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단/2022년 말씀

자기를 하나님께 드리며 삽시다(롬 06:01~14).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22. 10. 22. 0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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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 여러분도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 소식을 들으면서 걱정하시지요? 저는 이 전쟁을 보면서 약 30년 전 무너진 소련(蘇聯 Union of Soviet Socialist Republics)을 생각해보았습니다.

소련은 1990년을 전후하여 미국과 쌍벽을 이룬 15개 공화국 연합체입니다. 미국과 수십 년이나 패권을 다툰 나라인데 어떻게 전쟁 한 번도 하지 않고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먼저 1991년 9월 발트해 연안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3개 공화국이 독립하였고 이어 1991년 12월 8일 우크라이나, 벨라루스가 독립을 선언하면서 소련은 정식으로 해체되었습니다.

 

세계사의 관점에서 소련의 해체는 미스터리이지만 기독교의 관점에서 볼 때그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 건강한 종교가 없기 때문입니다.

둘째 건전한 시민 사회가 형성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건강한 종교와 건전한 시민 사회는 한 나라를 든든하게 세웁니다. 21세기의 세계 질서는 미국과 중국 간의 패권 다툼으로 인해 약소국가는 줄서기 하느라 바쁩니다.

우리나라는 이들 사이에서 상당한 고민을 안고 있습니다. 옛 소련과 마찬가지로 중국 역시 건강한 종교가 없습니다. 공산주의가 그 역할을 담당해 왔습니다.

그러나 그 기능을 제대로 담당  못하는 실정입니다. 시민 사회 역시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점이 중국 공산당 정권이 직면한 약점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이 사실을 전혀 모릅니다.

 

대한민국의 현실도 건강한 종교와 건전한 시민 사회가 형성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라고 생각해 봅니다. 이 원리를 우리 교회에 적용해 봅시다.

복을받는교회 가족 여러분, 건강한 종교를 가지고 있습니까? 예, 고신이라는 좋은 전통까지 있으니 무엇을 더 말하겠습니까? 또 일찍부터 신앙생활 해 왔으니 건전한 신앙 의식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혹 형식은 아닙니까? 무늬만 있는 믿음은 혼란과 무너짐의 지름길입니다. 안정과 평화는 건강한 믿음과 건전한 교회관에서 나옵니다.

건강한 믿음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 자기를 드리는 생활입니다. 그래서 건강한 믿음, 혼란이 없는 평화의 믿음을 구축하기 위하여 「자기를 하나님께 드리며 삽시다」로 정했습니다.

 

 

1. 나는 죄에서 해방되어 주님과 연합되었습니다.

 

04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 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복을받는교회 가족 여러분,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최대의 기쁨은 죄를 용서받는 은총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용서해 주셨다는 기쁨보다 더 큰 기쁨은 없습니다.

반면 그리스도인에게 최대 슬픔은 죄를 용서받았음에도 그 죄 속에 갇혀 삶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는 일입니다. 성경 진리를 아는 성도는 죄는 내가 지었지만, 주님의 은혜로 사죄의 은총을 받고 사는 것을 즐거워합니다.

오늘 말씀을 잘 보십시오. 안다는 단어가 03절 06절 09절에 나옵니다. 그러면 무엇을 알아야 합니까? 우선 03절 06절 09절에 나오는 세 단어를 보겠습니다.

 

03…. 알지 못하느냐? 06 우리가 알거니와 09 사망이 다시 그를 주장하지 못할 줄을 앎이로라.

 

세 구절에서 안다는 말은 첫째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을 때 나도 함께 죽었다는 뜻입니다. 둘째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는 순간 내가 주님과 연합되었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셨을 때 나도 죽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을 때 나도 부활하였습니다. 이 사실은 육으로는 직접 경험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으로는 경험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도 그 진리를 이렇게 고백하였습니다.

 

갈 0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그러므로(οὖν). 이 접속사는 01~03절까지의 진술에 대한 결론을 유도해 내기 위해 사용되었습니다. 우리는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은 줄을 알지 못하느냐? 라는 03절 진술을 다시 확인하기 위하여 사용된 접속사입니다.

이 사실 꼭 기억하십시오. 지금도 죄의 세력이 나를 넘어지게 하려고 걸림돌을 놓고 걸리기를 기다립니다. 미끼를 들고 기다립니다.

중요한 사실은 나는 이미 죄에 대하여 분명히 죽었습니다. 죄와는 거래가 완전히 끝났습니다. 이 사실을 내가 알고 있느냐가 중요합니다.

성도 여러분, 세례가 내게 미치는 효력이 무엇입니까? 옛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죽고 주님의 은혜로 다시 태어났다는 의미입니다. 세례는 나에게 옛사람의 종말이고 새사람의 출생입니다.

 

4세기경 북아프리카 알제리 및 이탈리아에서 활동한 신학자이자 교부로 존경받는 인물 어거스틴이(St. Augustine 354.11.13.~430.8.28.) 있습니다. 분이 회심한 후 하루는 길을 가다가 옛날에 함께 어울리던 거리의 여자를 만났습니다.

어거스틴이 못 본 척하고 지나려 하자 그 여자가 좇아오면서 저예요. 저 몰라요? 하며 아는 척을 했습니다. 그러자 어거스틴이 너는 너지만 나는 내가 아니란 말이야. 하고 대답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이와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기독교 초창기 시절 유명 부흥사였던 김익두 목사(황해도 안악, 1874~1950)님이 회개하고 구원받은 후의 일화입니다.

제일 먼저 한 일이 자기 장인에게 김익두 사망 이런 부고를 보냈습니다. 얼마나 장인 속을 썩였으면 먼저 한 일이 옛사람 김익두가 죽었다고 부고를 보냈겠습니까? 영원히 회자하는 말입니다.

 

 

2. 나는 이제 주님 안에서 살아난 일꾼입니다.

 

11 이와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있는 자로 여길지어다.

 

본문에서 중복되는 단어 몇 개가 있습니다. 첫째 죄에 대한 의미로 10회, 둘째 죽음이란 의미로 15회, 셋째 살았다는 의미로 7회 나옵니다. 이 가운데 살았다는 단어를 살펴보겠습니다. 앞에서 계속 반복되어 온 죄에 대하여 죽었으면 이제는 살아나야 한다는 뜻입니다. 죄의 삶을 마치고 거듭난 삶을 시작해야 합니다.

살아있는(ζάω 자오). 죄의 세력으로부터 놓임을 받아 자유를 누리는 상태를 말합니다(02). 바울은 자기를 죄에 대하여 죽었다고 선언합니다.

자기뿐만 아니라 이 진리를 믿는 사람 모두가 죄에 대하여 죽었다고 선언합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 보지 말고 나도 죄에 대하여 죽었습니까?

죄에서 해방을 받았습니까? 그러면 다시는 죄의 종이 되지 않기 위해 육체의 욕망을 제어해야 합니다. 죄에서 완전히 끊어져 거룩함으로 지음을 받아야 합니다(엡 04:24).

 

롬 06:19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

 

여길지어다(λογιζεσθε 로기제스테). 이인칭 현재 명령형 복수입니다. 나는 죄에 대하여 죽은 자인 줄 알아라. 하나님 앞에서 살아있는 자인 줄 알라는 말입니다. 왜 살아있는 자임을 알아야 합니까?

성도가 가지는 신분 때문입니다. 성도는 신분 따라 삽니다. 죽은 자로 여기면 죽은 생활을 하게 될 것이고 산자로 여기면 살아있는 생활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긴다는 말은 실재가 아닌 것을 실재인 것처럼 생각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실재를 그대로 알고 굳게 붙잡는다는 뜻입니다.

 

인도에 전해 내려오는 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옛날 어느 임금이 암행 순찰을 나갔다가 다리 밑에서 거지 소년을 보았습니다. 어쩐지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거지 소년을 데리고 궁에 들어와서는 이렇게 선포했습니다. 오늘부터 이 소년을 내 아들로 삼겠노라.

이 거지는 졸지에 왕자의 신분으로 바뀌었습니다. 과거의 거지 소년은 죽었고 왕자로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그런데 누워 자야 할 시간이 되자 이 왕자가 슬금슬금 궁궐 바깥으로 나갑니다. 신하들이 왕자님 늦은 시간 어디로 가십니까 하고 물으니 나는 본래 거지라서 다리 밑에서 자야 편하다. 하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신하들이 아닙니다. 왕자님 주무실 곳은 대궐 안에 잘 준비되어 있습니다. 하고 친절하게 안내하였습니다. 아침이 되자 왕자는 다시 궁궐 밖으로 나갑니다.

시녀들이 왕자님 어디 가십니까? 다리 밑에 세수하러 가려고 하노라. 이 왕자에게 왕자다운 행동이 나타나려면 거지 스타일이 아니라 왕자로서 생활 의식입니다. 오랫동안 거지로 살았기 때문에 당분간은 거지처럼 행동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함을 받고 신자가 되었음에도 죄인 같은 삶은 나타날 수 있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주님께서 나를 용서하시고 의롭다고 인정해 주셨으니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이 사실 인정하십시오. 그에 걸맞은 생활하십시오. 살아있는 신자답게 생활하십시오.

 

 

3. 살아난 신자는 죄의 지배를 받지 않는 방어벽이 있습니다.

 

12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바울은 05장 20절에서 죄가 더한 곳에 주님의 은혜가 더욱 넘친다고 안내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은혜가 넘쳐도 구원받은 신자는 더는 죄에 거하면 안 됩니다(01, 02).

바울은 본문을 통해 설명한 교리를(02~11) 적용하기 위해 04절에 이어 다시 그러므로 접속사를 사용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죄의 지배를 받지 않는 자기 방어벽이 있다는 뜻입니다.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신자가 그리스도와 함께 죄에 대하여 죽었음에도 여전히 죄가 나의 주위를 맴돌며 역사합니다. 사람은 세상에 사는 동안 약한 육체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시간과 공간의 지배를 비켜 갈 수 없습니다.

때로는 무기력하여 흔들릴 때가 있고, 마음은 원이로되 의지가 약하여 죄로부터 공격당할 때가 있습니다. 넘어지는 때도 있습니다. 이것이 현실의 내 모습입니다. 그러나 죄가 이제는 이전과 같이 나를 지배하지 못합니다. 주님께서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죄는 어느 순간 내 연약함을 통해 찾아옵니다. 친구 하자고 아주 친절하게 속삭입니다. 이때 유혹을 거절해야 합니다. 하나님 자녀의 긍지로 단호하게 물리쳐야 합니다.

 

죄는 생각을 타고 마음에 옵니다. 몸으로 죄를 지으려는 욕구를 일으킵니다. 이때 마음이 욕구를 받아주면 죄가 들어와 자리를 잡습니다. 그래서 마음 관리가 매우 중요합니다. 가룟 유다가 예수님을 팔게 된 여러 이유 가운데 하나가 자기 마음을 잘 관리하지 못한 일입니다.

가룟 유다가 세상 생각에 사로잡혀 갈등할 때 마귀가 접근하여 예수님을 팔아 버리는 것이 어떤가? 라는 생각을 슬쩍 뿌렸다는 뜻입니다. 가만히 있는데 마귀가 들어오지 않습니다.

마귀가 들어와서 자리를 잡을 수 있도록 마음을 열어주므로 들어왔습니다. 이왕 마귀가 들어왔더라도 속히 마음을 정돈하여 파멸로 가는 마음을 정리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사도 요한이 가룟 유다에 대하여 이런 결론을 내렸습니다.

 

요 13:02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복을받는교회 가족 여러분, 나의 삶은 마지막 날까지 죄와 투쟁입니다. 혹 죄에 패배할 때가 있을지라도 나는 죄에 대한 승리를 보장받은 신분임을 기억하십시오. 12절 마지막 부분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라는 말을 잘 보십시오.

사탄은 불같은 정욕 따라 행할 것을 요구한다는 뜻입니다. 사탄은 신자가 단순히 죄와 연합하는 것을 넘어 죄에 순종하도록 흥정합니다. 사탄은 주님께도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유혹하였고 계속 주님 곁을 따라다녔습니다(마 04:09).

 

이런 좀 시시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꼬마 감자가 사춘기에 접어들며 번민하다 엄마 감자에게 물었습니다. 엄마, 나 감자 맞아? 그러자 엄마가 이렇게 대답합니다. 당근이지. 그 말을 들은 꼬마 감자는 낙심한 나머지 그만 가출하고 말았습니다.

너무 고생스러워 슬그머니 집에 돌아왔습니다. 이번에는 할머니 감자에게 물었습니다. 할머니, 나 감자 맞아? 그러자 할머니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오이야(경상도 사투리 오냐). 꼬마 감자는 너무 속상해서 다시 가출하고 말았습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믿음의 정체성(正體性) 때문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떤 존재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정체성의 혼란이 생기면 인생을 방황하기 쉽습니다. 이처럼 우리 믿음의 가족도 자기를 정확히 알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 자기 정체성을 제대로 알아야 흔들리지 않습니다. 나는 절대 죄의 지배를 받지 않는 사람이다. 나는 복을받는교회의 살아있는 일꾼이다. 이런 정체성이 있어야 흔들리지 않습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13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지체(μέλος)는 몸과 같은 의미입니다. 거듭난 우리의 지체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쓰임을 받는 무기입니다. 도구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새로운 피조물(고후 05:17)입니다. 새 생명을 소유한 신분입니다. 당연히 자기의 지체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마땅합니다.

우리의 몸은 그리스도의 지체이며(고전 06:15), 성령님이 거하시는 전이며(고전 06:19), 값으로 사셨기(고전 06:20) 때문입니다. 신자가 자기 몸의 지체를 관리하지 않으면 이미 그의 몸은 불의의 무기로 죄를 짓는 것과 같습니다. 바울은 신자의 무기를 죄짓는 일에 사용하지 말고 하나님의 거룩한 일에 사용하라 권합니다.

 

12절을 압축해 봅시다. 너희 자신을~ 하나님께 드리라. 자기를 하나님께 드리며 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과 같이 죽었다가 산 자입니다. 가끔 죽은 줄 알았던 옛사람의 본성이 나올 때 자기를 쳐서 주님께 복종하여야 합니다(고전 09:27).

 

고전 09: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사람은 어디서 사느냐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사느냐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무엇을 입고 사느냐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무엇을 하고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복을받는교회 가족 여러분, 세상에 살면서 네 가지 질문에 대하여 분명한 답이 있다면 성공한 인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네 가지를 잘 들어보십시오.

①나는 누구인가? 라는 존재에 관한 질문입니다.

②나는 어디에 소속되어 있는가? 라는 소속감에 관한 질문입니다. 하나님께 속해 있는가 아니면 세상에 속해 있는가가 대단히 중요합니다.

③나는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라는 사명에 관한 질문입니다.

④나는 어디로 갈 것인가? 에 대한 미래에 관한 질문입니다. 이 네 가지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리며 사는 자만이 답을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