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덜란드 출신의 유명한 화가 고흐(1853.3.30.~1890.7.29.)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본래 목사의 아들인데 그가 화가가 되기 전 벨기에의 한 탄광에서 광부들과 함께 탄을 캐며 복음을 전하는 전도사의 일을 하였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옷감이 귀할 때였는데 광부 한 사람이 물건을 포장했던 천으로 셔츠를 만들어서 입고 다니는 겁니다. 물건을 포장하면 거기에 글자를 쓰지 않습니까? 그 글의 내용이 깨어지기 쉬운 물건이오니 취급할 때 주의하십시오. 라는 문구입니다.
아무리 천을 빨아도 글자가 지워지지 않자 광부는 글자가 있는 그대로 옷을 만들어서 입고 다닙니다. 비록 물건을 포장할 때 쓴 글이지만 그 사람의 등에 깨어지기 쉬운 물건이오니 취급할 때 주의하십시오. 라는 글 때문에 계속 놀림감이 되었습니다.
고흐가 조용히 그 글을 생각하면서 이 문구야말로 사람을 향한 가장 솔직한 진리요 사실이구나. 라고 생각하고 새로운 인생의 각오를 하였다고 합니다.
사람은 부서지기 쉬운 존재이기 때문에 취급주의를 하여야 합니다. 겉으로는 대단한 것 같아도 내면은 한없이 약한 것이 사람입니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를 취급주의를 하여야 합니다. 부부 사이에도, 부모와 자식 사이에도, 성도와 성도 사이에도 취급주의를 하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의인은 한 사람도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 취급주의를 소홀히 하면 건강하던 사람도 깨어지고, 힘 있는 사람도 깨어지고, 믿음의 사람도 깨어지고, 마음 약한 사람은 더욱 잘 깨집니다. 오늘 말씀은 연약한 우리 인생을 하나님이 자상하게 돌보아 주신다는 영적 교훈입니다. 사람은 자기가 자기를 지키는 줄 알지만, 하나님께서 지켜 주심으로 살아가는 자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의 제목을 우리를 자상하게 돌보시는 하나님. 이렇게 정했습니다. 함께 은혜 받는 시간 됩시다.
1. 우리의 주변은 두려운 것들이 많습니다. |
04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오늘 본문을 시작하는 말씀이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시는 말씀인데 좀 더 넓게 적용하면 믿음의 사람 우리에게도 하시는 말씀입니다. 다정다감한 어조로 표현하시는 내 친구라는 말씀이 얼마나 친근한지 모릅니다.
우리 모두가 처해 있는 환경이 얼마나 위험하고 두려운 곳인지 모르는 때가 많습니다. 주변을 보십시오. 얼마나 많은 사건 사고들이 많습니까? 또 사탄의 시험거리는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를 흔들고 혼란하게 하는 요소들은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흔히들 이 세상을 가리켜 큰 풍랑이 일어나는 바다로 비유합니다.
이와 같은 환경이고 보면 세상은 당연히 위험하고 두려운 곳이며, 이런 세상에서 사노라면 늘 근심과 염려가 떠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성도들에게 예수님은 세상을 결코 두려워할 대상이 아니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정말 두려워 할 대상이라면 그것은 천지만물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한 분 뿐이며, 그 외의 것들은 대단한 게 아니라고 하십니다. 사탄의 영역이 우리를 위협하고 괴롭혀보았자 영적 생명까지는 해치지 못합니다.
우리 영혼에는 절대로 손을 못 댄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박해의 절정은 죽음 아닙니까? 그러나 죽는 것은 우리 몸이지 영혼은 아닙니다.
요즘 한창 중동 이슬람권 지역 시리아와 이라크 영토 안에 있는 수니파 극단주의 IS(Islamic State)와 이를 대항하는 연합군이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많은 인명 피해, 재산 피해가 일어나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제가 이 IS를 거론하는 것은 어떤 현재에 일어나고 있는 시사 문제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 동참하여 전쟁을 하는 IS 대원들의 전쟁관에 관한 일입니다. IS대원들이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대중들을 향해 자폭을 하면서까지 뛰어드는 것은 자신들의 행위를 성전(聖戰,지하드)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또 이런 전쟁에서 죽으면 그들은 죽는 순간에 천국에서 72명의 아름다운 여자를 보상으로 받는다는 코란의 달콤한 말에 미혹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단 하나 IS대원들이 전쟁에서 여자의 손에 죽는다면 천국에 갈 수 없다고 규정하기 때문에 여성부대와 맞닥뜨리면 싸우지도 않고 도망을 간다고 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영혼은 이 땅의 어떤 권세자도 박해자도 죽일 수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으로 인해 순교를 하면 그때는 영광을 얻게 될 것입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더 이상 두려운 골리앗이 아니라 모험하면서 도전하여 승리를 쟁취하는 현장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근심과 걱정에서 해방을 받지 못하고 힘들어 합니다
잠 29:25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
때로는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할 만한 환경이 오고, 때로는 내가 왜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는지 알 수 없다고 넋두리를 할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이해가 안 되는 일 앞에 놓여 있을지라도 거기에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계획이 있음을 믿고 세상을 두려워 할 것이 아니라 승리하는 믿음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2. 하나님은 하찮은 것도 돌아보십니다. |
06 참새 다섯 마리가 두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도 잊어버리시는바 되지 아니하는 도다.
예수님은 연약한 사람들을 사랑으로 돌아보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자상하고 큰지를 설명하기 위해 참새를 예로 들어 주십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실 때 어쩌면 청중들은 날아다니는 참새를 보았을지도 모릅니다. 여기 앗사리온이라는 말이 나오죠?
로마 시대의 최소 화폐 단위로서 우리 식으로 보면 100원 혹은 200원 정도 가치의 화폐단위로 보면 될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마 10:29절에 보면 시장에서 참새 두 마리의 가격이 한 앗사리온입니다. 그러면 단순 계산으로 두 앗사리온이면 참새 네 마리를 살 수 있지 않습니까?
06절에 두 앗사리온이면 다섯 마리를 살 수 있다고 했으니 결국 한 마리는 덤으로 끼어 오는 셈이죠. 그러고 보면 참새는 당시 인기 없는 가난한 사람들의 싸구려 음식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생활상을 보면 부자들은 소갈비를 뜯고, 평민들은 양 다리를 나눌 때에 아무리 가난한 사람도 비둘기 한 마리는 정도는 잡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명절이 되어도 정말 가난한 사람들은 참새를 사서 먹어야 했습니다.
그것도 덤으로 끼워 팔린 참새 한 마리. 비록 한 마리지만 이 한 마리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세밀하게 관심을 가져 주시는가에 대한 증거입니다. 특별히 잊어버리시는바 되지 아니하는 참새란 당연히 덤으로 따라온 참새이죠.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보잘 것 없는 참새에게도 날게 하시고, 짝을 짓게도 하시고, 먹을 것도 있게 하시고, 밤이 되면 보금자리도 있게 하시고, 의미 없이는 죽지도 않게 하십니다.
마 10:29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예수님은 이런 참새를 예로 들고 나신 후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마 10:31)고 말씀하십니다. 무슨 뜻입니까? 무엇을 먹을까 염려하지 마라. 참새를 먹이신 하나님은 너희도 먹여 주실 것이다.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참새를 입히신 하나님은 너희도 입혀 주실 것이다.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 참새를 마시우게 하신 하나님은 너희의 생사화복도 주관해 주실 것이다.
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마 06:30).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를 결코 버리지 않습니다. 혹 잠시 실패했다고 낙심하십니까? 절망하십니까? 뭔가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불평하십니까? 하나님께서 잠시 기다리라 하신다고 조급해 하며 불안해하십니까?
사람들의 눈에는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별 볼일 없는 사람처럼 보여도 하나님이 보실 때는 대단히 귀한 사람들입니다. 왜냐고요? 천국의 소망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고려대학교 강병화 명예 교수님이 28년간 3,901일의 현장조사를 통해 시기와 장소를 달리하여 채집한 야생자원식물 1,700초종 7,500점의 종자를 2012년 7월 고려대학교 야생자원 식물종자은행에 기증하였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한 사람이 장한 뜻을 세워 아무도 돌아보지 않는 잡초들의 씨앗을 받으려 청춘을 다 바쳤다는 것은 고맙고 자랑스러운 일이지요. 그 분이 기증하면서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잡초는 없습니다.
밀밭에 벼가 나면 잡초고, 보리밭에 밀이 나면 또한 잡초입니다. 상황에 따라 잡초가 되는 것이지요. 산삼도 원래 잡초였을 것입니다. 사람도 같습니다. 제가 꼭 필요한 곳, 있어야 할 곳에 있으면 산삼보다 귀하고, 뻗어야 할 자리가 아닌데 다리 뻗고 뭉개면 잡초가 된 답니다.
예, 남들이 보기에는 우리도 잡초 같은 별 것 아닌 인생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아끼며 보호하는 한 귀한 존재이며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존재입니다.
3. 하나님은 우리의 약한 부분까지도 돌아보십니다. |
07 너희에게는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니라.
저는 머리카락에 누구보다 많이 신경을 씁니다. 저와 비슷한 처지의 분들은 다 저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머리숱이 많은 사람들은 그 머리카락의 중요성을 잘 알지 못합니다. 하루에도 자연적으로 수없이 빠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머리카락이 없는 분들은 어떤지 아십니까? 머리카락 하나를 자기 지체의 수준으로 귀하게 여기고 가꿉니다만 머리카락 관리가 마음대로 잘 되지를 않습니다.
07절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분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별 할 일이 없어서 우리의 머리털을 세셨을까요? 그런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지식은 방대할 뿐 아니라 구체적이어서 사람의 머리카락 한 올 한 올까지도 다 헤아린 것처럼 아신다는 그런 의미입니다.
즉 사람들의 무관심한 영역, 그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는 영역까지도 돌아보신다는 뜻도 되고요. 그만큼 우리를 사랑하시고 귀하게 여기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결단코 우리의 머리카락 하나라도 상하게 할 자가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 어떤 사람이 성경에 몇 번이나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이 있는가를 조사해 보았더니 무려 365번이었다고 합니다. 일 년으로 계산하면 하루에 한 번씩 꼴로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이 되겠죠?
하나님께서 참새에 관심을 가져 주시니 참새가 죽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사람의 머리카락 하나까지도 세셨으니 머리카락이 조금도 상하지 않고 빠지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관심을 가져 주심에도 참새가 때로는 포수의 총에도 죽고, 그물에 걸려 떼죽음을 당하기도 하고, 하나님께서 헤아리신 머리카락이지만 백발도 있고 대머리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생각을 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돌보신다면 감기도 안 걸리고, 사업의 실패도 없고, 이별도 죽음도 없어야 한다고 말입니다. 물론 하나님은 보잘 것 없는 참새에 대한 관심, 사람의 머리카락 한 올 한 올까지도 깊숙이 관여하고 있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참새나 머리카락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시의 소외 된 사람처럼 보이는 서민들에게도 집요한 관심과 사랑으로 챙기시는 하나님의 세밀함에 초점이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세상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고 담대한 마음과 굳건한 믿음으로 사십시오. 때로는 현실을 바라보면 참으로 걱정이 되지 않을 수 없고,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두려움에 사로잡히기 쉽습니다. 여러분의 몸이 조금 불편하다고 하나님 앞에 원망하십니까?
여러분이 건강할 때도 하나님은 관심을 가지시지만 여러분의 몸이 시들어 있을 때도 깊은 관심을 가지십니다. 여러분의 가정을 하나님이 얼마나 소중하게 관심을 가지고 계시는지 모릅니다. 여러분이 그토록 애절하게 기도한다면 하나님은 여러분들의 기도를 그대로 버려두지 않습니다.
4세기에 크리소스톰(349~407, John Chrysostom)이라는 위대한 설교가가 있었습니다. 황금의 입을 가졌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설교를 잘 했던 사람인데 그가 정부에 의해서 그의 지위를 박탈당하고 설교도 하지 못하는 핍박을 당했을 때 이렇게 자문자답 하였습니다.
내가 무엇을 두려워하는가? 죽음일까? 그러나 그리스도가 나의 생명이고 죽음까지도 유익할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귀양을 가는 것일까? 두렵기는 하다. 그러나 이 지구와 지구상의 어디에 가도 주님은 거기 계시지 않는가?
재물을 잃는 것인가? 그러나 나는 세상에 빈손으로 왔고 갈 때도 빈손으로 가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세상에서 무섭다고 하는 것이 나에게는 아무 것도 아니다. 또 세상의 좋은 것도 나는 그저 웃어넘길 뿐이다. 나는 가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재물을 사모하지 않으며 죽음에 위축되지도 않겠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
스카이다이빙이란 항공 스포츠가 있습니다. 먼저 비행기를 타고 3,4천 미터 하늘에 올라가서 거기서 낙하산을 메고 뛰어내린 뒤 45초에서 1분 정도 자유낙하를 즐기는 경기입니다. 이때 떨어지는 속도는 200 Km가 넘습니다. 자세에 따라서 300Km까지 속도가 붙는데 스카이다이버들은 만약을 위해서 예비 낙하산을 하나 더 멥니다. 주 낙하산이 펴지지 않으면 사용하기 위해서입니다.
그 밖에도 여러 가지 보호 장구들을 갖추는데 그러나 아무리 대비를 해도 맨몸을 허공에 던지는 것은 분명 두려운 일입니다. 이런 일을 직업처럼 해 내는 사람들이 있는데 공수부대 특전사들이나, 스카이다이빙 직업 교관들입니다. 이들은 점프를 밥 먹듯이 합니다. 심지어는 천 번이 넘는 경력을 가진 사람들도 많습니다. 이들이 점프를 할 때 믿는 것은 오직 낙하산뿐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인생살이는 낙하산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너무 힘들고 두렵게 살지 맙시다. 다 때가 되면 풀리고 열립니다.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시면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했지 않습니까? 그러 할진데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야 더 말 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말씀을 읽고 마치겠습니다.
시 139:09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10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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