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에서 만남 이란 단어를 검색하면 만남을 주선하는 여러 사이트가 나옵니다. 그 중에 저의 눈길을 끄는 한 사이트가 띄었습니다. 2001년 6월에 오픈한 클럽 5678 미팅 및 채팅 전문 업체로서 국내 유명 포털 외 50 여 사이트에 자사를 지속적으로 광고한다는 안내 문구까지 담고 있었습니다.
어떤 만남을 주선하는지를 살펴보니 지역별, 테마별, 직업별로 주선한다고 나와 있어서 혹 유익한 정보라도 있을까 회원가입을 하였는데 이용료가 있어서 그만 두었습니다. 그러나 나름대로 평가하건데 직업별 만남 코너는 괜찮을 거라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사람은 세상을 살면서 사람과의 만남을 통해 삶이 하나씩 하나씩 완성이 꾸며져 가며 또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서 그 인생관이 형성됩니다. 누구를 만나느냐? 하는 것은 자신의 인생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일 아닙니까?
사람은 일생을 살면서 세 가지의 중요한 만남이 있어야만 합니다. ①첫째는 부모님을 잘 만나야 합니다. 왜냐면 우리의 삶에 첫 출발이 되기 때문입니다.
②둘째는 선생님을 잘 만나야 합니다. 이는 우리 인생에 가장 기초적인 것들이 교육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 ③셋째는 배우자를 잘 만나야 합니다. 우리 생애의 ⅔가 배우자와 함께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많은 고민이 무엇입니까? 만나야 될 사람은 못 만나고 정작 안 만나도 될 사람과 만나지는 것 아닙니까? 친구와의 만남이 중요하고, 직업과의 만남이 중요하고, 배우자와의 만남이 참 중요하지만 우리 성도들은 어떤 교회를 만나며 어떤 목회자를 만나느냐가 중요합니다.
이처럼 만남은 중요한 것인데 만남 중에서도 가장 축복 된 만남이 있다면 그 만남이 무엇인지 여러분은 아십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으로 만나기만 한다면 그 만남이야말로 진정 축복 된 만남이란 말입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예수님과 장례 행렬의 만남, 이 복된 만남 이후에 주님께서 울지 말라(13) 하심으로 인해 장례측이 겪는 고통과 슬픔의 문제가 해결됩니다.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의 인생 문제도 주님을 만남으로 인해 시원하게 해결되기를 바랍니다.
1. 우리의 인생길은 눈물의 길입니다. |
13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많은 사람들이 인생살이를 오랫동안 경험하고 나서 말하기를, 이 세상은 고해요 인생은 일엽편주(一葉片舟)와 같다고 합니다. 그만큼 인생살이가 힘들고 고통스럽다는 뜻 아닙니까?
우리네 인생살이 한 백년 안쪽의 짧은 삶에 있어서 만사형통한 일만 있으면 저도 여러분도 얼마나 좋을까요? 그런데 그 보다는 오히려 환난 풍파가 계속적으로 따르고 특히 죽음은 예고도 없이 찾아와서 모두에게 슬픔을 안겨다 주는데 이런 일이 슬픈 겁니다.
성도 여러분! 나인이라는 성문 가까이에서 두 행렬이 마주치고 있는 장면을 보십시오. 하나는 생명의 행렬이요 또 하나는 죽음의 행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즉 한 행렬은 장례를 맞아 마을 밖 공동묘지로 나가는 중이고 또 한 행렬은 지금 나인성 안으로 사람을 찾아 복음을 증거하기 위해 들어가는 행렬인데 동네 어귀에서 마주친 겁니다. 성안으로 들어가는 행렬에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있고 그 뒤로 몇 백 명이 되는 지도 모를 사람들이 저마다 야! 저 분이 선지자다. 메시야다. 하면서 경건한 마음과 또 흥분된 마음으로 그 뒤를 바짝 뒤따르고 있습니다.
11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 새 제자와 많은 무리가 동행하더니.
그러나 나인성에서 나오는 행렬은 한 과부의 외동아들이 죽은 대단히 안타까운 장례 행렬임을 알 수 있는데 이는 그 성의 많은 사람들이 동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2 성문에 가까이 이르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한 어머니의 독자요 그의 어머니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이 여인에게 있어서는 남편을 잃은 뒤 자신의 일생을 그 외아들에게 걸었는데 그 아들마저 젊은 나이에 죽어 버렸으니 하도 운명이 기가 막혀 목을 놓아 울면서 슬픈 낯으로 상여를 따르고 있습니다. 마음 아프네요.
거기에다 동네 사람들도 안타까움을 어쩔 수 없어 같이 슬픔을 나누기 위해 장례에 참여했는데 죽음이란 남녀노소를 구분치 않고 이렇게 만민 모두에게 공평하게 찾아오는 겁니다.
오늘의 말씀을 보면 젊은 청년이 죽었다는 사실입니다. 젊은 청년이 일을 했으면 얼마나 했겠으며 고대 사회에서의 여인네는 별 힘이 없었던 때이고 보면 죽은 청년의 어머니인들 무슨 영향력이 대단하겠습니까?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이들의 장례 행렬에 함께 애도해 주고 했으니 얼마나 안쓰럽고 슬픕니까?
저와 우리 여러분의 살아가는 길도 바로 이러한 길이라는 말입니다. 세상에 태어날 때는 순서가 있지만 세상을 떠날 때는 순서가 없다고 누구나가 다 이야기를 하지요. 보통은 나이 들어 장수하고 죽지만 불의의 사고로 갑자기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으며 죽음 앞에는 그 누구도 한결같이 무력하기만 합니다. 어린아이도, 청년도, 장년도, 모두 죽음의 대상이 된 것을 볼 때 인간의 행렬은 결국은 장례의 행렬이며 모두가 슬픈 길을 가는 인생입니다.
2. 인생길의 문제는 주님을 만남으로 해결됩니다. |
14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인생을 외롭게 사는 이 여인은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천하에 귀한 옥동자로 여기고 키웠을 터인데 그 아들이 죽었으니 이보다 더 큰 절망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에 예수님께서 그 상황을 아시고 그 과부를 불쌍히 여기사 아들을 살게 해 주심으로 그 어머니와 아들이 다시 만나게 되었으니 이는 대단히 축하할 만한 일입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은 참으로 귀하고 놀라운 은총이 되기에 무엇보다도 주님을 만나는데 있어서는 타이밍(timing)이 잘 맞아야 합니다.
만일 장례식 행렬이 마을을 빠져나간 다음에 예수님께서 이 마을에 오셨더라면 어떻게 되었을 것 같습니까? 이미 다 끝난 일이 되고 말았겠지요. 장례식을 끝내고 난 다음 성(城)안에서 예수님을 만날지라도 주님! 오늘 불쌍한 사람이 하나 죽었는데 그 사람을 살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라는 질문은 아무도 하지 않았을 겁니다.
죽으면 모두가 다 끝나는 것으로 믿고 있기 때문에 병자를 고쳤다는 소문만 가지고는 예수님께 죽은 자를 살려달라고 간청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난다고 해서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이 아니라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그 분과 내가 만나야 기적을 보고 누릴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전능자의 음성,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는 말씀이 있어야만 그 기적을 자신이 체험하고 이웃에게도 간증 할 수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여기서 소중히 생각해야 할 것은 예수님과 나와의 만남 그리고 그 분께 경배를 드리는 삶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 분을 만남으로서 비로소 내가 지닌 모든 문제들을 풀어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께서 인생살이에 잘 안 풀리는 일들이 계속 머물고 있습니까? 성경의 답을 들어 봅시다.
욥 05:08 나라면 하나님을 찾겠고 내 일을 하나님께 의탁하리라.
시 34:15 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그들의 부르짖음에 기울이시는 도다.
시 37:05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그래도 계속 답답하며 괴롭기 짝이 없습니까? 이럴 때 우리 다같이 시온의 찬미 143장을 부르면서 문제를 풀기를 바랍니다.
①넘지 못할 산이 있거든 주님께 맡기세요. 넘지 못할 파도 있거든 주님께 맡기세요. 우리 가야 할 길은 멀고도 험하여 허덕이며 가야하는 우리 인생인데. 이럴 때 우린 누굴 의지하나요. 주님밖에 없어요. 나는 그 길 갈 수 없지만 주님이 대신 가요.
②참지 못할 분노 있거든 주님께 맡기세요. 참지 못할 슬픔 있거든 주님께 맡기세요. 우리 살아갈 길은 눈물의 골짜기 내 힘으론 참지 못해 늘 흐느끼네. 이럴 때 우린 누굴 의지하나요. 주님밖에 없어요. 나는 그 길 갈 수 없지만 주님이 대신 가요.
3. 예수님을 만나면 영육 간에 살아납니다. |
15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머니에게 주시니.
죽음이 우리를 슬프게 하는 이유는 우리와 세상을 떠난 사람의 관계가 단절되어 다시 만날 수 없고 함께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죽었던 자가 살아났다고 해서 그것을 부활이라고 이야기하는데 엄격히 말해서 그것은 진정한 부활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나인 성 과부의 외아들이 죽음에서 살아났지만 그것은 죽었다 살아난 것일 뿐 부활이 아니고 회당장 야이로의 딸도 나사로도 살아났지만 결국은 또 죽고 말았지 않습니까? 한 번 죽는 것이 얼마나 힘이 듭니까? 그런데 또 죽게 될 것이니 오히려 얼마나 고역이며 장례식에 다시금 경비만 들지 않습니까?
참된 부활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었다가 사흘 만에 살아나신 그 사건뿐이고 다만 과부의 아들이 살아 모자간에 다시 만나게 된 것은(15) 장차 우리에게 일어날 부활과 함께 장래의 소망이 있음을 알려주는 하나의 상징적 표시입니다.
살전 04:13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4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우리 모두가 언젠가는 죽겠지만 예수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실 그 때는 이 세상의 몸을 벗고 부활의 영광체의 몸을 입게 될 것을 기대하십시오. 그날을 내다보며 살아가는 성도는 오직 생명의 주인 되신 예수님을 만나고 그 분과 동행함으로 인해 영육 간에 회복됨의 역사, 살아남의 역사가 따를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나름대로 세상에 이름을 남기고 떠난 사람들의 묘비명에 보면 제법 읽을거리(?)가 되는 것이 있어 몇 곳을 소개해 보겠습니다.
헤밍웨이. 일어나지 못해 미안해. 버나드 쇼(아일랜드 소설가). 우물쭈물 살다 내 이럴 줄 알았지. 중광(걸레스님). 괜히 왔다 간다. 칼 마르크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이는 다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의 삶의 흔적과 표현이 아니겠습니까? 우리는 그날을 믿음으로 내다보면서 불신적인 모습을 떨치고 믿음의 시간표를 세워서 살아가야만 합니다. 한편 믿음의 시간표를 따라 목적을 세우고 살다간 사람들의 묘비명을 보면 고개가 숙여지고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김수환 추기경.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이 없어라. 아펜젤러 선교사.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습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의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될는지 모르지만 선한 일 영광된 일을 하기에는 시간이 많이 모자라겠지요? 그러면 시간을 어떻게 사용하여 글을 나의 묘비에 새기렵니까?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
미국의 뉴욕 대학교 부속병원 재활 센터 벽에 보면 나는 가장 축복 받은 사람입니다. 는 아주 좋은 글이 쓰여 있습니다. 큰일을 이루기 위해 힘을 달라고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는 겸손을 배우라고 연약함을 주셨습니다.
많은 일을 해낼 수 있는 건강을 구했는데 보다 가치 있는 일을 하라고 병을 주셨습니다.
행복해지고 싶어서 부유함을 구했더니 지혜로워지라고 가난함을 주셨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서 칭찬을 받고자 성공을 구했더니 뽐내지 말라고 실패를 주셨습니다.
삶을 누릴 수 있게 모든 것을 달라고 기도했더니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는 삶 그 자체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구한 것 하나도 주시지 않았지만 내 소원 모두를 들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못하는 삶이었지만 내 마음속에 진작 표현 못한 기도를 모두 들어주셨습니다. 나는 가장 축복 받은 사람입니다. 성도 여러분! 생명의 주님을 만남으로 인해 죽은 청년을 앞세우고 가던 장례 행렬이 나인성 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생명의 주님을 만남으로 인해 공동묘지를 행해 가던 울음의 행렬에 웃음이 찾아왔고 통곡이 변하여 감사가 되었고 절망이 변하여 희망이 되었습니다.누구든지 예수님을 만나기만 하면 이렇게 인생이 달라집니다.
이 시간 주님께서 청년아 일어나라고(14) 하시는 말씀은 나를 향한 말씀인 줄 알고 다함께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일어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오늘 내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일어날 때, 심령이 소생할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으며 만일 죽은 심령 그대로 있으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성도 여러분! 내 삶이 믿음으로 명품이 되게 하십시오. 명품과 같은 인생은 세상 사람들과 다르게 삽니다. 내 이름 석 자가 최고의 브랜드, 명품이 되는 인생이 되십시오. 인생 자체가 귀하고 값어치 있는 명품과 같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명품을 사기 위해서 목숨 거는 인생이 아니라 옷으로, 가방으로, 신발로 치장하는 인생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믿음의 명품으로 만드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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