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남북전쟁 때의 일입니다. 한 번은 워싱턴시를 흐르는 포토맥(Potomac, 665km)강을 사이에 두고 남군과 북군이 서로 대치하고 있었습니다. 이제 밤이 지나고 아침이 밝으면 서로 간에 치열한 전투가 시작될 예정입니다.
달빛이 흐르는 고요한 시간 양쪽 진영 모두가 깊은 적막감에 쌓여 있습니다. 병사들은 두려움에 떨며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하는 지경입니다.
그때 한 병사가 적막감을 깨뜨리고자 나직한 목소리로 노래를 한 곡 부릅니다. 그때만 하더라도 남군과 북군 사이에서는 서로 군가와 애국가가 달랐습니다.
이쪽에서 군가를 부르면 저쪽에서는 또 다른 군가로 응수하곤 했는데 그 군인은 모두가 함께 따라 부를 수 있는 노래를 불렀습니다.
우리도 잘 아는 노래입니다. Home, sweet home입니다. 옆에 있는 사람이 따라 부르자 그 옆에 있는 사람도 따라 부르면서 온 진영에 노래가 울려 퍼졌습니다. 급기야 강 건너편에 있는 상대 진영에도 들려서 그들도 함께 따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밤이 새도록 Home, sweet home을 부르고 또 소리 내어 부르는 가운데 드디어 결전의 날이 밝았습니다. 그러나 어느 쪽 진영에서도 진군의 나팔 소리는 울려 퍼지지 않았습니다. 그곳에 더는 전쟁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모두가 근본으로 돌아갔기 때문입니다. 왜 우리가 싸워야 하는가? 따지고 보면 우리는 한 형제인데 즐거운 곳에서는 나를 오라고 하는데 우리는 왜? 하면서 깨달은 겁니다.
복을받는교회 가족 여러분, 우리 모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가족입니다. 예수님의 피로 맺어진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형제입니다.
교회를 섬기는 일에도 하나 된 가족임을 기억하십시오. 복을받는교회를 굳게 세우는 일에 에너지를 기울이십시오. 그래서 오늘 말씀 제목을 「우리는 하나 된 가족입니다.」로 정했습니다.
1. 우리는 이미 하나 된 가족입니다. |
0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가정에도 부부 사이에도 혹 갈등이 있습니다. 형제 사이에도 시샘이 일어납니다. 때로는 한 지붕 밑에 살면서도 하나라는 감정을 체험하지 못합니다.
어쩌면 남이 되어 고독하게 살기도 합니다. 그런 가정은 한 가족이 어떻게 하나 됨을 이루어 나가느냐 하는 것이 우선순위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피 받아 한 몸 이룬 형제입니다. 이 하나의 지체를 어떻게 잘 지켜나가느냐? 가 우선순위입니다.
요 17:11…. 아버지여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사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하나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 안에서 구원받은 우리를 위한 기도로 받을 수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 안에서 하나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하나 되었음을 상기시킵니다. 이 하나 된 것을 깨뜨리지 말 것을 03에서 부탁합니다.
03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복을받는교회 가족 여러분, 이제부터는 성령님께서 하나가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켜야 할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사명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하나를 깨뜨리려는 악한 세력은 항상 하나를 무너뜨리려 틈을 노립니다. 오늘 말씀이 속한 에베소서는 특별히 교회론을 강조하는 성경입니다.
성도 여러분에게 교회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들의 모임 자체입니다. 교회를 굳건히 세우기를 원한다면 공동체를 지키는 의무와 책임도 함께 수행해야 합니다.
04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05주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06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우리가 하나 됨을 지키기 위한 근거가 04~06절 말씀에 일곱 가지로 나옵니다. 제가 이해를 돕기 위해 분석해 드리겠습니다.
①몸이 하나이고 ②성령도 하나이고 ③소망도 하나이고 ④주님도 하나이고 ⑤믿음도 하나이고 ⑥세례도 하나이고 ⑦하나님도 한 분입니다.
이렇게 일곱 가지가 하나인 것처럼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입니다. 이 일곱 가지를 다시 세 단어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04절에는 성령님이고 05절에는 주님이며 06절에는 하나님 아버지입니다. 정리하면 성령님, 예수님, 하나님 이렇게 삼위일체 하나님으로 조화를 이룹니다.
왜 우리는 하나입니까? 같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고 같은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고 같은 성령님을 체험해서 같은 소망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신령한 공동체에 들어왔습니다. 당연히 하나를 지키기 위해 수고하여야 합니다.
공동체 회원이 가만히 있으면 공고해집니까? 서로가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노력의 원동력은 평안의 매는 줄(03)입니다. 바울은 하나를 이루기 위하여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골 03:14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온전하게 매는 띠,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 된 것이 깨어지지 않고 분열되지 않도록 노력하는 추진력을 의미합니다.
복을받는교회 가족 여러분, 우리가 하나 된 것이 분열되는 것은 사탄이 틈을 탄 증거인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 된 것이 깨어지지 않도록 최선의 노력을 합시다.
2. 하나 됨을 견고히 하는 4가지 자세가 있습니다. |
0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하나 됨을 잘 간직하기 위해서 무엇보다 교회에 대한 주인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주인 된 심정으로 신앙생활 하시는 분은 웬만한 것은 양보합니다. 얼마든지 이해합니다. 하나를 이루어 가는 일에 능히 앞장을 섭니다.
우리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공동체 일원입니다. 하나 됨을 위하여 지키기 위해서 몇 가지 원칙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02절에서 하나 됨을 견고히 하는 자세를 안내합니다.
02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①하나 됨을 지키기 위해서 겸손한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겸손은 낮춘다는 뜻입니다. 자기의 생각이나 자세를 순수하게 낮춘다는 뜻입니다.
종의 자세나 종의 행동을 말합니다. 그러면 종에 대한 반대 뜻은 무엇입니까? 다른 사람을 부리는 자세 혹은 남을 조종하는 자세입니다.
한때 아름다웠던 성도의 교제가 상처를 입습니까? 그것은 반드시 우리 중에 누군가가 겸손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무례한 사람이 있다는 말입니다.
성경이 기록되던 당시의 헬라 문화나 혹은 그다음에 일어나는 로마 문화에서는 겸손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가 없었습니다.
겸손이란 말이 있기는 하나 그 당시에는 비겁하다는 뜻입니다. 그만큼 헬라나 로마의 문화는 겸손이라는 덕목을 낮추어서 생각했습니다.
겸손이라는 단어가 주는 따뜻함과 아름다움을 회복시켜 겸손을 위대하게 만드신 분이 있습니까? 누구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빌 02:0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0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겸손을 실천하기를 원하면 사람에 따라서 대하는 태도가 먼저 달라져야 합니다. 언제 어디서나 누구를 대해도 낮은 자의 위치에 서야 합니다. 겸손한 태도를 보이면 상대방을 존중하게 되고 서로 간의 교제에 문제가 생기지 않습니다.
네비게이토 선교 단체의 회장을 지낸 론 세니에게 어느 날 한 대학생이 찾아와서 이런 질문을 하였습니다. 선생님, 제가 종의 자세를 가지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면 어느 수준까지가 종의 자세입니까? 제가 종의 태도 겸손한 태도를 보이게 되었다는 것을 저 스스로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론 세니가 다음과 같은 대답을 했습니다. 그것은 자네가 사람으로부터 종으로 취급당할 때 어떻게 반응하는지를 보면 안다네.
성도 여러분도 종과 같이 되기를 원합니까? 종처럼 취급당할 때 정말 종처럼 행동할 수 있습니까?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아직도 종의 모습을 실현하지 못한 증거입니다.
성경은 성도의 교제를 견고히 하고 하나 됨을 지켜나가는 가장 중요한 덕목이 겸손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날마다 겸손을 추구하며 살기를 바랍니다.
②하나 됨을 지키기 위해서 온유한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보통 온유하다고 하면 연약한 이미지를 먼저 떠 올립니다. 온유는(πραΰ́της 프라위테스) 연약함의 이미지와는 다른 따뜻함과 절제입니다. 힘이나 능력이나 감정을 쉽게 발산하지 않는 상태입니다.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아주 사나운 야생마가 한 마리 있는데 보통 사나운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그 말을 훈련했더니 훌륭한 준마(駿馬)가 되었습니다. 이때 헬라인들은 그 말을 가리켜서 프라위테스(πραΰ́της)라고 합니다. 온유해졌다는 뜻입니다.
야생마는 자기의 힘을 잃은 것이 아닙니다. 야생의 힘이 아직도 내재하고 있지만, 그 힘을 잘 통제하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격정이 일어나고 힘이 솟구칠 때 어떻게 합니까? 또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자기의 감정을 어떻게 통제합니까? 성경은 통제가 잘 되는 사람을 온유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마 05:0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자기주장이 지나치게 강할 때 그의 곁에 있는 사람이 상처를 입을 수 있습니다. 지나친 자기주장의 배후에는 종종 자기 신뢰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자기의 신념, 자기의 생각이 너무 강하면 양보하기가 어렵습니다. 양보가 없는 곳에 교제를 깨뜨리고 상처를 입히는 가시가 나옵니다.
우리 모두 공동체의 유익을 위해 이웃의 평화를 위해 생각을 온유한 마음으로 바꿉시다. 그리하여 예수님처럼 온유한 마음으로 땅을 차지하는 복을 누리기를 축원합니다.
③하나 됨을 지키기 위해서 오래 참음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오래 참음이 하나 됨을 지키고 교제를 돈독히 하는 요소입니다. 그러면 오래 참는다는 뜻이 무엇입니까? 어떤 역경 어떤 위기 어떤 상황 속에서도 포기하지 않는 자세를 말합니다.
지금 처한 환경이 아무리 힘들어도 하나님께서 허용하신 것이라 믿는 사람, 비록 짜증 나는 환경이라도 분명한 하나님의 뜻이 있다고 믿는 사람은 오래오래 참을 수 있습니다.
롬 0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오늘의 고통을 내일의 영광으로 바꾸어 주실 하나님, 오늘의 좌절을 내일의 희망으로 바꾸어 주실 하나님, 오늘의 당한 손해를 내일의 복으로 바꾸어 주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습니다. 오래 참음은 극복을 동반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내는 아무 과정도 없이 저절로 하루아침에 만들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인내의 품격은 연단의 과정을 통해서 형성됩니다. 하나님께 이 오래 참는 성품 주시기를 기도해야 합니다.
인스턴트 제품이 발달한 현대는 대부분 사람이 과정 없이 결과만을 추구합니다. 인내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하지만 인내하는 과정은 싫어합니다.
실제로 이 오래 참음을 통해서 성도의 교제를 든든하게 지켜나갑니다. 때로는 한 사람의 조급함이나 혹 참지 못함으로 교제가 무너지는 때도 있습니다.
벧후 03:09….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④하나 됨을 지키기 위해서 사랑으로 서로 용납하는 자세를 가지는 겁니다. 용납이란 담요로 덮는다는 뜻입니다. 이웃의 허물을 덮어 주라는 의미입니다.
비록 내 의사와는 다른 의견을 가졌다 할지라도 바다와 같은 넓은 마음으로 그 사람을 감싸주는 것이 용납입니다. 그저 용납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할 것을 명합니다. 용납한다는 말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상대방을 있는 모습 그대로 수용하는 자세입니다.
인간관계에서 위기가 왜 생깁니까? 한마디로 상대방이 내 마음에 안 들기 때문입니다. 내 마음에 안 드니 상대방이 변하기를 바랍니다. 상대방이 변하기를 기대할수록 바뀌지 않는 상대방을 보면서 우리는 얼마나 속상해합니까?
여러분은 상대방을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일 용기가 있습니까? 자기의 관점에서 상대방을 비판하면 우리는 더욱 속상해집니다.
이것이 우리의 인간관계의 당면한 위기의 악순환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어떻게 강조합니까?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라고 가르칩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랑이란 상대방의 이익을 전제로 합니다. 그리고 상대방의 유익을 위해서 상대방의 자리에 서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알 수도 있습니다. 그 사람의 환경을 살펴보고 그 사람이 자라난 배경을 들어보는 것이 우선입니다.
그 사람의 삶의 형태를 이해하고 용납할 수 있을 것이며, 이 용납과 관용이야말로 교제를 더욱 아름답게 만들어 가는 도구가 됩니다.
항아리에 게를 집어넣으면 어떻게 됩니까? 게들은 항아리 밖으로 나오려고 막 기어 올라갑니다. 그런데 한 게가 올라가면 다른 게가 뒷다리를 붙들고 늘어집니다.
또 한 마리가 올라가려고 하면 다른 한 마리가 역시 붙들고 늘어집니다. 결국 항아리 밖으로 나오는 게는 거의 없습니다. 이런 게들 모습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너 죽고 나 죽자입니다. 그러면 혹 나는 그런 스타일은 아닌지 돌아봅시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
본문이 기록될 당시 에베소교회는 하나 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교회 안에는 유대인 출신과 이방인 출신 등 두 부류의 사람이 있었습니다.
복음을 받아 같이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지만 서로 간에 벽이 있었습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바울은 에베소교회에 대하여 설교의 형태로 편지를 띄웁니다.
엡 02: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주님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놓여 있는 막힌 담을 이미 허물어 버리셨습니다. 모두가 하나님의 권속이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구원받았다면 이제 손님이 아니라 같은 하늘나라의 시민입니다. 우리가 복을받는교회의 신앙 공동체 안에 들어왔습니다. 한 아버지 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그러면 우리 모두 한 가족입니다.
얼굴이 다르고 이름도 다르고 성격도 다르고 취미도 다르고 생각이 달라도 한 하나님을 아버지로 고백합니다. 이 고백은 한 가족입니다. 이 사실을 믿고 살기를 바랍니다.
마 12:49 손을 내밀어 제자들을 가리켜 이르시되 나의 어머니와 나의 동생들을 보라 50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시더라.
동화 속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하루는 입과 손과 발이 자기들 몸에 있는 다른 지체를 향하여 열심히 성토하였습니다.
자기들이 죽도록 일해서 결국은 누구만 좋게 해 주느냐 하며 입을 열었습니다. 저기 저렇게 빈둥빈둥 놀고 있는 밥통(胃)만 좋은 일 시키는 것 아닌가? 우리가 무엇 때문에 이렇게 사서 고생을 하느냐면서 손과 입과 발이 동맹파업을 했습니다.
발은 가만히 주저앉아서 아무 데도 가지 않습니다. 손도 음식물을 입에 넣어주지 않습니다. 입도 가만히 다물어 버렸습니다. 며칠이 지나자 결국 온몸에 힘이 빠져서 결국은 손도 혀도 발도 제대로 놀릴 수 없을 정도가 되고 말았습니다. 함께 일하고 함께 가야 합니다. 역할이 각기 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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