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 후 일본 경제가 다시 일어설 때의 일입니다. 일본의 한 대기업이 미국 일류대학 출신의 고급 엔지니어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중에서도 될 수 있으면 박사학위도 있고 일본어도 능숙한 사람이었는데 오랜 수소문 끝에 마침내 그런 한 사람을 찾게 되었습니다.
그는 공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신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에서 선교하고 있었습니다. 즉시 선교사에게 높은 대우와 여러 혜택을 보장하며 회사에 와줄 것을 제의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단호하게 거절하였습니다. 기업 측에서는 보수가 적어서 그러는 줄 알고 다시금 파격으로 제안했지만 역시 대답은 거절이었습니다.
기업 측에서 도대체 무엇이 문제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이렇게 답을 했습니다. 예, 대우는 충분하지요. 그러나 그 일이 나의 삶을 바칠 만큼 가치성을 갖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 선교사의 대답은 오늘날 크리스천이 과연 무엇을 위해 도전하고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가를 다시 한번 일깨워 줍니다.
성도 여러분은 지금 어떤 선택을 하였습니까? 육신의 세계입니까? 아니면 영의 세계입니까? 어느 쪽을 택하시던 그 선택권은 여러분에게 있습니다.
세상 것보다 영의 세계에 속한 것을 더 귀하게 여기십시오. 그러면 분명 복된 길이 열릴 것이며 잘 선택한 길은 생명과 영생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둘러싸고 불행한 길을 선택한 총독 빌라도 아시지요. 영원히 돌이킬 수 없는 영벌의 길이 되었습니다.
이와는 달리 영원히 복된 길을 선택한 아리마대 요셉이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신 후 분위기가 살벌한 상황에서 등장하여 나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그 고백을 따라 제목을 「자기의 신앙을 고백한 아리마대 요셉」으로 정했습니다.
1. 아리마대 요셉은 살벌한 상황에서 자기의 신앙을 공개합니다. |
43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 사람은 존경받는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중심으로 빌라도는 이미 최악의 선택, 영원히 돌이킬 수 없는 영벌의 길을 선택하였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빌라도의 굽은 판결로 인해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고, 이제 그 사역은 끝이 났다고 여겨진 순간에 홀연히 아리마대 요셉이 등장합니다(43).
이 사람은 열두 제자 중의 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전에도 이름이 한 번도 나오지 않은 인물인데 전격적으로 등장하였습니다.
사도 요한은 아리마대 요셉에 대하여, 예수님의 제자이면서도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숨어서 지낸 사람이라고 소개합니다(요 19:38). 자기를 들어내지 않고 숨어 있었습니다. 믿기는 하면서도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은둔 자세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요 19:38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의 제자이나 유대인이 두려워 그것을 숨기더니….
요한은 이 요셉을 예수님 제자이나 유대인을 두려워한 나머지 자기를 숨기고 산 일종의 약간 비겁한 자라고 소개합니다.
요즈음도 이런 제자, 이런 신자가 많이 있습니다. 가령 직장에 가서는 좀 불리할 것 같으면 신앙의 꽁지를 내리고 안 믿는 척하시는 분들 말입니다.
요셉이 지금까지는 자기의 신앙을 감추면서 지내왔습니다. 그러나 갑자기 공개 장소에서 나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고백합니다. 그 증거가 예수님을 장례 하려고 시신을 청구한 일입니다.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당돌히(τολμάω 톨마오) 라는 단어를 보십시오. 요셉은 용기를 내어 빌라도에게 예수님 시신을 인도하겠다고 요청합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평범한 사람은 아닙니다. 칠십 명으로 구성된 유대인의 법정 기관 산헤드린 공회원이기 때문입니다. 명예와 부를 소유한 특권층 엘리트입니다.
그가 어떻게 예수님을 믿게 되었는지 성경에는 일절 나오지 않습니다 요셉이 빌라도에게 예수님 시신을 인도하겠다는 요청은 구걸이 아니라 나름의 담대함입니다.
일종의 신앙고백으로 보아도 되겠습니다. 무엇이 그에게 이런 변화를 가져오게 했을까요? 우리는 자세한 동기를 성경에서 볼 수는 없지만 아마도 십자가 사건을 전후로 된 여러 일이 요셉의 마음을 바꾼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어쩌면 산헤드린 공회에서 심문 과정이나 십자가가 집행되는 과정에서 자기의 미지근한 믿음을 회복하였을 것으로 봅니다(눅 23:51).
예수님께서 아버지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모릅니다(눅 23:34). 라는 가상칠언의 기도도 전해 들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좌우에 함께 달린 강도 중 회개한 사람이 예수님께서 천국에 이르실 때 나를 기억해 주십시오(눅 23:41). 라고 요청하였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2). 고 화답하셨습니다.
이처럼 당당하신 주님의 모습에서 감동하였을 것으로 짐작합니다. 이후 요셉은 안식일 전에 속히 장례식을 치르려고 빌라도에게 당돌히 찾아가서 시신 인도를 요청합니다. 요셉은 결국 자기가 예수님의 제자임을 공개 석상에서 알리고 나섰습니다.
2. 신앙을 공개하면 다른 사람을 감동하게 합니다. |
요 19:39 일찍이 예수께 밤에 찾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온지라.
김삼일 가족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자기 신앙을 감추고 사는 것은 아닙니까? 그리스도인을 숨기는 한 이웃에게 믿음의 영향을 끼치지 못합니다.
신앙을 감추고 살면 과연 편합니까? 순간은 편할 수는 있을지 모르나 그런 모습으로는 주위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지 못합니다. 열정 있는 믿음만이 주위에 영향을 끼칩니다.
그러면 요셉이 빌라도에게 자기도 예수님의 제자임을 알릴 때 주변 사람에게 믿음의 영향을 끼치는 일이 나타났습니까? 동료 공회원 니고데모에게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 영향을 받은 사람이 바로 니고데모입니다. 요 03장에서 밤에 예수님께 나아와 거듭남에 관하여 대화한 관원 니고데모입니다. 예수님과 니고데모의 처음 만남의 장면을 기억하십니까? 요한복음 03장에 보면 밤에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와서 상담한 일이 나옵니다.
요 03:02 그가 밤에 예수께 와서 이르되 랍비여 우리가 당신은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인 줄 아나이다.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아니하시면 당신이 행하시는 이 표적을 아무도 할 수 없음이니이다(예수님은 자연스럽게 주제를 중생의 교리로 옮겨 설명하십니다).
0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이후 니고데모가 분명 거듭났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일 후에 니고데모의 활동이 전혀 나타나지 않습니다.
아마 니고데모 역시 숨어서 믿는 사람 중의 한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요셉이 자기 신앙을 공개함으로 동료 관원 니고데모에게 영향을 끼쳤습니다.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요셉을 따라 예수님의 장례식에 용품으로 동참하였습니다(요 19:38). 이렇게 공개하는 신앙, 노출된 신앙은 매우 조심스럽고 책임감도 따릅니다.
그러나 공개하는 신앙은 내 신앙 성숙과 삶에 지대한 영향을 줍니다. 동시에 주변 사람에게 상당한 영향을 끼치기도 합니다.
물론 사람에 따라 큰소리 뻥뻥 치고는 책임을 지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뻥 氏나 풍 氏는 우리 교회에서는 없을 것입니다.
김삼일 가족 여러분, 회사에서 여러분이 그리스도인 것을 알리십니까? 광고료가 들지 않고 가볍게 알릴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무엇인 줄 아시지요?
바로 식사 시간 때의 기도입니다. 이때는 내가 특별히 광고를 안 해도 식사할 때 기도를 진지하게 하면 저 사람 크리스천이군 하며 인정합니다.
반면 어떤 사람은 그것이 부담스러워 회사에서 전혀 예수님과 상관없는 척 속으로만 기도하거나 아니면 빨리 기도를 해치워 버립니다.
성도 여러분이 그런 상황에 있거든 일단 정중하게 기도하십시오. 그때는 저분이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이구나 하면서 주목하고, 후한 점수까지 줄 것입니다.
신앙인은 그만큼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고백을 한 후에 따라오는 그리스도인의 업무처리, 그리스도인의 성실성, 그리스도인의 정직함 등이 배어 있는 행동은 분명 나에게 도움이 됩니다.
더러 자동차 뒤에 물고기 표나 아니면 창원 극동방송 주파수인 FM 98.1 MHz 스티커를 부착하고 다닙니다. 차를 운행하다가도 그런 차량을 보면 반갑습니다. 그런 반가운 마음이 생기는 것은 그것이 성도의 공개 신앙고백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물고기 표(ΙΧΘΥΣ) 뜻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라는 의미가 들어있는 표시입니다(Ιησους Χριστος θεου Υιος Σωτηρ).
그걸 달고 다닐 때는 양보가 우선입니다. 천천히 제대로 운전하면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으로 인정합니다. 본인도 좋고 상대방도 좋은 일입니다.
요셉의 삶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믿음을 공개한 때부터 비로소 신앙인의 삶을 산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신앙을 공개하기 전까지는 별반 영향력 없는 삶이었을 것입니다.
3. 공개하는 신앙은 때로는 고난도 만납니다. |
43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 사람은 존경받는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요셉이 당돌히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님의 시신을 인도하겠다고 요청하는 일은 나름대로 신앙의 모험입니다. 어쩌면 삶을 건 모험입니다.
당돌히, 이 말은 요셉이 빌라도에게 예수님의 시체를 대담하게 요구했다는 말입니다. 다른 말로 신앙의 모험을 하였다는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왜 모험입니까? 잘못되면 지금까지 쌓아 올린 지위와 출세의 탑이 무너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그 사회에서 공회원(sanhedrin) 신분입니다.
공회는 유대인의 종교와 도덕과 정치에 관한 일을 재판하는 권한이 있습니다. 요셉이 그중의 한 사람이니 상당한 권력자인 셈입니다. 그런 모임에서 예수님을 사형수로 결의할 때 아리마대 요셉은 소신껏 거부권을 행사하였습니다.
바로 그 예수님 편에 서서 신앙을 공개하는 것은 어쩌면 그 사회에서 소외될 수도 있습니다. 동료에게 무시당하고 자기 지위까지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 장례식을 맞아 자기 신앙을 공개하는 것은 대단한 모험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불이익이 오면 얼마든지 감수하겠다는 표시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 하기로 각오했으면 좀 제대로 믿어야 합니다. 좀 흥분이 있고, 전율도 있고, 감격도 있고 눈물도 있는 삶이어야 합니다.
요셉이야말로 상황 따라 고난의 길이 예상됨에도 그 길을 선택했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각오입니다.
한 가지 기억할 일은 신앙의 용기를 내는 일에는 불이익이 따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요셉은 신앙의 용기를 앞세워 예수님의 장례식을 잘 치러 냅니다. 상황에 따라 유대교 사회에서 매장될 수 있음에도 모든 고난을 믿음으로 감수하는 길을 택합니다.
신앙생활을 계산으로 하면 비겁해질 수 있습니다. 반면 나에게 주신 사명과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면 고난과 희생을 능히 감당할 수 있는 용기가 생깁니다.
신앙의 용기를 내는 일에 아픔을 지출할 수도 있습니다. 요셉은 자기가 쓰려고 바위 속에 판 무덤을 주님께 드렸습니다. 최고의 것을 들렸습니다.
사람의 생각으로 보면 물질의 손해입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보면 거룩한 낭비입니다. 거기다 예수님 장례를 치렀으니 부정해져서 안식일도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아리마대 요셉은 계산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열두 제자는 위험하다고 판단되자 다 도망하였습니다(마 26:56). 그러나 요셉은 위기의 상황에서 자기의 모든 것을 잃을 각오로 등장하여 예수님의 장례를 치르고 부활도 예비하였습니다.
창 43:14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 앞에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사 그 사람으로 너희 다른 형제와 베냐민을 돌려보내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내가 자식을 잃게 되면 잃으리로다.
여러분 가운데 신앙생활에 좀 재미가 없다는 분들 계시지요? 성도 여러분 일종의 신앙생활의 타성에 젖은 사람 말입니다. 타성은 외식의 지름길입니다.
주일날 예배드리러 왔다 갔다 그것밖에는 의미가 없는 분, 변화가 없는 분, 구원의 감격이 없는 분, 생동감이 없는 분은 이제 좀 달라져야 합니다. 믿음으로 희생도 좀 하십시오. 주님 앞에 시간을 드리십시오. 사랑을 드리십시오.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을 드리며 사십시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
마 27:59 요셉이 시체를 가져다가 깨끗한 세마포로 싸서, 60 바위 속에 판 자기 새 무덤에 넣어 두고 큰 돌을 굴려 무덤 문에 놓고 가니.
이 현장에는 가족들도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제자들도 거의 도망하고 요한과 여자 네 사람이 안타까운 심정으로 서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럴 때를 대비하여 요셉을 준비하셨습니다. 이 사람에 대해서는 이사야 53장 09절에 이렇게 예언되어 있습니다.
아마도 요셉이 이 예언 된 말씀을 알고 있었다면 대단히 흥분하였을 것입니다. 혹시 성경에 기록된 부자가 바로 나였구나. 하고 깨달아졌으면 전율을 느꼈을 것입니다.
다가오는 하나님의 나라, 그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우리도 무덤이라도 내어놓을 수 있도록 믿음으로 각오하여야 합니다. 소중한 것을 드릴 수 있는 믿음을 가지십시오.
김삼일 가족 여러분, 세상 것을 구하는 삶에서 영원한 세계의 부함을 사모하십시오. 하나님은 이런 것을 사모하는 사람을 통해서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쓰임을 받는 자에게는 복된 삶을 누리게 하십니다. 우리 모두 아리마대 요셉처럼 신령한 것을 구하며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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