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단/2021년 말씀

비전은 소원의 항구로 인도합니다(시 107:23~32).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21. 1. 9. 0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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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인 1597년 7월 14~16일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이 거제시 앞바다 칠천량(漆川梁) 해전에서 일본 수군에게 궤멸당하였습니다. 원균을 비롯해 전라 우수사 이억기, 충청 수사 최호 등이 전사했습니다. 이에 선조(宣祖) 왕은 조선 수군을 폐지할 계획으로 도원수 권율의 육군에 예속하게 했습니다.

조선 시대 수군이 존망의 갈림길을 맞은 셈입니다. 그리고 선조는 백의종군하던 이순신 장군에게(1545.4.28.~1598.12.16)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를 맡으라고 하달하였습니다.

군선도 군사도 군량도 무기도 제대로 없는 상황입니다. 이때 이순신 장군은 칠천량 해전에서 달아난 경상 우수사 배설이 숨겨놓은 널빤지로 지붕을 덮은 전투용 판옥선(板屋船) 12척을 찾아내었습니다. 반면 일본군 선단은 300여 척 대선단입니다.

 

이순신 장군은 왕에게 절대 수군을 폐지하면 안 된다는 장계(長計)를 이렇게 올렸습니다. 신에게는 아직 열두 척(隻)의 배가 있습니다(今臣戰船 尙有十二). 비록 전선의 수가 적지만(戰船雖寡) 미약한 신이 죽지 않고(微臣不死則) 있으니 죽을 힘을 다해 싸운다면(出死力拒戰) 적이 감히 우리를 얕보지 못할 것입니다(不敢侮我矣).

불가능 같은 상황을 가능으로 전환할 수 있다는(Can do) 각오입니다. 이순신 장군의 임전무퇴 정신은 이 시대에도 필요합니다. 김삼일 가족의 믿음에도 적용할 수 있는 정신입니다.

누구에게나 도전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이순신 장군과 같은 불굴의 정신이 있다면 무슨 일이든 감당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마음에 어떤 비전이 있습니까? 그 비전을 믿음으로 단장했습니까? 소원을 이룹니다. 그래서 말씀 제목을 「비전은 소원의 항구로 인도합니다.」로 정했습니다.

 

 

 1. 비전(vision)의 배를 띄워야 합니다.

 

23 배들을 바다에 띄우며 큰 물에서 일을 하는 자는

 

시편 107편을 잘 보십시오. 이스라엘을 깊고 큰 바다를 오가며 장사하는 해상 무역인의 모습으로 비유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지형을 보면 바닷가와 접한 곳은 서쪽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서쪽에서 해상 무역을 하지 않습니다. 해안 지대 상당한 부분을 블레셋과 가나안 원주민이 장악하였기 때문입니다.

당시 이스라엘이 정착하던 곳은 산간 지대와 트랜스 요르단 지역입니다. 해상 무역을 하는 자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23절에서 이스라엘을 해상 무역업자로 비유합니다.

왜 이런 비유를 합니까? 이스라엘이 실제 해상 무역을 하지 않는데 말입니다. 말씀의 본래 의미는 이스라엘의 겪는 고난이 풍랑이는 바다와 같다는 시적(詩的) 비유입니다.

 

비록 지금은 어려움에 놓여 있을지라도 고난을 풀어가는 일에 믿음으로 도전하면 마침내 소원의 항구로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다는 뜻입니다.

우리 믿음의 가족에게 묻습니다.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만났습니까? 예수님을 주님으로 만나면 가슴에 벅찬 꿈이 일어납니다. 삶의 질이 달라집니다.

물질을 사용하는 방법, 시간을 활용하는 방법, 달란트를 사용하는 수준이 달라집니다. 김삼일 가족 여러분, 꿈을 꾸는 사람은 기대와 설렘으로 살아간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복음의 비전을 품은 사람은 그 비전이 인생을 이끌어 갑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꿈이 있었습니다. 로마에 가서 복음을 전하고 싶은 간절한 비전입니다.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 복음 전하고 싶다고 고백하였습니다(롬 01:15). 중요한 것은 꿈을 품었다고 해서 다된 것이 아닙니다.

비전을 실현하기 위해 삶의 지혜를 동원하고 행동으로 옮겨야 합니다. 가만히 있으면 복은 다가오지 않습니다. 교회를 일으켜 세우는 일에도 각자의 열정을 펼쳐야 합니다.

 

어느 치킨집 사장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지금은 코로나바이러스 19로 전 국민이 힘들다고 하지요. 이 치킨집 사장도 말할 수 없도록 어려웠습니다. 더운 여름철이 되면 주말 아니라도 치킨에 맥주 한잔하려는 손님으로 가게 안 테이블이 가득 찼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가게를 찾아오는 손님이 확연하게 줄었습니다.

그나마 배달 손님이 있기에 가게 문을 닫지 않고 견딥니다. 그러자 치킨집 사장은 배달 손님을 더 늘리기 위해 고민하다가 전에 TV에서 본 이연복 중화요리 요리사가 소개한 외국 경험담이 떠올랐습니다.

그 프로그램에 이연복 씨 이야기가 나옵니다. 외국에서 푸드트럭을 운영하면서 손님이 없을수록 열심히 요리를 만들어 냄새를 풍겼습니다. 결국, 그 냄새 때문에 손님이 많이 왔다고 합니다. 

 

치킨집 사장도 그 경험담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한가한 시간에는 튀긴 치킨을 몇 마리 들고 아파트로 가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복도를 계속 왔다 갔다 했습니다. 그렇게 며칠을 계속했지만, 주문이 더 들어오지 않습니다. 결국 몸은 점점 힘들어져서 회의감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포기할 것이 아니다. 더욱 열심히 다니자며 자기 다짐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치킨 주문이 늘기 시작하더니 마침내 정상화 되었다고 합니다. 

꿈을 품고 나아가는 길은 포기만 안 하면 됩니다. 깊은 바다에 배를 띄운 것처럼 먼저 도전부터 하면 됩니다.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하면 됩니다(빌 04:13).

 

 

 2. 비전을 이루는 일에 고난의 풍파도 만납니다.

 

26 그들이 하늘로 솟구쳤다가 깊은 곳으로 내려가나니 그 위험 때문에 그들의 영혼이 녹는 도다.

 

깊은(תְּהוֹם 테홈) 곳으로 내려가나니. 하늘로 솟구쳤다는 말과 깊은 곳으로 내려간다는 말을 비교하는 문구입니다. 현실에서 겪는 위험이 롤로 코스터를 타는 것처럼 위험하다는 표현입니다.

이유 없이 불행한 사태가 돌발하는 곳이 바다입니다. 마치 바닥을 알 수 없는 깊은 바닷속으로 가라앉듯 사람도 끝을 알 수 없는 위험과 고통의 나락으로 떨어져 버린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인생길에는 자기의 의지와는 상관없는 어려움이 다가옵니다. 고난이 산더미처럼 밀려오는 때도 있습니다. 도무지 예측할 수 없는 불안과 두려움의 공포가 찾아오기도 합니다.

사람은 그런 곤경을 만나면 좌절합니다. 목숨을 잃을 때도 있습니다. 문제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고통은 인생을 무너뜨리는 길목이기 때문에 그 누구도 좋아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상처와 갈등만 남깁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문제를 기적을 일으키는 재료로 사용하실 때가 있습니다. 거센 풍랑은 고난의 바다와 같은 인생길에 수시로 찾아옵니다. 특별한 사람만 골라서 오지 않습니다. 세상이라는 배에 탄 사람은 어느 나라 사람이건 구분 없이 찾아옵니다. 이 풍랑은 재벌, 권세자, 서민 구분하지 않고 찾아옵니다.

 

영혼이 녹는(מוּג 무그) 도다. 녹는다는 말은 두려움이나 공포 때문에 그 용기와 활력을 잃은 마음을 말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영혼이 파선하는 절망 속에 계속 머물러야 합니까?

탈출해야 합니다. 탈출하는 비결은 세상이 감당 못 하는 믿음(히 11:38)입니다. 예수님은 겨자씨 한 알의 비유를 통해 열두 제자를 훈련하신 후의 일을 아십니까?

 

저물 때쯤 건너편 동쪽 거라사(막 05:01) 지방으로 갈 때의 일입니다. 예수님과 열두 제자가 배를 타고 갑니다. 그런데 갑자기 큰 광풍이 일어나면서 물결이 배에 차고 들어왔습니다.

배가 침몰할 지경에 놓였습니다. 제자들은 배에 고인 물을 쉴새 없이 퍼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힘을 모아 물을 퍼내기에는 더는 감당할 수 없는 한계상황입니다. 결국은 제자들이 주무시는 예수님을 깨워 아룁니다. 선생님 큰일 났습니다. 우리가 지금 파도에 휩싸여 죽게 되었습니다. 제발 살려 주십시오.

 

막 04:39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 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예수님께서 단번에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지금 우리 시대는 난관과 같은 상황을 하나님의 안목으로 보고 풀어가는 자를 필요로 합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문제를 긍정의 사고로 봅니다. 직면한 문제에 대해서도 긍정으로 반응합니다. 문제를 기쁨으로 만들기 위해 고심합니다.

김삼일 가족 여러분, 문제를 친구로 삼고 배움의 기회로 여기는 사고력이 필요합니다. 성경은 문제 때문에 예수님을 만나고 기적을 경험한 사람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사람은 그 누구나 고난의 풍파와 함께 갑니다. 힘들고 고통스러운 현장이 늘 따라다닌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누구를 만나느냐가 중요합니다.

특별히 우리 김삼일 가족 여러분은 믿음의 사람 옆에 있는 것을 좋아해야 합니다. 그래야 문제를 같이 나눌 수 있고 같이 해결할 수 있습니다. 좋은 사람, 믿음의 꿈을 품고 사는 사람과 교제하는 것을 사모하십시오.

성령님이 함께하는 사람의 공통점은 사람을 살리려는 비전을 품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은 생명의 영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비전을 품은 분과 함께하면 고난의 풍랑을 이겨냅니다.

 

 

 3. 비전은 소원의 항구로 인도합니다.

 

30 그들이 평온함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중에 여호와께서 그들이 바라는 항구로 인도하시는 도다.

 

바라는 항구(מָחוֹז 마호즈). 항구가 정확히 어떤 곳을 말합니까? 바라는 즉 소원이라는 말과 연결해 보면 항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소원의 항구는 세상 관점에서 보면 우리가 믿음으로 섬기는 교회와 일터와 복된 터전으로 보면 됩니다. 신령한 면에서 마지막 날 가서 누릴 천국을 의미합니다. 결국, 우리가 가야 할 소원의 항구는 장차 가서 누릴 천국임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면 우리는 이 소망의 항구에 대한 그리움이 생생하게 일어납니까?

내일의 소망이 없는 사람은 기대할 수 없지만 우리는 이곳을 향해 날마다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비전을 품고 나아가는 자를 마침내 소원의 항구로 인도해 주십니다. 이 항구는 우리가 가야 하는 비전의 목적지 천국입니다.

 

우리 믿음의 가족은 신령한 항구를 향한 설렘이 있어야 합니다. 장차 심판대 앞에 서게 될 때를 내다보면서 믿음의 꿈을 안고 나아가야 합니다. 묵시가(vision) 없으면 백성이 방자하게 행합니다(잠 29:18).

꿈이 없는 자는 오만불손하다는 뜻입니다. 사람은 밥을 먹으며 사는 존재 이전에 말씀과 비전을 먹고 사는 존재입니다. 이런 비전을 품은 자에게는 생기가 돋습니다. 소원의 항구로 인도함을 받습니다.

 

김삼일 가족 여러분, 다음 세 가지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지나간 시간과 한번 사용한 말과 놓친 기회는 되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 말입니다. 또 우리의 삶에서 확실하지 않은 일 세 가지도 있습니다.

성공과 꿈과(Dream) 행운입니다. 어쩌면 신기루일 수도 있습니다. 많은 사람이 고통에 빠지는 이유는 확실하지 않은 일에 매달리기 때문입니다. 반면 비전을 품은 사람은 이룰 수 있는 일과 이룰 수 없는 일을 잘 구분하는 지혜가 있습니다. 비전을 품은 자가 불러야 할 노래, 들어야 할 깃발, 외쳐야 할 구호가 있습니다.

 

비전을 품은 사람은 무엇보다 하나님의 음성 듣는 일에 귀를 기울입니다. 비전을 실현해 가는 사람은 고난 극복하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고난을 통해 성숙함을 이룹니다.

마침내 소원의 항구에 이릅니다. 애굽에서 총리로 큰 명예를 떨친 권세자 요셉을 보십시오. 세상 부귀영화에 마음을 두지 않았습니다. 가나안이 소원의 항구였기 때문입니다. 그가 임종할 때의 어떤 유언을 하였습니까?

 

창 50:25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시리니 당신들은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

 

이스라엘이 출애굽 할 때 모세가 직접 요셉의 유골을 가지고 나왔습니다(출 13:19). 모세의 광야 시절이 끝나자 여호수아가 가나안 정복 전쟁을 지휘하였습니다.

전쟁이 거의 끝날 무렵에 요셉의 유골을 세겜에 장사하였습니다(수 24:32). 가나안을 품은 지 415년 만에 소원의 항구에 도착한 셈입니다. 하나님의 비전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김삼일 가족 가족 여러분은 비전을 품은 자답게 소원의 항구를 향해 계속 순항하는 삶입니까?

아브라함은 부름을 받은 날부터 메시아의 조상이 되는 비전을 품었습니다(창 12:01~03). 그 삶의 발자취는 소원의 항구에서 누리는 신령한 즐거움 자체였습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매달리는 일에 하나님의 뜻이 임하면 소원의 항구에 도착하는 복을 받습니다. 거울 속의 내 모습을 보십시오. 치장한 모습이 아름답습니까?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

내면의 세계를 믿음으로 단장해야 아름답습니다. 김삼일 가족 여러분은 혹 지금까지 도전이 없는 나태한 현실주의자로 살아왔습니까? 감각 없는 불신 모습을 깨뜨리지 못했습니까? 과감하게 깨뜨립시다. 불신 영향력도 제어해 버립시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프랑스의 종교 사상가요 수학자인 파스칼(Blaiss Pascal 1623.6.19.~1662.8.19)이 이런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여기에 세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첫째는 내일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고 사는 사람이고, 둘째는 내일 매우 불길한 사건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 속에 사는 사람이고, 셋째는 내일 있을 결혼식을 기다리는 신랑 신부입니다.

이 세 부류 중 어떤 사람이 가장 아름다운 오늘을 삽니까? 오늘 말씀은 인생 여정을 바다의 풍랑으로 비유하였습니다. 바다는 끝없이 잠잠하다 어느새 광풍이 일어나고 성난 파도가 요동칩니다.

그러다 언제 그랬느냐는 식으로 금방 잔잔해집니다. 인생살이를 비유하는 데는 아주 적절합니다. 내일에 대한 비전은 내일 자체보다 오늘의 삶을 바꾸어 주기 때문에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이제부터 어떤 삶의 형태로 살기를 원합니까? 계속 환경의 지배 받기를 원합니까? 지식과 경험의 지배 받기를 원합니까? 아니면 신앙의 토대 위에서 살아가기를 원합니까? 큰 물결이 설레는 어둔 바다 찬송가 432장 가사를 생각해 봅시다.

 

➊ 큰 물결이 설레는 어둔 바다 저 등대의 불빛도 희미한데 이 풍랑에 배 저어 항해하는 이 작은 배 사공은 주님이라.

➋ 큰 풍랑이 이 배를 위협하며 저 깊은 물 입 벌려 달려드나 이 바다에 노 저어 항해하는 이 작은 배 사공은 주님이라.

➌ 큰 소리로 물결을 명하시면 이 바다는 고요히 잠자리라 저 동녘이 환하게 밝아올 때 나 주 함께 이 바다 건너가리.

[후렴] 나 두렴 없네. 두렴 없도다. 주 예수님 늘 깨어 계시 도다. 이 흉흉한 바다를 다 지나면 저 소망의 나라에 이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