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단/2024년 말씀

➊노아처럼 말씀에 순종합시다(창 06:11~22).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24. 9. 21. 1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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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신앙생활에서 아멘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기도하고 나서 아멘하고, 찬양을 올리고 나서 아멘하고, 설교를 듣고도 아멘 합니다.

우리만 아멘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도 아멘을 자주 사용하셨습니다. 진실로라는 단어가 원문에서 아멘(ἀμήν  01:51)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요한복음에서는 진실로 진실로라는 아멘을 25회나 사용하셨습니다. 아멘이라는 단어 속에 들어있는 그 의미가 무엇입니까?

, 맞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도 그 뜻에 동의합니다. 라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이력서를 다 작성하고 맨 마지막에 위 사실과 같음이라고 쓰고 도장을 찍지 않습니까? 이 말은 이 이력서는 진실하다, 혹은 사실이다. 는 뜻입니다.

 

신구약 성경은 아멘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했습니다. 저주를 선포할 때 사용했고, 영광송에 사용했고, 맹세와 축복에 사용했고, 하나님의 말씀에 동의할 때 사용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아멘 즉 말씀에 대한 순종이야말로 우리의 믿음을 가늠하는 가장 확실한 기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하나님과 동행한 믿음의 사람 노아의 신앙 행적을 볼 수 있습니다.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22 노아가 그와 같이하여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믿음의 가족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복이 올 줄 믿습니까? 그러면 오늘 본문을 믿음으로 받고 노아처럼  순종하면 됩니다.

노아는 하나님께서 명하신 14절 말씀을 22절로 응답하였습니다. 아멘으로 감당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말씀 제목을 노아처럼 말씀에 순종합시다.로 정했습니다. 이 제목으로 인사를 나눕시다.

 

 

1. 죄악의 길은 멸망과 심판이 기다립니다.

 

11 그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포악함이 땅에 가득한지라. 12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부패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부패함이었더라.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06:23). 노아 시대 당시 모든 사람이 죄악으로 기울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의 심판을 스스로 불러오고 있었습니다.

06장은 노아 때의 죄악이 어느 정도 팽창해 있었는지를 확인해 줍니다. 05, 06절을 여러분과 같이 읽겠습니다. 읽은 결과는 곧 임할 심판을 볼 수  있습니다.

 

05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06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11 그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포악함이 땅에 가득한지라. 12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부패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부패함이었더라.

 

11절에 아주 강력하게 나타나는 단어 하나가 있습니다. 포악(暴惡)이란 단어입니다. 이 포악이란 폭력을 뜻하는 말입니다. 이 포악이 땅에 가득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이니 당연히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17절 말씀은 11, 12절과 같은 죄악에 대해서 누구든지 예외 없이 심판을 만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죽음과 이후에 일어날 심판을 부인하거나 잊으려 합니다.

 

알렉산더(Alexander The Great B.C. 356~323.6.13,) . 내가 모든 일에 시간을 바칠 생각을 해왔지만 가장 중요한 사실, 죽음에 대해서만은 고려하지 않았구나. 하고 탄식했다 합니다.

 

하나님은 노아 시대를 심판하신 공의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도 다 보고 계십니다. 주님을 통해서 심판을 계획하신다고 경고의 메시지를 띄웁니다.

그러면 경고를 받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밖에서 살아가는 사람입니까? 오늘 말씀을 듣고도 영적 감각이 없는 우리 모두입니다.

 

고후 05: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이제 우리가 시간을 낭비할 때가 아닌 줄 아십니까? 주님께선 이미 도끼를 나무뿌리에 놓고 회개하지 않는 자마다 찍을( 03:10) 것이라 하셨습니다.

이제 심판과 구원의 때가 임박했으니 더 이상 지체하지 말라는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시간이 많이 남아 있으니 안전하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경고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마 03:10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

 

 

2. 구원을 위하여 방주를 짓도록 명하십니다.

 

14 너는 고페르(גּוֹפֶר 잣나무) 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되 그 안에 칸들을 막고 역청을 그 안팎에 칠하라.

 

하나님께서 노아를 향하여 방주를 건조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받을 때 몇 가지를 전제하고 듣는 것이 말씀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방주는 미래에 도래할 예수 그리스도를 예시합니다. 노아가 구원의 방편으로 방주를 건조하였듯이 예수님도 구원의 방편으로 교회를 건설하십니다.

노아의 방주가 완성될 때 종말의 심판이 왔듯이 예수님의 교회가 완전히 세워질 때(복음이 땅끝까지 전해질 때) 주님의 다시 오십니다.

 

방주(תֵּבָה 테바). 무동력선(無動力船) 네모 난 배입니다. 운전되어 가는 배가 아니라 물 위에 떠 있기 위한 하나의 수상 건물로 보면 적절할 것 같습니다.

방주의 재료는 고페르로서 일종의 잣나무입니다. 겉은 역청을 칠하여 물이 들어오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완벽하게 방수 처리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세밀한 설계도를 따라 건조되었기에 절대 안전입니다. 방주는 무역선과 같은 기능을 하는 것이 아니라 물 위에 떠 있으면 됩니다. 하나의 큰 궤()로서 전혀 속력을 낼 필요가 없습니다. 급하게 항해할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그저 물에 떠 있기만 하면 됩니다. 홍수 심판 가운데서도 노아와 그 가정을 구원하기 위한 방주는 그 기능이 신약 시대의 교회(敎會)에 자주 비유됩니다. 그 기능이 구원이기 때문입니다.

 

15 네가 만들 방주는 이러하니 그 길이는 삼백 규빗, 너비는 오십 규빗, 높이는 삼십 규빗이라

 

1 규빗을 45cm로 계산할 때 방주의 규모는 길이 약 135m, 폭이 약 22.5m, 높이 13.5m로서 3층 규격에 그 정도의 크기라면 중량이 약 14,000t 정도가 됩니다.

따라서 한때 세계 최고의 항공모함으로 그 위용을 자랑하던 엔터프라이즈호가 길이 317m 배수량 75,700t이었다는 점에 비추어 보면 다음과 같은 의문이 생길 수 있습니다.

즉 당시 선박 건조술(建造術)이 발달하지 못했고 동원 인원도 8(?) 정도에 불과한 상황에서 어떻게 그토록 큰 방주를 건조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입니다.

 

바벨론 전설에 의하면 노아는 한 성읍의 주권자(성주)로서 상당한 인품의 사람으로 전해집니다. 또 방주를 건조하는 데는 많은 인력이 동원되었습니다. 당시 포악한 사람들이 심판의 방주를 만드는데 협조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노아가 가진 물질을 구원의 방주를 만드는 데 아낌없이 사용하였기 때문입니다. 아마 많은 사람이 方舟(방주)를 만드는 데 참여는 하면서도 노아 할아버지는 정신 이상자라고 놀리며 뒤에서 많이 수군거렸을 것입니다.

 

그럴지라도 노아는 오랜 세월을 인내하며 홍수 심판을 대비하였습니다. 구원의 방주를 짓는 데 물질과 마음을 투자하였습니다. 노아의 신앙 자세야말로 매우 가치 있는 삶으로 볼 수 있습니다.

 

마 06:20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결국은 방주 안에 들어간 사람만 살았습니다. 나아가 예수님 안에 거하는 사람만 하나님의 구원과 사랑과 영생의 은혜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3. 방주의 문으로 들어가야만 구원이 있습니다.

 

16 거기에 창을 내되 위에서부터 한 규빗에 내고 그 문은 옆으로 내고 상 중 하 삼 층으로 할지니라.

 

16절에 의하면 방주에는 단 하나의 문만 있습니다. 16절을 잘못 이해하여 층마다 문이 있는 것처럼 생각할 수 있으나 그렇지 않습니다.

(צּוֹהַר 초하르). 채광과 통풍을 받기 위한 기능입니다. 꼭대기에서부터 45.6cm 되는 지점에 둘러 가며 여러 개 설치한 것으로 짐작됩니다.

그러면 방주를 삼 층으로 한 까닭은 무엇입니까? 적재 면적을 최대한 확보하기 위해서입니다. 왜냐하면 방주에는 노아의 가족과 각종 짐승과 홍수 후 1년여간 사용해야 할(08:14) 식량과 생활용품을 적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21).

 

여기서 문이 하나밖에 없는 이유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왜 문이 하나밖에 없습니까? 방주 안으로 들어가는 구원의 문이기에 굳이 두 개가 있을 필요가 없습니다. 홍수가 나기 전에는 누구든지 이 문으로 들어갈 기회가 있었습니다.

홍수로 인한 물 심판이 임하기 전 하나님께서 문을 닫기 전까지 이 문은 열려( 07:16) 있었습니다. 노아의 전도를 듣고 회심하거나 방주의 의미를 깨닫기만 하면 누구든지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시대 사람 모두가 이 문을 외면하였습니다. 노아의 형제들까지도 외면하였습니다.

 

창 05:28 라멕은 백 팔십 이세에 아들을 낳고 29 이름을 노아라 하여…. 30 라멕은 노아를 낳은 후 오백구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창세기를 통한 방주의 문, 노아가 건조한 방주의 문은 구원의 문입니다. 나아가 이 문은 오직 예수님을 믿음으로만 들어가는 구원의 문을 상징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은 기독교의 복음을 지나친 독선이라고 비판합니다. 어째서 구원의 문이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없느냐고 항의합니다.

그러나 삶과 죽음의 갈림에 서 있는 사람은 그런 질문을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구원의 문이 하나라도 열려 있는 사실에 오히려 감사합니다.

 

하나님 은혜를 흘려버리면 죽음입니다. 심판으로 인하여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에게 구원의 문을 열어주신 일은 하나님의 큰 사랑의 증거입니다.

우리를 향한 구원의 문, 구원의 길이 예수님을 통해서 열려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그 길로 들어가면 됩니다.

 

예수님 외의 길은 모두가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입니다. 우리는 노아가 방주를 만들면서 세상 사람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충분히 경고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창세기에는 노아가 직접 전도하였다는 전도 행적이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벧후 02:05에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가 나옵니다.

 

벧후 02:05 옛 세상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

 

22 노아가 그와 같이하여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

 

22절은 오랜 세월에 걸친 노아의 인내와 믿음과 소망이 응축된 구절입니다. 전력을 기울여 방주를 짓는 세월 동안 노아는 당대의 사람들에게 갖은 조롱과 희롱을 당하였습니다. 또한 미치광이 취급받으면서도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였습니다.

노아는 하나님의 존재를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 말씀을 믿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약속을 믿음으로 승리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실천하면서 하나님의 심판을 예비하였습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노아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명하신 것을 다 감당한 결과 자기와 가족과 새 시대를 열어갈 짐승들까지 보존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오늘날 각종 불법과 불경건이 난무하는 시대를 살아가는 성도들에게도 절실하게 요구되는 인내와 순종의 자세입니다.

믿음의 가족 여러분, 주님께서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 하셨고( 21:19),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을 것이라 하셨습니다( 10:09)

 

성도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대로 온전히 준행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까?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인해 말씀에 순종하는 삶 말입니다.

어둠 가운데서 헤매고 있는 영혼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삶, 더 나아가 이 땅에 예수님의 문화를 창조하고 이루어 가는 삶을 사느냐 말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 노아 시대의 그 냉담한 반응을 역시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한 생명을 구원하는 길이 천하보다 귀한 것임을 알고 주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순종을 다 합시다.

 

행 04: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