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의 절기로 맞이하는 오늘을 우리는 종려주일이라고 합니다. 사순절(四旬節)의 여섯 번째 주일로서 한 때 이 주일은 호산나주일이라고 불렸으며 이전에 고대 교회에서는 세례 지원자주일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명칭은 부활절주일에 세례 받기를 희망하는 자들이 이 주일에 기독교 신조와 주님의 기도 및 고난의 의미를 배웠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번 주간은 예수님의 고난의 시작과 십자가의 죽음을 생각하면서 우리 성도들은 주님의 고난에 믿음으로 동참해야 하는 주간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롬 05:17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오늘날 교회의 표시와 사랑을 나타내는 표식으로서 사람들은 십자가를 떠올릴 때, 기독교 하면 십자가요 십자가 하면 으레 기독교를 상상합니다. 성도들 역시도 십자가를 매우 자랑스럽게 여겨 목걸이나 반지 기타 성의에 십자가 형상을 새겨 착용하기도 않습니까? 우리나라는 하나님의 은혜로 가장 교회가 많은 나라요 도시마다 거리마다 십자가 탑이 높이 서 있는 것을 보게 되는데 김해지역 어느 곳이든지 밤이면 십자가의 빛이 붉게 빛납니다. 그렇다면 이 십자가가 본래부터 그렇게 멋있는 매력의 형상입니까? 전혀 아니죠. 오히려 사형 도구의 하나로 보면 됩니다. 당시 로마에서는 주로 탈주한 노예, 내란 선동자, 살인자, 반역자 등 죄인들을 괴롭혀 죽이는 일에 사용하였습니다. 특히 팔레스타인 지역에서는 정치적인 폭도들의 소요 억제책으로 십자가형을 집행하는 일이 허다하였습니다.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 37~100)에 의하면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의 잦은 반란과 항거가 일어나자 정치적 소요를 일으켰던 수천 명의 유대인들이 이 십자가형에 처해졌다고 합니다.
마 27:22 빌라도가 이르되 그러면 그리스도라 하는 예수를 내가 어떻게 하랴 그들이 다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23 빌라도가 이르되 어찜이냐?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그들이 더욱 소리 질러 이르되 십자가에 못 박혀야 하겠나이다. 하는지라.
대제사장과 서기관 그리고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다른 사형 법도 많은데 왜 하필이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는 법으로 기소했는가 하는 점입니다. 여기에는 당시의 권력 집행관이었던 로마의 관료들이나 아니면 보통 사람들이 모르는 깊은 의도가 숨어 있었다고 볼 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신명기에 기록된 말씀 때문입니다.
신 21:23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 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만약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는다면 그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자가 됨으로 사람들이 예수님을 더 이상 메시아로 추앙하며 따르지 않을 것이라는 계산입니다. 저들의 계획은 지극히 인간적이요, 악의적이지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그 사건을 통하여 오히려 온 인류를 구속하신 대속의 사역을 완성시키셨음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본래 우리 인간은 아담의 범죄 이후 그 죄 값으로 인해 사망을 당하여만 하는 처지였습니다. 그렇다면 누가 이 사망의 값을 대신 지불하여 해결해 줄 수 있다는 말입니까? 사람의 몸을 입고 오신 하나님 즉 예수님만이 인간의 죄를 대신 속해주실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19 빌라도가 패를 써서 십자가 위에 붙이니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 기록되었더라. 20 예수께서 못 박히신 곳이 성에서 가까운 고로 많은 유대인이 이 패를 읽는데 히브리와 로마와 헬라 말로 기록되었더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곳은 예루살렘 성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골고다(라틴어 갈보리. calvaria)로서 그 십자가의 팻말에는 관례를 따라 죄목을 붙였는데 그 죄목이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고 기록하였습니다. 이렇게 당시의 통용되던 3개국의 언어 히브리 로마 헬라 말로 기록한 것은 유대인이나 이방인 가릴 것 없이 이곳을 지나는 자는 누구나 예수님의 죄목을 읽기 위해서입니다. 그 팻말에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 이라고 쓰였다고 했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 글을 읽는 사람들 가운데 나타난 반응은 그 죄명을 그대로 인정하면서 고개를 끄덕이는 사람도 있었고 반면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못 마땅히 여긴 사람들은 즉시 총독 빌라도에게 거센 항의를 했는데 그때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거짓 증거까지 조작했던 대제사장들의 항의가 가장 거칠었습니다. 그들은 유대인의 왕이라 하지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 그러니까 가짜 왕으로 고쳐 써 달라고 요구하였습니다만 그러나 총독 빌라도는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가 그렇게 죄목에 대해 수정안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은 나름대로의 내린 결론이 예수님은 분명히 유대인의 왕이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야말로 유대인의 진정한 왕이시라는 사실이고, 빌라도와 대제사장들도 표현의 차이는 있었지만 예수님을 유대인의 왕으로 인정한 겁니다.
21 유대인의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라 쓰지 말고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 쓰라 하니 22 빌라도가 대답하되 내가 쓸 것을 썼다 하니라.
예수님이 왕이라는 생각은 요한복음 기자만의 생각이 아니고 마태복음 기자도 역시 예수님을 이 세상의 왕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다윗의 자손으로 오셨고 구약의 예언대로 유대 땅 베들레헴에 나셨으며 왕이 받아야 마땅한 귀한 예물을 동방의 박사들로부터 받으셨음을 기록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나 이 왕의 임무는 세상적인 방식으로 백성들 위에 군림하며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을 죄악에서 구원하여 해방시키는 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이 고난 주간 동안 특별히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며 지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시 한 번 묻습니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는 여러분에게 있어서 그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실제로 여러분의 삶의 주인이 되시며 왕이 되십니까? 이제 성도 여러분은 그 분을 여러분 자신의 왕이라고 고백을 하여야 하며 예수님께서 여러분의 삶 전체를 다스리고 이끌어 주셔야 합니다. 지금까지는 자신이 주인 노릇을 했고, 또 세상의 헛된 우상들을 최고로 여겼지만 이제부터는 예수 그리스도를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그분의 뜻을 온전히 따라 살기를 축원합니다.
롬 05:0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얼마 전 까지만 해도 많은 사람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들고 겉옷을 벗어 예수님이 지나가시는 길에 펴고 호산나 찬송을 부르며 환영을 했었습니다. 그러나 이내 마음이 변심되어, 대제사장들과 하속들이 예수를 보고 소리 질러 가로되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 십자가에 못 박게 하소서(요 19:06) 하는 말을 듣고 그 군중심리에 합류하고 말았습니다. 제자들도 이런 분위기 속에서 침묵만 하다 결국은 도망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속죄의 제물로 오셨기에 사람들이 도망하는 것과는 상관없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셔야 했습니다. 이후 아리마대 요셉이 자신이 묻히기 위하여 미리 준비해 둔 무덤에 장사 지낸 바 됨으로 막을 내렸는데 이제 이것으로 다 끝난 것입니까? 아닙니다. 장사한 지 사흘 만에 부활하심으로서 인해 십자가의 가치와 예수님의 사랑이 빛나기 시작했습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났다는 말입니다.
골 02:14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 아프리카 대륙 북동부에 있는 에티오피아(Ethiopia. 혼혈)라는 나라가 있습니다. 주후 3세기부터 그리스도교를 신봉하는 나라로서 전 인구의 3분의 2가 기독교인이며 매년 세례식 때면 공동으로 세례를 받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나라에는 마스칼이라는 최고의 큰 명절이 있는데 마스칼이란 에티오피아말로 십자가의 재발견이란 뜻입니다. 비록 경제 수준은 낮지만 예수님이 지셨던 십자가를 발견한 날이라고 해서 매년 온 국민이 큰 명절로 지킨다고 하니 그 전통이 얼마나 아름다우며 신앙적입니까? 그에 비해 우리는 어떠합니까? 우리 주위에 십자가는 많이 있지만 진정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과 의미를 잊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십자가 없는 교회는 없지만 십자가 사랑이 살아있는 교회는 얼마나 되겠습니까? 교회 종탑이나 제단에 십자가 마크가 선명하지만 나의 마음, 나의 가정, 나의 교회 생활에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이 진정 숨 쉬고 있습니까? 이 시간 이 자리에 계신 우리 여러분들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뜻을 새롭게 깨달아야만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빌라도가 말한 대로 아무 죄도 없으신 분으로서 머리에는 가시로 엮은 면류관을 쓰고 손과 발에는 못이 박힘으로 인해 찢어지는 고통 속에 죽음을 당하셨음은 바로 나의 죄를 대속(代贖)하시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는 곧 나의 죄의 깊음과 악함을 보여 주는 거울임을 아셔야 합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그 장본인은 다른 사람 아닌 바로 나 자신입니다. 내 죄의 깊음이 예수님을 골고다 언덕에 높이 세우게 했으니 십자가는 죄가 얼마나 무섭고 치명적이며 깊은가를 다시금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탈리아 아시시(Assisi)에서 출생한 성자 프란체스코(Francesco, 1182 ~1226, 10, 03)는 십자가의 사랑을 깨달은 뒤 어느 날 떠오르는 아침 해를 바라보면서, 오, 주님, 제가 죽기 전에 꼭 두 가지의 은혜를 내려 주옵소서. ①먼저 저로 하여금 저의 육체와 영혼이 십자가의 고통을 체험하게 하시고, ②다음에는 예수님께서 우리 죄인을 사랑하신 뜨거운 사랑을 저의 마음속에 간직할 수 있게 하여 주옵소서 라고 기도했다 합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신 하나의 표상으로서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사랑하신다는 무언의 말씀이요, 예수님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증명해 주시는 속성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볼 때 하나님께서 인류를 향하신 크신 사랑의 높이를 우러러보게 되며 십자가야말로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표식임을 알게 됩니다. 반면 십자가를 어리석고 미련한 것으로 보는 사람은 영원히 멸망당하고 영원히 죽을 것이요, 십자가를 구원의 지혜로 선택하는 사람은 참 영원한 삶의 승리를 누릴 것입니다.
고전 01: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마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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