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스탠퍼드 대학교(Stanford University 캘리포니아주(州) 팰러앨토에 있는 사립 종합대학교)를 세계 최고급 명문대학교로 인정합니다.
이 학교는 1891년 리랜드 스탠퍼드(Leland Stanford, 1824~1891)가 설립하였습니다. 설립자 스탠퍼드는 캘리포니아 출신 상원의원으로 상당한 부자였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잘생긴 수재(秀才) 외아들이 죽었습니다. 이 일로 장례식을 치르는 동안 극도의 슬픔에 잠겨 있는데 꿈에 아들이 생생한 모습으로 나타나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버지, 저는 지금 부활하신 예수님 곁에 있습니다. 저 대신 청년들을 도와주세요. 스탠퍼드는 이 환상을 보고 난 후 인생관이 바뀌었습니다.
예수님도 살아 계시고, 내 아들도 살아있구나. 그리하여 스탠퍼드는 아들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하여 믿음으로 청년 교육에 온 힘을 기울였습니다.
당시에는 거액인 2천만 달러를 기부하여 학교를 설립하고 어려운 학생들을 돕는 일에 집중하였습니다. 이 학교가 바로 그 유명한 스탠퍼드 대학교입니다.
스탠퍼드가 임종하면서 이런 유서를 남겼습니다. 나의 재산은 하나도 남기지 말고 청년 교육에 사용하여라. 얼마나 멋진 유언입니까? 부활의 주님을 만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유앤아이교회 가족 여러분, 오늘은 2026년 부활주일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주일입니다. 미지근한 믿음을 뜨겁게 회복하는 복된 주일입니다.
설교가 아무리 유창하여도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예수님이 보이지 않습니까? 부활하신 예수님이 보이지 않습니까? 그러면 복음이 아니라 그냥 소리입니다. 오늘 말씀 주제는 예수님과 마르다의 대화에 관한 일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예수님, 부활하실 예수님을 나타내 보이는 대화입니다. 이 말씀을 따라서 「부활을 안내하시는 예수님」 이런 제목으로 강론하겠습니다.
| 1. 예수님께서 부활 사건을 미리 안내하십니다. |
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오늘 말씀을 잘 보십시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일과 사흘 만에 부활하실 일을 통하여 부활의 세계를 안내하십니다.
먼저 오늘 말씀의 전후 사정을 보겠습니다. 본서의 저자 요한은 예수님께서 특별히 사랑하시는 한 사람을 소개합니다. 이 사람은 베다니에 살고 있는 나사로입니다. 베다니는 예루살렘 동쪽 여리고 방향 감람산 산기슭에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나사로가 그만 죽을병에 걸렸습니다(요 11:01). 죽을병인 만큼 자매 마리아와 마르다가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 나사로의 소식을 전했습니다.
03 이에 그 누이들이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 이르되 주여 보시옵소서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하니.
나사로의 자매가 예수님께 오빠의 병 치료를 위해 연락하였을 때 예수님은 어디 계셨습니까? 요단강 저편 즉 요단강 동편 베뢰아 지역 베다니에 계셨습니다(요 10:40).
이곳에서 예루살렘 근처인 베다니까지 당시의 거리로는 약 50km 정도입니다. 그 시절이니 이 도로가 도보로 12시간 이상 걸릴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사로의 집을 속히 찾으시지 않고 유대로 가자 하셨습니다(요 11:07).
나사로의 병든 소식을 듣고 출발은 했지만 바로 나사로의 집을 향해 직진하지 않았습니다. 사람의 눈에는 안 보이지만 예수님께서 부활을 소개하시려는 프로그램 때문입니다.
천천히 가셨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나사로의 누이들이 인편에 보낸 나사로의 병든 소식을 들으시고 이 병은 죽을병이 아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병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04). 그리하여 예수님은 일정을 이틀 더 머무셨습니다(06).
그때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마침내 예수님은 나사로의 집을 찾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유월절을 맞아 예루살렘에 오실 때마다 들리시던 집입니다.
11절 보십시오.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기를 기다리셨습니다. 나사로의 병 상태를 전지전능하신 예수님께서 왜 모르시겠습니까? 아시면서도 의도적으로 이틀을 더 머무셨습니다.
11 이 말씀을 하신 후에 또 이르시되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죽기까지 기다리셨다는 의미입니다. 이 기다림은 무관심이 아닙니다. 냉담함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더 크고 완전한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특별 지연입니다.
잠들었도다(κεκοίμηται 케코이메타이).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은 사실을 베다니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아셨습니다. 이 죽음을 통한 계획이 서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잠들었다고 하신 이 표현은 헬라어로 죽음을 완곡하게 표현한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깨울 수 있는 죽음이라는 뜻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문자로만 이해합니다. 주여,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 이에 예수님께서 다시 말씀하십니다. 아니야 나사로가 죽었다(14).
본문 흐름을 잘 보십시오.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사흘 만에 부활하심을 보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사건에 앞서 부활 사건을 미리 안내하십니다.
| 2.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음을 믿으면 영생입니다. |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26절은 누가 누구에게 하는 말입니까? 예수님께서 마르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마르다의 오빠 나사로가 죽은 상황에서 하신 대단히 중요한 선언입니다.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문구는 육체의 죽음을 부정하는 말이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죽음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모든 사람이 경험하는 육체의 죽음과 둘째는 하나님과 생명 관계가 단절된 영적 죽음입니다.
26절을 잘 이해하려면 앞 절인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라는 예수님의 말씀과 연결하면 더 선명해집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으면 육체는 세상에 속하여 세상 법을 따라 죽어도 하나님과의 생명은 끊어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네가 믿느냐(πιστεύεις τοῦτο). 26절의 핵심 문구입니다. 예수님께서 단순한 교리를 성경 공부하듯이 묻고 있습니까? 아닙니다.
개인의 믿음을 요구하시는 물음입니다. 피상적인 지식이 아니라 신앙의 결단을 말합니다. 그저 평범한 진리가 아니라 신앙의 핵심을 묻습니다.
예수님께서 단순히 과거에 믿은 적 있느냐가 아닙니다. 마르다에게 이 일(τοῦτο) 즉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이 말을 믿느냐고 물으십니다. 상당히 도전적인 현재 직설법 형태의 질문에 마르다가 신학 차원으로 답합니다. 마르다의 답을 새번역으로 보겠습니다.
27 마르다가 예수께 말하였다. "예, 주님! 주님은 세상에 오실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내가 믿습니다.
마르다를 향한 예수님의 현재시제 형 질문에 마르다는 현재 완료시제로 답했습니다. 예수님의 물음은 바로 지금 믿느냐? 입니다.
마르다는 조금도 망설임이 없이 주님, 이미 믿고 있습니다. 지금도 믿고 있습니다. 단순한 즉흥적 고백이 아닌 확신에 찬 고백입니다.
과거에 싹이 트고 시작된 믿음이 현재까지 지속되는 성숙한 확신의 표현입니다. 성숙하고 사려 깊은 확신과 깨달음입니다.
이것(τοῦτο)은 예수님의 정체성인 부활과 생명을 말합니다. 지금 마르다에게 전 인격으로 신뢰하느냐는 물음입니다. 마르다의 고백은 내 상황과 내 감정과 내 이해를 초월하고 있습니다. 그저 주님의 말씀만이 옳다는 고백입니다.
주님 말씀을 진리로 받는 마르다의 신앙 깊이가 대단합니다. 한 마디로 예수님의 정체성과 복음의 핵심을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오시는” 이 부분을 잘 보십시오.
어떻게 이런 고백까지 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우연히 태어나신 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메시아로 보내셨다는 고백 이거 대단합니다.
단순한 교리를 동의하는 고백이 아닙니다. 자기 존재와 운명을 거는 인격의 신뢰입니다. 당시 예수님 사역 현장에서 오히려 열두 제자보다 더 신앙 깊이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로부터 세상에 오신 메시아입니다. 아주 높은 기독론 신앙입니다.
특히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이런 고백이 마르다를 더욱 돋보이게 합니다. 이 고백은 초대교회의 대표적인 신앙 고백이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그대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 3.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심은 부활의 예표입니다. |
44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44절을 설명하기에 앞서 먼저 39절을 이해하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39절이 있으므로 44절의 기적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같이 39절 말씀을 읽읍시다.
39 예수께서 이르시되 돌을 옮겨 놓으라. 하시니 그 죽은 자의 누이 마르다가 이르되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이스라엘 문화에서 4일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당시 유대 전통 랍비 벤 카프라(Rabbi Yosiah ben Kappara)의 문헌에 따르면 사람이 죽으면 그 혼이 3일 동안 무덤 주변을 맴돌다가 4일째가 되면 완전히 떠난다고 믿은 흔적이 있습니다.
따라서 4일이 지나면 소생 가능성이 없는 확실한 죽음으로 인정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실 때 그 누구도 완전히 죽은 상태임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돌을 옮겨놓으라고 명령하십니다. 동굴 형태의 입구를 돌로 막아 놓은 무덤이기 때문에 옮기라고 하십니다.
돌 문을 옮겨놓으라는 말은 기적이 일어나기 전에 인간이 믿음으로 할 수 있는 마지막 부분입니다. 순종의 행동을 보여야 기적이 일어나는 공식(公式)입니다.
마리아의 입장에서 무덤을 막고 있는 돌은 단순한 돌이 아닙니다. 오빠와의 마지막 이별을 고한 돌입니다. 오빠를 다시 볼 수 없는 절망의 돌입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일하실 때는 사람의 순종을 바탕으로 하십니다. 이 명령은 죽음과 생명 사이를 막고 있는 장애물을 치우라는 영적 명령입니다.
마르다의 반응이 어떠하지 봅시다. 죽은 지 4일이 되어 벌써 냄새가 납니다. 인간의 희망과 가능성이 완전히 사라졌음을 고하는 말입니다.
인간의 가능성이 완전히 끝나는 곳이 주님께서 일하시는 출발점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인간의 불가능한 상황까지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스라엘의 기후상 4일이면 이미 시신의 부패가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을 안내하시려고 나사로가 죽은 지 4일이 되는 시점까지 기다리셨습니다.
돌을 옮겨놓으라는 말씀에 마르다가 마침내 순종합니다. 돌을 옮겨놓는 일까지는 사람의 몫입니다. 드디어 마르다가 돌을 옮깁니다(41).
이 돌문을 옮기는 순간은 슬픔의 봉인이 해제되는 순간입니다. 인간이 할 수 있는 한계의 끝에서 하나님께 모든 일을 내어드리는 행위입니다.
드디어 나사로가 무덤에서 수족을 베로 감은 채로 나옵니다. 얼굴도 수건에 싸인 채로 나옵니다. 살기만 하였지, 장례식을 할 당시의 모습으로 나옵니다.
오늘 제가 전하는 메시지 주제는 나사로가 살아난 일이 아닙니다. 나사로의 살아난 일을 통해서 예수님의 부활을 보는 겁니다. 돌을 옮기는 행동의 신령한 의미를 봅시다.
나사로를 통해서 하나님의 일하시는 원리입니다. 절망이라는 돌이 옮겨질 때 영적 생명이 회복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영적 생명의 마지막에 부활을 볼 수 있습니다.
|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
1960년대 이스라엘 사해 근처의 요새인 마사다의 한 저장 창고에서 고고학자들이 오래된 대추야자 씨앗 수백 개를 찾아내었습니다. 방사성탄소 연대측정으로 약 2천 년 전 로마 시대(헤롯왕 요새 포위 무렵) 것으로 확인되었습니다.
이스라엘 과학자들이 이 씨앗들을 보존해 오다 2005년 생명력이 있다고 판단되는 34개의 씨앗을 골라내 그중 한 개를 발아시켰습니다. 그리고 므두셀라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후 나무를 이스라엘 남부 키부츠로 이식하여 수컷 나무로 성장하였습니다. 암컷과 교배를 통해서 2020년 첫 수확에서 111개의 열매를 거두었습니다.
나머지 33개 씨앗은 비료 성분이 포함된 물속에서 보관하다 결함이 있는 씨앗 하나를 제외하고 32개의 씨앗을 발아시켰습니다.
그중 6개에 이런 이름을 붙였습니다. 요나(Jonah), 우리엘(Uriel), 보아스(Boaz), 유디스(Judith), 한나(Hannah), 아담(Adam)입니다. 이후 유전자 분석을 통해 여러 방향으로 실험하고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생명만 있으면 살아납니다. 생명이 없으면 그대로 썩고 맙니다.
오늘 부활절을 맞아 우리 모두 영적 생명이 있는지 돌아봅시다. 생명이 있으면 회복할 수 있는 길이 열립니다. 어떤 일이라도 감당할 수 있습니다.
반면 영적 생명이 없으면 살아있는 것처럼 보여도 능력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가 말라서 죽어버린 것과 같습니다(마 21:19).
예수님께서 나사로를 통해 곧 있을 부활을 미리 보여주십니다. 여기서 하나 분명 확인할 일이 있습니다. 나사로가 부활하였느냐입니다. 정말 부활했습니까?
아닙니다. 주님께서 부활의 예표로 보여주신 사건입니다. 주님께서 나사로를 살리셨지만, 나사로는 다시 죽었습니다. 그래서 부활이 아닙니다.
오늘 부활절을 통해 능력 있는 삶을 회복합시다. 부활하신 주님으로 인해 복된 생명 능력 있는 삶을 무장합시다. 능력 있는 삶, 생명의 삶은 오직 믿음의 확신과 언행일치의 삶에서만 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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