 밖에 없다. 건강이 좋지 않아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책을 읽을 수도 글을 쓸 수도 없다. 너무 슬퍼하지 마라.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 미안해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 운명이다. 화장해라. 그리고 집 가까운 곳에 아주 작은 비석 하나만 남겨라. 오래된 생각이다.

저는 이 분을 무척 좋아했습니다. 왜냐고요? 깨끗한 정치를 구현해 보려고 했기 때문이고 알고 보면 재물에 대하여 역대 어느 통치자보다 깨끗했기 때문입니다. 좌파다 우파 하는 것은 정치세계에선 어느 나라나 다 존재하며 권력을 잡은 쪽에서 반대파를 다 안 좋게 몰아붙이기 위해 그렇게 표현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저는 지금 정치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라 예수님이 없는 한 인생의 삶이 허무하게 끝나는데 대안 아쉬움입니다.

 

고전 15:19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여러분 무엇 때문에 여기에 나와 있으며, 무엇 때문에 교회를 사랑하면서 살아갑니까? 무엇 때문에 진리를 말하고 의를 행하려 하십니까? 무엇 때문에 빼앗아도 모자라는 판국에 남에게 사랑과 물질을 나누어주고 사십니까?

장차 우리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따라 부활의 영광에 참여할 것이고 그 나라에서 충분히 보상이 있기 때문에 그 명령을 따라 행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부활신앙 없이 의, 자유, 평등, 진리, 선, 사랑, 인내를 말한다면 그것은 생명이 없는 겁니다.

사랑해야 할 이유도, 참고 살아야 할 이유도, 남에게 주어야 할 이유도 다 예수님의 부활에 기인한 것임을 잊지 마십시오. 우리에게 부활의 신앙이 없다면, 일시적인 화려함과 아름다움은 있으나 이내 시들어 버리는 뿌리 없는 꽃을 꽃병에 꽂아 놓은 것과도 같지 않을까요?



 3. 예수님의 부활은 새로운 창조의 사건입니다(11~15).

 


매년 봄이 오면 다 죽어 가던
나무에서 다시 새로운 잎이 피고, 동면(冬眠)하던 곤충이나 동물들도 새로운 생명의 순환을 하는 계절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자연의 순환을 통해서 부활의 모습을 어렴풋이나마 짐작을 하지만 식물이 싹이 트고 자라고 하는 과정 정도가 부활의 정확한 증거는 전혀 아닙니다.

우리가 어린아이에게 부활을 설명할 때는 자연의 순환을 통하여서 또는 다 죽어진 것 같은 나뭇가지에서 봄이 되면 다시 움이 터 오르는 것으로도 또 나비가 신나게 세상을 날아다니지만 사실 그 이전에 번데기의 시절이 있었다는 것 등으로도 설명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는 예수님의 부활을 일반계시의 의미에서 접근한 것일 뿐이고 진정한 의미에서의 예수님의 부활은 새로운 창조의 사건입니다. 그래서 당시 부활의 광경을 목격한 제자들이 그렇게도 중요하게 생각하며 지키던 안식일을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인 주일로 바꾸어 모이게 된 겁니다.
그러니까 부활은 새로운 차원의 역사의 출발점임을 아십니까?
어린 계집아이 앞에서도 비겁하게 주님을 부인하던 베드로였지만(마 26:69~75) 부활하신 주님을 뵈옵고 나서는 고백하기를,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행 02:32). 외치며 주님의 복음을 힘있게 증거하는 전도자의 삶을 살았습니다.

일시적이지만 용기를 잃고 무기력해진 제자들이 다시 새로운 힘을 얻어 활기 있게 걷게 된 것이야말로 부활이 가져다 준 재창조적 발걸음의 출발입니다.


12,13절을 보면 예수님의
부활 사건을 목격한 파수꾼들이 이 사실을 대제사장들에게 고했을 때 이들이 지도층과 의논을 하면서 군인들에게는 이 사실을 말하지 않는 조건으로 돈을 주고 입을 막으려 했으나 그 부활을 감히 막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그 믿음만이 미래를 열어갈 수 있고, 오늘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주일 그 부활의 주님을 만남으로 인해 우리 모두가 창조적인 새 힘으로 무장되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행복에 이르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욕망을 이루었을 때 오는 행복이고, 둘째는 욕망 그 자체를 비웠을 때 오는 행복입니다. 전자의 행복은 끊임없이 또 다른 욕망을 불러오면서 잠깐 동안의 들뜬 행복을 가져다주지만, 후자의 행복은 평화롭고 고요한 심령을 잘 유지시켜 줍니다.
많은 사람들, 인생을 넓게 사는 사람들이 마음을 비워라 하는 이유도 바로 욕망을 비웠을 때 오는 행복이 참된 행복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살아가는 성도는 욕망을 내려놓음으로 인해 누리는 고요하고 평화로운 행복을 마음껏 누리는 복된 세계를 가꿉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성도는 폭이 넓은 세계를 살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합니다. 당신 힘을 내세요. 그 말을 들을 때 정말 힘이 나거든요. 오늘 이 말을 꼭 해 보십시오. 그러면 당신도 힘을 얻게 될 테니까요.

부활의 주님을 만난 성도는 당신 걱정하지 마세요. 라는 말을 합니다. 그 말을 들을 때 정말 걱정이 사라지거든요. 오늘 이 말을 꼭 해 보십시오. 그러면 용기를 얻게 될 테니까요.

부활의 주님을 만난 성도는 당신 감사합니다. 라는 말을 합니다. 그 말을 들을 때 정말 따사롭고 푸근해지거든요. 오늘 이 말을 꼭 해 보십시오. 그러면 감사를 받게 될 테니까요.

부활의 주님을 만난 성도는 당신 아름다워요. 라는 말을 합니다. 그 말을 들을 때 정말 따사롭고 환해지거든요. 오늘 이 말을 꼭 해 보십시오. 그러면 아름다워지게 될 테니까요.

부활의 주님을 만난 성도는 당신 사랑해요. 라는 말을 합니다. 그 말을 들을 때 정말 사랑이 깊어지거든요. 오늘 이 말을 꼭 해 보십시오. 그러면 사랑을 받게 될 테니까요.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부활절 달걀 풍습의 유래를
아십니까? 이 풍습은 유럽에서 십자군 전쟁이 일어났을 당시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로자린드 부인은 남편이 십자군 전쟁에 나간 뒤 나쁜 사람들에게 집을 빼앗겨 먼 산골 마을로 피해가서 살게 되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그 딱한 로자린드에게 친절하게 대해 주자 로자린드도 그 친절에 보답하는 뜻으로 부활절에 마을 아이들을 모아 맛있는 음식을 대접해주고,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상징으로 예쁘게 색칠한 달걀을 하나씩 나눠주었습니다. 그 달걀에는 부인이 직접 쓴
하나님의 사랑을 믿자. 라고 적혀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로자린드 집안의 가훈이었습니다.
어느 해 부활절 날 로자린드는 길에서 병든 어머니를 찾아간다는 어린 소년을 만났습니다.
로자린드는 그 소년을 위로하고
가지고 있던 색 달걀 하나를 주었는데 로자린드와 헤어진 그 소년은 어머니를 찾아가는 중에 한 산골에서 병든 군인을 만났습니다.
그러자 소년은 군인을 보살펴 주고 로자린드 부인에게 받았던 달걀을 주었습니다.
그것을 받아 든 군인은 그 달걀에 적힌 글을 보고 너무나 놀랐습니다. 바로 자기 집안의 가훈이었으니까요. 군인은 그 소년에게 물어서 결국 로자린드 아내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로자린드는 그 후에도 해마다 부활절이면 자신의 남편을 찾아준 색 달걀을 이웃들에게 나눠주었고 이것이 유래가 되어 오늘 날에도 부활절이면 부활의 메시지가 담긴 색 달걀을 나누며 예수님의 부활을 축하하는 겁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의 부활을
믿습니까? 그러면 로자린드 집안의 가훈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사람을 믿으며 살아갑시다. 하나님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사는 것이 가장 큰 축복입니다.

 

벧전 01:0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①예수님의 부활은 인류에게 새 소망을 줍니다. ②예수님의 부활은 신앙의 확증을 줍니다. ③예수님의 부활은 영생의 문이 열리는 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