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간의 사이가 좋지 않은 집사 부부가 있었습니다. 이 부부는 늘 다투며 지내다보니 마치 싸우기 위해 사는 가정과 같았습니다. 어느 주일 저녁 남편 혼자서 저녁 예배에 참석하고 오더니 그날 밤에 아내를 열렬히 사랑해 주는 것입니다.
너무나 행복한 부인은 대견한 눈초리로 남편을 보면서 말합니다. 당신 오늘 웬일이유? 그러자 남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부인은 남편이 필시 목사님의 설교를 듣고 은혜를 받은 것이라 판단하고는 다음날 아침 값비싼 과일 바구니를 사들고 목사님을 찾아갔습니다. 목사님 고맙습니다. 어제 저녁 설교가 참 좋았다지요? 아내를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설교였는가요? 그러자 목사님은 고개를 흔들면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설교였는데요.
마 06:14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15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예수님께서 주기도문을 가리켜 주신 후에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가 용서의 삶을 사는 것은 쉽지 않으며, 눈에 보이는 그대로 바라보면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조명으로 사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관점으로 보아야만 자신을 넘어 상대방을 용서하고 품을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도 항상 예수님 중심의 삶을 살면서 자신도 살고 남도 살리는 용서의 힘을 체험하기를 축원합니다.
1. 용서는 생명을 회복시킵니다. |
15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유대인의 용법에서는 형제라는 말이 같은 종교를 가진 자, 같은 종교적 공동체의 일원이라는 의미입니다. 믿음의 동료, 신앙의 동지라는 말로서 예수님은 신앙생활을 함께하는 공동체 안에서 행해진 서로 간의 도덕적 죄에 대해 피해자의 입장에서 말씀을 하십니다.
개역 성경에서는 생략되었으나 라틴 Vulgate역을 위시한 권위 있는 여러 문서들에는 네 형제가 네게 죄를 범하거든 이렇게 번역을 하면서 나와 상대방의 문제로 다룹니다. 용서란 제 삼자의 입장에서 볼 것이 아니라 자신과 직접적인 관계로서 보라는 뜻입니다.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이 명령은 실족한 자를 잃지 않기 위한 첫 단계의 작업으로서 지은 죄가 무엇인지를 깨닫고 고치기를 위한 권면입니다. 공동체 안에서 지체인 형제가 어떤 중대한 실수를 했을 때 흉이나 조롱거리로 볼 것이 아니라 그 영혼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회복할 수 있도록 도우라는 말입니다.
이 권고의 목적은 형제를 판단이나 질타를 하기 위함이 아니라 다시 본래의 형제로 얻기 위함인데 만일 그렇게 해서 들으면 형제를 얻게 되는 것 아닙니까? 신령한 공동체 안에서 어떤 허물 된 사람을 징계보다 사랑과 용서로 믿음의 자리에 세울 수만 있다면 이런 용서야말로 진정 생명을 회복시키는 용서입니다.
용서는 항상 생명을 살리는 관점에서 보고 실천하여야 하며, 한 영혼을 천하보다 더 귀하게 여기시는(눅 09:25) 예수님의 가슴을 나의 가슴으로 전환하여야 합니다. 사실 교회 공동체 안에는 각양각색의 사람이 모여 있습니다.
자신과 체질이 맞는 사람도 있고, 눈에 거슬리는 사람도 있기 마련입니다. 서로가 살아온 삶의 환경과 문화들이 다르기 때문에 쉽게 상처를 주고받을 수 있는 상황을 만나게 되는데 사탄은 이런 환경을 통하여서 공동체를 깨뜨리게 합니다. 지금 여러분과 불편한 관계에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인간관계가 불편한 것은 그 사람을 미워하기 때문일 것이며, 미운 마음을 품고 있으면 자신을 상하게 하다 결국은 자신을 죽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모든 허물을 용서하는 출발점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도 생명을 회복시키는 그 용서의 자리에 믿음의 기초를 세워야 합니다. 구약시대 애굽의 총리 요셉을 아십니까? 형들이 자신을 노예로 판 것을 조건 없이 용서하는 현장에서 이렇게 말을 합니다.
창 50:20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21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스데반도 자신을 돌로 쳐서 죽이는 자들을 향해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를,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행 07:60). 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이런 기도를 드릴 수 있을까요?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체험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스데반의 용서의 기도로 인해 누가 돌아오게 되었습니까? 기독교 역사를 수놓은 전도자 사도 바울입니다. 그를 통해 커다란 복음의 확산이 일어났으니 이렇게 용서는 생명을 회복시키는 통로 역할을 합니다.
성도 여러분, 모든 관계를 예수님의 십자가로 회복합시다. 이를 통해 여러분이 가는 곳마다 생명이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용서는 한계가 없습니다. |
2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예수님께서 용서에 대한 교훈을 하실 때 아마 베드로가 예수님으로부터 칭찬을 받고 싶은 마음에서 이 말을 하였을 것 같습니다. 주님, 형제가 내게 죄를 짓는 다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라도 해야 됩니까? 라고 묻고 있는데 베드로가 왜 일곱 번이라는 숫자를 사용합니까?
여기에 대해서는 당시의 사회적인 배경을 조금 이해해야만 합니다. 당시의 랍비들은 어떤 잘못에 대해서 세 번 정도까지는 용서해야 한다고 가르쳤는데 이 역시 상당한 아량에 속합니다.
베드로는 당시 전통을 넘어 자신은 일곱 번까지 용서할 수 있다고 말하는데 이만하면 베드로 딴에는 완벽한 용서로 여기고 예수님께 물은 것입니다. 베드로가 제시한 일곱 번은 랍비들의 가르침을 두 배로 늘린 것에 또 하나를 더한 것이니 이만하면 정말 충분한 것 아닙니까?
그러나 예수님에게는 그것도 충분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용서에 대하여 베드로의 예상을 훨씬 뛰어 넘는 답변을 하셨습니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이 말씀은 용서에 어떤 숫자적인 한계를 두지 말고 조건 없이 끝까지 용서하라는 것입니다. 산술개념으로는 7×70=490인데 한 허물에 대하여 이렇게 까지 죄를 짓거나 또 용서하는 일이 세상천지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예수님은 용서를 놓고는 제한을 두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한 번 용서한 경우는 어떤 경우든 영원한 용서, 완전한 용서, 깨끗한 용서가 되어야지 용서한다고 해놓고 옛날을 기억하고, 용서한다고 해놓고 계속 옛날 일을 들추어 곱씹는 것은 진정한 용서가 아니란 말입니다.
눅 17:04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하시더라.
우리는 보통 용서에 인색합니다. 열 번 잘하다가도 한 번 잘못하면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면서 비판하며, 십년 전에 들었던 섭섭한 말도 다시 토해서 속을 뒤집어 놓습니다. 하루에 일곱 번은 고사하고 평생에 한 번도 용서하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이어 예수님은 23절부터 한 비유를 들어 설명을 하십니다. 어떤 임금에게 만 달란트를 빚진 종이 있는데 이 빚진 자가 돈을 도저히 갚을 능력이 없다고 전제하면서 비유의 말씀을 하십니다. 달란트는 예수님 당시의 유대와 로마 사회에서 통용되던 화폐 단위 중 가장 큰 것으로서(순금 약 34kg) 당시 한 달란트는 6천 데나리온입니다.
한 사람의 노동자가 약 6천 일, 대략 16년을 일해야 벌 수 있는 금액이니 만 달란트라면 그 종으로서는 불가항력적인 금액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임금은 이 종을 불쌍히 여겨 아무런 조건 없이 빚을 탕감해 주었습니다. 이어서 28절이 나오는데 같이 읽겠습니다.
28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
28절 원문을 보면 임금이 탕감하여 주었다. 그러나 그 종이 나가서 라고 시작됩니다. 개역 성경에서는 접속사가 빠져 있다는 말입니다. 28절에 그러나 라는 접속사가 있음을 보아 앞의 사건과는 일이 좀 다르게 전개될 것을 예고합니다.
이어서 임금으로부터 불쌍히 여김을 받은 자가 궁궐을 나오다가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을 진 동료를 만나자 즉각 갚으라고 난리를 칩니다. 그러자 그 동료가 엎드려 빌면서 시간을 좀 달라고 간청을 하나 이 종은 당장 갚지 않는다고 바로 고소를 하여 채무자를 감옥에 쳐 넣었습니다. 이 상황을 본 다른 동료들이 너무 한다 싶어서 종의 주인에게 가서 되어진 일을 상세히 보고하자 주인이 크게 노하여 그 종을 감옥에 가둡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이 비유에서 임금과 종의 신분적인 관계로만 본다면 빚진 돈의 액수가 천문학적인 숫자로서 지나치게 많지 않습니까? 이로보아 이 종은 궁궐에서 일하는 하급 관리나 노예가 아니라 임금의 영토 중 일부를 다스리고 그곳에서 나오는 수입을 임금에게 상납하는 지방 장관으로 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신분에 대한 관심보다 천국의 상속자들이 얼마나 많이 죄 용서함을 받았는지를 가르치기 위해 이런 신분과 빚을 예로 들으셨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그러므로 천국은(23)…. 이렇게 말씀하신 비유를 35절로서 결론을 내립니다.
3. 용서 이후에는 심리적 감옥에서 해방되어야 합니다. |
35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죄책감으로 인해 나타난 질병의 증상들, 자유하지 못하고, 환경에 제한을 받고 사람들에게 제한을 받으며 살아가는 사람은 아직도 심리적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이렇게 심리적 감옥에 갇혀 살아서 되겠습니까?
어떻게 해야 이 심리적 감옥에서 해방될 수 있다는 말입니까? 그것은 형제를 용서하는 마음에 있습니다. 깨끗하게,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용서하는 것, 다시는 그 아픈 과거를 기억하지 않는 것, 완전히 내 마음속에서부터 지워 버리는 것이 감옥에서 해방을 받는 비결입니다.
세계 제 2차 대전이라는 큰 사건이 지나간 후 우리 마음에 가장 강하게 크게 남는 기억 하나가 바로 독일의 나치 수용소입니다. 독일의 히틀러는 아우슈비츠를 비롯해서 나치 수용소에서 죄 없는 유대인을 끌어다가 6백만 가량을 죽였는데 이 사건은 인류 역사의 가장 처참한 사건이었습니다.
숫자를 의심할 만큼 엄청난 사람이 희생을 당했지만 그 가운데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은 사람들이 몇 있고 그 가운데에 두 친구가 있었습니다. 얼마 후에 저들은 다시 만나서 옛날이야기를 하는데 생각만 해도 피가 거꾸로 솟구치면서 도저히 분노를 잠재울 수 없는 그런 격한 감정이 일어납니다. 당신은 그때 그 놈들을 용서할 수 있소? 나는 생각만 해도 잠시도 그때 사건을 잊지 못하고 있다고 말을 합니다.
이 말을 듣는 친구는, 글쎄 이제는 오랜 이야기인데 다 지나간 이야기를 이제 꺼내서 뭐 하겠나? 이렇게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자 그 친구는 여전히 말하면서 그걸 어떻게 잊고, 어떻게 용서할 수가 있느냐고 또 한 번 치를 떨었습니다. 그때에 친구가 말합니다. 그러면 자네는 아직도 감옥에 있는 것일세.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물리적으로는 감옥에서 나왔고, 정치적으로도 해방되었습니다. 그러나 심리적으로는 여전히 그의 마음은 분노라고 하는 감옥, 보복이라고 하는 감옥에 있는 겁니다. 감옥에 있던 그때 그 마음 그대로 있으니 그 인생살이 자체가 감옥입니다. 이걸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경제적, 정치적, 물리적으로는 자유인이라 할지라도 누군가를 미워하고 있는 동안은 여전히 증오라고 하는 무서운 감옥에 그대로 살고 있다는 말입니다. 참 용서에는 놀라운 능력이 있어서 용서하는 자에게 놀라운 평안과 자유를 안겨줍니다.
또한 용서는 상대방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서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진정한 용서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누구도 진정으로 용서할 수 없다는 사실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심리적 감옥으로부터 해방을 얻지 못해서 지금도 고통하는 부분들이 있습니까? 주님의 용서해 주심을 기억하십시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피 흘려 나의 그 무거운 죄 짐을 다 완전히 그리고 영원히 용서하셨음을 믿으십시오.
이제 그 용서받은 은혜를 가지고 여러분을 아프고 괴롭게 하였던 분들을 용서하고, 용서하지 못함으로 인해 여러분을 묶고 있는 분노의 감옥으로부터 해방을 받으십시오.
벧전 04:08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우리가 용서받은 죄에 비하면 우리 이웃이 우리에게 지은 죄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이웃을 용서하지 않으면 우리가 받은 용서도 취소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남을 용서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신앙생활은 없습니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 용서를 하지 않으면 용서하지 않는 동안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고, 하나님께로 올라가는 기도의 통로가 막히고, 하나님으로부터 내려오는 말씀의 통로가 막힙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
어느 부부가 심한 갈등으로 부부싸움이 잦았는데 이상한 것은 싸움이 시작되면 남편의 일방적 싸움이지 아내는 전혀 대꾸를 하지 않는 겁니다. 오히려 아내는 더욱 침착해지고 마음을 가라앉히자 어느 날 남편은 아내의 자제력에 대해 감탄을 하면서 말을 건넵니다. 내가 당신에게 화를 낼 때마다 당신은 전혀 내게 대응을 하지 않는데 어떻게 당신의 분노를 자제하는가?
아내가 대답하기를, 나는 화장실 청소를 하면서 분노를 풉니다. 남편이 다시 묻기를 화장실 청소가 어떻게 도움을 주는가? 아내가 태연히 대답합니다. 나는 늘 당신의 칫솔로 변기를 닦습니다.
행복은 누가 미리 만들어놓은 기성품이 아닙니다. 행복은 마술이 아니라 예술입니다. 행복은 예술가가 각고의 노력으로 작품을 만들듯이 가족과 이웃이 함께 눈물과 피와 땀을 흘리며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천사와 살지 않고 사람과 삽니다. 서로 부족하고 모자란 사람들이 용서와 사랑의 보자기로 덮으며 살 때 부드러운 인생이 펼쳐질 것입니다. 모두를 예수님의 관점으로 바라보며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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