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20년 차에 접어 든 한 여자가 남편에게 애정이 식은 것 같다고 불평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남편에게 교회 목사님을 찾아가 조언을 받으라고 독촉하였습니다. 남편은 그 말을 따랐고, 마침내 집으로 돌아오더니 아내를 번쩍 안아 들고 집안을 돌아다니기 시작합니다.
그러자 놀란 아내가 묻습니다. 목사님이 도대체 뭐라고 하신 거예요? 남편이 응, 당신이 바로 내가 짊어져야 할 십자가라고 하시더군. 예, 우리 모두에게 십자가가 있습니다. 고난으로 감당해야 할 십자가 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고난의 십자가를 지시면서 베드로를 통하여 그 흔적을 따라오라고 하셨습니다.
벧전 02: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인류를 사랑하셔서 이 땅에 오셨고 그 사랑 때문에 고난을 받으셨습니다. 그 사랑의 고난은 바로 우리를 위한 고난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 주님,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해 고난 받으셨으니, 그 사랑에 항복합니다.
그 사랑을 받아들입니다. 이런 기도가 나와야 합니다. 동시에 이제부터는 나도 주님을 위한 십자가의 길, 고난의 길을 가기를 원합니다. 이런 고백도 나와야 합니다. 오늘은 종려주일로서 말씀을 통하여 예수님의 남은 고난이 있습니다. 이런 제목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귀한 시간되기를 축원합니다.
1. 예수님은 환경의 고난을 택하셨습니다. |
고후 08:09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으로서 하늘과 땅의 주인이시기 때문에 무엇이든 부족함이 없는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가난하게 되셨습니다. 우선 가난한 마리아의 몸을 빌려서 태어나시되, 방을 구할 수 없어 말구유에서 나셨습니다.
그리고 공생애로 나설 때까지는 나사렛에서 자라셨습니다. 이 나사렛은 주전 2천년 경부터 사람들이 살던 곳으로서, 구약성경에는 이 지명이 한 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별반 내세울 것 없는 작은 마을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도 나사렛은 여러 곳에서 사람들로부터 소외된 가난한 동내로 묘사되고 있는데, 이는 당시 나사렛 사람들이 주로 토굴로 된 집에서 살았기 때문입니다.
이 나사렛에는 특별히 마리아 수태고지(受胎告知)교회가 있습니다. 마리아가 성령님에 의해 예수님을 잉태하였음을 천사 가브리엘이 알려 준 일을 기념하는 교회입니다. 중근동에서 가장 큰 삼각지붕의 대성당으로 프란체스코 가톨릭수도회 소속의 성당입니다.
제가 이 교회를 거론하는 것은 외형의 웅장함 때문이 아입니다. 이 교회의 지하에 마리아가 수태고지를 받았을 당시 살았던 곳을 짐작하게 하는 굴로 된 집이 있기 때문입니다. 성지순례 때 많은 사람들이 마리아 수태고지교회를 찾는 이유가 이 굴 집 때문으로서, 예수님도 공생애 전까지 그 동네 사람들처럼 그렇게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이 나사렛이 별 볼일 없는 마을임을 짐작하게 하는 일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갈릴리 바닷가에서 어부였던 빌립을 제자로 불렀을 때의 일입니다. 예수님의 부름을 받은 빌립은 즉각 친구 나다나엘에게 달려가서 소식을 전합니다(요 01:45,46).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그러자 나다나엘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고 반문합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전하실 때 한 서기관이 예수님께 와서 선생님의 제자가 되겠습니다. 그리고 어디든지 따라가겠습니다. 라고 고백합니다(마 08:20,21). 그러자 예수님은 이렇게 답변하십니다.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무슨 의미입니까?
예수님은 부유한 분이지만 환경적인 면에서 스스로 가난을 선택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얼마든지 부유할 수 있음에도 환경적인 고난을 택하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에 대해 고후 08:09절이 밝혀 줍니다.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를 위해서 가난하게 되셨다는 말입니다. 주님 자신이 가난하게 되심은 우리를 더욱 부요하게 지낼 수 있도록 위함이었다는 뜻입니다. 부자가 무엇입니까? 소유를 표현하는 단어입니다. 그러면 부요는 무엇입니까? 자기에 대하여 만족하고 넉넉하여 풍성한 삶을 누리는 상태를 말합니다.
만일 예수님이 복음 전하는 동안 물질 면에서 좀 넉넉하게 생활을 하였다고 합시다. 그러면 우리는 그것을 기준으로 삼고 육신과 마음이 늘 가난을 느끼고 살았을 것입니다. 우리의 행복이 어디에 있습니까? 가난한 환경을 택한 예수님을 바라볼 때 입니다. 우리가 행복하기를 원한다면 부자 되려는 노력보다 심령이 가난해지는 훈련이 더 필요합니다. 좀 더 내 심령을 가난하게 만드는 일에 믿음의 초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2. 예수님은 육체의 고난을 겪으셨습니다. |
사 53:03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예수님은 우리가 당하는 고통과 병을 잘 알고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육체적인 고난을 많이 당하셨습니다. 또 사 53:05절은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이 재판을 받는 과정에서 빌라도에 의한 명령으로 채찍에 맞으실 것이며,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을 오르면서 군인들이 휘두르는 채찍에 맞으실 것을 내다보는 예언입니다. 예수님은 그 예언대로 채찍을 맞는 일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무엇 때문에 그들에게 채찍질의 고난을 당하셨습니까? 우리를 질병에서 치료하시고, 우리의 나음을 위해서 자신의 몸으로 친히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당하신 고난 중에 가장 큰 고난이 무엇입니까? 십자가의 죽음입니다. 이 십자가에서 고통과 함께 죽으시며 이루신 것이 무엇입니까? 죄를 지은 사람이 받아야 할 죽음의 형벌을 대신 받아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신 것입니다. 평소에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막 10:45). 나는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내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
세례 요한도 예수님을 처음 만나고서는,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요 01:29) 라고 하였습니다. 이 모두가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예언하는 일입니다.
렘브란트[Rembrandt, 네덜란드, 1606~1669)라는 유명한 화가가 있었습니다. 초상화, 풍경화, 정물화, 종교화 등 수많은 종류의 그림을 남겼는데 그의 작품 중 특별히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못박혀 죽으시는 그림을 여러 장 남겼습니다.
그런데 렘브란트의 십자가 그림 중에는 이상한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각 십자가 그림마다 언제나 한쪽에 이상한 사람이 그려져 있는 일입니다. 그래서 그림을 감상하는 사람들이 렘브란트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의 그림마다 저 한쪽에 서 있는 사람이 있는 데 그가 누구입니까? 그럴 때마다 렘브란트는 눈물을 글썽이면서 그 사람은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거들었던 바로 저의 모습입니다.
예수님이 달린 십자가는 반란자와 노예들에게만 가해졌던 극단의 형벌입니다. 십자가형은 인간이기를 포기하게 하는 참혹한 사형방식입니다. 가장 잔인하고 혐오스러운 형벌입니다. 왜냐하면 옷을 완전히 벗긴 채, 모든 사람 앞에서 수치를 당하며 손과 발에 못이 박힌 채 마지막까지 고통을 느끼게 하는 죽음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엔 자기의 죽음을 스스로 바라보며 죽는 죽음입니다. 그 고통스러운 죽음, 누구도 맞이하고 싶지 않은 죽음의 현장을 예수님은 당하십니다. 그리고 그 고통의 마지막 순간에 크게 소리를 지릅니다. 비명 중의 비명입니다.
마 27:46 제 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예수님의 고통스러운 소리를 들은 사람 가운데 어떤 이들은 엘리야를 부른다. 라고(47) 생각했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한 것 같습니까? 엘리야 하면 죽지 않고 승천한 선지자입니다(왕하 02:09~12). 유대인의 전통적 종말관에 따르면 그가 고통당하는 자들을 구하러 다시 올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저들은 예수님이 엘리엘리 하는 절규를 엘리야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것으로 오해하였습니다. 엘리라는 말을 엘리야를 뜻하는 히브리어 음 엘리야후로 잘못 들었기 때문입니다.
3. 이제 예수님의 남은 고난이 있습니다. |
골 01:24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 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바울은 골로새교회를 향한 편지에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는 말을 합니다. 왜 예수님의 남은 고난입니까?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신 고난이 아직도 좀 모자란다는 말입니까? 아니면 예수님의 십자가 효능이 조금 부족한 것입니까? 예수님의 고난은 분명히 우리를 구원하기에 온전하고 넉넉합니다.
십자가는 온 인류를 구원하는 능력이 넉넉하게 있기 때문입니다. 골 01장 20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세상의 모든 피조물이 다 화평을 이루었다고 선포합니다. 이어서 22절에서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이 하나님과 모든 성도 사이를 화목하게 하는 완벽한 구원의 사건이라고 밝힙니다.
그리고 바울은 복음을 전하면서 받는 고난의 성격을 놓고 대단히 중요한 말로 해석합니다. 전도자의 수고를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고. 예수님이 맡겨주신 사명을 따라 복음을 전하다 전도자가 겪는 고난을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고 말입니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란 구원의 소식을 전하면서 모질게 겪는 전도자의 고난과 고통의 흔적들입니다. 또 바울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운다고 한 말을 좀 더 넓게 적용해 봅시다. 십자가는 마음으로 지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말로 지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는 내 몸으로 지는 것이고, 내 삶으로 지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한다면 예수님의 남은 고난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을 감당하는 전도자의 열정이요, 생산되는 아픔의 흔적들입니다. 바울은 주님의 고난의 의미를 알았기에 이 고난을 자신의 육체에 채운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의 남은 고난, 즉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자신이 어떤 고난을 만날지라도 그 목적을 이루고야 말 것이라는 각오를 나타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고백합니까? 그러면 바울과 같은 복음의 열정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남은 고난을 우리의 육체에 채워야 합니다. 24절에서 바울은 자신의 육체에 채울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 무엇인가를 두 가지로 말합니다.
①첫째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사명에 대한 고난입니다. 고난이란 괴로운 일입니다. 누구나 피하고 싶습니다. 반갑지 않은 손님 같다고 할까요? ②두 번째로,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를 위해서 뜨거운 헌신을 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고난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김삼일 가족 여러분, 교회를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교회를 세우는데 헌신하십시오. 교회를 위하여 수고하며, 고난도 받으십시오. 바울의 일생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예수님의 복음 때문에 고난의 길을 간 인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고난 없는 인생이란 존재하지 않으며, 산다는 것은 곧 수고를 의미합니다.
마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역사상 그리스도의 삶을 실천한 사람치고 고난에서 제외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서 고난받는 사람들, 탄식하는 사람들, 외로워하는 사람들, 눈물 흘리는 사람들의 고통을 안으셨습니다.
바울도 24절을 통하여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이 무엇인지, 주님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깨닫고 자신을 주님의 고난에 진정으로 동참하는 생활을 하였습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
미국 최고의 설교가로 불리는 척 스윈들(Chuck Swindoll, 1934~)이 한 말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정보라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교육자를 보내셨을 것이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기술이라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과학자를 보내셨을 것이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돈이라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경제학자를 보내셨을 것이다.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쾌락이라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연예인을 보내셨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에게 중보자요, 화목자인 구세주를 보내신 것이다.
예,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예수님을 보내셨습니다. 오늘은 교회의 절기상 예수님이 고난을 받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들어오신 날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이때 많은 사람들이 종려가지를 들고 환영함으로 인해 특별히 종려주일이라고 부릅니다.
이번 한 주간을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 우리를 통하여 이루어지기를 소원하십시오. 주님이 지신 십자가야말로 우리가 주님의 교회를 위하여 살기 위함과 모든 사람과의 화목을 이루기 위함임을 기억하십시오. 십자가는 기독교를 상징하는 표시입니다.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변함없이 십자가가 세워져야 합니다. 불신자들은 어두운 도심을 밝히는 수많은 십자가를 싫어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십자가 없이는 기독교를 말할 수 없고, 예수님을 설명할 수 없습니다. 성도 여러분은 주님께서 지신 십자가야말로 내가 예수님 고난의 의미를 알고 실천하는 데 있음을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동시에 내가 복음의 사명자임도 확인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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