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단/2017년 말씀

내게도 하늘 문이 열립니까?(마 03:13~17)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17. 6. 10. 14:57
728x90

제가 사역을 하던 초기 때만 해도 시골교회에서 장례식이 나면 주로 상두군들이 상여를 메고 장지까지 가고 그 뒤를 유족과 조객들이 따랐습니다. 이때 상여를 이끌고 나가는 분이 부르는 찬송이 몇 곡 있는데 그 가운데 반드시 부르는 찬송이 606장입니다. 후렴 부분을 보면 이렇게 나옵니다.

며칠 후 며칠 후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반복).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라는 찬송 때문에 강의 이미지가 죽음의 의미로 연상되기도 합니다. 몇 년 전에 성지순례를 하면서 요단강을 둘러보게 되었는데 이 강을 기준으로 이스라엘과 요르단이 구분되는 국경선 역할인 것을 보았습니다

 

요단강도 북쪽 끝에 위치한 헐몬산에(2,852m)서 발원하여 훌라 계곡을 따라 갈릴리 호수와 연결되는 28km부분을 상부 요단강이라고 부릅니다. 이어서 갈릴리 호수 남쪽 하구에서 요단강 계곡을 따라 사해(해저 380m)에 이르는 곳을 하부 요단강이라고 부르며, 전체 길이가 약 250km 정도 됩니다.

요단강 폭은 몇 미터 정도 되는 아주 좁은 곳부터 20-30m정도 되는 곳도 있는데 지금은 예수님 시대에 비해 현저하게 좁아진 강으로 변했습니다. 그러면 요단강이 우리에게 왜 죽음과 관계가 된 이미지로 인식되어 있는 지를 성경을 참조하면서 살펴보겠습니다.

 

 

  1.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십니다.

 

13 이때에 예수께서 갈릴리로부터 요단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려 하시니.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부터 여리고 지역의 요단강(베다니 지역 요단강 동편, 01:28) 한 곳에서 세례 사역을 하는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가셨습니다. 세례란 죄 있는 사람이 죄를 씻기 위해 받는 것 아닙니까?

그러면 예수님은 죄가 없으시므로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세례 요한이 깜짝 놀라 말을 합니다. 아니 내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어떻게 내게로 오십니까?(14) 라고.

자기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시는 주님을 보고, 세례 요한(이후 요한)이 황송해 하면서 만류하는 말을 보면 요한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말입니다. 왜냐하면 요한이 베푸는 세례는 죄에 대한 회개의 세례로서, 이 세례는 죄 없으신 예수님이 받아야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요한이 예수님으로부터 받아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메시아이신 주님이신데 왜 요한이 베푸는 회개의 세례를 받으려고 하시는 겁니까? 죄에 대해서 무관하신 예수님께서 무엇 때문에 회개의 세례를 받으려 하시는지 그 의미를 좀 더 살펴보겠습니다.

03:11절을 보면 요한이 자기에게 세례를 받으러 온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당신들에게 회개의 물세례를 베풀지만 내 뒤에 오시는 주님은 성령과 불로 세례를 베푸십니다.

요한의 세례는 죄인임을 고백하면서 구원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것이고, 예수님의 세례는 죄를 씻는다, 구원 얻는다는 구원의 여부가 결정되는 세례입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예수님 세례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여러 다양한 신학적 견해들이 있지만 두 가지의 세례, 동일시의 세례와 모범 세례로 구분을 합니다.

 

동일시 세례.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죄인인 인간과 동일시(identity) 되사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우리를 대신하여, 우리와 같은 죄인의 자리에서 세례를 받으신다는 의미입니다.

 

모범 세례. 예수님을 따르게 될 제자들이 세례로 신앙을 고백하고, 따라 오도록 온전히 모범이 되고자 세례를 받으신다는 의미입니다. 실제 예수님의 전 생애는 우리가 따라갈 삶의 모범임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이에 베드로는 이렇게 안내를 합니다.

 

벧전 02: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문제는 불완전한 인간인 우리가 과연 예수님의 모범을 제대로 따라갈 수 있느냐가 고민거리입니다. 여러분은 제대로 따라 갈 수 있을 것 같습니까? , 당연히 우리의 힘으로는 따라 갈 수 없지만 여기에 성령님의 역할이 있습니다.

예수님도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신 후 성령님이 임하셨습니다. 이어서 성령님께 이끌림을 받아 광야에서 40일 금식기도에 들어가셨고(04:01,02), 한평생 성령님 인도를 받으셨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도 성령님의 인도함을 받으면 주님 가신 길을 따라 갈 수 있습니다.

 

05:16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따라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2. 예수님은 의를 이루기 위하여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15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시니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요단강을 중심으로 기록된 일들이 성경에 많이 나옵니다. 구약에 29, 신약에 15 44회입니다. 이 가운데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사건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구약시대 여호수아가 이스라엘을 데리고 지금의 요르단에서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온 일이고(03:14~17), 둘째는 신약시대 예수님이 여기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일입니다.

서두에서 장례식 때 부르는 찬송이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여호수아의 인도로 이스라엘이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에 들어왔을 때 이 가나안은 아브라함 때부터 하나님이 주시겠다고 약속한 땅입니다.

그리고 가나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경계선에 해당하는 요단강을 반드시 건너야 했습니다. 그러므로 가나안은 영적 의미에서 천국으로 상징되었고, 요단강은 죽음의 저편으로 상징되었습니다.

따라서 요단강 건너가 만나리. 라는 찬양은 천국에서 죽은 자와 만난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에 장례식 때 성도의 가정에서는 꼭 부르는 찬송이 되었습니다.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 예수님은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이라고 말씀을 하십니다. 예수님은 죄가 있어서 세례를 받는 것이 아니라 죄인인 인간의 죄를 대신하신 대속의 주님으로서 죄인의 자리에 서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은 인류의 죄를 예수님께 담당하도록 계획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이신 예수님이 죄인으로 헤아림을 받아 채찍을 맞고, 찔림을 당함으로 대신 죄 있는 인간들을 구원을 얻도록 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입니다(53:01~12).

이것이 바로 인류를 구원하고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기 위한 성부 하나님의 뜻입니다. 요한도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의를 이해하였습니다. 의는 구원이라는 말과 같으며, 예수님이 세례를 받는 것은 인류 구원에 반드시 필요한 상징입니다

 

예수님의 세례 받으심은 보기에는 평범하고 당연한 것처럼 보이나 대단한 믿음과 순종이 뒷받침 되어야만 가능한 행동입니다. 왜냐하면 죄 없으신 주님께서 죄 있는 인간의 모습으로까지 자신을 한없이 낮추어야만 성립되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사람들의 오해와 의심을 사기에 충분한 행동입니다. 장차 메시아로서 천국 사역을 전개하는데 상당한 위험과 불이익이 따를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자신을 죄인의 위치까지 낮추시며 세례를 받으시자 하늘이 열리면서 주님을 영광스럽게 하시는 성령님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예수님에게 있어서 요단강 세례는 주님으로서의 공적 생애의 새로운 시작이었습니다. 사람들의 눈에는 불합리하게 보일지라도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해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이제 세례를 받는 것은 새로운 삶의 시작입니다. 예수님은 요한이 베푸는 세례를 받기 위해 먼 갈릴리 나사렛에서 요한의 세례 사역의 현장 베다니까지 오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먼 길을 오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받으신 세례는 상징적인 의미로서 그렇게 하심으로 하나님의 모든 의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구원의 여명(黎明)이 서서히 밝아 왔습니다. 예수님의 세례를 영적인 의미로 우리에게 적용시키면 어떻겠습니까? 우리도 천국 백성으로서의 새 삶을 살도록 알려주는 선언이 되어야 합니다. 동시에 우리 자신도 이제 새로운 삶을 지향하는 일상을 날마다의 삶에서 보여주어야 합니다.

 

 

  3.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지는 곳에 하늘 문이 열립니다.

 

16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곧 물에서 올라오실 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려 자기 위에 임하심을 보시더니.

 

인류의 대제사장으로서의 예수님의 공적 생애, 구원 사역의 출발이 세례 받으심으로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프로그램에 예수님이 순종하실 때 신비스러운 모습들이 서서히 나타납니다.


물에서 올라오실 새.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신 것은 완전히 물에 잠기는 침례(浸禮) 받으셨음을 표현하는 문장입니다. 그러나 세례이던 침례이던 그것이 꼭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이 모두가 상징적인 의미이기 때문이며 진정한 세례는 불세례입니다.

세례 그 자체가 지니는 영적 의미와 거룩한 정신을 외면한 채 세례냐 침례냐의 어떤 외적 의식만을 절대적 기준으로 삼지 말아야 합니다. 굳이 침례를 고집한다면 그것은 죄 씻음과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는 세례의 의미를 무시하는 형식주의 독선이 될 수 있으며, 계속 침례를 주장한다면 요단강에까지 가서 받아야 합니다.

 

하늘이 열리고. 성경의 여러 신령한 환상들(64:01; 01:01; 07:56; 04:01; 19:11)을 연상시킵니다. 동시에 신령한 영적 세계를 보여줍니다. 하늘이 열린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과학의 관점에서 보면 하늘은 열리거나 닫히는 세계가 아닙니다. 우주 전체가 하늘입니다.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하늘의 문을 열고 싶어서 애를 씁니다. 어떤 사람은 오랫동안 명상을 하고, 어떤 사람은 면벽을 하면서 5년이고 10년이고 도를 닦는데 그리하면 열릴 것 같습니까?

 

우리 믿음의 가족들, 모두 하늘의 문이 열리면 좋겠습니다. 신앙생활이 행복해지려면 우리의 마음의 문이 하나님을 향해 먼저 열려야 합니다. 그리고 하늘 문이 우리를 향해 열려야 합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믿음의 문이 닫혀 있으면 행복한 신앙생활이 될 수 없고, 믿음의 능력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경건한 삶을 살며, 자신의 마음을 낮고 겸손하게 여는 자를 향해 하나님도 하늘 문을 열어 주실 줄 믿고 믿음으로 메어 달리십시오.

 

제주도의 관광 상품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올레길이 있습니다. 올레길이란 큰 길과 연결되어 있는 골목길, 작은 길을 말하는 제주도 방언입니다. 큰 길, 넓은 길은 우리 모두가 추구하는 성공의 길인 것은 분명합니다. 성공의 길을 연결하기 위하여 성공 프로그램을 잘 짜야 합니다.

동시에 우리에게는 하늘 문이 열리기 전에 하늘 문으로 연결되는 믿음의 올레길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미 2천 년 전 하늘의 문을 여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하늘의 보화를 이 땅의 우리에게도 허락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해 겸손히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의 머리 위로 하늘이 열렸습니다. 이 현장은 구원받은 성도들, 성령님의 불세례를 경험한 사람에게는 열릴 수 있습니다. 에스겔에게도 하늘이 열렸습니다. 스데반에게도 열렸습니다. 바울에게도 열렸습니다. 사도 요한도 열린 하늘을 계속 보았습니다. 순교자들이 용감하게 죽어갈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열린 하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빌라델비아교회를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03:07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가 이르시되 08 볼 지어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 가운데 빌라델비아교회는 말씀을 지켰고, 끝까지 주님을 배반하지 않았으며 그 결과는 하늘 문을 여는 능력 있는 교회가 되었습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뉴질랜드의 원주민 피지 족들의 생활을 연구한 한 선교사의 기록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원주민들이 사는 동네 한 가운데에는 죽이는 바위(Killing Stone)가 있습니다. 이 죽이는 바위는 아주 무서운 사형 방법으로서 중죄인에게는 큰 바위에 묶어놓고 머리를 짓눌러서 죽이는데 흐르는 피를 닦아내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이 참혹한 광경을 보여줌으로써 죄에 대한 경고를 대신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곳에 온 선교사가 사람들에게 전도를 해서 예수님을 믿는 자에게 세례를 줄 때, 이 죽이는 바위 앞에서 주었습니다. 바위에서 피를 보게 하면서 옛 사람은 이렇게 죽었습니다. 라는 세례의 의미를 지혜로운 방법으로 인식시켰다고 합니다. 이 선교 방법은 대표적인 케이스로 알려져 있습니다.

 

예수님은 왕으로 이 세상에 오셨지만 종처럼 섬기는 삶을 사신 분이심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이제 우리는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이상 예수님처럼 섬기는 삶, 희생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섬기는 자와 종 된 자는 자기주장이 없습니다. 주인의 생각을 드러낼 뿐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의 모습을 돌아보십시오. 다른 사람을 섬기는 자로서 온전히 자신을 낮추며 살아갑니까? 나를 내세우려고 다투지 맙시다. 그저 나는 죽고 그리스도만 내 안에서 존귀하게 되기를 원한다고 하였던 바울의 메시지를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은 왕이면서도 종처럼 사람을 섬겨주셨는데 주님을 섬기는 사람들을 행해 내가 섬기지 못할 이유가 있습니까?

 

06:03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0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