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단/2010년 말씀

서로 용서하며 삽시다(엡 04:32).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10. 3. 20. 21:29
728x90

많은 사람이 존경하는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넬슨 만델라(Mandela 1918~) 전 대통령이 있습니다. 그는 인권운동의 투사입니다백인 소수 정부를 전복하려는 음모 혐의로 44세에 종신형을 선고받았습니다빅토르 버스 터 감옥에서 복역하던 중 27년 만인 72세의 나이에 F. W 데클레르크 대통령의 사면에 따라 풀려났습니다.

당시 면회와 편지는 6개월에 한 번밖에 허용되지 않았지만, 만델라는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산 결과입니다. 이후 백인 정권의 흑백차별정책을 종식하는 결정적 업적을 남긴 결과로 1993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으며 1994년엔 대통령까지 되었습니다.

 

그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많은 사람이 이제는 만델라가 분노의 칼을 뽑아서 자기를 한평생 감옥에 넣은 백인 원수들을 보복할 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만델라는 대주교를 위원장으로 하여 진실과 화해 위원회(TRC)를 설치하고 용서와 화해를 이루는 사회를 만드는 일에 앞장을 섰습니다.

또한, 350년간이나 인종 차별 정책으로 흑인을 박해한 소수의 백인 사회를 어떤 경우에도 정치 문제를 놓고는 보복하지 않았습니다.

이후 남아공은 특이하게도 두 가지 국가(國歌)를 함께 부르는 나라가 됩니다. Die stemNkosi sikelela 두 가지 국가입니다.

 

흑인들은 정권이 바뀌자 아프리카민족회의 대표를 열어 백인들이 만들어 부른 국가(國家) 디 스템을 더는 부를 이유가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흑인들 사이에서 불리는 엥코시 세케레레를 국가로 바꾸기로 만장일치로 정하고 만델라 대통령에게 보고하였습니다.

그러자 대통령은 뜻밖의 말을 합니다. 죄송하지만, 전 여러분과 생각이 다릅니다. 디 스템은 오랫동안 백인들이 불러온 국가입니다.

 

우리가 디 스템을 없애고 흑인들만의 노래를 부르면 우리도 백인들과 꼭 같은 차별주의자와 같지 않습니까? 남아공은 백인들만의 나라가 아니듯 흑인들만의 나라도 아닙니다여러분이 국가를 바꾼다면 남아공이 걸어가야 할 길 즉 백인과 흑인의 화합을 파괴하는 겁니다.

이렇게 해서 남아공은 공식 행사에서는 반드시 백인과 흑인이 좋아하는 디 스템과 엥코시 시케레레가 함께 국가로 연주됩니다.

 

우리도 인간관계에서 서로 거리를 두고 살 때는 사랑과 용서가 필요 없습니다. 그러나 서로의 거리를 좁히고 한 공동체에서 살 때는 충돌과 갈등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이럴 때 문제를 풀어 가는 중요한 단어가 무엇입니까? 바로 용서와 관용입니다. 이 용서를 오늘 말씀의 키워드로 정하고 서로 용서합시다. 라는 제목을 정했습니다.

 

 

1. 용서를 어떻게 실천해야 합니까?

 

32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하라.

 

32절을 보면, 용서가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용서를 실행하는 데 있어서 선행되어야 할 중요한 덕목이 32절에 나옵니다. 한 번 보겠습니다.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하나님의 속성입니다(02:07). 이웃을 부드러움과 관용으로 대한다는 의미입니다.

어떤 일을 놓고 저 사람도 다 사람이라 그런 실수를 했을 거야? 하고 이해하는 마음이 관용입니다. 상대방의 실수나 잘못을 불쌍히 여기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이런 자세를 너그러운 마음이라고 합니다. 이 관용에는 항상 따라다니는 파트너가 바로 웃음입니다. 나에게 혹 용서하기 어려운 대상이 있습니까?

그러면 웃음으로 하십시오. 좋은 마음 좋은 교회는 용서의 폭이 넓습니다. 그 용서함을 넉넉하게 실천하는 웃음이 있습니다. 웃음은 실천입니다.

관용과 웃음이 없으면 어쩌면 용서라는 구실 아래 상대방을 정죄하며 무시하는 일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용서라는 단어에는 우리 모두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합니다.

 

골 03:13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미국의 제16대 대통령을 지낸 에이브러햄 링컨 이야기 자주 들어보셨지요? 링컨이 미국의 대통령이 되기 전 일리노이(Illinois)주에서 변호사로 일한 적이 있었습니다.

당시 일리노이주에는 스탠턴이라는 유명한 변호사가 있었는데 그는 자기가 맡은 사건마다 척척 해결해 명성이 그 일대에 자자했습니다. 그런 스탠턴에 비해 링컨은 애송이 변호사에 불과했는데 어느 날 링컨이 한 사건을 맡게 되었습니다.

 

사건 준비를 위해 아침부터 서둘러 법정에 나간 링컨은 스탠턴이 법정에 나와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알고 보니 링컨과 스탠턴에게 같은 사건이 맡겨져 있는 겁니다링컨은 이번 사건을 통해 스탠턴에게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겠구나 싶어 속으로 은근히 좋아하였습니다.

그런데 링컨과 함께 일하게 된 사실을 안 스탠턴은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링컨을 쳐다보며 큰 소리로 외칩니다이 촌뜨기 변호사와 어떻게 함께 일하라는 겁니까?

 

나는 못 하겠습니다. 는 말을 남기고는 법정 밖으로 나가버렸습니다. 갑작스러운 사태에 법정 안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당황했지만, 링컨은 모욕받고서도 그저 담담한 표정으로 앉아만 있습니다.

그 후 링컨이 대통령으로 당선된 뒤, 남북전쟁이 한창 치열할 때 국방부 장관이 자리를 물러남으로 인해 후임자를 임명하게 되었습니다.

 

참모들이 여러 의견을 냈으나 링컨은 딱 잘라서 말하기를, 스탠턴 씨를 신임 국방부 장관에 임명하겠소. 그러자 참모진들은 일제히 반대하고 나섰습니다.

각하 지난날 스탠턴이 각하에게 한 무례한 행동을 벌써 잊으셨습니까링컨은 참모들의 이야기를 끝까지 다 듣고 나서 천천히 입을 열었습니다.

나는 수백 번 무시당한다 해도 괜찮소. 다만 그 사람이 국방부 장관이 되어 훌륭하게 일을 수행하기만 하면 무엇이 문제가 되겠소? 이것이 진정한 관용이요 용서가 아닐까요?

 

누가 나에게 잘못한 일, 상처 준 일 따위를 기억해 두었다가 상대에게 복수하거나 제삼자에게 그를 비판하는 일은 그를 용서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혹 상대가 나에게 손해를 끼친 일이 있을지라도 무조건 기억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럴 수 있으면 우리는 관용의 사람이요 용서를 실천하는 사람이라고 말해도 될 것입니다.

 

 

2. 예수 그리스도의 용서를 보겠습니다.

 

마 18:21 그때에 베드로가 나아와 이르되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2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21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종교적 책무를 수치(數値)화하는 습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베드로는 유대인들의 용서 개념을 능가하는 자기의 관대함을 은근히 내세웠습니다. 자랑이라도 하듯 완전수에 해당하는 7번의 용서를 제안했습니다. 그러나 3번이든 7번이든 제한이 있는 용서는 예수님의 무한 수 70×7에 의해 거부되었습니다.

 

마 06:14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15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김삼일 가족 여러분, 관용과 용서에 대해 아십니까? 성경은 용서는 이웃의 인간성의 연약함을 이해하고, 용납하며, 실수를 더 이상 문제 삼지 않고 더 나은 관계로 회복하는 과정입니다. 바울은 용서의 중요한 동기를 그리스도 안에서라고 하였는데 다시 32절을 읽어 보겠습니다.

 

32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하라.

 

그리스도 안에서. 용서의 동기가 예수님께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회복시키기 위해 그 대가를 치르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님의 그 용서하심을 실천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얼마나 큰 용서를 받았는지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는 순간 용서는 선물로 주어졌습니다.

 

용서 자체는 값없는 선물로 주어졌지만, 그 용서의 배경에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값비싼 희생을 치르셨다는 사실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받은 용서는 아주 값비싼 용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이웃을 쉽게 용서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직도 우리가 주님께 받은 용서가 얼마나 귀한 용서인지를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3. 탕자의 비유를 통하여 용서의 하나님을 만나 보겠습니다.

 

눅 15: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용서의 사건을 가장 극적으로 드라마틱하게 보여 주는 사건이 작은아들의 비유, 일명 탕자의 비유 아닙니까? (15:1132 참조)

탕자는 당시 유대의 상황에 비추어 보면 최악의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는 작은 아들이 아버지 생전 자기 몫의 재산을 요구한 것도 부당한 일이지만 그나마 분배받은 재산도 먼 나라에 가서 다 탕진하였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이 아들은 자기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명예까지도 더럽히는 잘못을 저질렀으니 정말 이런 아들은 태어나지 않는 게 오히려 제게 좋을 뻔한 자입니다. 그런데도 탕자의 아버지는,

 

①첫째로 조건 없이 용서했습니다.

아버지는 돼지를 치다 돌아온 아들을 비웃거나 야단치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있는 그대로 조건 없이 품 안에 안아 주었습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을 용서할 때 용서의 조건을 달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우리도 조건 없이 이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②둘째로 용서한다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표현했습니다.

아들은 아버지가 나를 받아 주실까? 종으로라도 써 주시면 좋으련만 하면서 무거운 발걸음으로 자기의 잘못을 후회하며 돌아가기로 작정하고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아마 기가 죽어 한숨을 쉬면서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왔을 것입니다그런데 아버지가 아들을 먼저 발견하고 달려왔습니다. 극적인 만남을 통해 아버지는 아들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습니다.

 

돼지 치기 했던 아들이니 몸에서 얼마나 악취가 났겠습니까? 그러나 아버지는 그런 것에는 상관없습니다.

아들이 돌아온 것을 기뻐하며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으니 아들은 아버지의 용서를 피부로 감동 있게 실감했습니다. 우리도 가끔은 상대방을 관용하고 용서할 때 그 용서를 구체적으로 표현해 주어야 합니다.

 

③셋째로 이전의 죄를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그동안의 잘못을 낱낱이 고하라고 역정 내지 않았고 분배받은 재산을 어디에다 썼느냐고 고함치지도 않았습니다.

대신 아버지는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고 말합니다(15:24). 아들에게 가락지를 끼워 주고 새 옷과 새 신발을 주고 송아지를 잡아 동네잔치를 열었습니다.

아들의 과거를 문제 삼는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용서하기로 했으면 지나간 일은 문제 삼지 않아야 진정한 용서가 이루어집니다.

 

④넷째로 죄인을 온전히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이 온전한 부자(父子) 관계를 회복할 수 있도록 새 신발을 신기고, 손에는 가락지를 끼우고, 새 옷을 입혀서 아들로서의 당당한 권위를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이전보다 아버지와 더 가까운 자리에 설 수 있도록 배려하였습니다.

새로운 내일을 향해 힘차게 나아갈 수 있도록 온전한 삶을 회복시켜 준 겁니다. 상대방을 관용하는 마음으로 회복의 자리에 이르게 하는 것이 진정한 용서입니다.

 

탕자였던 작은아들은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아버지와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아버지의 용서를 체험하고 난 후 아버지의 사랑 안에서 성실하게 살았을 것입니다.

우리는 나에게 혹 손해를 끼친 이웃들이 있습니까? 진정으로 그들을 용서하며 회복의 자리에 서도록 협조하고 있습니까? 우리도 서로 용서하는 기쁨을 누리며 살기를 바랍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존 브루크만은 그의 책 지난 2000년 동안의 위대한 발명품 121가지를 소개했는데 인쇄술, 전기, 비행기, 컴퓨터, 인터넷 등이 포함되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의외의 한 가지 놀라운 발명품 지우개가 우리 생활에 큰 변화를 준 위대한 발명품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습니다.

지우개가 발명되면서 비로소 인류의 기록문화가 극적으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예컨대, 이 지우개 때문에 음악가들이 악보를 적어나가다 잘못하면 지우고 새로 쓰기도 합니다. 화가도 그림을 그리다 잘못하면 지우고 다시 그립니다.

 

시인과 음악가의 작품들이 모두 현재와 같이 완성도를 이룬 것은 지우개 때문입니다. 위대한 창조주 하나님께서 실수투성이인 우리를 위해 예수님의 십자가 용서라는 지우개를 사용하셨습니다. 이 용서의 지우개로 인해 실수와 죄 가운데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십자가의 보혈 앞에서 그 모든 원한을 지워버리고 풀면서 사랑과 화해를 앞세우며 나가는 것이 진정한 크리스천의 생활입니다.

 

미움과 복수심은 파괴의 바이러스지만 웃음과 관용은 행복의 바이러스입니다. 누군가를 용서할 수 없다고 여깁니까? 그를 이해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살다 보면 미운 사람도 있고, 사랑하고픈 사람, 좋아하고픈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사랑하다 보면 괴로움이 따르는데 그럴 때 예수님께서 나를 어떻게 용서하셨는지 생각하십시오.

 

눅 23:34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벧전 01:18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이 물려 준 헛된 행실에서 대속함을 받은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된 것이 아니요 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