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앤아이교회 가족 여러분,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죄책(罪責)이라는 짐입니다. 이보다 무거운 짐은 없습니다.
행복은 무거운 죄의 짐을 벗는 데 있습니다. 죄의 무게가 얼마나 됩니까? 믿음이 살아있는 분에게는 한없이 무거운 짐일 것입니다.
믿음이 마비된 사람은 죄의 짐을 느끼지 못할 것입니다. 육신의 생명이 떠난 사람의 가슴에 바위를 올려놓은들 어디 무겁다고 하겠습니까?
영이 죽은 사람은 죄책을 느끼지 못합니다. 죄책을 심각하게 느끼는 사람, 죄의 무게를 아는 사람은 예수님을 통하여 구원받은 신자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죄의 짐을 내려놓고 살아갑니다.
신앙인에게 최고의 기쁨은 죄 사함의 기쁨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셨다는 기쁨보다 더 큰 기쁨은 없습니다.
신앙인에게 슬픈 일이 하나 있습니다. 죄의 용서를 받았는데도 계속 죄 속에 갇혀 삶의 즐거움을 누리지 못하는 일입니다.
성경 진리와 회개의 삶을 아는 신자는 죄는 지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사죄의 은총을 누립니다. 신령한 은혜의 삶도 누립니다. 우리 믿음의 가족이 삶의 현장에서 죄와 싸워 이기는 삶이 가능합니까? 예, 가능합니다.
신령한 복을 몰고 다니는 신자는 죄와 싸워 이깁니다. 죄에서 벗어난 삶이 얼마나 귀합니까? 이런 사람은 하나님께 날마다 드림의 생활을 합니다.
따라서 오늘 말씀 제목을 「자기를 하나님께 드리며 삽시다.」로 정했습니다. 메시지를 통하여 은혜의 시간, 자기를 하나님께 드리는 동력이 임하는 시간 되기를 바랍니다.
| 1. 나의 신분은 죄에서 해방된 신자입니다. |
03 무릇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여기서 세례는 단순히 물로 씻는 의식만 뜻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었다는 신령한 표시입니다. 좀 더 이해를 돕는 표현을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속죄의 제물로 십자가에 돌아가셨을 때, 우리도 함께 죽었다는 영적 표현입니다. 죄와 벗하던 삶은 끝나고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는 선언입니다. 신자는 더 이상 예전처럼 죄에 끌려 사는 존재가 아닙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고 다시 사는 새로운 신자가 되었습니다. 이 말씀은 세례를 받았으니 형식상 신자가 되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삶의 방향이 바뀌어야 하는 도전의 말씀입니다.
안다는(ἀγνοεῖτε) 의미의 단어가 03절, 06절(γινώσκοντες), 09절(εἰδότεςοἶδα)에 계속해서 나옵니다. 그러면 무엇을 알아야 합니까?
03 알지 못하느냐? 06 우리가 알거니와 09 앎이로라. 번역상 비슷하게 보이지만 바울은 미묘하게 다른 의미로 구분하여 사용합니다.
세 구절에서 안다는 말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을 때 우리도 함께 죽었다는 뜻입니다. 현재 내가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면 예수 그리스도에게 영적으로 연합되었다는 의미가 됩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죽었을 때 나도 죽었고, 주님께서 부활하셨을 때 나도 부활하였습니다. 이 사실은 육으로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신령한 은혜로 경험합니다.
갈 0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지금도 죄의 세력은 나를 넘어지도록 줄기차게 미혹합니다. 그러나 나는 이미 죄에 대하여는 분명히 죽었습니다. 우리 믿음의 가족은 죄와 거래가 완전히 끝났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 진리가 매우 중요합니다.
믿음의 가족 여러분, 세례 뜻이 무엇입니까? 옛사람이 죽고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새사람으로 거듭났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세례식은 그리스도인에게는 장례식이요 동시에 부활 의식입니다.
오거스틴(Αυγουστίνος 354.11.13~430.8.28)은 4세기경 서방 기독교에서 교부로 존경받으며 마틴 루터와 장 칼뱅과 큰 영향을 준 인물입니다. 이분이 회심하고 새로운 사람이 된 후 길을 가다가 옛날에 함께 어울리던 거리의 여자를 만났습니다.
오거스틴이 못 본 척하고 지나자, 그 여자가 좇아오면서 저예요. 저 몰라요? 하였습니다. 그러자 오거스틴은 너는 너지만 나는 내가 아니란 말이야.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습니다. 기독교 초창기 시절 유명 부흥사이던 김익두 목사님이 회개하고 구원받은 후의 일입니다.
제일 먼저 한 일이 자기의 장인에게 김익두 사망이라는 부고를 보냈습니다. 얼마나 장인의 속을 썩였으면 먼저 한 일이 옛사람 김익두가 죽었다고 부고를 보냈겠습니까?
| 2. 나의 신분은 예수님 안에서 살아난 신자입니다. |
11 이와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11절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연합한 신자의 정체성을 선언하는 말씀입니다. 원문 핵심은 여기다(λογίζεσθε) 입니다. 이는 단순한 자기암시가 아닙니다. 나의 신분은 하나님을 향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아 있는 자로 여기라는 뜻입니다.
예수님 안에서 살아간다고 죄를 더 이상 짓지 않습니까? 아닙니다. 죄가 나를 지배하지 않는 것일 뿐 일상에서 자범죄는 어쩔 수 없습니다.
우리는 비록 죄의 환경에 노출은 되어 있지만 하나님을 향해서는 살아 있는 신자입니다. 생물학적 생존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해 새 생명 안에서 살아가는 신분입니다.
감정적으로 그렇게 느끼는 신분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연합한 새 신분입니다. 새로운 신분의 정체성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이어지는 12절이 우리가 받을 말씀입니다.
12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여길지어다(λογίζεσθε) 현재 명령형 이인칭으로 간주하다, 생각한다. 이런 뜻입니다. 계속해서 그렇게 판단하고 받아들이라는 지속적 명령입니다.
신자는 죄에 대하여 분명 죽은 자입니다. 동시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을 대하여는 산 자입니다. 이 신분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람은 약합니다. 여전히 죄가 우리를 넘어지게 합니다. 사탄이 여러 도구를 놓아 넘어지도록 미혹합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죄에 대한 우리의 자세를 이렇게 안내합니다.
히 12:04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 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
피 흘리기까지. 이 표현은 단순한 상징이 아닙니다. 실제 목숨을 걸고 싸우는 수준까지를 말합니다. 죄와의 싸움은 단순한 도덕적 갈등이 아닙니다.
생명을 걸어야 할 만큼 진지한 싸움입니다. 신앙생활에서 유혹과 어려움을 만날 때 끝까지 버티며 싸워야 한다는 메시지입니다.
당시 초대교회 신자들은 박해와 고난 속에서 신앙을 지켰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처럼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며 죽기까지는 경험하지 않았음을 상기시키는 말입니다.
우리에게는 실제로 목숨을 잃는 순교의 상황은 드뭅니다. 그런데도 여전히 죄와 싸움은 치열합니다. 자기 욕망, 세상의 압력, 신앙을 흔드는 유혹 앞에서 피 흘리기까지의 각오가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유앤아이 가족은 하나님 앞에서 새로운 정체성을 세워야 합니다. 코람데오의 삶을 기준으로 삼아야 합니다. 현실의 감정이나 상황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준으로 자기의 신분을 확인해야 합니다.
죄의 유혹이 여전히 강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믿음으로 나는 죄에 대하여 죽었다. 라고 여기는 시점이 승리의 출발점입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살아가는 삶이 성화의 길입니다.
신앙생활의 중요한 관점은 내가 어떻게 느끼는가? 보다 하나님께서 나를 어떻게 보시는가를 기준으로 삼아야 합니다. 11절은 우리가 이 사실을 알고 살아가는 신분임을 밝힙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용서하시고 의롭다고 인정해 주셨으니,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인정하십시오. 그에 걸맞게 생활하십시오. 이 일이 바로 하나님 자녀의 신분입니다.
| 3. 나의 신분은 하나님께 드리는 헌신자입니다. |
13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무기는 선(善)도 악(惡)도 아닌 중립 도구입니다. 고대 전쟁에서 칼과 창, 활 등과 현대 전쟁에서 고성능의 미사일, 화학 무기 등 그런 것들이 무기입니다. 그것을 쥔 사람의 의도와 목적에 따라 선을 위해 쓰일 수도 있고 악을 위해서 쓰일 수도 있습니다.
바울은 우리의 몸(肢體)을 무기에 비유합니다. 즉, 우리의 손과 발과 입과 눈 그리고 마음은 전쟁에서 쓰이는 무기처럼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
그런 뜻에서 바울은 몸을 죄에 방임하여 욕망, 탐욕, 미움, 거짓에 휩싸이지 말 것을 주문합니다. 자칫 죄를 확산하는 무기가 되기 때문입니다.
사실 우리의 지체와 삶은 반드시 어떤 목적을 위해 쓰이게 되어 있습니다. 어디엔가 쓰일 바에야 함부로 죄에 내어 주어 불의 무기로 전락하면 안 됩니다.
따라서 몸을 죄에 내주면 불의의 무기가 되고 하나님께 드리면 의의 무기가 됩니다. 문제는 내 모든 삶을 죄의 방향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향하여 가는 일입니다. 이 일은 믿음으로 받고 믿음으로 결정할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만이 방향 설정을 할 수 있습니다.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παρίστημι). 우리의 몸과 삶을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로 사용하라는 명령입니다.
바울이 우리의 지체를 왜 하나님께 드리라고 합니까? 이 구절은 단순히 착하게 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앞뒤 문맥을 이어보십시오.
바울은 신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난 자라고 밝힙니다. 그래서 더는 죄가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새 사람으로 살기를 명령합니다.
즉, 삶의 주도권을 죄에게 넘기지 말고 하나님께 드리라는 뜻입니다. 내 몸이라고 내 마음대로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 속한 신자답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방향으로 전환하여야 합니다.
현재 시제(時制)로 적용하면 내 몸과 재능과 물질과 시간과 언어를 죄가 마음대로 관리하도록 내버려 두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 옳다고 여기는 일에 사용하십시오. 죄에게 내어 주면 가족과 이웃과 사회 전반에 상처만 남깁니다.
하나님께 드리면 그때부터 사랑의 바람이 불어옵니다. 서로를 세워주는 말과 행동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어 갑니다.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십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몸과 삶이 중립을 유지 하지 않습니다.
순간순간의 선택을 통해서 죄의 도구가 될 수 있고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도구도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헌신을 다짐하는 자는 헌신자답게 신앙 정체성을 잘 지키십시오.
유앤아이교회 가족 여러분, 여러분의 모든 부분을 하나님께 드리는 삶으로 전환할 수 있습니까? 그러면 그분이 나의 온전한 주인이 되게 하십시오. 비로소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빛나고 거룩한 삶을 믿음으로 체험할 수 있습니다.
이제는 죄의 지배를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사망의 지배를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 지배는 끝이 났습니다. 바울은 로마서를 통하여 헌신자에게 이런 삶을 안내합니다.
롬 12:0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
14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주장하지 못하리니(κυριεύσει) 동사 κυριεύω의 미래 시제입니다. 죄가 주인이 되어 군림하지 못할 것이라는 미래형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인이 되면 당연히 죄가 신자를 현재뿐만 아니라 미래에도 주관하지 못합니다. 믿음으로만이 받을 수 있습니다.
이 강력하고 확실성 있는 보증의 근거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율법 아래에 있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믿음의 가족은 은혜 아래 거합니까? 그리스도의 구속에 대한 확신과 함께 죄의 문제가 해결된 상태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죄가 감히 넘볼 수 없습니다.
지난 시간은 흘러간 물과 같습니다. 되돌릴 수 없습니다. 남은 세월 모두가 주님 안에서 구원받은 신분임을 알고 헌신자의 삶을 사십시오.
나는 죽었다. 다시 태어났다. 이런 진리를 앞세워서 살아야 합니다. 이제는 죽은 자가 아니라 새롭게 태어난 신자답게 자기를 믿음으로 관리하며 살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일을 기대하십시오. 나를 통해서 일하실 하나님을 바라보며 후회 없는 믿음의 길을 잘 걸어가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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