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단/2013년 말씀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요 06:60~69)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13. 5. 25. 11: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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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 여러분. 오병이어나(14:17~21) 칠병이어(15:34~38)에 대한 기적을 많이 들어 보셨지요? 이 놀라운 기적을 체험 한 그 사람들은 예수님 한 분만 지도자로 추대하면 민생고 문제는 해결될 것 같아서 열렬히 지지하고 따라 다녔습니다.

그러나 이내 예수님과 자기들 사이에 사인이 좀 안 맞는다고, 주님의 메시지가 자기들에게 이상하게 들린다고 밀물처럼 밀려왔다가 썰물처럼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06:56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60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대 66 그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그렇게도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이 한결같이 한 순간에 물러가고 다시는 예수님 앞에 나오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은혜의 현장에서 돌아간 무리들, 도대체 그들은 어떤 생각을 가졌기에 예수님을 믿는 것을 포기한 것일까요?

영혼이 죽느냐 사느냐? 천국이냐 지옥이냐? 하는 대단히 중대한 문제인데 말입니다. 사람들이 거의 다 떠나고 난 후 예수님께서 열 두 제자에게 이렇게 물으십니다. 너희도 가려느냐? 정말 가슴 아픈 물음이죠. 이때 베드로가 수제자답게 주님의 마음에 꼭 드는 말을 합니다. 68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68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베드로의 대답을 들으신 예수님께서 무척 기뻐하셨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 그렇게도 예수님을 열성으로 따르든 사람들이 왜 떠났는지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1. 생명의 말씀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떠났습니다.

 

60 제자 중 여럿이 듣고 말하되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한 대.

 

51~58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내 살은 먹어야 하고, 내 피는 마셔야 하며, 나를 통하지 않고는 영생을 얻을 수 없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을 따르던 그 사람들이 오늘 이 말씀 상당히 어렵네, 무슨 이상한 소리지? 하며 물러갔는데 떠나기 전에 먼저 주님께서 왜 이 말씀을 하시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벳새다 들판에서(09:10) 오병이어의 기적을 맛본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왕으로 추대하려 하자 예수님은 즉시 그 자리를 피하신 후 그날 밤에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 바다를 건너 가버나움으로 가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곳까지 기어이 예수님을 찾아오자 주님께서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26).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오병이어의 기적을 통하여 그들이 전통적으로 기다리던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임을 깨달은 것이 아니라 순전히 공짜 떡만 더 얻어먹으려 찾아온 것이라고 지적하신 것입니다. 그런 후에 예수님께서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다(35). 너희가 인자의 살을 먹고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다고 하시자(53) 사람들이 그만 돌아갔습니다.

즉 성육신 된 말씀을 직접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졌음에도 그 살을 먹고 그 피를 마셔야 한다는 상징적인 언어, 영적인 언어가 그들에게 통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상징적 언어란 믿음으로만 통하는 언어이기에 믿음 없는 사람에겐 아무래도 소통하기가 힘이 듭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인한 민생고 문제, 세상적인 문제에만 집중하다보니 오병이어의 진정한 영적 의미가 와 닿지를 않았습니다. 만일 무리들이 예수님께서 떡을 주신 사실을 깊이 생각하였더라면 영원한 생명을 내게 주셨다는 뜻으로 받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만 믿음 없이 육적으로만 생각하니 그저 식사 한 끼 얻어먹었다는 것 외에 무슨 의미를 더 찾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오늘날에도 성경의 말씀이 내게 살아있는 생명의 말씀으로 다가오지 않는다면 기독교인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고, 교회에서의 좋은 직분이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명목상의 교인이고 직분자이지 진정한 믿음의 사람은 아닙니다.

교회 안의 불신자인 셈이죠. 예수님의 공생애 3년을 보면 예수님의 은혜를 입은 자들 즉 죽음에서 살아난 사람들, 각종 병을 고침 받은 사람들,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을 입성할 때 호산나 호산나를 열렬히 외치며 환영하던 그 무리들.

 

그들이 하나같이 변질되지 않고 다 은혜의 생활을 잘 유지했으며, 예수님을 끝까지 잘 믿고 따랐다고 여겨집니까? 아닙니다. 나중에는 오히려 예수님을 배척하는 일에 이용을 당하거나 앞장을 서는 경우가 더 많았는데 오늘날에도 세상적인 이권의 배경을 염두에 두고 교회를 찾거나 또 출석을 한다면 형식적인 신자가 되기 쉽고 낙심의 길로 나가기가 알맞습니다.

 

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2. 영적 생명이 없기 때문에 떠났습니다.

 

61 예수께서 스스로 제자들이 이 말씀에 대하여 수군거리는 줄 아시고 이르시되 이 말이 너희에게 걸림이 되느냐?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한 후 예수님을 따르든 그 사람들은 오히려 뒤에서 수군수군하면서 불평을 막 늘어놓습니다. 왜 수군거린다고요. 생명의 영이 없기 때문에, 세상적인 것이 전부인 줄 알기 때문에 영적 예수님의 메시지를 문자적으로만 생각하다 그만 수군거리기 시작합니다.

우리의 주변을 보십시오. 낙심한 분들이 왜 그리 많습니까? 왜 잘 믿다가 떠나고 또 실족하는 일이 일어나는 겁니까? 모두가 낙심에 대한 변명은 많이 늘어놓지만 결국은 영적 생명이 없기 때문에, 세상적인 것이 전부인 줄 알기 때문에 낙심의 길로 갑니다.

교회 안에서도 왜 수군수군하고 문제가 일어납니까? 생명의 영이 없기 때문에 판단력이 흐려져서 육의 기준으로만 생각하고 행동하기 때문입니다. 영적 일을 육신의 관점에서 판단하면 당연히 이해가 모자라고 오해도 일어납니다. 생명의 영이 없이 육신적인 것을 기준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특징을 성경은 이렇게 소개합니다.

 

01:28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29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30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영적 생명이 없는 것이 얼마나 답답하고 무서운 줄 압니까? 일단은 교회를 와서 말씀을 들어도 그게 영적 소화가 잘 안 되는 때가 많습니다. 우리 목사님은 왜 나만 치는지 모르겠다며 투정을 하게 되고, 은혜 생활을 잘 하다가도 이내 이 교회에는 사랑이 없다고 악평하면서 무너지기도 합니다.

결국 말씀에 걸려 넘어지는 이유는 그 말씀이 진리가 아니어서가 아니라 생명의 영이 없이 육의 생활만 생각하고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왜 사람들이 떠났다고요? 생명의 주님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인데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06:26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너희가 나를 찾아온 것은 오병이어의 신령한 뜻을 따라 온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에게 먹을 것을 배부르게 주었기 때문에 왔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많은 사람들이 자신들의 배를 채우고 자기 육신의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나왔기 때문에 그게 뜻대로 안되면 떠납니다. 주님께서 기적을 행하시는 것은 그 속에 분명한 영적인 상징의 뜻이 있습니다.

기적이 목적이 아니라 그 기적을 통해 보여주시려는 분명한 메시지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걸 모르면 떠나는 겁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겉도 보지만 예수님의 내적인 생명의 말씀을 들으면서 본질을 깨달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 때문에, 말씀 때문에, 영혼 때문에 예수님 곁에 있어야 하며, 이것 때문에 생명의 주님을 떠나지 않아야 하는 겁니다. 이게 진리입니다. 우리의 생활은 성령님의 감동을 통해 심령의 문이 열려야만 영의 일도 분별할 수 있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살리는 것은 영이라고 이미 단정하십니다.

 

63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

  

  

 3. 믿음의 사람은 주님을 떠나지 않습니다.

 

68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이런 고백은 나는 생명의 떡이다(35). 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을 바로 나에게 주시는 영의 양식으로 받을 수 있는 자만이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을 떠나간 많은 사람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이 예수님의 표적의 의미를 진지하게 살폈다면 얼마든지 그 뜻을 헤아렸을 것입니다. 때로는 다소 이해하기가 어려운 메시지라도 끝까지 진리 탐구를 위해 알아보아야 하는데 그러지를 못하여서 주님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어렵다고 해서 도중하차해서는 안 되는 것은 영원히 사느냐 죽느냐? 하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한 때는 주님을 잘 따라 다니던 사람들이 결정적인 순간에 모두 물러가 버린 것처럼 세상의 것을 목적으로 삼는 사람은 언제든지 떠나갈 가능성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세밀한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어떤 상황을 만나도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는 순종할 수 있는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때로는 그 말씀이 좀 힘들게 느껴지거나 성가시게 여겨져도 아멘으로 순종하면 복된 일을 만날 수 있을 것임을 믿음으로 받으시기 바랍니다.

 

비행기를 타면 이륙 직전이나 착륙 직전 승무원들이 반드시 이런 말을 합니다. 좌석 등받이를 정 위치로 돌려놓고 안전벨트를 착용하세요. 비상 착륙에 대비한 예비 행동인데 승객의 입장에서는 좀 귀찮지만 안전을 위해서 지시대로 따라야 합니다.

그런데 미국의 한 코미디언이 비행기 탑승 후 목적지가 가까워오면서 승무원의 이 소리를 듣고 농담을 하였습니다. 아니 지금 1만 미터 상공에서 비행기가 추락하는 판인데 좌석을 10도 뒤로 젖혀 놓으면 사망이고 10도 앞으로 바로 세워 놓으면 생존이 됩니까? 하며 청중들을 웃겼습니다. 하지만 그 코미디언은 그 10도 차이라는 것이 실제로 사망과 생존을 좌우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비행기가 불시착했을 때 승객들은 촌각을 다투면서 탈출하는데 만약 모든 좌석이 다 10도 정도 뒤로 젖혀져 있으면 좌석 사이의 좁은 틈을 빠져나가느라 모두가 최소한 몇 초씩은 더 지체될 것입니다. 그리고 수백 명의 승객들이 한 사람 당 몇 초씩 늦어지게 되면 그 합계는 몇 십분 이상 될 것이며 그 사이에 화재나 침수가 발생하면 얼마나 많은 인명 피해가 날지를 모릅니다.

그러므로 불시착 시에 좌석의 등받이를 정 위치로 돌려놓으라는 승무원의 말은 그야말로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중대한 메시지입니다. 만일 승무원의 지시 사항을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넘겨 버리면 곧 죽음으로 직결될 수 있고, 생명을 지키기 위한 유의사항으로 받아들이면 절체절명의 상황에서도 목숨을 지킬 수 있습니다.

 

생명의 설교도 마찬가지입니다. 매주일 설교를 건성으로 듣는 교인, 교회에 출석은 하지만 성경 말씀을 통하여 구원의 길은 깨닫지도 못하는 사람은 교회를 떠나게 될 가능성, 마지막 심판대 앞에서는 지옥의 선고를 받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라는 베드로의 고백처럼 나도 고백할 수 있다면, 주님 어떤 상황에서도 나는 이 교회에서 내린 믿음의 뿌리를 잘 가꾸고 지키렵니다. 라는 고백을 할 수 있다면 그 분이야말로 진정 복된 영혼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 옛날 갈릴리 바닷가의 주님과 베드로의 대화, 또 그렇게도 열렬히 주님을 따르다 떠나간 그들의 이야기만 듣고 가면 안 됩니다. 믿음생활을 하다 보면 예수님의 매력이 없어질 때가 있고, 예수님을 따를만한 가치가 더 이상 느껴지지 않을 때도 있을 것입니다. 요즘 같이 어려운 때는 쉽게 그런 생각에 빠질 수 있을 것인데 그럴수록 여러분은 교회에 와서 이일기 목사의 입을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영의 양식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한 때는 바울의 동역자로 수고하였던 데마라는 사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가 어떻게 되었는지 아시지요? 영적생활, 믿음관리를 잘못하여 그만 옛 생활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딤후 04:10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너희도 가려느냐? 언젠가 나를 등지려느냐? 주님께서 나에게 하신 말씀으로 받으십시오. 그리고는 베드로의 고백처럼 생명의 말씀, 영생의 말씀이 김해삼일교회에 있는데 우리가 어느 교회로 가겠습니까? 라는 고백이 진정으로 우러나오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