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단/2017년 말씀

[종려주일] 예수님께서 흘리신 눈물(눅 19:38~44)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17. 4. 8. 2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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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호기심으로 이런 질문을 더러 합니다. 평소에 예수님은 웃으셨을 것 같습니까? 아니면 우셨을 것 같습니까? 신약성경에 예수님이 웃으셨다는 말은 한 번도 나오지 않지만 우셨다는 말은 세 번 정도 나옵니다.

세 번을 우셨다면 역으로 생각하여 예수님은 웃는 일도 많았을 것입니다. 근엄하면서도 웃으시는 모습으로 말입니다. 그러나 성경기자들은 굳이 예수님이 웃으셨다고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정말 웃으셨는지에 대한 간접적인 증거를 보겠습니다

 

07:34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너희 말이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실제 예수님은 세례 요한처럼 금욕적인 생활을 하지 않고, 일반 사람들처럼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며 자유로이 교제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혼인 집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을 때에 금식할 수 있느냐?(02:19)

예수님은 전도를 위해 세리들과도 가끔 어울리면서 포도주를 기울인 것을 보면 분명히 잘 웃으셨음을 짐작 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호탕하신 예수님이 세 번이나 우셨다고 성경에 나옵니다. 아마 성경기자들 입장에서는 예수님의 눈물이 특별하게 느껴져서 기록으로 남긴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첫 번째 우심은 나사로의 무덤을 방문하셨을 때이고(11:35), 두 번째는 예루살렘에 들어오셔서 예루살렘성의 미래를 내다보며 우신 일이고(19:41), 세 번째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 우신 일입니다.(05:07; 22:44) 예수님의 세 번의 눈물은 각각 의미가 있는 눈물입니다. 그 가운데 두 번째의 눈물이 아주 뜻깊은 눈물입니다. 그래서 제목을 예수님께서 흘리신 눈물. 로 정하고 말씀을 강론하겠습니다

 

 

  1. 주님께서 눈물을 흘리십니다.

 

 

41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우시며(εκλαυσεν 클라우센). 사람이 눈물을 흘린다는 것은 그 대상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많이 애를 쓴다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성을 보시고 우셨습니다. 여기 우셨다는 말은 크게 소리 내어 즉 통곡의 눈물을 흘리셨다는 뜻입니다. 예루살렘을 놓고 예수님이 통곡을 하실 정도로 우신 이유는 그 성안에 속한 사람들이 비참한 멸망당할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성곽과 성전 그 자체가 파괴될 것 때문에 통곡하신 것이 아닙니다. 물론 거대한 성전은 예수님 당시 46년 째(02:20) 짓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은 돈만 있으면 얼마든지 지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진정한 눈물 흘림은 이스라엘에게 곧 닥치게 될 멸망을 내다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눈물은 예루살렘의 장래를 애통해 하는 메시아의 눈물이며, 그것은 곧 하나님의 눈물이고 사랑의 눈물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의 현실은 로마로부터의 정치의 억압, 문화와 종교의 헬라화 내지 타락, 소수 특권층의 끊임없는 자기민족 착취로 암담하였습니다. 이런 현실을 예수님께서 보시고 예루살렘의 멸망을 안타까워하는 마음을 표현한 곳이 있습니다.

 

42 이르시되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 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여기 너도 는 예루살렘을 인격으로 비유하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은 예수님이 가져오시는 평화에 관한 일들을 알지 못하였고, 또 하나님의 구원을 거부하였습니다. 주후 1세기의 역사가 요세푸스(Josephus 주후 37~100)는 이렇게 전합니다.

예루살렘은 예수님이 통곡의 눈물을 흘린 지 40년 후쯤인 주후 70년 로마의 디도(Titus) 장군의 약 15만 명 병사에 의해 침략을 당하였습니다. 예루살렘을 5개월 동안 포위하였는데 그때 이스라엘 민족은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100만이 넘는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모였습니다. 사람들은 전혀 밖으로 나가지도, 들어오지도 못하게 갇혔고, 식량도 일절 반입되지 못하게 함으로 그 안에서 굶어 죽는 사람이 속출하였습니다.

얼마나 비참하였는지 시체가 산을 이루었고, 어머니가 자식을 잡아먹는 비참한 상태까지 되었습니다. 마침 성안에 들어오지 않은 사람들은 곳곳으로 흩어져 방랑자가 되었으니 예루살렘의 멸망은 인류 역사에 전무후무한 참상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민족의 참상을 예견하시고 울었습니다. 그러면 이스라엘이 왜 이렇게 비참한 멸망을 당해야만 합니까? 선지자들의 경고를 외면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의 기득권 권력은 오랜 세월동안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파송된 선지자들을 돌로 쳐 죽였고, 마지막에는 예수님까지 십자가에 못을 박았습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의 파멸, 곧 이스라엘의 멸망은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죽인 죄 값입니다. 그때 그들이 무엇이라 하였습니까? 스스로 죄 값을 자청하였습니다. 그때의 소리를 소리를 보겠습니다.

 

27:24 빌라도가 ...무리 앞에서 손을 씻으며 이 사람의 피에 대하여 나는 무죄하니 너희가 당하라. 25 백성이 다 대답하여 이르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 지어다 하거늘.

 

 

  2. 믿음으로 미래를 내다보면 눈물이 나옵니다.

 

 

09:01 어찌하면 내 머리는 물이 되고 내 눈은 눈물 근원이 될꼬. 죽임을 당한 딸 내 백성을 위하여 주야로 울리로다.

 

구약시대 인물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유다 왕국의 미래를 내다보면서 기도로 하나님 앞에 나아간 눈물의 선지자입니다. 지금 읽은 렘 09:01절은 예레미야의 심령의 상태를 가장 잘 설명해주는 구절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에 직면한 유다 왕국의 미래를 정확하게 예언하기 때문입니다.

09:01절 말씀을 보아 당시 유다는 예수님이 예언을 한 때의 죄악과 동일한 수준입니다. 영적 타락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초래하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라면 그 수준이 어디까지입니까? 파멸입니다. 나라가 망해서 포로로 잡혀간다는 말인데 예루살렘의 영적 상태가 어느 정도였는지 보겠습니다.

 

렘애 01:01 슬프다 이 성이여 전에는 사람들이 많더니 이제는 어찌 그리 적막하게 앉았는고. 전에는 열국 중에 크던 자가 이제는 과부 같이 되었고...

 

이런 참담함을 예레미야가 믿음의 눈으로 보니 탄식과 통곡과 눈물밖에 더 나오겠습니까? 안타까움의 피를 토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유다 왕국의 수도 예루살렘의 타락, 나라를 염려하는 사람이라면 어느 누군들 통곡과 눈물의 기도를 아니 드리겠습니까? 예레미야는 이렇게 울고 있습니다.

내 눈에 눈물이 물 같이 흘러내림이여(01:16), 또 예레미야가 얼마나 울었던지 내 눈이 눈물에 상하며 내 창자가 끊어지며 내 간이 땅에 쏟아졌으니(02:11).

 

성도 여러분은 언제 교회에서 웁니까? 누가 내 속을 뒤집어 놓을 때입니까, 아니면 내 명예가 손상되고 자존심이 상할 때입니까? 또 믿음생활의 나이는 점점 늘어가는 데 가슴이 메마르고, 눈물도 메말라 영적 감각이 식어진 것은 아닙니까?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주님 앞에서 직분을 받고 계속 감격의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까? 구원의 감격을 눈물로 누리고 있습니까? 그렇지는 않겠지만 혹 눈물이 완전 메마른 것은 아닙니까?

눈물이 메말랐다는 것은 그만큼 경건의 샘이 메마른 증거입니다. 직장이나 사업, 생업의 터전에 눈물이 뒷받침 되지 않으면 든든함이 보장되지 못합니다. 모든 것을 변화시킬 수 있는 에너지가 바로 하나님 앞에서 흘리는 눈물입니다. 지금은 우리 모두 자신을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국가를 위하여, 눈물을 흘려야 할 때입니다. 이 눈물만이 정치와 경제와 국가를 살립니다. 국가를 위해 희생을 한 한 사람을 소개하겠습니다.

 

이준 열사(1859~1907). 많이 들어 본 이름입니까?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2차 만국 평화 회담이 열리고 있을 때 고종의 특사로 파견된 인물입니다. 세계의 이목이 네덜란드에 집중되어 있었으므로 이곳에서 을사보호조약의 무효와 한국의 독립에 대한 열강의 지원을 요청하다 순국하였습니다.

이준 열사에 대한 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분은 상동감리교회 교인으로서 믿음생활을 하였는데 네덜란드로 가기 전 전덕기 목사님의 안수기도를 받았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장렬하게 잘 죽게 하옵소서.

안수기도 후 두 분은 서로 붙들고 펑펑 울었습니다. 마지막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 준은 평화회담 장소에서 일본의 만행을 알리고는 장렬하게 할복자살하여 온 세계를 놀라게 하였습니다. 민족을 위하여 울 수 있는 사람이 민족을 구합니다. 요즘 정치가 좀 불안정한 때에 제가 여러분에게 할복하라는 뜻은 절대 아닙니다. 오해 마십시오.

 

 

  3. 누구나 눈물을 흘릴 때가 다가옵니다.

 

 

43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날이 이를지라. 무슨 날입니까? 종말의 날입니다. 이 종말은 세상의 종말과 더불어 예루살렘 성전의 멸망이 다가오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는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여기서 원수들은 로마제국이고, 이 로마제국이 예루살렘을 멸망시킨다고 앞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예루살렘의 멸망이 세상의 종말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종말이 다가왔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문자적으로는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후 40년 만에 예루살렘성과 성전이 함께 파멸을 맞고 말았습니다.

 

당시 예루살렘 시민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대도시에 산다고, 또한 거룩한 성전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심이 대단하였습니다. 그러나 자기들 내면에 있는 불신앙, 영적 헐벗은 모습, 외식 등에 관한 것들은 일절 보지 못하였습니다.

반면 예수님은 예루살렘 시민들의 그런 불신앙의 모습을 보셨습니다. 믿음의 눈이 감긴 영적 소경의 모습도 보셨습니다. 그래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세상의 종말이 우리 앞에 다가 온 것입니다. 당연히 찾아오는 이 종말은 세상 모든 사람에게 해당이 됩니다.

각자가 그 종말이 언제일지 모르지만 잘 대비를 하여 믿음으로 살면 행복한 삶을 지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자기의 앞날을 마음대로 조정 할 수 있는 것처럼 여깁니다. 아주 자신 만만하게 말입니다. 정말 자신의 앞길을 정확히 예측하면서 살 수 있습니까?

 

10:14 .사람은 장래 일을 알지 못하나니 나중에 일어날 일을 누가 그에게 알리리요?

 

사람은 장래 일을 조금도 알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이 종말에 대하여 믿음으로 깨어있으면 대비는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종말의 때, 죽음의 때를 모르게 하셨습니다. 사람은 그 종말을 모르기 때문에 하루하루를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종말을 준비함에 있어서 성도는 긴장이 풀어지지 않도록 예고된 종말의 징조를 잘 분별하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죽음 후에는 반드시 심판이 있기 때문입니다(09:27). 또 심판대 앞에 설 때는 각각 선악 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습니다(고후 05:10).

 

솔로몬은 인생의 법칙을 이렇게 안내합니다. 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03:01,02). 다시 설명하자면 나도 죽을 때, 뽑힐 때가 있다는 말입니다. 아무도 내 인생의 죽음의 때, 뽑힐 때를 알려줄 사람이 없습니다. 이 같은 종말의 현실 앞에서 우리가 취해야 할 자세가 무엇입니까? 이와 관련한 주님의 말씀을 소개하겠습니다.

 

25:13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때를 알지 못하느니라.

 

, 내일 어떻게 될지 모르는 인생이기에 말씀과 더불어 깨어 있는 생활을 하여야 합니다. 믿음의 성도는 세상에서의 삶의 길이를 전세 기간과 같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인생 전세 기한이 얼마나 남아있는 것 같습니까? 금 같은 귀한 시간들을 아끼고 세월을 믿음으로 조절합시다.

종말의 때에 국가를 위하여 울고, 교회를 위하여 울고, 자신을 위하여 눈물을 흘립시다. 장래의 일들을 내다보지 않고 산다면 머잖아 통곡의 눈물을 흘릴 때가 올 것입니다. 장차 예루살렘이 망하게 될 것을 아시고 흘린 예수님의 눈물이 오늘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눈물 흘리며 기도해야 할 때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앞서 로마의 디도 장군이 주후 70년 예루살렘을 침략하였을 때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각지에서 모여든 사람이 백만 명이 훨씬 넘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때 예루살렘 성전은 기둥과 내부의 중요한 부분들이 금으로 장식되어 있었습니다.

이곳에 로마의 병사들이 횃불을 던지자 금이 녹아서 기둥이나 벽돌 틈 사이로 흘러들어 갔습니다. 이에 병사들이 그 금을 찾으려고 불타버린 조각들을 다 헤쳐 버렸는데 그 결과 예수님의 예언대로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아니하고 모두 파괴되고 말았습니다(44).

우리 모두에게 무엇이 문제입니까? 메마른 눈입니다. 웃고 즐기는 일에는 적극적인데, 감동적인 일, 정의를 부르짖는 일에는 눈물이 메말랐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데는 필요한 눈물이 있습니다. 조국을 위한 눈물, 교회를 위한 눈물, 이 눈물은 메마르면 안 됩니다. 예수님도 예루살렘 시민들에게 울라고 하셨습니다.

 

23:28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자신의 약함을 위해 울어야 하고, 허물을 고침받기 위해 울어야 하고, 이웃의 아픔을 위해 울어야 하고, 외로운 사람, 병든 사람을 위해 울어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서 허물없는 자가 있습니까? 눈물을 회복합시다. 예수님이 우셨던 그 울음을 우리도 찾읍시다. 예수님의 흘리신 눈물이 우리의 심장에서 흐르도록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