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5년 4월 5일 부활절 아침은 특별한 날입니다. 교회사의 측면에서 대한민국 교회가 시작된 출발점으로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때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Underwood, 1859.7.19~1916.10.12]와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Appenzeller,1858, 2,6~1902, 6,11] 부부가 인천에 첫 발을 내딛었습니다.
아펜젤러 선교사는 한국 땅에 첫 발을 내딛으면서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우리는 부활절 아침에 이곳에 왔습니다.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조선 백성을 얽어맨 흑암의 결박을 끊고 자유와 빛을 주시옵소서.
언더우드 선교사도 눈물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주님, 지금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메마르고 가난한 땅, 나무 한그루 시원하게 자라 오르지 못하는 땅에 저희를 옮겨와 심으셨습니다. 지금은 예배당도 없고, 학교도 없습니다. 그저 온갖 경계와, 의심과, 멸시와, 천대함이 가득한 곳입니다. 그러나 이곳이 머지않아 은총의 땅이 될 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두 선교사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가난한 한국 땅에 학교와 병원이 세워지고 나라 발전의 기틀이 마련되도록 역사하셨습니다. 한국은 예수님의 부활의 복음이 전해지면서부터 큰 복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 모두에게 은혜라는 복을 선물해 줍니다.
어두웠던 과거를 청산하여 희망이 넘치는 미래로 인도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오늘 우리의 옛사람을 깨뜨리고 새롭게 믿음으로 출발하는 축복의 통로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을 나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이런 제목으로 강론하겠습니다. 은혜의 시간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1.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면 평강이 임합니다. |
19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안식 후 첫날. 이 날은 지금 우리가 지키는 주일(Lord's day, 일요일)입니다. 이후부터 안식일의 기본 정신은 폐기하지 않으면서 신자들에게 큰 의미를 주는 날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초기에는 일요일을 주일로 지키면서 상당한 진통을 겪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날은 로마인들이 태양의 날(Sun day)로 지켜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A. D. 321년 콘스탄틴(Constantine, 274-337) 대제에 의해 일요일이 공휴일화 되면서 이 날이 의로운 태양(말 04:02)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날로 굳어져 우리는 지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부활의 소식을 듣고도 기쁨보다 오히려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꼭꼭 잠가 놓고 숨소리조차 죽이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두려워하면서 비밀리에 모여 있습니까? 마 26:56절에 보면 제자들은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에서 잡힐 때 뿔뿔이 흩어져 피신하였고, 산헤드린 공회로부터 위험한 인물로 혐의를 받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 놓였으니 당연히 비밀 아지트에 은신할 수밖에 없었고, 언제 군사들이 체포하러 들이닥칠지 모르는 처지이었으므로 문을 굳게 닫고 있는 것입니다. 평강이 있을지어다. 여기 평강은(εἰρήνη, 에이레네) 평화, 화평, 복지의 뜻으로서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인사말 שָׁלוֹם(살롬)에 상응하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은 길에서 사람을 만날 때(왕하 05:21), 헤어질 때(삼상 01:17; 행 16:36), 이웃을 방문할 때(마 10:12) 등 일상생활에서 기본으로 주고받는 인사입니다. 그러나 이 평강(εἰρήνη)이 주님께서 선포하실 때의 의미는 일상적인 인사의 범주를 넘어 세상이 주는 평강과는 다른 평안이라는 범주에서(요 14:27) 이해되는 말씀입니다.
요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두려움이 없고, 마음의 동요가 없는 상태의 평안은 오직 주님만이 주실 수 있는 평안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이 부활하셨음을 확인시켜주신 뒤에 또 말씀하십니다.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21)
이후 팔일을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주님께서 오셔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26).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제자들을 만날 때마다 계속 평강이 있으라고 말씀하십니까? 제자들에게 당장 필요한 것은 불안에서의 해방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관점에서 볼까요? 여러 나라들이 전쟁에 시달리고, 불안의 고통 속에서 시달리며 죽어가고 있습니다. IS라는 말 많이 들어 보셨지요? 이슬람국가(IS)라는 말인데 이라크, 시리아, IS 등이 서로 얽히고설켜서 전쟁함으로 많은 사람들이 불안 속에서 죽어가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화학무기까지 동원 된 상태입니다.
2월 13일 말레이시아 국제공항에서 김정남이 피살 된 후 북한의 많은 간부들이 불안 속에서 지낸다고 합니다. 나도 언제 저런 일을 당할지 모르는 두려움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도 대선을 앞두고 불안한 마음에 잠 못 이루는 후보들과 그 운동원들이 많습니다. 당선되면 좋지만 떨어지면 따르는 사람 모두가 잘립니다.
현재 경제 상황도 매우 불투명합니다. 지금 겪고 있는 심각한 상황들이 호전될 기미가 보이지 않아서 불안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런 분들 모두가 먼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라고 선언하신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평화입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평화입니다.
2.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면 기쁨이 회복 됩니다. |
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20절 말씀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마 14:24~27절을 먼저 살펴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제자들이 갈릴리 바다에서 밤 4경 쯤(밤을 5로 나눈 4번째 1시부터 3시까지) 바람으로 인해 파도가 휘몰아치는 상황에 휩싸여 있을 때입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다 위를 걸어 제자들에게 오시자 제자들이 유령이 나타났다고 무서워하며 막 소리를 지르는 패닉 상태에 빠졌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이르시되 안심하라 나니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염두에 두고 20절 말씀을 보겠습니다.
기뻐하더라. 예수님의 손과 옆구리의 상처를 본 제자들이 기뻐하는 이유는 이제는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입니다. 조금 전 까지만 해도 산헤드린 공회의 권력자들을 두려워하여 꼭꼭 숨어있는 제자들이었습니다.
이런 제자들에게 찾아오신 주님께서 먼저 손과 옆구리의 상처를 보여주셨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확증시켜 주시기 위함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의 그 상처를 보는 순간 두려움이 변하여 기쁨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제자들이 기뻐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서 입니까? 아닙니다.
제자들의 마음을 덮고 있던 슬픔의 그림자들이 걷혀졌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자기들을 짓누르던 절망을 털어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캄캄하던 앞길이 생명의 길로 다시 눈앞에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 새 힘을 얻어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복음 사역을 다시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조금 전 까지만 해도 든든한 배경이신 주님을 잃고 목자 없는 양같이 방황하던 제자들이었습니다. 이루 말 할 수 없는 고통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그 순간에 슬픔은 저 멀리 달아나고 대신 기쁨이 찾아왔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주님이 오신 그 현장에 한 사람이 빠져 있습니다. 디두모라 하는 도마(24~28)입니다. 우리는 이 사람을 일명 의심 많은 제자 이렇게 부릅니다. 주님께서 떠나시고 난 후 제자들이 도마를 만나 이렇게 말을 합니다.
25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이르되 내가 그의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예수님이 다녀가신지 팔일 째입니다.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혀 있는데 예수님이 또 오셔서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그리고 도마에게는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이 말씀 앞에 도마가 고백을 합니다.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 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손과 옆구리의 상처를 보여주신 것은 부활하신 주님의 몸과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주님의 몸이 동일함을 확인해 주시기 위함입니다. 주님께서 영으로만 부활했다거나 가현설을 주장하는 영지주의를 배격하는 중요한 단서가 됩니다.
오늘 부활절을 맞아 하늘의 기쁨이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주변에는 절망의 터널을 빠져나갈 돌파구가 보이지 않아서 힘들어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구 하나 도움을 청할 사람이 없어서, 절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어느 것에도 희망을 걸만한 것이 없어서 절망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부활절을 맞은 이 시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십시오. 다시 일어 설 수 있는 용기를 주십니다.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마침내 기쁨을 회복하게 해 주십니다. 아멘.
3.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면 성령님을 받습니다. |
22 이 말씀을 하시고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
성령을 받으라(Λάβετε πνεῦμα). 성령님을 영접하라. 생명의 영에 사로잡히라는 뜻입니다. 두려움에 빠져 있는 제자들에게 주님은 성령님은 어떤 분이시고, 성령님은 우리에게 어떻게 임하시는지를 생생하게 가르쳐 주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부어주시는 숨결은 제자들을 다시 살아나게 합니다.
마치 흙으로 지음을 받은 사람에게 하나님의 생기가 들어감으로서 비로소 살아 있는 생명체가 된 것처럼 (창 02:07) 살아나게 합니다. 성령님을 받는다는 것은 어떤 능력을 받거나 도구적인 수단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인격으로서의 성령님을 실존 속에 모신다는 생명 회복의 의미입니다.
당시의 제자들은 영적으로 죽어있는 상태였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을 목격하였고, 예수님도 떠났고, 유대 당국자들의 핍박으로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제자들에게 성령님을 받으라고 하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지상명령으로 주신 복음 전파의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입니다. 성령님과 동행하여야 식어진 열정이 회복되고, 천하 만민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에너지가 발산됩니다.
예수님의 승천을 지켜 본 제자들이 예수님의 분부대로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기도하던 중에 바람과 같은 성령, 불과 같은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습니다(행 02장). 그 결과는 각기 방언을 하면서 열방에 나가 생명의 복음을 전하다 마지막에는 순교자의 길을 갔습니다.
그러면 문을 굳게 닫고 두려워하는 제자들의 모습과 우리의 모습을 비교해 봅시다. 무기력해 있던 제자들의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은 아닙니까? 우리는 겉으로 보기에는 예루살렘 다락방의 한 집에 숨어 있는 제자들처럼 그렇게 무기력해 있지 않습니다. 도망자도 아닙니다.
오히려 의기양양 합니다. 우리가 외적 면에서는 좀 그럴듯하게 보일지 모르나 속사람은 아주 작은 일에도 두려워합니다. 절망도 합니다. 앞으로 한발자국도 제대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영적인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흔들리고 있습니다. 한없이 무기력 합니다.
그래서 오늘 부활주일 예배의 현장에 예수님이 오셔야 합니다. 제자들에게 임하신 성령님을 우리가 인격으로 만나야 합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눈물을 닦아주시며, 위로하시고, 고통의 멍에를 함께 져주시고, 상처를 치유하십니다. 모든 염려와 근심은 다 주님께 맡깁시다.
베푸신 은혜를 감사하면서 부족한 것은 회개하고, 위로부터 임하는 능력을 받아 주님이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합시다. 성령님께서 우리의 범사의 생활에 인도자가 되게 합시다. 제자들이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보혜사 성령님과 동행함으로 새 힘을 얻었던 것처럼 우리도 부활의 영으로 충만해 져야 합니다
행 01:0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평강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사명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증인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려면 은혜의 자리에 있어야 합니다. 약속의 말씀을 붙들어야 합니다. 삶 속에서 부활의 능력을 경험할 뿐 아니라 증인의 사명을 감당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복된 믿음으로 전환하여야 합니다.
요 20: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 되도다 하시니라.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
미국의 한 교회학교에서 있었던 이야기입니다. 성경 공부를 하다가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물었습니다. 지금 살아 있는 사람들 중에 너희들이 가장 존경하는 사람을 말해 보아라. 그러자 학생들은 생각나는 대로 말을 합니다. 부시 대통령을 가장 존경합니다. 워렌 버핏을 좋아 합니다. 오프라 윈프리가 최고입니다. 모두가 자기가 좋아 하는 사람을 말하는데 한 학생은 이렇게 말을 합니다.
나는 예수님을 가장 존경합니다. 그때 옆에 있던 학생이 손을 붙들어 내리면서 말합니다. 선생님께서 살아 있는 사람 중에서 말하라고 그랬잖아? 그 학생이 손을 다시 올리며 말합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살아 계셔. 예수님은 영원히 살아계셔. 예수님은 영원히 살아계신 분이십니다.
유머로 들으시면 됩니다. 한국 남자들이 다 무기력하게 죽어가고 있다고 합니다. 그 이유를 살펴보니 한약 한 첩을 잘 못 먹어서 라고 합니다. 그 한약은 바로 구기자가 들어간 한약인데 구기자 한 첩을 먹으므로 다 구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느 아내가 남편에게 뭘 먹이면 구겨져 있는 인생을 활짝 펴지게 할 수 있을까 생각하다가 한 가지 간식을 발견했습니다. 바로 피자 한판입니다. 피자 한판을 시켜 먹었더니 인생이 펴졌다고 합니다. 우리의 믿음이 구겨져 있습니까? 펴지게 합시다. 피자 한판을 시켜 먹어서라도 믿음이 활짝 펴지게 합시다.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를 세상으로 파송하셨습니다. 내가 부활의 주님을 믿는다면, 이제부터 내가 만난 예수님, 나를 변화시킨 예수님, 내 삶을 바꿔준 예수님, 내 인생을 바꿔준 예수님, 이 예수님을 전하는 사명자로 살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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