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자리에 계신 나이가 드신 성도 여러분! 어릴 때 무슨 놀이를 하면서 지내셨습니까? 딱지치기, 구슬치기, 땅따먹기, 고무줄(여자) 놀이 등 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많은 세월이 지난 요즘에 와서는 컴퓨터 게임을 통한 다양한 놀이 문화가 지배합니다.
이제는 컴퓨터로 사이버 공간에서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에 관한 일들을 설정해 놓고 국가 간에 게임도 할 수 있는 시절이니 정말 격세지감(隔世之感)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 당시의 아이들은 주로 어떤 놀이를 하며 지냈을 것 같습니까? 가정에서는 어떤 특별한 놀이가 없었습니다. 다만 부모님을 따라 시장에 갔다가 어른들이 사람을 만나고 물건을 사는 동안의 잠시 시간을 활용하여 또래의 아이들끼리 서로 만나서 놀이를 하는 정도였습니다. 주로 어른들의 세계에서 행해지는 일들을 그대로 모방한 것으로서 시장 거리에서 결혼식 놀이나 장례식 놀이입니다(17).
결혼식을 할 때 행렬을 이뤄 즐거워하는 것과 장례식 때에 슬퍼하고 애곡하는 것을 보고 자신들이 느낀 대로 놀이에 적용한 건데 예수님께서 이와 같은 아이들의 놀이를 제자들에게 비유로서 들려주신 이유가 무엇이라고 생각됩니까?
아마 당시의 영적 무감각한 시대상과 기다리던 메시야를 영접치 않는 세태를 지적하려는 의도로 여겨집니다. 그래서 저는 왜 아직도 영적 무감각입니까? 라는 제목으로 강론하려 합니다.
1. 피리를 부는 것과 슬피 우는 것은 무슨 놀이입니까? |
16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17 이르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피리와 춤은 유대인의 결혼식과 같은 잔치 집에서 기쁨과 흥을 돋우기 위한 방법으로서 활용하였습니다. 피리를 부는 사람들은 전문인으로서 주로 일정한 삯을 받고 가서 수고를 하는데 그들이 열심히 피리를 불면 그 소리를 따라 남자 손님들은 덩실덩실 춤을 추게 됩니다.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곡을 하고 가슴을 치는 것은 장례식의 풍습으로서 이 역시 전문적인 여자 울음꾼에 의하여 행해집니다. 즉 이 애곡을 하는 여자 울음꾼의 소리를 따라 식장에 온 사람들은 슬픔의 현장에 동참한다는 의미에서 함께 자기의 가슴을 쥐어뜯고 가슴을 치곤했습니다.
이러한 결혼식과 장례식의 풍습을 알고 있는 아이들이 부모님을 따라 장터에 나왔다가 서로가 만나서 신랑, 신부, 피리 부는 사람, 춤추는 사람 등의 배역을 정하고 결혼식 놀이를 합니다.
먼저 피리 부는 역을 맡은 아이가 피리를 부는 척하면 남자아이가 춤을 추어야 하는데 그 아이들 사이에 고집이 아주 세고 마음이 비뚤어진 한 아이가 있어 정해진 규칙을 따라 도무지 춤을 추지 않는 겁니다. 그러면 어찌 될까요? 흥이 깨어져 놀이가 중단되겠지요.
그래서 아이들 중 피리를 부는 자가 답답해서 이렇게 묻습니다. 우리가 피리를 부는데 왜 너희들은 춤추지 않고 그대로 서 있기만 하느냐? 그래도 묵묵부답이니 그 놀이는 흥이 없으므로 저절로 깨어지고 맙니다.
모처럼 아이들끼리 만난 놀이 아닙니까? 놀이를 중단하는 게 아쉬워서 다른 놀이를 하자고 하여 다음 놀이가 장례식을 흉내 내는 놀이입니다. 이 놀이는 사람의 시신 대신 주로 죽은 메뚜기 한 마리를 갖다놓고 장례식을 시작합니다.
서로 간에 적절한 배역들을 정한 후에 여자아이가 장송곡(葬送曲)을 부르면 다른 아이들은 거기에 맞추어 가슴을 치며 통곡을 하여야 하는데 여기에도 문제가 생겼습니다. 역시 고집이 아주 센 한 아이가 있어 정해진 규칙을 따라 가슴을 치는 행동을 하지 않는 겁니다.
울음꾼이 애곡을 하면 그 동무들은 당연히 가슴을 쳐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않고 있으니 함께 있는 아이들이 말합니다. 우리가 슬피 울어도 너희가 가슴을 왜 치지 아니하느냐? 결국은 이 놀이 역시 제대로 흥이 나지 않아 결혼식 놀이처럼 그만 중단을 하고 맙니다. 이 역시 무관심 때문 아닐까요?
2. 두 비유를 통해서 시대의 영적 무감각함을 지적하십니다. |
16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결혼식과 장례식 비유의 초점은 아이들의 놀이가 아니라 그 놀이에 동참하지 않고 방관만 하는 동무들에게 있습니다. 결혼식 놀이를 제안해도 싫다. 그렇다고 장례식 놀이를 제안해도 싫다고 하는 아이들 즉 이래도 싫고 저래도 싫다고 하는 부류의 아이들이 바로 당시의 사람들에 비유되는 겁니다.
16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요한과 예수님의 동시대 사람들(12절)을 가리키는 말로서 예수님은 아이들의 놀이를 비유로 당시의 영적 무감각을 지적하신 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비유에 대한 해설로서 세례 요한은 금식한다는 이유로 사람들이 그를 미쳤다고 비난하고 반면에 예수님은 먹고 마시기를 즐기며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같이한다는 이유로 사람들이 비난한다고 말씀하십니다.
18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아니하매 그들이 말하기를, 귀신이 들렸다 하더니 19 인자는 와서 먹고 마시매 말하기를, 보라 먹기를 탐하고 포도주를 즐기는 사람이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로다 하니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
주님의 비유 속에 등장하는 그 세대의 모습을 다시 주목해 볼까요? 먼저 그들의 신앙관은 기준이 없이 그저 불신과 교만한 마음만 가지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결혼식 놀이에서 보듯 삶은 비탄과 슬픔으로 가득 차 있는데 어떻게 희희낙락하느냐며 거부하는 모습이 역력히 드러납니다.
그래서 장례식 놀이를 하자고 하니 그것 또한 너무 슬퍼서 싫다는 거지요. 세례 요한을 보고는 너무 비관적인 인물이라고 불평하고 예수님을 보고는 너무 낙관적이라고 역시 싫어합니다. 당시 교권자들의 모습을 주목해 보십시오.
그들은 예수님을 인용해 세례 요한을 비판하고 세례 요한을 인용해 예수님을 비판합니다. 무슨 말입니까? 그 삶에 기준이 없고 또한 원칙이 없이 그저 무감각한 삶을 살면서 무조건 비판만 하는 자존심만 강한 사람들입니다.
요즘도 무조건 비판만 하는 사람이 더러 있는데 한 번 나열해 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목사가 젊으면 경험이 부족하여 좀 불안하다고 하고, 나이가 많으면 시대에 맞지 않고 뒤떨어진다고 이야기를 하지 않습니까?
목사가 인물이 좀 뒷받침 되면 제비 같아 위험하다 하고, 못 생기면 품위가 없어 틀렸다고 하며, 목사가 자식을 많이 두면 무절제한 사람이라고 하고, 없으면 복 받지 못한 사람이라 하고,
가난한 성도의 집을 심방하면 인기운동 한다 하고, 부잣집을 심방하면 있는 사람과만 어울리며 없는 사람은 돌보지 않는다 하죠. 목사가 좋은 집에서 살면 사치한다고 하고, 허름한 집에서 살면 축복도 받지 못한 목사라고 천시하며,
좋은 차를 타면 어려운 사람들은 생각지 않고 과소비 한다고 하고, 궂은 차를 타면 장로님들과 교인들에게 사랑도 받지 못한다고 합니다. 또 있습니다. 어쩌다 헌금에 대한 설교를 하면 우리 목사는 맨 날 돈타령만 한다고 하고, 헌금설교를 안하면 가르치지 않는 무책임한 목사라고 합니다. 간혹 잘못된 일에 대한 책망을 하면 너무 냉정하다 하고, 온유함 때문에 잘못을 지적치 않으면 정의감이 없다고 말을 합니다.
3. 이 시간 나의 영적 무감각함을 지적하십니다. |
16 이 세대를 무엇으로 비유할까 비유하건대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제 동무를 불러.
같은 내용을 누가복음에서는 이 세대의 사람을 무엇으로 비유할까 무엇과 같은가?(눅 07:31) 라고 표현했습니다. 결혼식과 장례식 놀이의 두 비유는 예수님께서 당시의 유대인들의 신앙관을 규명하신 말씀이요 동시에 이 시대의 우리의 신앙관, 나의 신앙관을 지적하는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면서도 의인인 채 하는 사람 말입니다. 즉 이 세대가 바로 우리 자신들이 예수님의 구원의 은혜에 대한 기쁨이 없고 자기 죄악에 대한 안타까운 눈물과 회개가 없다는 말입니다.
오늘의 시대를 가리켜 무관심과 무감각과 무기력의 시대 즉 3무(3無)의 시대라고 표현합니다.
ⓛ무관심의 시대입니다. 타인과 공동체에 대해 모두가 한결같이 무관심한 거죠? 사회와 정치 경제에 대해서도 무관심하며 자기의 이익대로 자기의 기분에 맞고 좋은 사람한테는 관심이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는 관심이 통 없습니다.
②무감각의 시대입니다. 무관심은 무감각으로 발전하게 마련인데 옳고 그름에 대한 감각 상실과 함께 더불어 사는 사회에서의 윤리의 마비로 인해 자아를 잃어버린 채 살아갑니다.
③무기력의 시대입니다. 나 혼자 열 내어 충성하면 무슨 소용이 있나? 나 혼자 바르게 사는 것은 결국 나 혼자 비뚤어지게 사는 것은 아닌가? 하면서 에이 모르겠다. 될 대로 되겠지 라고 포기 한 채 살아갑니다.
조선이 개국하기 전 이방원(李芳遠. 太宗)이 고려의 충신 정몽주(鄭夢周, 1337~1392)의 진심을 떠보고 그를 회유하기 위하여 읊은 하여가(何如歌)라는 시조가 전해지는데 여러분들도 잘 아실 겁니다.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萬壽山) 드렁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처럼 얽혀져 백년(百年)을 누리리라. 적당한 세상살이를 살자는 권고 아닙니까? 이에 정몽주가 답한 것이 단심가(丹心歌) 인데 청구영언(靑丘永言)에 실려 전하며 그 전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 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단심가의 종장(終章)에서 정몽주는 임(主) 향한 일편단심(一片丹心)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라고 노래를 하였는데 이미 기울어 가고 있던 고려이지만 끝까지 굳은 결의를 지키려는 유학자의 자세와 두 왕조를 섬기지 않겠다는 일관 된 신념이 잘 나타나 있는 부분입니다.
오늘의 우리 신앙인에게 아주 적절한 시조인 것 같아 제가 한 번 소개해 보았는데 우리의 신앙, 바로 나의 신앙이 적당주의로 무감각해 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주관적인 관점이 없이 그저 적당히만 세속에 휩싸여 살아가는 무감각한 신앙으로 말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이와 같은 지조가 있어서 시대의 흐름을 극복하여 무관심, 무감각, 무기력해지지 않는 힘 있는 믿음으로 살아간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예수님은 오늘 말씀을 통하여 참가 정신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한 맘 되어 함께 어울리며 춤도 추고 가슴도 두드리는 것 말입니다.
내 생각, 내 비위에 맞지 않거나 뜻을 달리하는 일이 있더라도 장터의 놀이 다시 말해 교회를 통한 천국 운동에 순종하며 헌신하는 참여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안타까워하시는 것은 남들은 은혜의 자리에서 기쁨을 누리는데 정작 나는 무감각, 무관심, 무기력 때문에 천국 잔치에 참여하지 않고 분위기를 깨는 행동입니다.
우리 김해삼일교회에서는 Gup 30 영혼추수주일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나도 이번 기간 동안에는 믿음으로 기도하며 계획을 세워 성공하여야지 않겠습니까? 자기를 자기만의 방에 가두지 마세요. 역시 그런 사람은 방관자입니다.
자기를 가두는 사람은 결국 자신이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서로 손뼉을 칠 때는 손뼉을 치고, 손을 들고 찬양할 때는 함께 손을 들고 찬양하면서 은혜의 강에 나도 들어가야만 합니다. 설교도 마찬가지에요.
아무리 열정으로 설교를 하여도 반응이 없으면 이때는 정말 설교가 힘듭니다. 설교 어떻게 하나? 나를 한 번 감동시켜보시지? 하는 자세 앞에는 정말 설교가 힘들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설교를 들으면서 아멘, 아멘하며 영적 반응을 나타내면 성령님으로부터 우리 모두에게 감동이 오고 또 감동이 전달됩니다. 아멘입니까? 무조건 시류에 따라 반응하면 안 되지만 진리에는 힘써 반응할 줄 알아야 하며 사랑과 관심에도 힘써 반응할 줄 알아야 합니다.
사람에게 열정과 감동이 사라졌다는 것은 영혼이 병들었다는 증거입니다. 이제 열정과 감동을 회복하여 전도의 일에 관심을 기울이고, 교회도 열정적으로 섬기고, 내가 먼저 감동 받고 남도 감동시킬 수 있고, 하나님도 감동시킬 수 있기를 바랍니다.
롬 12:15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
일본의 유명한 신학자 우찌무라 간조는, 하나님이 인간을 저주하신다면 질병이나 실패나 죽음 따위로 저주하시지 않는다. 성경을 읽어도 믿지 못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이 살아 계시는 것을 믿지 못하는 마음으로, 감사하는 마음이 우러나오지 않는 마음으로 저주하실 것이다. 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무감각 무관심 무기력은 저주입니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그 시대의 사람들, 마치 피리를 불어도 춤을 추지 않고 곡을 해도 가슴을 치지 않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회개를 통한 복음 운동에 응하지 않고, 구경만 하고, 손가락질하고, 비평만 하는 사람들인데 이들은 온통 세례 요한과 예수님에 대해 분노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회개를 거절하고 복음을 거절하는 사람인 셈이죠?
피리를 불어도 춤을 추지 않고 곡을 하여도 가슴을 치지 않는 사람은 바로 오늘의 우리가 아니겠습니까? 나는 얼마나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살아갑니까?
만일 무관심의 생활이라면 이보다 더 안타까운 일이 어디 있습니까? 오늘 비유의 말씀에 앞서서 12절을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같이 읽도록 하겠습니다.
마 11:12 세례 요한의 때부터 지금까지 천국은 침노를 당하나니 침노하는 자는 빼앗느니라.
무슨 말씀입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그렇게 무관심의 대상이 아니라는 서로가 빼앗으려고 할 정도로 귀한 나라이기 때문에 천국은 침노를 당한다고 표현 한 것이지요.
그런데 그 나라를 앞에 두고 예수님 당시처럼 이 시대 우리들도 영적 무감각한 자가 되어 주님을 안타깝게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말씀에 관심을 기울이고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판단하고 순종하며 살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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