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단/2026년 말씀

섬기는 곳에는 내가 있습니다(막 10:32~45).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26. 4. 11. 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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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 버지니아주 린치버그 출신 데스몬드 토마스 도스(Desmond Thomas Doss(1919.2.7.~2006.3.23.)의 전투 참여 이야기입니다. 토마스 도스는 미 육군(U.S. Army) 77 보병사단 소속 상병으로 안식일교 신봉자였습니다.

이 교파의 신실한 사람 중 남자들은 살인을 금하는 계명을 문자대로 지키는 일에 집중합니다. 그래서 일반 기독교인과는 달리 집총(執銃)을 거부합니다.

우리나라도 여호와 증인과 안식일교 소속 징집병은 본인이 양심적 병역거부자로 선언하면 대체복무를 통하여 병역 의무를 하게 합니다.

토마스 도스 상병이 위생병 임무를 맡아 투입된 곳은 일본군과 치열하게 싸우는 오키나와의 핵소 고지(Hacksaw Ridge) 절벽이었습니다. 전투는 참혹했고 많은 병사가 상처를 입고 절벽에 방치되어 죽어갔습니다. 모두가 철수한 밤에 도스는 혼자 그 전장으로 올라갔습니다.

 

총도 없고, 보호구도 없이, 쓰러진 병사들을 한 명씩 찾아서 밧줄로 묶어 절벽 아래로 내려보냈습니다. 그는 한 명을 구할 때마다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한 사람만 더 구하게 해 주세요. 이렇게 기도하며 밤새도록 수고하여 75명의 생명을 죽음에서 구하였습니다. 이 일로 토마스 도스는 1945년 미국 34대 대통령 해리 S. 트루먼(1884.5. 8.~1972.12.26.)으로부터 최고 훈장 명예훈장(Medal of Honor)을 받았습니다.

그때 트루먼 대통령이 나는 이 훈장을 수여하는 일보다 당신 이야기를 듣는 것이 더 영광스럽습니다. 라고 하자 토마스 도스가 말합니다. 나는 영웅이 아닙니다. 그저 섬겼을 뿐입니다.

 

유앤아이교회 가족 여러분, 물질이든지, 힘이든지, 혹 재능이든지, 기술이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이웃을 위하여 섬기는 일에 활용할 때 즐거움이 옵니다. 사실 대부분 사람은, 섬기는 일보다 섬김받는 일을 더 좋아합니다.

혹 밤이나 낮이나 계속 섬김을 받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성숙하지 못한 갓난아기입니다. 이 갓난아기는 늘 섬겨 주어야 합니다. 엄마의 섬김, 아빠의 섬김, 언니의 섬김, 할머니의 섬김 등 항상 보살펴 주어야 합니다.

날마다 꼼짝을 하지 않고 드러누워서 먹여 달라, 입혀 달라, 기저귀 갈아 달라고 울고 징징거립니다. 심지어는 자다가 깨어서도 섬김을 요구합니다.

제대로 성숙하지 못했기에 섬김을 받으려고 합니다. 반면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는 섬기는 일을 좋아합니다. 저는 말씀을 준비하면서 저와 우리 믿음의 가족이 더 잘 섬기는 자리에 이르게 해 달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리고 말씀 제목을 섬기는 곳에는 내가 있습니다.로 정했습니다.

 

 

1. 섬기는 자는 으뜸의 자리를 차지합니다.

 

43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44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섬김이라는 단어는 주로 교회에서 사용합니다. 사회에서도 기독교인이나 기독교인 사업장에서 이 단어를 많이 사용하지, 사회인은 관심 밖의 일입니다.

우리가 섬김이라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듣게 될 것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많이 들었고, 사회에서도 많이 들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이 단어를 자주 듣다 보니 그만 섬김의 진정한 가치를 잃고 살 때가 있습니다. 섬김, 이거 좋은 말입니다. 섬김은 믿음의 향기입니다. 우리가 회복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여러 교회가, 여러 사람이 세상을 변화시키자. 능력을 보여주자. 이런 단어와 문구를 펼칩니다. 과연 세상이 변했습니까? 힘을 보여주었습니까? 저는 솔직히 이런 거창한 말을 하는 것이 부담스럽습니다. 그런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세상을 품자. 이런 일은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변화시키자. 보여주자 보다는 모든 것을 품고 섬기는 일이 복음의 실체입니다. 예수님 사랑의 본질입니다.

 

제가 섬김이라는 단어를 주제로 말씀을 준비하면서 엄청난 압박이 왔습니다. 여러분에게 섬기라고 말하기 전에 내가 먼저 섬김의 본을 보여야 하는데 그렇게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섬김을 말하는 자체가 오히려 가식적인 모습만 드러납니다.

그러고 보면 목사가 정말 이중인격자이고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성도에게 설교하기 전에 먼저 실천하여야 하는데 그게 잘 안되니 그저 민망할 뿐입니다.

그런데도 섬김이란 설교를 하는 것은, 예수님께서 섬김을 본으로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섬김은 예수님의 가치관이며 동시에 우리가 행할 삶의 도리입니다.

 

예수님은 섬김을 통하여서 제자들의 으뜸 되고자 하는 교만을 절제시켰습니다. 본문 흐름을 보면 이미 제자들 사이에 누가 더 크냐는 논쟁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을 세상의 메시아로 판단하여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려는 전략도 볼 수 있습니다.

그 전략이 야고보, 요한이 어머니 살로메를 앞세워 메시아 왕국에서 오른쪽 자리 왼쪽 자리를 차지하겠다는 청탁입니다(10:35~37).

그러자 예수님께서 42절의 집권자들 모습을 제자들에게 들려주시면서 훈계하십니다. 이들은 섬김을 받는 사람들로 바깥 사회에서 언제나 말로만 호령하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에서는 얼마나 많은 사람을 부리는가?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 사람을 섬겨 주는가를 기준으로 그 사람의 높낮이를 평가합니다.

 

성경은 으뜸이 되는 사람의 기준을 밝힙니다. 자기를 섬기는 사람을 얼마나 많이 거느리고 있는가가 아니라 내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섬기는가가 기준입니다.

크고자 하는 자와(43). 으뜸 되고자 하는 자(44)는 히브리인들 언어 용법으로 같은 내용의 반복 표현입니다. 크다. 으뜸이 되다. 라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사람들 속에서 돋보이려는 마음 자세를 말합니다. 제자들 사이에 누가 크냐? 라는 논쟁과 다툼을 놓고 예수님께서 여러 번 경고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삼 년이나 으뜸 논쟁을 하였습니다.

 

막 09:35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사람의 끝이 되며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43절에서 섬기는(διάκονος) 자는 초대교회 시절 집사(διάκονος)로 번역되었고(딤전 03:08), 44절의 종은(δολος) 당시의 종의 제도에서 이해하여야 합니다. 으뜸 되는 사람 되기를 원합니까? 그러면 종의 위치로 내려가십시오. 거기서 섬기는 일만 하면 됩니다.

 

 

2. 예수님은 섬김을 본으로 보여주셨습니다.

 

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믿음의 가족 여러분, 어떤 사람을 성공한 사람이라고 말합니까? 많은 사람을 찐하게 섬기는 사람입니다. 교회에는 이런 낮아진 사람이 참여하여야 합니다.

그리하면 그 일은 대단한 가치가 있습니다. 세상은 힘과 성공 언어로 소통합니다. 반면 하나님 나라는 섬김의 언어로 소통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이런 말씀을 하십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함이라고, 우리에게 매우 익숙한 말씀입니다.

인자는(ὁ υἱὸς τοῦ ἀνθρώπου)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표현하는 또 하나의 칭호입니다. 의미는 고난받는 종, 섬기는 종, 영광을 받으시는 분(13:26) 이런 뜻입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을 왜 인자로 표현합니까?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을 정치 메시아로 기대했으므로 이런 오해를 피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의 정체성을 점진적으로 계시하기 위해서입니다.

 

45절은 예수님께서 섬김을 받으러 오시지 않았음을 강하게 선언합니다. 오히려 섬기러 오셨다고 강하게 선언합니다. 아멘입니까?

사람이 모여 있는 곳에는 모두가 높아지기를 원합니다. 대접받기를 원합니다. 교회에서 목사 장로를 비롯한 중직자일수록 섬김받기를 기대합니다. 겉으로는 겸손한 척을 해도 실제는 교묘하게 자기를 포장하여 섬김받으려고 합니다.

자리가 높아질수록, 경력이 쌓일수록, 나이가 들수록, 더욱 알아주기를 기대합니다. 그러나 가장 높으신 예수님은 가장 낮은 자리에 섬기려고 오셨습니다.

세상은 올라가라고 하지만, 예수님은 내려오라 하십니다. 세상은 군림하라고 하지만, 예수님은 섬기라고 하십니다. 세상은 자기를 드러내라고 하지만, 예수님은 자기를 내어주라고 하십니다.

 

섬기는 일은 예수님의 여러 사역 중 하나입니다. 섬김은 예수님의 성품을 드러내는 방식입니다. 섬김의 마지막은 자기를 내어주심입니다.

이 점이 중요합니다. 섬김은 약함이 아닙니다. 비굴함도 아닙니다. 사람에게 끌려다니는 일도 아닙니다. 사랑으로 자기를 내어주는 일입니다.

섬김은 오직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 풍기는 성품입니다. 이 성품을 놓치면 섬김은 피곤해집니다. 왜 나만 섬깁니까? 왜 아무도 알아주지 않습니까? 라는 소리가 나옵니다.

여기서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알아주는가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성품을 어떻게 나타내느냐? 입니다.

 

섬김을 실천하는 사람과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삶의 질과 가치관이 다릅니다. 섬김은 신앙인에게 성숙하고 고상한 삶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섬김을 얼마나 많이 받으셨습니까? 아니면 얼마나 많이 섬기셨습니까?

섬김받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조금만 서비스가 모자라도 불평합니다. 반면 종의 위치에서 섬김의 자리를 지키는 사람은 여간 잘못된 일이 있어도 불평하지 않습니다.

섬김은 자기 비움입니다. 사람이 몰라주어도 전혀 개의치 않습니다. 칭찬이 없어도 서운해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끝까지 배신할 유다의 발도 씻기셨고, 부인할 베드로도 품으셨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섬김이 흔들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섬김의 원인을 상대방에게 찾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이 고마워하면 더욱 섬기겠다고 하는 것은 섬김이 아닙니다. 사랑도 아닙니다. 거래일 뿐입니다.

 

 

3. 예수님의 섬김 마지막은 십자가입니다.

 

45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代贖物)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대속물(λύτρον 뤼트론)은 종이나 전쟁 포로에게 자유를 주기 위하여 누군가가 대신 몸값을 치르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섬기는 일을 통해 만족을 누리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한다는 부분을 보십시오.

예수님 섬김의 절정은 발 씻김이 아닙니다. 오병이어도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대속물은 단순히 주고받는 거래를 말하지 않습니다.

죄 아래 있어서 스스로는 벗어날 수 없는 영혼의 포로 상태를 해방하는 구원입니다. 예수님의 섬김 마지막 지점은 희생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희생입니다. 이 지점이 섬김의 최고봉입니다. 우리의 섬김은 단순한 베풂이 아니라 주님처럼 자기를 내어주는 사랑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의로워 구원의 은혜를 베푸시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의 자리에 있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빚진 자이고, 우리가 구원의 자리에 스스로 이를 수 없기에, 십자가로 섬겨 주셨습니다. 피 흘림으로 섬겨 주셨습니다.

 

딤전 02:06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대속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러 주신 증거니라.

 

참된 섬김은 먼저 자기를 낮추는 일에서부터 시작하여 마지막에는 십자가까지 갑니다. 우리가 혹 으뜸을 품었습니까? 그러면 으뜸을 비어야 합니다.

하나님, 제가 섬긴다고 말은 했지만, 사실은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하나님, 제가 봉사한다고 말은 했지만, 사실은 저의 의를 쌓고 있습니다.

하나님 제가 말만 낮아진 척하였지 제 안에는 여전히 높아지려는 마음이 있습니다. 저의 인간적인 생각을 정돈하여 주님처럼 십자가 지기를 원합니다. 이런 고백을 해야 합니다.

 

믿음의 가족 여러분, 이것 하나 아셔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는 신앙의 길은 성공의 길이 아니라 섬김의 길입니다. 이 길이 고되지만, 여기에서 하나님 나라가 확장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은 사람을 섬겨 주시기 위함입니다.

섬김의 최고봉은 우리를 죄에서 속량하시려고 자기의 몸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일입니다. 예수님의 삶의 목표가 그럴진대 그 섬김을 우리도 삶의 목표로 삼아야 합니다.

그러면 그 섬김이 희생의 자리에 이를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의 섬김은 나를 구원의 자리로 이끌었으니 나도 섬김을 주님의 십자가 희생처럼 실천해야 합니다.

 

갈 05: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

 

섬김은 행동이기보다 몸에 배어 있는 향기이어야 합니다. 섬김은 복음의 향기와 같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삶이 세상에서 예수님을 드러내는 방식입니다.

예수님의 섬김은 값을 치른 섬김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섬김이 계속 힘든 이유는 십자가의 희생처럼 나를 내어놓지 않기 때문입니다.

유앤아이 가족 여러분, 나의 작은 섬김으로 사람을 살릴 수 있고, 무너진 영혼을 일으킬 수 있고, 누군가의 인생도 바꿀 수 있습니다. 섬김은 하나님의 구원이 흘러가는 통로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대부분 교회가 주일에는 교회에서 점심을 준비합니다. 남자도 부엌에서 섬기는 일을 합니다. 이왕 섬기는 자리에 들어왔으면 놀랄 정도로 섬기십시오. 앞서 말씀드렸지만 늘 섬김을 받는 사람은 어린아이이고 어른은 섬기는 일을 합니다.

제가 다시 거론하는 것은 어린아이 짓 하지 말자는 뜻입니다. 서로서로 섬기라고 했으니 믿는 어른들, 아이들 모두가 섬기는 모습을 보이십시오.

특히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섬기는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내가 편할 때는 누군가가 불편함을 견디고 있는 줄을 아십니까? 내가 조금 불편할 때 누군가는 편안하지 않겠습니까? 섬김은 서로 하여야지 일방이면 결국 불편이 나옵니다.

 

선글라스가 필요한 계절을 맞았습니다. 검은색 선글라스를 사용하면 온 세상이 검게 보이고, 파란색 선글라스를 사용하면 하늘이 파랗게 보입니다. 우리 믿음의 가족은 어떤 안경을 끼고 있습니까? 세상을 어떻게 바라봅니까?

섬김의 안경이어야 합니다. 이 신령한 안경을 쓰고 세상을 보면 섬김의 현장이 보입니다. 섬김은 예수님을 닮아가는 통로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왜 섬김의 자리를 피합니까? 왜 섬김의 현장에 자리를 잡지 못합니까? 이유는 단순합니다. 예수님의 섬김을 충분히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섬김은 억지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구원받은 감격으로 됩니다. 자랑이 아닌 감사로, 의무감이 아닌 복음의 감격으로 실천합시다. 섬김은 예수님과 가장 가까운 자리입니다.

 

요 13:14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17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