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단/2009년 말씀

나도 오병이어를 주님께 드립니다(막 06:301~44).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09. 6. 20. 1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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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가끔 기적에 관한 이야기를 주고받습니다. 그런데 대부분 일어나는 기적은 소수의 사람이 지켜보는 가운데서 이루어집니다.
방송 중계 카메라를 동원하여 일어난 기적은 없습니다. 그래서 기적에 관한 일은 의심과 오해를 받기 알맞습니다. 성경에는 기적에 관한 일이 많이 소개됩니다.

특별히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였다는 오병이어(五餠二魚)의 사건은 아무리 생각해도 기상천외한 일입니다. 이 기적은 요즘 같으면 모든 매스컴이 동원되어 세계에 생중계할 특종 뉴스감이지만 이미 지난 일입니다.
오병이어에 관한 이야기는 이미 유명 본문이 되었습니다. 주일학교 때부터 교회에 다닌 사람이라면 어쩌면 수없이 들어온 내용일 것입니다.


그래서 설교학에서는 가능하면 눅 15장의 탕자 이야기와 오병이어의 기적은 설교 본문으로 택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말합니다. 너무 잘 알므로 식상(食傷)하기 쉽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동안 베푼 이적 가운데 사 복음서가 다 취급하는 유일한 사건이 오병이어입니다. 그만큼 중요한 의미를 가진 기적입니다.
복을받는교회 가족에게 주는 신령한 의미도 클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 제목을 나도 주님께 오병이어를 드립니다로 정했습니다. 은혜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임하시기를 바랍니다.



1. 오병이어 기적의 배경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32 이에 배를 타고 따로 한적한 곳에 갈새(요 06:01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의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매.


갈릴리 바다는 사실 바다가 아닙니다. 큰 호수로서 길쭉한 고구마처럼 생긴 지형입니다. 예수님은 가끔 갈릴리 바다(남북 길이 21km, 동서 폭은 가장 넓은 곳 12km)를 가운데 두고 서쪽 가버나움에서 배를 타고 동북쪽 벳새다까지 가서 전도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가버나움에 거처를 정하시고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몰려오는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때로는 무리를 떠나 한적한 곳에서 휴식도 하셨습니다.
조용한 시간을 갖는 것은 복잡한 소용돌이에서 볼 때 매우 좋은 일입니다. 계속해서 복잡한 사건에 몰두해 있으면 자기도 모르게 짜증이 또 올바른 판단력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서쪽 디베랴에서 벳새다로 가셨습니다. 휴식을 위해 한적한 곳을 찾으신 셈입니다. 우리는 쉰다고 하면 행동을 정지한 휴식 개념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생각하시는 휴식은 우리의 휴식 개념하고는 차원이 다릅니다.
예수님께서 휴식하신다고 할 때 휴식은 기도하신다 이런 의미입니다. 기도가 바로 휴식 시간임을 성경 여러 곳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군중들 예수님께서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시는 모습을 보고 혹시 놓칠세라 육로로 재빨리 돌아 예수님보다 먼저 벳새다에 도착하였습니다
.

군중을 피하여 건너오신 예수님은 배에서 내리자마자 다시 사람들과 마주합니다. 사실 이렇게 되면 좀 짜증이 날 만하지 않습니까?
모처럼 조용한 시간 갖기를 원했는데 사람들이 뒷길로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탓하거나 물리치지 않고 오히려 불쌍히 여기셨습니다(06:34).

예수님의 지난 여러 행적을 보면 자비로움의 본체입니다
. 각색 병든 자들을 동정하사 치료해 주셨고 죽은 자도 살려 주셨습니다.

이런 소문이 널리 퍼져서 본문 01, 02절처럼 무리가 소문의 호기심도 확인하고 제각기 병을 고침을 받으려고 예수님께 모여들었습니다.
이때 벳새다 광야에 모여든 사람의 수효가 남자 장정만 오천 명 이상입니다. 그 당시 오천 명이라면 이 많은 무리가 어디서 올 수 있었습니까?


마 14:21 먹은 사람은 여자와 어린이 외에 오천 명이나 되었더라.


그들은 순례자(Pilgrim)입니다. 열두 살 이상의 이스라엘 남자는 유월절이 되면 예루살렘 성전에 참여해야 했습니다. 따라서 유월절 절기에 참여하기 위해 많은 사람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중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기적 소식을 들었습니다
나병환자를 깨끗게 한 일, 맹인의 눈을 뜨게 한 일, 중풍 병자를 고친 일, 각종 병을 고친 일을 들었습니다. 그중에 본 사람도 더러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왕 떠난 여행길에 소문난 그 예수님을 한번 만나보고 싶어서 몰려들었습니다.

예수님은 정말 소문대로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메시아인가를 확인해 보고 싶어서 모여들었을 가능성이 더 큽니다. 유대인은 매년 유월절이면 예루살렘을 향해 가면서 로마의 압제로부터 우리를 해방해 줄 메시아가 언제쯤이나 오실 것인가? 하는 기대를 하였습니다. 그 간접 증거를 보겠습니다.


요 06:15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가시니라.


2. 예수님은 배고픈 사람의 처지를 잘 헤아리십니다.

 
3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으로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


본 절은 예수님께서 벳새다 광야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시게 된 배경입니다. 몰려온 무리를 목자 없는 양처럼 보시고 그 처지를 불쌍히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목축 현장에서 이 말씀을 보아야 합니다. 양은 제각기 따로 가려는 습성을 가졌습니다. 양은 목자가 없으면 맹수의 먹이 신세입니다.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북부 갈릴리 일대를 다스리던 헤롯왕은 정치 욕심으로 주민들의 삶을 제대로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주민들의 고통받고 굶주리는 삶을 곁눈질로도 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런 사람을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불쌍히 보시고 동정하셨습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영의 양식, 질병의 치유, 육체의 배고픔을 해결해주시기를 원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무리를 불쌍히 보심으로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이 기적의 의미는 예수님께서 오늘 이 시대에 우리도 불쌍히 여겨 주신다는 뜻으로 받을 수 있습니다.

김삼일 가족 여러분은 예수님께서 불쌍히 여겨 주시는 음성을 안 들어도 됩니까?
아직 주님의 위로가 없어도 됩니까? 그렇지 않으면 주님 부르심에 응답하여 주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를 불쌍히 보시고 신령한 양식을 주시는 음성을 보겠습니다.


마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08:01~03절은 갈릴리 동편 이방인의 땅 데가볼리 광야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이때도 예수님께서 그들의 처지를 불쌍히 여겨 주셨습니다.
그 당시의 상황을 점검해 보면 예수님께로 모여든 무리가 말씀을 듣다 보니 얼마나 은혜가 되었는지 사흘이 지나고 있었습니다.
무리가 이대로 돌아가다가 배가 고파 쓰러지는 일도 있음을 염려하셨습니다. 심지어 멀리서 온 사람은 돌아가다 필경 쓰러질 것이라고 예상하셨습니다.


막 08:02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 지났으나 먹을 것이 없도다. 03 만일 내가 그들을 굶겨 집으로 보내면 길에서 기진하리라….


마침내 칠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이적의 동기는 바로 상대방을 긍휼히 여기는 동정심에 있습니다.
그래서 고통받는 환자를 불쌍히 여겨 병을 고쳐 주셨고, 죽은 아들 때문에 울고 있는 과부의 처지도 불쌍히 여겨 그 아들을 살려주셨습니다. 상대방의 관점에서 판단하셨습니다.
때로는 인생살이에 내가 혼자 있는 것처럼 여겨질 때도 있으나 결코 나 혼자가 아니라 나의 형편을 잘 알고 계시는 주님이 함께하십니다.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눅 07:13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14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15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3.
오병이어의 기적이 나타나기까지 제자들 역할입니다.

 
36 무리를 보내어 두루 촌과 마을로 가서 무엇을 사 먹게 하옵소서.


예수님께서 벳새다 광야에 모인 무리에게 복음을 전하시는 가운데 저녁 시간이 되었습니다. 광야의 집회가 얼마나 은혜가 넘쳤는지를 알 수 있는 현장입니다.
제자들은 현재 시간을 보니 저녁 식사 시간입니다. 계획에 없는 집회다 보니 식사가 걱정되었습니다. 사실 사람으로서는 계획을 세울 수 없는 현장입니다.

제자들이 함께 의논해 보니 역시 대안이 없습니다
. 그래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나아와 고합니다. 선생님, 해는 이미 저물었습니다.

이곳은 빈들입니다. 식당도 없습니다. 각자가 더치페이하도록 해산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고 요청합니다(14:15, 09:12). 가장 현실성 있는 해결책입니다.

이때의 요청을 조금 더 깊이 있게 살펴봅시다
. 제자들이 이렇게 말을 하지만 회계를 맡은 가룟유다가 자기들 먹을 것은 이미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많은 무리의 식사는 자기들이 감당할 수 없으니 그냥 보내자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십니다.


37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하시니 여짜오되 우리가 가서 이백 데나리온의 떡을 사다 먹이리이까?


예수님의 말씀에 제자들은 참으로 당황합니다. 왜냐하면 먹을 것을 주라는 명령어 때문입니다. 주라(δοτε 도테)는 명령어는 주다(δίδωμι 디도미) 2 과거형입니다.
즉각 행동으로 옮겨야 하는 긴급성 단어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이 엄청난 사람을 먹일 수 있는 능력이나 수단이 없음을 잘 아십니다.
그러면 왜 이런 말씀을 하십니까? 제자들이 이 무리에 대한 책임을 일깨워 주시려는 의도입니다. 동시에 제자들의 믿음 정도를 시험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빌립을 시험하십니다.


요 06:05….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하시니 06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빌립의 대답을 보겠습니다).
07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이 무리가 시장기를 없앨 정도로 먹어도 이백 데나리온의 돈이 들겠다고 말합니다. 한 데나리온의 가치는 노동자의 하루 품삯입니다.
이백 데나리온이면 노동자가 쓰지도 않고 7개월 정도는 벌어야 가능한 돈입니다. 계산상으로는 맞지만, 그 상황에서는 실제 돈도 물건도 없는 형편입니다.

결국 빌립은 예수님께서 하신 믿음의 시험에 불합격한 셈입니다
. 이미 해결책은 예수님께서 정해 놓으신 이상 차라리 이렇게 말했다면 어떻겠습니까?

선생님, 이 무리를 먹일 수 있는 민생고 해결책은 주님께 있습니다. 또 돈으로 환산할 바엔 한 삼백 데나리온의 떡은 있어야 하겠습니다. 이렇게 말했으면 더욱 좋았을 것입니다.


38 이르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는지 가서 보라 하시니 알아보고 이르되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더이다 하거늘(안드레의 역할입니다)
요 06:08….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09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안드레는 어린아이가 가진 한 끼 식사의 오병이어를 찾아와서 주님께 보고합니다. 이후의 해결책은 선생님께 있습니다. 알아서 하십시오.
안드레는 예수님의 명령을 따라서 문제 그대로를 내어놓았는데 이 점이 가장 중요한 겁니다. 있는 그대로 문제를 가지고 오면 됩니다.
내 생각이나 능력으로 문제 해결의 방법이 없을 때 지금 주님 앞에 내어놓으십시오. 어떤 문제 건 내가 해결의 길을 찾을 것이 아니라 사실 그대로 주님께 가지고 나오십시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오병이어는 작은 아이의 한 끼 식사 아닙니까? 그러면 안드레가 아 아이의 것을 달라고 할 때 오늘 저녁 내가 먹어야 할 밥입니다. 안 됩니다. 나도 배가 고픕니다. 줄 수 없습니다. 하고 말을 했다면 어찌 되었을 것 같습니까? , 이놈아, 무슨 이유가 많아, 하면서 뭐라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 아이는 내가 먹기보다 예수님께서 찾으신다는 말을 듣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내어놓았습니다. 내가 생각할 때는 작은 것이지만 주님의 손에 들려지면 대단한 위력과 가치를 발휘합니다.



11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


예수님께서 오천 명 이상 되는 군중 앞에서 다섯 조각의 떡과 작은 물고기 두 마리를 놓고 축사하시는 장면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범인(凡人)은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는 일입니까? 또 현실의 관점에서 생각하면 기가 막히는 장면이지만 예수님은 감사 기도를 올립니다.
어떻게 보리떡 다섯 개와 작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앉혀 놓고 감사 기도를 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런데도 주님은 감사의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형편없고 작은 것처럼 여겨질지라도 감사할 줄 아는 자세가 꼭 필요함을 가르칩니다. 이런 감사는 미래 지향의 감사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통해서 오천 명이 먹고 열두 광주리에 차고 남을 것을 미리 내다보고 감사합니다. 지난 일만 생각하고 현재 손에 쥐고 있는 것만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앞으로 받을 것을 내다보며 미리 감사하라는 기도문입니다.
기적의 역사를 체험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나의 정성이 담긴 물질과 시간과 지혜와 노력입니다.
대부분 사람은 이 작은 것을 가지고 무엇 하겠느냐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씨가 되고 시작이 되어 굉장한 일을 가져오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