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한 철도 사업가가 임종을 맞게 되었습니다. 그는 수많은 종업원을 거느린 거대한 철도 왕국을 이룩했고 수천만 달러의 돈을 번 사람입니다. 인생을 정리하는 죽음 앞에서 이 사업가 아들의 손을 잡고 이렇게 말합니다.
아들아, 너는 지금 세상에서 가장 비참한 실패자의 손을 붙잡고 있구나. 그때 아들이 대답하기를, 아버지 무슨 말씀을 하세요. 아버지가 실패자라니요.
아버지는 큰 철도 왕국을 건설하셨고 수많은 사람을 고용했으며 수천만 달러를 벌었지 않습니까? 아버지가 실패자라니 당치도 않는 말씀입니다.
그때 사업가는 말하기를, 아들아. 절대 그렇지 않다. 이런 일을 하는 동안에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멀리 떠났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아니한 자는 모두가 실패자다.
그의 말은 옳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인생을 산다면 하나님께서 그에게 어리석은 자여 너는 실패한 자로라고 말씀하실 것이 틀림없습니다.
믿음이 가족 여러분, 한 해를 마무리하는 송년 주일입니다. 앞서 열한 제자를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가룟 유다를 생각해 보는 시간입니다.
가룟 유다는 제자로 부름을 받아 삼 년 동안 화려한 열두 제자의 공동체 안에서 지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알지 못했습니다.
마지막에는 예수님을 은 삼십에 팔고 제 갈 길을 갔습니다. 출발은 좋았으나 마지막 그 삶의 모습이 불행 중의 불행으로 끝났습니다.
저는 열두 제자의 마지막 제자인 가룟 유다의 행적을 살피면서 「불행으로 막을 내린 가룟 유다」라는 제목으로 강론하겠습니다. 함께 은혜받는 귀한 시간 되기를 축복합니다.
1. 가룟 유다(Ἰσκαριώτης Ἰούδας)의 기초 이력서 |
70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의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가룟 유다에 대해서 그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제자가 되었는지에 대한 내용이 성경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 흔적이 조금도 없습니다.
다만 공관복음의 열두 제자 명단에 그의 이름이 등재되어 있고 또 요 12:06에 돈궤를 맡은 자로 소개됩니다. 외형으로는 신뢰를 받는 위치입니다. 그런데도 가룟 유다는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 가운데 큰 의문점을 지닌 인물로 회자(膾炙)합니다.
삼 년이나 따르며 섬기던 스승을 노예 한 사람 가치(출 21:32)에 해당하는 은 삼십에 팔았기 때문입니다. 가룟 유다가 왜 노예 한 사람 가치의 돈에 예수님을 팔게 되었는지 살펴보겠습니다.
가룟(Ἰσκαριώτης)은 이쉬(אִישׁ)+그리욧(קְרִיוֹת)의 합성입니다. 로마의 관리나 로마에 협력한 유대인을 암살하는 유대 혁명가 조직의 명칭입니다.
또 그리욧은 유대 지역에 속한 고을로(수 15:25) 헤브론에서 남쪽으로 약 19km 떨어져 있습니다. 가나안 정복 전쟁 당시 유다 지파가 점령한 남방 지역 중의 하나입니다.
따라서 가룟 유다(Ἰούδας)는 그리욧 사람이란 뜻입니다. 이 명칭은 그의 아버지 시몬에게도 붙어 있으며(요 06:71, 13:26) 뜻은 찬양이라는 의미입니다.
요 06:71 이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키심이라 그는 열둘 중의 하나로 예수를 팔 자러라.
구약에서 유다(찬양)는 야곱의 넷째 아들입니다(창 29:35). 그러나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판 이후 오늘날은 유다라는 이름을 짓는 자는 거의 없습니다. 한 사람의 자취가 얼마나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것인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좀 더 이 가룟 유다에 대하여 신앙 차원에서 그의 모습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가룟 유다에 대하여 말할 때 믿다가 타락한 사람이라는 말을 종종 합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믿다가 타락한 사람이 맞느냐? 말입니다.
가룟 유다는 잘 믿다가 타락한 사람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믿음의 자리에 들어온 사람이 아닙니다. 그 증거로 요 06:64, 70절을 들 수 있습니다. 이런 내용입니다.
요 06:64 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하시니 이는 예수께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며 자기를 팔자가 누군지 처음부터 아심이러라. (70 …한 사람은 마귀니라).
비록 삼 년 동안 주님의 지도를 받으며 제자들과 함께 어울리는 생활을 하였습니다. 실제 그는 신앙의 환경에 동참했던 것뿐입니다.
겉보기에는 주위의 시선을 받을 만한 유력한 인물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내면의 세계에는 주님을 알지 못하는 불신앙의 모습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요 12:06 절에 의하면 가룟 유다가 돈궤를 맡은 자라고 설명합니다. 그만큼 계산력과 상황 판단력이 뛰어났다는 말로 받을 수 있습니다.
가룟 유다는 외형으로는 요한 외에 대부분 제자가 신뢰하였습니다. 주님께서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요 13:21, 22) 하셨을 때 제자들은 한결같이 나입니까? 하고 묻기만 했습니다.
그 누구도 가룟 유다를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겉과 속이 다른 위선자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누가 감히 돈궤를 맡겼겠습니까?
우리는 가룟 유다의 삶의 결말을 알고 난 후에 그가 악한 자임을 알았습니다. 다만 당시 상황에서는 그의 간교함이 드러나지 않았기에 오히려 신뢰하였습니다. 훗날 사도 요한이 요한복음을 기록하면서 가룟 유다에 대하여 그 정체를 도둑이라고 밝혔습니다(요 12:06).
2. 가룟 유다에 대한 주님의 평가 |
마 26:24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가끔 주변 사람 중에는 가룟 유다에 대한 예찬론을 펴는 일이 있습니다. 정말 인정을 할 만한 인물인지 24절 말씀으로 진단하겠습니다.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일에 쓰임을 받았다고 해서 인간의 책임이 없어지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예정된 대로 십자가에서 대속의 죽임을 당합니다. 그러나 자기의 자유 의지를 따라 주님을 판 자의 죄는 결코 면제될 수 없습니다.
가룟 유다는 결국 자기가 한 일로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 형벌은 주님의 말씀처럼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뻔한 형벌을 맞이하였습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판 배신에는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책임이 관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구속사의 효력을 발생시킵니다. 그러나 인간의 책임은 악한 마귀의 유혹에 넘어간 잘못에 대하여 자기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 사람은 차라리 태어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제게 좋을 뻔하였느니라. 이는 당시 랍비들이 흔히 사용하는 속담의 표현입니다(욥 03:02, 10, 11).
예수님께서 가룟 유다의 앞날이 불행하게 될 것을 아시고 하신 말씀입니다. 배신자의 자리보다 차라리 세상 빛을 보지 않는 것이 더 좋다는 뜻입니다.
가룟 유다를 향한 폭탄선언은 함께 있는 제자들로서는 얼마나 충격 되는 일입니까? 이런 선언에도 가룟 유다는 반역 의지를 실천하기 위하여 밖으로 나갔습니다(요 13:30).
이제는 돌이킬 수가 없는 현실이 된 가룟 유다입니다. 나도 가룟 유다의 흔적을 거울삼아 혹 그렇게 되어가는 것은 아는지 자기를 살펴야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한평생 삶의 흔적을 세상에 남기고 가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같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삶에 대하여 주위에서 때가 되면 평가해 줄 때가 옵니다. 그 삶의 평가는 길이길이 후손들에게 전해질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주님의 평가가 중요합니다. 나에게 주어진 삶을 정말 조심스럽게 관리하십시오. 많은 사람의 유익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을 잘 살아야 합니다.
3. 가룟 유다가 왜 예수님을 팔았습니까? |
요 12:06 이렇게 말함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함이 아니요. 그는 도둑이라 돈궤를 맡고 거기 넣는 것을 훔쳐 감 이러라.
먼저 가룟 유다가 제자단에 선택된 이유부터 보겠습니다. 마 26:24절에(막 14:21) 의하면 예수님은 이미 가룟 유다가 자기를 팔 것을 아셨습니다.
그런데도 밤새워 기도하신 후(눅 06:12) 제자로 선택하셨습니다. 지상 교회에는 영원히 가룟 유다와 같은 인물이 존재할 것을 이르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모든 일을 통해 그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악한 요소까지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롬 08:28) 일에 사용하십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은 삼십에 팔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당시의 정치적 상황을 토대로, 여러 가지 측면에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①돈을 사랑하였기 때문입니다.
가룟 유다에 관한 성경의 말씀을 보면 분명히 물질에 대한 탐욕을 지닌 사람입니다. 성경은 물질에 대하여 일상생활의 필요 수단으로 인정합니다.
그것이 사람에게 있어야 함을 말합니다. 그러나 그 필요 수단이 목적 수단으로 바뀌면 안 된다는 점을 솔로몬도 밝히고(잠 23:04~05) 바울도 밝힙니다.
딤전 06: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가룟 유다는 요 12:06에 의하면 돈궤를 맡은 자로서 언제부터인가 그 마음에 물욕이 싹트기 시작했습니다. 이를 우리는 견물생심(見物生心)이라 합니다.
외형으로는 전혀 의심을 받지 않는 칭찬의 대상이었지만 물욕에 빠지면서 두 얼굴의 사람으로 서서히 바꾸어져 갔습니다.
지킬 박사와 하이드처럼 두 얼굴을 가진 사람이 되어갔다는 말입니다. 가룟 유다 이 사람은 물욕에 눈이 어두워졌습니다. 돈궤를 맡으면서 거기 넣어 둔 것을 빼내는 일을 하였습니다.
물론 장부상으로는 당연히 아무 이상 없도록 조작해 놓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작은 욕심을 키워가다 마침내 예수님을 파는 일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옛말에 바늘 도둑 소도둑 된다는 말 그대로입니다. 작은 탐욕이 마지막에는 예수님을 파는 욕심으로 바뀌었습니다. 겉으로는 구제 대상자를 생각하는 듯한 발언을 하면서 말입니다.
요 12:04 제자 중 하나로서 예수를 잡아 줄 가룟 유다가 말하되 05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 하니.
도둑의 심보를 감추려고 가면을 쓴 그 모습은 사람은 속여 넘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속일 수 없습니다. 그리하여 성령님은 사도 요한을 감동하여 기록하기를, 가룟 유다야말로 물욕에 빠져 돈을 사랑하는 자라고 밝힙니다.
가룟 유다가 애초 주님을 팔거나 배반할 생각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돈궤를 맡아 관리하다 보니 조그만 욕심이 잉태하여 결국은 사망을 낳았습니다.
약 01: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②지방색의 갈등에서 오는 소외감 때문일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이 말하는 완벽한 근거는 아닙니다. 다만 당시 사회의 상황을 추측해 봄으로 상상해 볼 수 있는 일입니다.
제자들 가운데 일곱 명은 소위 갈릴리 어부파입니다. 그들이 우세한 세력권을 형성하였습니다. 반면 가룟 유다는 남방 출신 비 갈릴리인입니다.
갈릴리인들은 자연스러운 동질 의식이 형성되었습니다. 그중에서도 어부파인 베드로, 야고보, 요한이 선두 그룹이었음은 잘 아실 것입니다.
거기다 극성맞은 세베대의 아내 살로메는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해 달라고 청탁하는 치맛바람을 일으켰습니다(마 20:20).
이런 일들은 서로 간에 경쟁 심리를 가져왔습니다. 이에 따라 가룟 유다는 점점 열두 제자 중에서 점점 소외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은 소외되기 시작하면 전혀 예상치 않은 일을 벌이는 때가 발생합니다. 가룟 유다 역시 이런 지방색에서 오는 소외감이 반발로 변하여 주님을 팔지 않았을까요?
신앙인의 모임에는 지방색 운운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일로 마음 상하는 일 일어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 안에서 한 형제입니다(복창).
1. 사랑하는 주님 앞에 형제자매 한 자리에 크신 은혜 생각하여 즐거운 찬송부르네. 내주 예수 본을 받아 모든 사람 내 몸같이 환난 근심 위로하고 진심으로 사랑하세. 2. 사랑하는 주님 앞에 온갖 충성 다 0바쳐서 괴로우나 즐거우나 주님만 힘써 섬기네. 우리 주님 거룩한 손 제자들의 발을 씻어 남 섬기는 종의 도를 몸소 행해 보이셨네. 3. 사랑하는 주님 예수 같은 주로 섬기나니 한 피 받아 한 몸 이룬 형제여 친구들이여 한 몸같이 친밀하고 마음조차 하나 되어 우리 주님 크신 뜻을 지성으로 준행하세. |
③마음을 잘 관리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요 13:02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가룟 유다가 세상 생각에 사로잡혀 갈등할 때 마귀가 접근했습니다. 예수님을 팔아 버리는 것이 어떤가? 하는 생각을 슬쩍 뿌렸다는 말입니다.
가룟 유다가 가만히 있는데 마귀가 찾아왔다는 말입니까? 마귀가 들어와서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가룟 유다가 마음의 창을 열어놓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마음을 세상으로 열어놓는 일이야말로 마귀가 제일 좋아하는 마음입니다.
마귀가 마음에 들어왔어도 이내 마음을 정돈하여 파괴적인 마음을 정리하였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가룟 유다는 그런 생각을 물리치지 않고 오히려 배반해 버릴까? 팔아 버릴까? 하는 물욕의 마음을 계속 유지하였습니다.
씨앗은 뿌려지면 때가 되면 싹이 나고 자라게 마련입니다. 이미 가룟 유다의 마음에 뿌려진 악한 생각의 씨앗은 무서운 악의 열매를 맺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도 가룟 유다는 그런 부정적이며 파괴적인 씨앗을 마귀가 자기의 마음에 심어놓은 사실을 그다지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우리도 믿음 생활을 하는 동안 마귀가 주는 부정적인 생각이 우리의 마음을 수없이 드나듭니다. 불신앙의 함정을 수없이 펼쳐 놓습니다.
가룟 유다는 마귀의 흥정에 계속 마음의 문을 열어놓고 있었습니다. 결국은 마귀가 온전히 자리를 잡아 파멸의 길로 이끌어갔습니다.
요한복음 13:02 이후를 읽어가면서 02절과 27절을 비교해서 보겠습니다.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됩니다. 제가 성경 구절을 읽어 드립니다.
요 13:02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27 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간 지라.
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갔다는 말씀을 보십시오. 조각은 최후의 만찬에서 예수님께서 이 떡을 받는 자가 나를 팔 것이라고 하실 때의 조각입니다. 이 떡 조각을 받은 순간은 가룟 유다가 예수님께로 돌아올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습니다.
이때 가룟 유다가 선생님, 제가 선생님을 팔 생각을 했습니다.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하고 고백하였더라면 역사는 달라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떡 조각을 받은 가룟 유다의 마음은 오히려 강퍅하여 배신의 결의를 굳히고 맙니다.
마귀가 처음에 가룟 유다 마음에 예수님을 팔면 어떨까? 하는 생각 정도의 씨앗만 심었습니다. 그러자 가룟 유다가 이 생각을 방치하였습니다.
마침내 그 생각이 예수님을 파는 쪽으로 서서히 기울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사탄이 들어가서 완전히 그 마음을 지배하였습니다.
이제는 모든 인격이 마귀 지배에서 움직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보셨기 때문에 일찍이 가룟 유다를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 06:70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의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믿음의 가족 여러분, 지금 내 생각을 어떻게 관리합니까? 내 생각은 얼마나 건강합니까? 내 마음에 뿌려지는 마귀의 생각들을 제거하고 있습니까? 이 일에 실패하면 사탄에게 내 존재 자체를 내어주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탄을 향해 마음 문을 굳게 닫으십시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창문으로 기도합시다. 말씀과 더불어 살도록 하나님과 신령한 관계를 잘 유지합시다.
행 16:14 두아디라 시에 있는 자색 옷감 장사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루디아라 하는 한 여자가 말을 듣고 있을 때 주께서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의 말을 따르게 하신 지라.
루디아는 하나님을 향하여 나름의 열린 믿음의 창문이 있었습니다. 주님은 그 마음을 열어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받게 하셨고 결과는 빌립보교회가 태어났습니다.
④예수님을 정치의 메시아로 잘못 이해함으로써 오는 실망감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일에 대하여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속량 물로 주려 함이라(막 10:45) 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하늘로서 내려온 생명의 떡으로서 그 떡을 먹는 자만이 영생을 얻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많은 사람이 이 말씀은 정말 어렵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하는 무지(無知)를 드러내었습니다(요 06:58~60).
그런데도 계속 사람들이 예수님께로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이유는 예수님께서 로마의 포악한 정치에서 이스라엘을 독립시키고 민중의 굶주림을 해결해 주실 분으로 믿었기 때문입니다.
정치의 메시아로서 활발한 활동을 기대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와 요한을 주님의 나라 좌우편에 앉게 해 달라는 그의 어머니 살로메의 치맛바람이 일어났던 것 아닙니까?
가룟 유다 역시 주님의 제자로 부름을 받기 전 로마로부터의 이스라엘을 독립하기 위한 열심당과 같은 계열에 소속하여 일하였습니다.
그가 태어난 곳이 가룟 즉 그리욧이라고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이 가룟이라는 지명을 상당수의 학자는 사마리아 땅의 시카리우스(Ἰσκαριώτης)와 연관합니다.
라틴어로 이 시카리우스는 자객(刺客)이라는 뜻입니다. 열광적인 국가주의자로서 로마인을 대항하여 싸우고 요인들을 암살하는 단체 이름입니다.
가룟 유다는 주님 제자로 부름을 받을 때 자기가 몸담고 있던 민중 해방의 단체를 지도해 줄 정치 메시아로 알고 따랐습니다.
열심당 같은 의지로 주님 따르며 국가 독립을 기대했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가룟 유다가 생각하는 정치 메시아로 발돋움할 기회를 두 번이나 무산시켰습니다.
①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한 군중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세우려는 중요한 기회에서 혼자 산으로 피신하신 때입니다(요 06:09). ②나귀를 타고 예루살렘 입성하신 직후 혁명가로 지지를 받아 용맹한 왕으로 부상(浮上)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반대로 십자가를 향해 최후의 발걸음을 걸으셨습니다. 이런 현실에서 가룟 유다는 자기가 믿고 따른 예수님에게서 그 정치 야망을 기대할 수 없음을 알았습니다. 그러자 주님께 기대한 마음이 실망으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가 기대한 분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결국, 가룟 유다의 불행은 예수님을 그리스도가 아닌 세상 정치 목적을 기대했기 때문에 배신하게 되었습니다.
정치 현상만 보고 주님을 따른 가룟 유다는 한 번도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거나 호칭해 본 적이 없습니다. 항상 예수님을 훌륭한 랍비로 알고 불렀습니다. 가룟 유다는 신령한 주님을 모시고 지내면서도 신령한 눈이 감겨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판 그 행위를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듭니까? 내 마음에 품고 있는 세상 기준으로 예수님을 믿으려 합니까? 그러면 가룟 유다와 같은 길을 갈지도 모릅니다.
가룟 유다가 십자가 없는 영광의 예수님만 바라보았듯이 우리도 그런 신앙의 오류가 많이 있습니다. 그런 것들을 지금 수정하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계속 세상 것을 기대하고, 십자가 지는 것을 싫어합니까? 가룟 유다의 허물이 바로 나의 허물로 자리 잡을 수 있습니다.
교회 생활에 혹 익숙해져 있습니까? 주님을 가까이할수록 주님의 뜻을 잘 분별해야 합니다. 그러한 삶을 살지 못하면 아무리 예배당을 출입해도 생명의 길은 멀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
은혜의 자리에 참여하고도 마지막엔 제 곳으로 간 가룟 유다, 그는 사람의 관점으로 볼 때는 존경스럽고 흠모할 만한 자리에 있었습니다.
귀한 사도의 자리로 부름을 받았고, 주님의 권능을 힘입어서 병을 고치는 치유의 은사와 귀신을 쫓아내는 능력도 행하였습니다.
또 삼 년이나 주님과 동고동락하면서 주님의 거룩한 성찬에도 참여했습니다. 그런데 천국을 향한 모든 좋은 자리의 앞에까지는 왔다가 그 자리를 차고 나가버렸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많은 사람이 충성의 자리에 있습니다. 하늘나라에 상급을 차곡차곡 쌓아 가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다가도 자기의 뜻대로 잘 안되면 교회 문을 박차고 나갑니다.
그래서 바울은 누구든지 선 줄로 생각하거든 넘어질까 조심하라고(고전 10:12) 했습니다. 주님을 떠나간 자 가룟 유다의 길이 어찌 되었습니까?
흔히들 말하는 잘 먹고 잘살았습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양심의 가책을 받아 은을 성소에 던져 놓고 물러가서 스스로 목매어 죽었습니다(마 27:05). 이후 목을 맨 끈이 떨어져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흘러나왔습니다(행 01:18).
그 후 베드로가 결원된 제자 한 명을 선택할 때 공동의회를 개최하여서 한 말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기억하십니까? 이 가룟 유다의 삶에 대하여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행 01:25…. 유다는 이 직무를 버리고 제 곳으로 갔나이다. 하고.
무슨 뜻입니까? 믿음의 자리에 들어오지 않고 자살을 택한 가룟 유다는 지옥에 갔다는 말입니다. 그 외에 더 무슨 말이 필요합니까? 가룟 유다가 택한 그 길이 처음에는 득의 하는 길처럼 보였으나 결국은 파멸의 길입니다.
'은혜의 강단 > 2008년 말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는 너그러운 믿음입니까? (행 17:10~15) (0) | 2021.02.18 |
---|---|
예수님을 맞이한 사람들을 보십시오.(마 02:01~12) (0) | 2008.12.25 |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억하십니다(창 08:01~05). (0) | 2008.12.20 |
[열두 제자 ⑪시몬] 열심당 시몬(눅 06:12~16). (0) | 2008.12.13 |
[열두 제자 ⑩다대오] 자기를 감추며 산 유다 다대오(요 14:22~24). (0) | 2008.09.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