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단/2023년 말씀

믿음의 길은 좀 불편합니다(마 07:13~14).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23. 6. 3.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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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개혁자 루터는 고달픈 삶의 길을 일부러 택했습니다. 한 마디로 구원받는 믿음으로 살고 이 믿음을 전하기 위해서 고난의 길을 걸었습니다.

하나의 가정(假定)입니다만 루터가 로마 카톨릭 교리가 성경에서 나온 진리가 아님을 알았지만 모르는 척하고 따랐으면 어떻게 되었을 것 같습니까?

육신 생활은 편안하였을 것입니다. 루터는 당시 막강한 힘을 가진 가톨릭의 사제(司祭)였고 비텐베르크 대학의 교수였습니다. 학생들에게 인기도 있었습니다.

그만하면 안정된 생활을 누릴 근거를 마련한 셈입니다. 그런데 루터는 하나님 앞에서 진리의 길을 가기로 작정하였습니다. 거짓된 주장을 묵과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결국 로마 교황청에 맞선 루터는 사제직과 교수직을 박탈당했습니다. 많은 생명의 위협을 받아야 했습니다. 이렇게 믿음으로 고난의 길을 택한 루터를 하나님께서 지켜 주셨습니다. 바르트부르크성에 감금되게 한 일입니다. 그 일 년이 은혜였습니다.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는 기회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성경 번역은 종교개혁의 큰 동력이 되었습니다. 루터는 믿음으로 살기 위해서 불편한 길을 택했습니다.

복을받는교회 가족 여러분, 진리를 따라 믿음으로 나아가는 길은 불편합니다. 종교개혁자 루터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신앙인의 길은 때로는 불편합니다.

 

그래도 그 길을 믿음으로 가야 합니다. 혹 순교의 현장이 기다릴지라도 가야 합니다. 마지막에는 영생의 세계가 예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혹 구원의 길을 이탈하면 그렇게 힘들고 불편한 삶을 살지 않아도 됩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삶을 포기하면 거룩한 부담도 안 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육신은 좀 편할 수 있겠지만 마음이 편한 것은 아닙니다. 과연 그런 삶을 평안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영이 죽은 삶은 괴로움입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우리의 앞에 육신이 편안한 길과 영이 편안한 두 길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길을 내 자유의지로 택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 제목을 믿음의 길은 좀 불편합니다.로 정했습니다. 말씀을 잘 새겨듣는 시간 되기를 바랍니다.

 

 

1.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삶은 좀 불편합니다.

 

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예수님께서 사람의 나아갈 방향성을 놓고 좁은 문과 넓은 문 두 가지 형태를 안내하십니다. 첫째 문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서 맞이하는 생명(生命)의 세계입니다. 둘째 문은 넓은 문으로 들어가서 맞이하는 영벌(永罰)의 세계입니다.

그러면 이 두 가지의 문을 들어가는 사람이 처음부터 정해져 있습니까? 아닙니다. 어느 길이든지 자기 의지로 판단해서 들어갑니다.

 

좁은 문이든 넓은 문이든 그 문을 통과해서 맞이하는 세계는 자기가 택한 결과입니다. 행복의 열매를 따는 것도 불행의 열매를 따는 것도 다 자기의 몫입니다.

예수님은 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십니까? 그 문의 마지막은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을 듣는 분은 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원할 것입니다. 생명이 보장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에 대해 다소 오해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예수님 믿고, 세례를 받고 교회 출석하면 계속 좋아지리라는 기대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도와주시고 잘 되게 하실 줄 믿습니다. 라고 아멘 합니다.

그런데 현실은 그 기대만큼 잘 안되는 때도 많습니다. 더 어려운 일이 생겨서 고민하는 때도 있습니다. 믿음이 약해지거나 무너지지는 때도 있습니다.

 

이런 현실에서 오늘 말씀을 보셔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하신 좁다는 말을 잘 보십시오. 어느 정도로 좁습니까?

예수님은 협착(狹窄)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또 그 문을 통과했다고 길이 넓어지지 않습니다. 계속 좁은 길입니다. 끝까지 좁은 길입니다. 협착이라는 말은 불편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신앙인의 삶이 시작부터 좁고 불편하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나아가는 길이 좁습니다. 세상 관점으로는 불편합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받으면 좁음도 즐거움이 됩니다.

 

복을받는교회 가족 여러분, 16장의 자색(紫色)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다 마지막에 지옥에 떨어진 부자 이야기 아시지요?

반면 대문간에서 음식 찌꺼기로 연명하던 거지 나사로는 아브라함 품에 안겼습니다. 서로 다른 곳이지만 갈 곳을 갔습니다. 돌아오는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두 번 삶을 허락하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한번 내가 결정한 문을 통과했으면 더 이상 물릴 수가 없습니다. 그 삶의 흔적을 가지고 갈 곳을 갔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은 이것 하나 꼭 기억하십시오. 좁은 문을 통해 생명의 길을 가는 사람은 불편함이 좀 따른다는 사실입니다. 왜 불편함이 있습니까?

진리의 말씀을 앞에 두고 살기 위해서는 일상생활을 먼저 구분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은 내키지 않아도 계속 밀고 나가야 할 일이 있습니다.

계속 내려놓아야 할 일도 있습니다. 적절하게 조율해야 할 일도 계속 다듬어야 할 일도 있습니다. 세상 관점으로 보면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좁은 길도 믿음의 눈으로 보면 은혜의 길로 보입니다. 이 길을 가는 동안 신령한 만나를 먹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이 길 마지막에 생명의 세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눅 13:24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2. 넓은 문으로 들어가는 삶은 세상 재미가 있습니다.

 

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멸망(ἀπώλεια 아폴레이아)으로 인도하는 문. 사람은 누구나 좁은 문과 넓은 문 두 문을 앞에 두고 살아갑니다. 대부분 사람은 넓은 문으로 들어갑니다.

그 문이 훨씬 좋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왕 들어갈 바에 박수갈채를 받으며 개선장군처럼 무게 잡고 들어가는 것도 좋겠지요. 많은 사람이 찾으니 확률로도 그만큼 좋은 것이 있다는 의미로 봐도 됩니다. 세상 원리로는 그렇습니다.

 

믿음과는 상관없이 마음 내키는 대로 가면 됩니다. 나의 감정과 유행을 따르면 됩니다. 그러나 그 길은 표류하는 난파선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멸망으로 가는 문은 크고 넓다고 정의하셨습니다. 왜 예수님께서 넓은 문과 좁은 문의 비유를 들려주십니까?

 

자기를 세상에 던져서 마음대로 살아가는(放縱) 자를 경고하기 위해서입니다. 분별력 없이 남의 말을 그대로 막 받아들이는 위험성을 경고하기 위해서입니다.

가볍게 듣고 넘어갈 말씀이 전혀 아닙니다. 나의 현재의 삶과 미래의 삶을 결정하는 경고문으로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신 것은 생명과 관계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굳이 넓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지금 사는 대로 살면 되기 때문입니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과 멸망의 길의 특징은 누가 말해 주지 않아도 체득됩니다. 우리 주변을 잘 보십시오.

몸과 마음과 영혼까지 끌어당기는 곳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의 감각을 자극하는 곳이 많습니다. 우리를 만족시켜 줄 것 같은 곳도 많습니다.

세상 문화 요소를 믿음으로 잘 분별해야 합니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은 좁은 길이요, 우리가 들어가야 할 문은 좁은 문입니다. 왜냐하면 그 길의 마지막은 영생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과 조카 롯이 생활권 문제, 사업상 문제로 마음이 안 맞아 불편하게 지내다 헤어지게 된 일 아실 것입니다. 그때 일을 돌아보겠습니다. 아브라함이 롯에게 말합니다.

이보게 조카 우리는 한 친족 아니냐? 나와 너, 내 목자와 네 목자가 서로 다투어서 되겠나? 그렇게 하지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한가?

나를 떠나가라 네가 왼쪽을 택하면 나는 오른쪽 할게. 네가 오른쪽 택하면 나는 왼쪽 할게. 이렇게 해서 아브라함은 롯의 선택 결과를 따라 마음 상함 없이 좁은 문을 차지했습니다(13:05~09).

 

이 과정에서 롯은 삼촌 아브라함을 향한 조금의 예의도 없이 소돔을 향하여 떠났습니다. 롯의 삶은 소돔에 들어가서 지내는 동안 그 성의 유력자가 되었습니다.

롯의 생활권인 요단 들판은 겉보기에 문화가 잘 발달한 애굽과 같고 에덴동산과도 같았습니다. 반면 아브라함이 선택한 헤브론은 황량한 산악지대였습니다.

 

좁은 길 좁은 문을 받은 셈입니다. 그러면 넓은 길 넓은 문을 택한 롯의 생활이 형통하게 되었습니까? 이전보다 하나님을 더 잘 믿었습니까?

넓은 길 넓은 문을 택한 롯은 폭망입니다. 왜냐하면 창세기의 저자 모세가 롯이 선택한 결과를 이렇게 정리하였습니다. 롯이 거하는 소돔 사람은 여호와 앞에 큰 죄인이었다. 망함을 뜻하는 말입니다.

 

창 13:12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거주하였고 롯은 그 지역의 도시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 13 소돔 사람은 여호와 앞에 악하며 큰 죄인이었더라.

 

 

3.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삶은 믿음의 모험을 합니다.

 

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협착하다는(θλίβω 들리보) 말을 보십시오. 이 단어의 의미는 짓누르다. 압박하다. 이런 뜻입니다.

협착하다는 말은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정도로 좁은 공간을 의미합니다. 그러면 우리 믿음의 가족에게 협착이란 무엇을 말합니까? 그만큼 불편함을 겪는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을 믿기로 작정한 자체가 좁은 문에 들어선 것과 같습니다. 좁은 문과 같은 삶을 지나는 동안 슬플 때가 더러 있습니다. 형통과는 반대 길입니다.

복을받는교회 가족 여러분, 믿음 생활을 위하여 지금도 불편을 감내하고 사십니까? 이것이 불편함을 감내하는 것이구나. 라고 느껴집니까?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혹 억울한 일을 당해 보았습니까? 믿음 때문에 혹 싫은 소리를 듣고도 못 들은 척해보았습니까? 세상 사람보다 더 참고 더 인내해 보았습니까?

 

아브라함이 아버지 데라 가문이 이동하기 전 살았던 갈대아 우르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곳은 당시 최고 문명인 수메르(Sumer)의 발상지입니다.

약. 4천 년 문명으로서 나중에 메소포타미아 문명으로 불립니다. 고고학 조사 보고서에 의하면 이라크 바그다드 서북쪽에 아브라함이 살던 생가로 추정된 건물이 보존되어 있습니다. 어디까지나 추정이라고 말씀드립니다.

2층 벽돌 건물에 방이 13~14개 갖추어져 있고 실내는 대리석과 석회로 치장되어 있습니다. 화장실은 수세식이고, 상수도 관개(灌漑) 설비까지 갖춘 풍요한 문화생활의 흔적입니다. 4천 년 전 문명으로서는 대단합니다.

 

하나님께서 데라 가문의 아브라함에게 모든 안락함을 내려놓고 미지의 땅으로 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 갈대아 우르를 떠났습니다(11:32, 12:01~04).

당시 세계 최고의 문명을 누리던 삶을 내려놓고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고 하는 것은 누구나가 받을 수 있는 말씀이 아닙니다.

나아가야 할 신앙의 여로(旅路)가 명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느 곳이라는 목적지가 설정되지 않은 미지의 땅을 가는 것은 엄청난 도전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서 굳게 결단하고 실천에 옮깁니다. 신앙의 결단을 하는 사람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모험도 합니다. 아브라함은 새로운 곳에서 척박한 삶을 개간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인생을 겁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아버지 데라는 갈대아 우르에서 나와 가나안으로 이동하던 중 하란에 이르러 그만 정착하려고 했습니다(11:31). 그러나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나아가는 일에 데라가 걸림돌이 되자 하나님께서 그 생명을 거두어 가셨습니다.

 

행 07:04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의 아버지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지금 사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창 11:32).

 

제가 왜 아브라함 출생지와 가나안의 삶을 비교합니까?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사람은 때로는 믿음의 모험을 해야 함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믿음의 모험을 하는 성도는 세속의 삶을 뒤로합니다. 자기의 영혼을 세상과 분리합니다. 옛사람의 습관을 벗어버립니다. 고난받을 것을 각오합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은 고난의 시작입니다. 좁은 길을 따라 걸어가는 것 역시 고난입니다. 주님을 따르면서 고난이 없다면 좁은 길을 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흉내만 낼 뿐입니다. 좁은 문, 좁은 길은 선호하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가는 사람도 별로 없습니다. 재미도 없고 고생문이 환하게 보입니다. 그러나 그 끝은 영생입니다.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여 들어가는 길입니다.

 

좁은 문 좁은 길을 가는 것은 그 안에서 생명의 싹을 틔웁니다. 믿음의 불편함은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방법입니다. 불편함은 자기 절제를 통해서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길목입니다. 불편함은 내 안에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 가는 통로입니다. 이 일에 믿음으로 집중하시기 바랍니다.

 

잠 14:12 어떤 길은 사람이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교회 안에도 어렵고 힘든 일을 기피 하는 현상이 계속 높아갑니다. 거룩한 부담 없이 편하게 믿으려는 풍조가 늘어갑니다. 희생하고 헌신하는 모습은 점점 줄어갑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믿음은 전혀 아닙니다. 신앙이 변질해가는 모습입니다.

지금, 이 시간 나는 어느 길로 가고 있는가? 제대로 잘 가고 있는가를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려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먼저 나는 좁은 문 좁은 길을 가는 사람인가? 아니면 믿음으로 좁은 문 좁은 길을 가는 사람인가를 잘 돌아보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