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단/2017년 말씀

선한 일이 최고의 가치관입니다(전 03:10~12).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17. 5. 27. 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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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명망 있는 시인 푸시킨(Александр Сергеевич Пушкин, 1799.6.6.~1837.2.10.)의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라는 시()가 있습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 말라. 슬픔의 날을 참고 견디면 머지않아 기쁨의 날이 오리니, 현재는 언제나 슬프고 괴로운 것, 마음은 언제나 미래에 사는 것, 그리고 또 지나간 것은 항상 그리워지는 법이니.

 

제가 중학교에 다닐 무렵 웬만한 학생은 다 암송하던 시입니다. 당시 우리나라의 경제가 워낙 열악하였기에 내용이 상당히 마음에 와닿은 것 같습니다.

요즘은 이런 시를 암송하는 학생도 드뭅니다. 굳이 암송할 필요도 느끼지 못합니다. 배고픈 맨발 투혼이 없기 때문입니다.

욥은 사람은 고생을 위해 태어났다고 했습니다(05:07). 사람이 세상에 사는 동안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고난은 피할 수 없는 불청객입니다.

 

이런 삶에서 불행의 원인을 하나님께 돌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왜 내게 이런 고난이 찾아오는가? 하나님께서 계신다면 세상은 왜 이리 불의한가? 세상은 왜 이리 공평하지 못한가? 하며 원망의 자리를 택합니다.

반면 믿음의 길을 가는 신자는 고난의 원인을 자기에게 돌립니다. 대신 하나님께서 주신 선한 사명에는 목숨을 겁니다. 그래서 말씀 제목을 선한 일이 최고의 가치관입니다.로 정했습니다.

 

 

1. 사람은 노고를 겪으며 살아갑니다.

 

10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노고를 주사 애쓰게 하신 것을 내가 보았노라.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노고를 주셨다는 말씀입니다. 노고[עִניָן 인얀 勞苦]가 무엇입니까? 사람이 어떤 일을 이루기 위해 고생하는 모습을 말합니다. 사람이 사는 동안 좋은 일만 겪는 것이 아니라 원치 않는 고난도 겪습니다. 환난도 겪습니다.

그만큼 인생살이가 만만치 않다는 뜻입니다. 물론 내가 하는 대로 일이 잘 풀리면 좋겠지만 어디 그게 마음대로 잘 됩니까?

 

오히려 현실은 꽉 막힌 절벽과 같아 한숨 나올 때가 많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상심하거나 고민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 노고의 길은 아담의 후손인 우리가 감당해야 하는 길입니다. 하나님께서 선악과로 인해 죄를 지은 아담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03:19). 본래 사람의 출발점은 흙수저 인생입니다. 금수저 인생과 자기를 비교해보니 고달픈 것이지 사실 수고를 하는 것은 마땅히 하여야 할 일입니다

기독교인의 노동관은 성경의 정신을 참고해야 합니다. 진실한 기독교인은 노동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신성하게 여겨야 합니다.

 

장 칼뱅은 성경의 원리에 따라 열심히 일한 만큼 개인의 사유재산을 축적할 수 있는 원리 즉 자본주의의 기초 사상을 세웠습니다.

그러므로 돈을 버는 일도 즐겁게 정직하여야 합니다. 각자 나름대로 돈을 잘 벌어서 헌금도 하고, 저축도 하면서 인생을 즐기는 것이 육신 생활의 기본 원칙입니다.

 

많은 신자가 착각하는 것 하나가 하나님은 좋은 것만 주신다고 믿는 생각입니다. 반면 원치 않는 것을 경험할 때 내가 믿음이 없어서 당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원하든지, 원하지 않든지 간에 자기의 계획대로 우리 인생에 슬픔과 기쁨이 교차하도록 모든 일이 진행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의 인생길에 눈물도 경험하고, 배반도 경험하고, 미움받는 것도 경험하고, 때로는 내가 잘못해서 쓰라린 실패를 경험할 때 실패도 허락하십니다.

 

사 45:07 나는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들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

 

사람은 모두가 하나님의 선하신 예정과 섭리 가운데 살아갑니다. 그리고 우리 가운데 고통을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좋은 일을 만나든, 궂은일을 만나든 이 모든 일을 하나님께서 주시는 일이라고 여기고 믿음으로 감당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역사가 따를 것입니다. 살아가면서 일이 잘 풀린다고 좋아하고, 잘 안 풀린다고 실망하지 마십시오.

비가 온다고 불평하지 말고, 폭풍이 친다고 원망하지 마십시오. 비가 오면 비의 노래를, 폭풍이 치면 세찬 바람의 노래를 연주하면 됩니다.

하나님은 꼭 잘 풀리는 결과를 통해서만 일하시지 않고, 잘 안 풀리는 과정을 통해서도 일하시며, 잘 풀려도 주님과 멀어질 수 있고, 안 풀려도 주님과 동행할 수 있습니다.

 

 

2. 사람은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11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들에게는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하나님은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사람에게만 영원한 생명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인 생명체들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둘 때 우리의 삶이 가치가 있습니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신자만이 신령한 것을 알고, 얻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애지중지하는 반려동물도 영혼이 없고, 신령한 것을 알지 못하는 이상 가족과 같은 대우를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사랑하고 아끼다 죽으면 좀 슬퍼하면 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그 마음으로 장래의 생활을 잘 준비할 시간을 주셨습니다. 사람에게는 공통이 있습니다. 어머니의 태로부터 났다가 결국 죽어서 장지로 갈 때 빈손으로 가는 일입니다.

 

이 일은 대재벌도, 막강한 권력자도, 그 누구도 같습니다. 더러는 죽은 자의 몸과 손에 돈과 금과 보석 등을 가득 넣어주지만, 그 같은 행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가진 가장 큰 복이 무엇입니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입니다. 사람이 세상을 사는 동안 돈을 아무리 많이 벌어도, 그것으로 만족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왜 만족을 누리지 못합니까? 사람은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 때문입니다. 세상 것을 아무리 쥐여주어도 갈증만 느낍니다. 또 재물의 속성상 만족이 없습니다. 오히려 지루함 때문에 고통을 느낍니다.

 

개는 종일 우두커니 혼자 있어도 지루해하지 않습니다. 개밥만 적당하게 주면 잠도 잘 잡니다. 거기다 주인이 좀 관심을 주면 생명도 내어놓습니다. 일생을 그렇게 살아도 불평하는 개가 없습니다. 자살하는 개도 더욱 없습니다.

금붕어도 좁은 수족관 안에 두어도 종일 움직이며 지냅니다. 지루해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람은 편한 것을 좋아하면서도 계속 편하면 못 견딥니까?

 

왜 많은 것을 가졌는데도 만족을 누리지 못합니까? 왜 무엇을 끝도 없이 추구하는 욕심을 위해 치열하게 투쟁합니까? 이유는 끝없는 욕심의 웅덩이가 파여 있기 때문입니다.

이 욕심의 웅덩이를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메꾸지 못하면 계속 모자라므로 살아갑니다.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우리의 삶에 채워질 때 비로소 만족함을 누릴 수 있습니다.

 

빌 04: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2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우리가 마지막 날 심판대 앞에 섰을 때 우선 질문이 무엇일 것 같습니까? 세상에서 얼마나 벌었느냐입니까? 주님의 나라를 위해 얼마나 드렸는가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잠깐 지나는 세상을 지혜롭게 삽니다. 무엇보다 물질 문제에 있어서는 더욱 지혜로워야 가치 있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딤전 06:07 우리가 세상에 아무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08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3. 선을 행하는 것이 최고의 가치관입니다.

 

12 사람들이 사는 동안에 기뻐하며 선을 행하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 없는 줄을 내가 알았고.

 

복을받는교회 가족 여러분, 선한 일이 무엇입니까? 생명을 살리는 일, 이웃을 돌아보는 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생활입니다.

우리는 무엇보다 선한 일을 분별하는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선한 일을 행한 후에는 즐겁고 행복함을 체험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일이 쉽지 않습니다.

육신의 즐거움이나 쾌락에 속하는 일은 육신의 욕망을 따라갑니다. 그러나 선을 행하는 일은 쉽게 잘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선한 일에 속하는 것은 사람의 일반적인 욕구와는 상반되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전하는 메시지를 읽겠습니다.

 

엡 02:10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우리는 선한 일을 위하여 지음을 받은 존재입니다. 선한 일을 하려면 자기 욕구를 제한할 줄 아는 억제력을 발휘해야 합니다. 그 억제력이 무엇입니까? 양심입니다. 이 양심은 때로는 자기의 육신에는 오히려 손해가 될 수 있습니다.

손해를 당하면서도 행한 후에 기뻐하게 된다면 그 사람 속에는 양심이 작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내면에 심어 놓은 이 양심이 동물에게는 없습니다. 동물은 선이란 것을 알지 못하며, 그것을 악과 구별하지도 못합니다.

 

동물은 자기 육체의 욕구를 참으면서까지 다른 동물을 이롭게 해 주지 않습니다. 자기 새끼를 지키기 위해 어떤 희생의 행동은 보여주어도, 그것은 종족 보존을 위한 본능입니다. 양심에 따른 행동은 전혀 아닙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자기를 희생하면서까지 다른 사람을 위해 선을 행할 줄 아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미국에서 제작된 쉰들러 리스트라는 영화가 있습니다(Schindler’s List. 1993). 1,100명의 폴란드 유대인 목숨을 구한 나치 사업가 오스카 쉰들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 영화에 유대인 수용소 소장인 독일군 장교 한 명이 나옵니다.

그는 수용소 바로 곁에 있는 자기의 관사 2층 발코니에서 소총을 들고 밑에 지나다니는 유대인들을 순전히 심심풀이로 아무나 쏘아 죽이는 악질 인물입니다.

하지만 주인공 쉰들러는 그를 잘 달래어야 그의 손에서 유대인들을 구해낼 수 있기 때문에 온갖 뇌물을 구해다 바치면서 친하게 지냅니다.

한날은 쉰들러가 수용소 소장에게 당신도 유대인에게 관용이라는 것을 베풀어 보시오. 너를 용서한다(I forgive you)는 말을 한 번이라도 해 보시오. 라고 넌지시 권합니다.

 

그래서 수용소장은 자기의 욕조를 깨끗이 닦지 못한 한 유대인 소년에게 너를 용서해 준다는 내뱉기 힘든 말을 억지로 한 번 합니다.

그러나 수용소장은 결국 소총을 들고 2층 발코니에 올라가서는 자기 막사로 돌아가던 그 유대인 소년의 뒷머리에 총을 쏘고 말았습니다.

왜 쏘았습니까? 수용소장은 선행에 따르는 기쁨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선행을 한 번 흉내 내 본 것뿐입니다. 믿음의 가족은 이웃을 위한 희생하는 삶을 기뻐하며 추구하십시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믿음의 사람은 주님과의 동행에서 오는 기쁨과 행복을 누립니다. 인생의 만족과 행복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데 있습니다. 사는 동안 인생살이가 좀 풀린다고 푹 빠지지 마십시오. 반대로 좀 꼬인다고, 잘 안 풀린다고 너무 괴로워하지도 마십시오.

오늘 말씀은 세상 그 어떤 사람도 고난의 길 수고의 길을 피해 갈 수 없음을 안내합니다. 우리 모두 행복의 길, 고난의 길을 가는 중입니다.

하나님은 꼭 잘 풀리는 결과를 통해서만 일하시지 않습니다. 꼬이며 잘 안 풀리는 과정을 통해서도 분명히 일하십니다.

문제는 지금부터 하나님께 믿음의 뿌리를 내려 동행하는 삶이냐?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신앙 생활하느냐? 입니다. 이 일을 사모하는 마음이 복된 마음이요 은혜받은 마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