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단/2009년 말씀

예수님은 어린이를 귀하게 보십니다.(마 18:01~06(엡 06:04))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09. 5. 2.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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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은 약 2천 년 전 사람의 계수에도 제대로 들지 못하였던 어린이를 귀히 여기고 사랑해 주어야 할 것을 06절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미국 같은 강국이나 구라파에도 어린이날은 없는데 대한민국처럼 조그마한 나라에서 어린이들을 위한 특별한 날이 있다고 하는 것은 그만큼 어린이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진다는 의미가 아니겠습니까? 아주 좋은 일입니다.
교육을 백년대계(百年大計)라고 하는데 이는 교육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고 또 오랫동안 분명한 방향을 가지고 꾸준히 지속해 나갈 때에 좋은 결과를 볼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요즘 우리나라의 교육을 보면서 갈팡질팡 큰 혼란이 일어나는 것을 감지하게 되는 것은 그만큼 방향을 제대로 설정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 우리 신앙인들은 어떻게 하면 좋을 것 같습니까? 오늘 어린이주일을 맞이하여 우리 김해삼일교회 성도들은 어떻게 하여야 할지를 주님의 말씀으로 조명하고자 합니다.
 


 1. 어린이주일과 그 날의 유래.


본래 우리가 지키는
어린이주일은 153년 전 1856년 북미 매사추세츠 주 첼시(市)에 있는 제일 유니버설교회의 G. H 레오날드 목사님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 레오날드 목사님은 어린이들의 믿음을 굳게 하기 위해서 그 부모님이 어린이를 하나님께 드리는 뜻으로 매년 6월 둘째 주일을 특별히 정해서 예배를 드리곤 하였는데 이것이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어 어린이주일(꽃주일)이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1957년 2월 최초로 동화 작가인 마해송(馬海松), 강소천(姜小泉) 등 7명이 성문화하여 어린이를 위한 헌장을 발표했습니다.이것을 바탕으로 하여 전문과 9개항의 헌장을 마련하여 같은 해 5월 5일 제 35회 어린이날을 기하여 공포하였습니다.
그 후 주무 부서인 보건복지부는 굶주린 어린이는 먹여야 한다. 등의 피상적인 내용을 전면 개정 이를 1988년 제 66회 어린이날을 기하여 다시 공포하였는데 제 2의 어린이 헌장은 전문과 11개항으로 되어 있으며 전문에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갖는 민주사회 시민으로서의 어린이 상을 구체화하였습니다.

대한민국 어린이 헌장은
모든 어린이가 차별 없이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니고 겨레의 앞날을 이어나갈 새사람으로 존중되며 바르고 아름답고 씩씩하게 자라도록 함을 지표로 삼는다.
①어린이는 건전하게 태어나 따뜻한 가정에서 사랑 속에 자라야 하며 가정이 없는 어린이에게는 이를 대신할 수 있는 알맞은 환경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
②어린이는 몸과 마음이 튼튼하게 자라도록 균형 있는 영양을 취하고 질병의 예방과 치료를 받으며 공해 없는 깨끗한 환경에서 살아야 한다.
③어린이는 누구나 교육을 받을 수 있어야 하고 어린이를 위한 좋은 교육 시설이 마련되어야 하며 개인의 능력과 소질에 따라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
④어린이는 빛나는 우리 문화를 이어받아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고 발전시키도록 이끌어야 한다.
⑤어린이는 즐겁고 유익한 놀이와 오락을 위한 시설과 환경을 제공받아야 한다.
⑥어린이는 예절과 질서를 지키며 서로 돕고 스스로 책임을 다하는 민주시민으로 길러야 한다.
⑦어린이는 자연과 예술을 사랑하고 과학을 탐구하는 마음과 태도를 길러야 한다.
⑧어린이는 위협으로부터 먼저 보호되어야 하고 안전을 지킬 수 있는 지도를 받아야 한다.
⑨어린이는 학대를 받거나 버림을 당해서는 안 되고, 나쁜 일과 짐이 되는 노동에 이용되지 말아야 하며 해로운 사회 환경으로부터 보호받아야 한다.
⑩몸이나 마음에 장애를 가진 어린이는 필요한 교육과 치료를 받아야 하고 빗나간 어린이는 선도되어야 한다.
⑪어린이는 우리의 내일이며 소망이다. 겨레의 앞날을 짊어질 한국인으로 인류의 평화에 이바지 할 수 있는 세계인으로 키워야 한다.

이러한 어린이 헌장의 원리는 알고 보면 다 성경에 기록된 주님의 말씀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며 수많은 어린이를 키워 본 가정의 부모님이나 연구한 교육자들에 의해서 확증된 실제적인 가치관이라 할 수 있습니다.

눅 18:16 예수께서 그 어린 아이들을 불러 가까이 하시고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어린이의 인권을 옹호해 주고 있는 이 얼마나 엄청난 말씀입니까? 그러므로 어린이날은 어린이의 명절도 되지만 사실 우리의 잘 못 교육한 일에 대한 경고를 받는 날이기도 합니다. 교육학에서 문제의 부모님은 있어도 문제의 아이는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자녀들을 잘 양육하는 것은 전적으로 부모님의 책임에 속합니다.

 

 2. 이스라엘 부모님들의 자녀에 대한 가정교육의 방편.


유대인의 속담 가운데
오른 손으로 아이를 벌주면 왼 손으로는 안아 주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속담은 유대인들이 자녀를 교육시키는 중요한 원칙을 나타냅니다. 또 이스라엘의 어머니들은 아이들에게 매를 여간해서는 들지 않는다고 하는데 그렇다고 아이들이 매를 댈 일이 없을 만큼 말을 잘 듣고 얌전한 것은 아닙니다.
대신 이스라엘의 어머니들은 매보다도 더 무서운 것이 있다는 것을 어릴 때부터 가르치는데 매보다 더 무서운 것은 바로 침묵(沈黙)을 말합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의 아이들에게 있어서 가장 무서운 벌이 부모님의 침묵인데 아이들이 부모님의 말을 듣지 않으면 그 이전에 일단 부모님은 그 아이를 불러서 ①주의를 줍니다.
주의를 주어도 되지 않으면 야단을 치지 않고 그 아이를 ②숨을 쉬지 못할 정도로 꽉 껴안아서 어머니의 힘이 아이에게 전달되도록 합니다. 그래도 부족하면 이번에는 아이의 ③손목을 꽉 움켜쥐어서 어머니의 힘이 아이에게 전달되게 하는데 어머니는 너를 사랑하지만 네가 말을 듣지 않으면 이 힘으로 너를 다룰 수가 있다는 일종의 경고장(警告狀)을 보내는 것과 같은 겁니다.

그래도 계속 아이가 말을
듣지 않으면 그때는 부모님의 힘이 아니라 침묵을 사용합니다. 그러니까 부모님은 아이가 잘못을 반성하거나 행동을 고치지 않으면 일정한 공간에 격리시켜 놓고 일체 말을 걸지 않는 다는 그런 뜻이에요. 사실 한 대 때리는 것은 잠시의 아픔이기 때문에 잠깐 견디면 되나 종일토록 침묵 속에서 생활하는 것은 부모님이나 아이 모두에게 힘들고 두려운 시간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아이는 어머니와의 대화가 단절되는 순간부터 심한 두려움을 갖게 되고 스스로 잘못을 뉘우치며 동시에 그 침묵을 통해서 어머니도 일시적인 감정에서 벗어나 스스로 반성하는 시간을 갖는다고 합니다.
어릴 때부터 이스라엘의 어린이들은 부모님의 침묵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를 알고 자라기 때문에 아무데서나 투정하지 않으며 더욱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는 일은 거의 없다고 합니다. 대신 이스라엘의 부모님은 아이들을 야단치고 나면 반드시 해가 저서 잠자리에 들기 전에 그 아이를 꼭 품에 안아줍니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는 최고의 표현을 하는 것이죠.

즉 이스라엘의 부모님은
반드시 벌에는 애정이 따라야 한다는 것을 표현해 줌으로서 아이들에게 사랑을 심어주는 겁니다. 이스라엘의 이 이야기는 부모님이 어린이들을 제대로 올바르게 교육한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하나의 예에 속합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가정은 탈무드를 기초로 하여 서로 조화를 이루는 방법과 자녀를 양육해 나가는데 자기들의 역량을 최대한 개발하여 이스라엘 민족의 공동체를 이루어 나가게 합니다.

인 아쉘 나임
(주한 이스라엘 대사 역임. 1992). 유대인 중에서 세계 정상의 예술가나 학자 등이 유난히 많은 것은 타고난 천재가 많은 민족이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교육을 통해 타고난 잠재력을 극대화시키는 데 대한 유대인들의 남다른 관심과 노력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다. 
 


 3. 성경에서 말하는 자녀들의 위치와 교육의 방편.


예수님 이전 시대와
그 당시만 해도 어린이는 여자들과 함께 그 집의 가장의 재산 목록에 들어갔을 뿐 결코 사람으로 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하였음을 역사적 문헌들이 말해줍니다.
당시 로마에는 자기의 자녀들에게만은 인권을 유린해도 누구 한 사람 이 일에 대하여 간섭할 수 없는 절대 부권이 있었는데 이 부권은 가족까지도 마음대로 할 수 있었습니다. 가령 가족을 노예로 팔기도 하고, 쇠사슬에 묶어 일을 시키기도 하고, 심지어 죽일 수도 있었으며, 자녀가 출생하면 아버지 발밑에 놓게 되어있어서 아버지는 그 아이를 보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버릴 수도 있는 것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소외 된 어린 아이들에게도 하나님의 형상이 있음을 인정하셨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나와 동등한 인격을 지니고 있음을 가르치는데 그 말씀이 03절입니다.

03 이르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즉 예수님은 어린이들을 사랑하시며 그들의 중요성을 아셨기 때문에 당시의 어린이들의 생사여탈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생각을 바꾸시면서 어린이들의 순진한 특성이 오히려 천국 시민이 되는 자격임을 제자들 앞에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이 자리에 계신 우리는 어린이에 대한 어떠한 인식을 가지고 어떠한 자세로 신앙교육을 하여야 할 것입니까?

시 127:03 보라 자식들은 여호와의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잠 22:06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가정에 주시는 가장 큰 선물은 자녀들로서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라고 표현 될 정도였습니다. 사실 어떤 재산이나 어떤 명예보다도 자녀들만큼 귀중한 것은 없지 않습니까?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자녀들을 바르게 양육하려고 애를 쓰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부모님이라면 누구나가 다 이와 같은 열망을 가지고 자녀들의 양육을 위하여 헌신적으로 봉사를 합니다만 문제는 그러면 어떻게 양육하는 것이 바람직한 교육인가 하는 점입니다.


엡 06:04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모든 가르침의 기초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아름다운 사랑의 언어가 있다 할지라도 그 기초나 근본이 아름답지 못하다면 그 교육은 헛된 것일 뿐만 아니라 순간적인 방편에 지나지 않습니다. 여기 교양이란 말은 주로 예방의 차원에서 행하는 것이며 훈계는 주로 치료적인 차원에서 행하는 것으로서 교양과 훈계라는 말 속에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부모님이 자녀를 바르게 양육하기위한 교육적인 지침이 담겨져 있습니다.
현대의 부모님들은 많은 지식과 기술을 가르려 주려고 어려서부터 열심히 교육을 시킵니다. 특히 영어의 발음을 좀 더 잘하기 위하여 한국말이 좀 어눌할지라도 멀쩡한 혀를 수술하는 일이 아주 성행해요. 정말 아주 웃기는 세상입니다.

김해삼일교회 성도 여러분!
아무리 많은 지식과 기술을 가르쳐 주어도 그것이 참다운 인간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아십시오. 영혼을 가진 인간으로서 영혼을 개발하지 아니하고는 참다운 인격을 이룰 수 없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있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인간에 대한 근본 이해가 이루어지지 않고는 바른 교육이란 기대하기 어렵겠지요? 우리는 어릴 적 예수님의 모습 속에서 바람직한 자녀상을 찾아보고 이를 목표로 자녀들의 교육을 바르게 행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①우리는 어린 자녀들에게 무엇보다도 먼저 그 영성을 개발시켜 주어야 합니다.(영적교육)

눅 02:40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만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위에 있더라.


이 말씀은 우리에게
자녀들을 하나님께 사랑스러운 아이가 되도록 양육할 것을 가르치고 있으며 자녀들에게 일찍이 그 영성을 일깨워서 아버지와 어머니를 주신 하나님이 계신다는 사실을 알게 하라는 의미입니다. 우리는 영아시절 말을 배우기 시작할 때 제일 먼저 엄마 아빠를 가르칩니다만 그 아이의 진정한 아버지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신 것을 먼저 가르쳐야 합니다.

②우리는 어린 자녀들에게 영적교육과 더불어 도덕 교육을 힘써야 하겠습니다.
눅 02:52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예수님은 자라면서 사람들에게 사랑스러워 가셨다고 하였는데 이 말은 사람들로부터 도덕적으로 부족함이나 흠 잡을 데가 없었다는 뜻입니다. 도덕교육이란 인간관계의 교육으로서 영적인 교육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교육이라면 도덕 교육이란 인간을 사랑하는 교육이라고 하겠습니다.
우리나라가 경쟁사회가 되기 이전까지는 모든 교육이 도덕적 인간을 형성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으나 선진국 문을 두드리는 정보 사회가 되면서부터 교육은 지식인간을 만드는 것을 그 목표로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기중심적인 면으로 탈바꿈하여 지극히 이기주의가 판을 치는 시대가 되었으며 이제 21세기 사회는 점점 더 지식과 기술 지향적인 사회로 급속히 전환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학교교육이 도덕적 인간 형성을 위한 교육으로 바뀌어가기는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은 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러한 현실에서 결국 우리 기독교가 이 사회의 도덕성 향상을 위한 큰 몫을 담당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요?
우리 기독교의 궁극적인 목표는 전인적인 구원을 이루고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데 있지만 또한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은 바로 사람을 변화시켜 도덕적인 인간이 되게 하는데 있습니다.

③우리는 어린 자녀들에게 지혜의 교육을 가르쳐야 하겠습니다.
눅 02:40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만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위에 있더라.


유대인들은 그들의 생활에
있어서 지혜를 우선순위에 두고 살아가는 것은 지혜가 없으면 타락하기 쉽고 그릇되어 그 삶이 전체적으로 악으로 기울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대인들의 교육은 이 지혜를 가르치는데 집중되어 있습니다. 지혜란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올바르게 살도록 이끌어 주는 힘이 아니겠습니까?

잠 03:13 지혜를 얻은 자와 명철을 얻은 자는 복이 있나니 14 이는 지혜를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낫고 그 이익이 정금보다 나음이니라.
약 01:0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유대인의 격언에 배고픈 자에게 생선 한 마리를 주는 대신에 고기를 잡는 법을 가르쳐 주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유대인의 지혜입니다. 삶의 원리를 살필 줄 아는 원리가 바로 지혜이며 이 지혜로 하나님의 뜻을 우리의 삶에 적용해서 살아가는 겁니다. 그러므로 근본적으로 이 세상의 지혜와는 다릅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요즈음 부모님들,
어린 자녀들을 너무 감싸고돌면서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다 돌보아주고 있지를 않습니까? 잘하는 일같이 여겨지기는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좀 삶의 원리를 가르쳐 스스로 적용하여 나가도록 하는 일을 막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어린 자녀들의 삶 전체를 부모님이 대신 살아주려고 하는 일은 제발 삼가십시오. 아무리 자녀들이 좋다 할지라도 일이 있을 때마다 부모님이 나서서 일일이 다 해결해 주려 한다면 이것은 자녀들의 자립심을 막는 결과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녀 교육에서 무엇이 옳고 그른 것이며 무엇이 가장 중요한 것인지 분명한 가치 철학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학식이나 명예보다 사람과의 관계가 더욱 중요하다는 인식을 가지도록 해야 하며 자기보다 남을 개인보다 공동체를 더 귀중하게 여길 수 있도록 유도해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위해 거짓과 욕심과 경쟁과 이기심과 독선과 고집과 분노와 허영을 버리고 진실과 이해와 사랑과 인내하는 사람이 되도록 교육을 해야 합니다. 인성이 정상적으로 자라도록 교육해야 하며 건강한 인성을 갖는 데에 역행하는 행동을 할 때는 근실히 징계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잠 13:24 매를 아끼는 자는 그의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
잠 23:13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하려고 하지 말라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그가 죽지 아니하리라 14 네가 그를 채찍으로 때리면 그의 영혼을 스올에서 구원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