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단/2025년 말씀

예수님을 만나면 살아납니다( 눅 07:11~17).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25. 3. 8. 0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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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에서 만남이란 단어를 검색하면 만남을 주선하는 여러 사이트가 나옵니다. 그중에 저의 눈길을 끄는 한 사이트가 띄었습니다.
20016월에 오픈한 클럽 5678 미팅 및 채팅 전문 업체입니다. 국내 유명 포털 외 50여 사이트에 자사를 지속해서 광고한다는 문구까지 담고 있습니다. 어떤 만남을 주선하는지를 살펴보니 지역별, 주제별, 직업별로 주선한다는 만남입니다.

혹 유익한 정보가 있을까? 싶어 회원가입 하니 이용료가 있더라고요. 그래서 그 사이트를 탈퇴했는데 잠깐 둘러보면서 직업별 만남 코너는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사람과 만남을 통하여 삶이 하나씩 하나씩 꾸며져 갑니다.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서 그 인생관이 형성됩니다.

누구를 만나느냐 하는 것은 자기의 삶에서 대단히 중요합니다. 사람은 일생을 살면서 세 가지 중요한 만남을 해야 합니다.

첫째 부모님과 만남입니다. 우리의 인생 첫 출발이 되기에 매우 중요합니다. 둘째 선생님과 만남입니다. 우리 인생에 가장 기초적인 것이 교육으로부터 나옵니다. 셋째 배우자와 만남입니다. 우리의 생애 가 배우자와 함께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고민거리가 무엇입니까? 꼭 만나야 할 사람은 안 만나고 정작 안 만나도 될 사람과 만나서 괴로워하는 일입니다. 친구와의 만남도 중요하고 배우자와의 만남도 중요합니다.

 

우리 믿음의 가족은 어떤 교회를 만나며 어떤 목회자를 만나느냐가 중요합니다. 이처럼 만남은 중요합니다. 만남 중에서도 가장 복된 만남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 복된 만남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예수 그리스도와 만남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만나기만 하면 그 만남은 복된 만남입니다.
오늘 말씀은 주님과 장례 행렬의 만남입니다. 이 복된 만남 후에 주님께서 울지 말라(13) 하십니다. 주님과의 만남으로 장례 측이 겪는 슬픔의 문제가 해결됩니다.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의 모든 문제가 예수님을 만남으로 인해 시원하게 해결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말씀 제목을 예수님을 만나면 살아납니다.로 정했습니다.

 

 

1. 우리의 인생길은 눈물의 길입니다.

 

13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

 

많은 사람이 인생살이를 오랫동안 경험하고 나서 말하기를, 이 세상은 고해요, 인생은 일엽편주(一葉片舟)와 같다고 합니다.

그만큼 인생살이가 힘들고 고통스럽다는 뜻입니다. 우리네 인생살이 백 년 안쪽의 짧은 삶에서 형통한 일만 있으면 저도 여러분도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그런 기대보다는 오히려 환난 풍파가 더 따릅니다. 특히 죽음은 예고도 없이 찾아와서 모두에게 슬픔을 안겨 줍니다. 이런 일이 우리 모두를 슬프게 합니다.

 

믿음의 가족 여러분, 나인 성문 가까이에서 두 행렬이 마주치고 있는 장면을 보십시오. 하나는 생명의 행렬이고 또 하나는 죽음의 행렬입니다.
죽음의 행렬은 장례를 맞아 마을 밖 공동묘지로 나가는 중이고 생명의 행렬은 지금 나인성으로 들어가서 복음을 전하려는 행렬입니다.

성안으로 들어가는 행렬에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있고 그 뒤로 많은 사람이 저마다 이분이 선지자다. 메시아다. 하면서 흥분된 마음으로 바짝 뒤따르고 있습니다.

 

11 그 후에 예수께서 나인이란 성으로 가실 새 제자와 많은 무리가 동행하더니.

 

그러나 나인성에서 나오는 행렬은 한 과부의 외동아들이 죽은 안타까운 장례 행렬입니다. 이는 나인 성의 많은 사람이 동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2 성문에 가까이 이르실 때에 사람들이 한 죽은 자를 메고 나오니 이는 한 어머니의 독자요 그의 어머니는 과부라 그 성의 많은 사람도 그와 함께 나오거늘.

 

죽은 아들 어머니는 남편 잃은 과부입니다. 자기의 남을 삶을 외아들에게 걸고 살았을 것인데 그 아들마저 젊은 나이에 죽고 말았습니다. 자기의 삶을 돌아보니 기가 막혀 목을 놓아 울면서 슬픈 낯으로 상여를 따르고 있습니다.

거기다 많은 동네 사람도 안타까움을 어쩔 수 없어 슬픔을 함께 나누기 위해 장례에 참여했습니다. 이처럼 죽음이란 남녀노소 구분하지 않고 모두에게 공평하게 찾아옵니다. 오늘 말씀을 보면 청년이 죽었다는 사실입니다.

 

사실 우리는 이 청년이 나인성에서 어떤 영향력을 끼치며 살았는지 모릅니다. 청년의 어머니도 무슨 영향력을 끼쳤는지 모릅니다. 성경은 침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이들 장례 행렬에 함께해 주고 있습니다. 젊은 아들을 잃고 절망에 몸부림치는 과부의 슬픔을 위로해 주는 현장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저와 우리 여러분의 살아가는 길도 바로 이런 길을 걷고 있습니다.

세상에 태어날 때는 순서가 있지만 세상을 떠날 때는 순서가 없다고 하지요. 보통은 나이 들어서 장수하고 죽지만 불의의 사고로 갑자기 죽음을 맞이할 수도 있습니다. 죽음 앞에는 그 누구도 한결같이 무기력하기만 한 존재입니다.

어린아이도, 청년도, 장년도, 모두 죽음의 대상이 된 것을 볼 때 인간의 행렬은 결국은 장례의 행렬입니다. 모두가 슬픈 길을 가는 인생임을 알 수 있습니다.

 

 

2. 인생길의 문제는 주님을 만남으로 해결됩니다.

 

14 가까이 가서 그 관에 손을 대시니 멘 자들이 서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시매.

 

예수님께서 보시기에 이 과부의 우는 모습이 얼마나 애처로웠으면 울지 말라고 하십니까? (13) 인생무상이니 어쩌겠느냐? 자식 없는 셈 치고 용기를 잃지 말라. 인생의 길은 다 이런 것이라고 적당한 말로 위로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마음과 마음을 주고받는 행동으로 위로를 해 주십니다. 관에 손을 직접 대면서 말씀하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이스라엘 문화에서 죽은 자는 부정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시체와 접촉하는 것이 금지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유대교의 정결법을 어기시면서 장례 행렬을 멈추셨습니다. 그리고 그 죽은 청년에게 말씀하십니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죽어서 관 속에 들어 있는 청년이 살아났습니다. 앉아서 말도 합니다. 모두가 살아난 것을 확인한 후 그 청년은 어머니에게 돌려졌습니다.

 

인생 삶에서 가장 중요한 만남은 생명의 주인 되시는 예수님과의 만남입니다. 복된 은총을 누리기 위해서는 주님을 만나는 절묘한 타이밍이 중요합니다.

혹 장례식 행렬이 마을을 빠져나간 다음 예수님께서 이 마을에 오셨더라면 어떻게 되었을 것 같습니까? 이미 다 끝난 일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장례식을 끝내고 난 다음 나인 성()안에서 예수님을 만날지라도 선생님, 오늘 불쌍한 사람이 하나 죽었는데 그 사람을 살려주실 수 있습니까? 라는 질문을 누가 하겠습니까?

 

죽으면 모두가 다 끝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병자를 고치셨다는 소문만 가지고는 예수님께 죽은 자를 살려달라고 간청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사람과 사람이 만난다고 해서 죽은 자가 살아나지 않습니다.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그분과 내가 만나야 기적을 보고 누릴 수 있습니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전능자의 이 말씀이 있어야 기적을 내가 체험할 수 있습니다. 이웃에게도 간증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소중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예수님과 나와의 만남, 그리고 그 분께 경배를 드리는 삶이 있어야 합니다. 그 삶이 매우 중요합니다.
그분을 만남으로 비로소 내가 가진 모든 문제를 풀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 믿음의 가족께서 인생살이에 잘 안 풀리는 일들이 계속 머물고 있습니까? 성경의 답을 들어봅시다.

 

시 34:15 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그들의 부르짖음에 기울이시는 도다.

시 37:05 네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그를 의지하면 그가 이루시고.

 

그래도 계속 답답하며 괴롭기 짝이 없습니까? 이럴 때 우리 다 같이 시온의 찬미 143장을 부르면서 문제를 풀기를 바랍니다.

넘지 못할 산이 있거든 주님께 맡기세요. 넘지 못할 파도 있거든 주님께 맡기세요. 우리 가야 할 길은 멀고도 험하여 허덕이며 가야 하는 우리 인생인데. 이럴 때 우린 누굴 의지하나요. 주님밖에 없어요. 나는 그 길 갈 수 없지만 주님이 대신 가요.

참지 못할 분노 있거든 주님께 맡기세요. 참지 못할 슬픔 있거든 주님께 맡기세요. 우리 살아갈 길은 눈물의 골짜기 내 힘으론 참지 못해 늘 흐느끼네. 이럴 때 우린 누굴 의지하나요. 주님밖에 없어요. 나는 그 길 갈 수 없지만 주님이 대신 가요.

 

 

3. 예수님을 만나면 영육 간에 살아납니다.

 

15 죽었던 자가 일어나 앉고 말도 하거늘 예수께서 그를 어머니에게 주시니.

 

죽음이 우리를 슬프게 하는 이유는 우리와 세상을 떠난 사람의 관계가 단절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만날 수 없고 함께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 죽었던 자가 살아났다고 해서 그것을 부활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엄격히 말해서 그런 삶은 진정한 부활이 아닙니다.

나인 성 과부의 외아들이 죽음에서 살아났지만, 그것은 죽었다 살아난 것일 뿐입니다. 부활이 아닙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도 살아났고 나사로도 살아났지만 결국은 또 죽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한 번 죽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그런데 또 죽게 될 것이니 오히려 얼마나 고역이며 장례식에 다시금 경비만 들지 않습니까?

참된 부활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었다가 사흘 만에 살아나신 그 사건뿐입니다. 다만 과부의 아들이 살아 모자간에 다시 만나게 된 것은(15) 장차 우리에게 일어날 부활과 함께 장래의 소망이 있음을 알려주는 하나의 상징입니다.

 

살전 04:13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4 우리가 예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믿음의 가족 모두 언젠가 죽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실 그때는 세상의 몸을 벗고 부활의 영광체(榮光體)를 입게 될 것을 기대하십시오. 그날을 내다보며 살아가는 성도는 생명의 주인 되신 예수님을 만나기를 소망하십시오.

그분으로 인해 영육 간의 회복의 역사가 있습니다. 세상에 이름을 남기고 떠난 사람들 묘비명을 보면 읽을거리(?) 되는 것이 있어 몇 곳을 소개하겠습니다.

헤밍웨이. 일어나지 못해 미안해. 버나드 쇼(아일랜드 소설가). 우물쭈물 살다 내 이럴 줄 알았지. 중광(걸레 스님). 괜히 왔다 간다. 카를 마르크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다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의 삶의 흔적과 표현입니다. 우리는 그날을 믿음으로 내다보며 불신의 모습을 떨치고 믿음의 시간표를 세워야 합니다.

한편 믿음의 시간표를 따라 목적을 세우고 살다가 간 사람들의 묘비명을 보면 숙연해집니다. 자기를 돌아보는 계기도 됩니다.
김수환 추기경.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운 것이 없어라. 아펜젤러 선교사.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습니다.
믿음의 가족 여러분, 지금 우리의 남은 시간 얼마나 될지 모릅니다. 선한 일 영광된 일을 하기에는 시간이 많이 모자랍니다. 그러면 나의 묘비에 어떻게 글을 남기렵니까?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미국의 뉴욕 대학교 부속병원 재활 센터 벽에 나는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라는 내용의 기도문이 걸려 있습니다. 가슴에 와닿는 기도문입니다.

큰일을 이루기 위해 힘을 달라고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는 겸손을 배우라고 연약함을 주셨습니다. 많은 일을 해낼 수 있는 건강을 구했는데 보다 가치 있는 일을 하라고 병을 주셨습니다. 행복해지고 싶어서 부유함을 구했더니 지혜로워지라고 가난함을 주셨습니다. 세상 사람에게서 칭찬받고자 성공을 구했더니 뽐내지 말라고 실패를 주셨습니다.
삶을 누릴 수 있게 모든 것을 달라고 기도했더니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는 삶 그 자체를 선물로 주셨습니다. 구한 것 하나도 주시지 않았지만 내 소원 모두를 들어주셨습니다.

하나님 뜻을 따르지 못한 삶이었지만 내 마음속에 진작 표현 못한 기도를 모두 들어주셨습니다. 나는 가장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믿음의 가족 여러분, 누구나 예수님을 만나면 이렇게 삶이 달라집니다. 청년아 내가 네게 말하노니 일어나라 하신 말씀은 나를 향한 말씀인 줄로 받읍시다.

오늘 내가 하나님의 말씀 앞에 일어날 때, 심령이 소생할 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죽은 심령 그대로 있으면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제부터 내 삶을 믿음의 명품이 되게 하십시오. 명품과 같은 삶은 세상 사람들과 다릅니다. 내 이름 석 자가 최고의 브랜드, 명품이 되는 인생을 만드십시오. 인생 자체가 귀하고 값어치 있는 명품과 같은 삶을 살아야 합니다.

명품을 사기 위해서 목숨 거는 인생이 아니라 옷으로, 가방으로, 신발로 치장하는 인생이 아니라 자기의 삶을 믿음의 명품으로 만드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