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단/사도신경

[사도신경⑥] 사흘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마 28:01~10)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19. 1. 12.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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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 석가모니의 뼈가 발견되었다고 인도를 비롯한 불교 권 국가에서 떠들썩하였습니다. 이 뼈들은 잘 진열되어 수백 만 인도 사람들의 경의 속에 시가행진을 하였고 많은 사람들이 그 뼈 앞에 부복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이 장면을 지켜보던 한 선교사가 그의 친구에게 만약 저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뼈 하나라도 발견할 수 있었다면 기독교는 산산조각이 나고 말 것이다. 기독교는 죽은 자를 믿는 것이 아니라 산 자를 믿으며,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살아계시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지 사흘 째 날 새벽에 여자들이 장례물품을 준비하여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 갔지만 그 시신을 보지 못했습니다.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일로 근심에 쌓여 있을 때 천사가 말합니다.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24:01~05)? 우리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찾으려 하는 때가 있습니다. 지금은 우리의 가슴 속에서 살아 역사하시는 부활의 주님을 보아야 합니다.

지난주일은 사도신경강론을 통해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에 대해 전했습니다. 오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예수님에 대해서 살펴보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말씀의 제목을 사흘 만에 부활하신 예수님으로 정했습니다.

 

 

  1. 예수님의 죽으신 사흘 동안에 대한 해석입니다.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으며.

 

사도신경에서 우리가 살펴보는 장사된 지 사흘 만에 라는 부분은 상당히 민감한 부분이요, 제대로 이해를 해야 할 부분입니다. 325년 니케아공회에서 거의 확정 된 사도신경 원문이나 영어 헬라어 번역본에는 장사된 지 사흘 만에 음부에 내려가사 라는 말로 되어 있습니다.

반면 한국어 사도신경에는 성도들의 오해를 원천봉쇄하기 위해 이 내용이 삭제되어 있습니다. 사도신경을 강론하는 분의 해석에 따라 성도들에게 예수님이 사흘 동안 지옥에 갔다 왔다, 안 갔다 로 전달됩니다.

이 말은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지옥의 고통까지도 친히 체험하셨다는 의미가 되는데 대단히 혼란스러운 일입니다. 한국어 판 사도신경에는 없지만 다른 대부분의 번역본에 있으니 이 부분을 어떻게 해석해야 합니까? 먼저 음부라는 단어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음부(ᾅδσ, Hades). 어떤 곳에는 Hades 대신에 Hell이라는 단어를 넣어서 번역을 해 놓은 곳도 있습니다만 그건 좀 잘못된 번역입니다. 대체적으로 음부는 천국과 지옥을 모두 아우르는 망자(亡者)들이 가는 곳을 총칭하는 단어이지만 주로 죽음의 상태를 가리킬 때 많이 사용됩니다. 문장 자체의 자구 해석은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된 후에 HadesHell 둘 중 한 곳으로 가셨다는 의미입니다.

여기서 음부에 가셨다는 부분에 대한 개혁교회의 올바른 해석이 어떤 것인지를 살펴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저는 소속이 고신인 만큼 루피누스(Ruffinus)와 어거스틴, 그리고 장 칼뱅, 벌코프 등이 해석한 것을 중심으로 설명하겠습니다. 그래서 저는 사도신경의 장사 된지 사흘 만에 음부에 내려가셨다는 고백을 죽음의 상태로 봅니다. 그래야만 무리 없는 해석이 됩니다.

음부라는 단어가 원래 장소의 개념보다는 상태의 개념, 즉 죽음의 개념으로 보는 게 무난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골고다에서 십자가에 못 박힐 때 함께 달렸던 좌우의 강도 중 회개한 강도에게 하신 말씀을 기억하십니까?

 

 

23: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예수님이 죽으신 후에 가신 곳은 지옥이나 음부가 아닌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 강도를 낙원에 데려다 주고 다시 지옥으로 가셨다고 볼 수 없습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44문답을 보면 좀 더 쉽게 정리가 되어 있습니다.

 

44. 그가 음부에 내려가셨다는 말이 왜 신조에 덧붙여 있습니까?

 

개인의 위기와 유혹의 때에 나의 주님이신 그리스도께서 특별히 십자가에서, 또한 그 이전에도 말할 수 없는 영혼의 고뇌와 고통과 공포를 감당하심으로서 나를 지옥의 고뇌와 고통에서 구원하셨음을 나에게 확신시켜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가야할 지옥의 모든 고통을 그 분이 우리를 대신해서 경험하심으로 우리를 그 영원한 지옥의 고통에서 구원하셨다는 사실을 상징하는 표현입니다.

 

 

  2. 예수님의 부활을 내가 믿어야 합니다.

 

28:06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막달라 마리아,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살로메(16:01) 등이 예수님의 무덤을 찾았다가 천사로부터 들은 메시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살아나셨다는 선언인데, 사람의 관점으로 볼 때 꾸밈없는 이 상세한 현장을 보고 예수님의 부활을 확증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사건은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지만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는 아무리 설명을 해도 이해가 되지 않는 일입니다.

 

여기 계시지 않고. 조금 전까지는 예수님이 이 무덤 안에 죽음의 상태로 있었으나 이제는 부활하셨음으로 여기 계시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확실하게 빈 무덤임을 보여줍니다. 빈 무덤 이게 중요합니다. 타 종교와는 비교 할 수 없는 생명의 종교임을 나타내는 확실한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하나 더 덧붙이는 말씀이 있습니다. 살아나셨느니라. 누가 살아나셨다고요?

예수님이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다는 말입니다. 천사가 다시 여자들에게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살아나셨는지 안 살아나셨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예수님이 죽어 장사 지낸바 된 그 무덤이 빈 무덤으로 있는 것은 두 가지의 중의 하나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겠다고 예언하신 대로 이루어진 일이거나, 아니면 대적자들의 말처럼 제자들이 예수님의 시신을 살짝 빼돌린 일입니다.

 

이에 대하여 유대의 지도자들도 예수님의 빈 무덤은 인정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않고 제자들이 그의 시체를 빼돌렸다고 거짓 소문을 퍼뜨렸습니다(28:1~15). 그렇게 한다고 예수님의 부활이 가려집니까? 예수님은 자신의 부활에 대하여 3년 동안의 공생애 기간 동안 자주 말씀하셨는데 그 예언을 성경으로 확인해 보겠습니다.

 

09:22 이르시되 인자가 많은 고난을 받고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버린바 되어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하리라 하시고.

12:40 요나가 밤낮 사흘 동안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 같이 인자도 밤낮 사흘 동안 땅 속에 있으리라.

24:07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 사람은 죽음에 대해 모르는 게 3가지 있습니다. 첫째 언제 죽을지 모르고, 어디서 죽을지 모르고, 어떻게 죽을지 모릅니다. 또 죽음에 대하여 아는 게 몇 가지 있습니다. 분명히 나는 죽는다는 사실, 죽을 때는 나 혼자 죽는다는 사실, 죽을 때는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한다는 사실,

여기에 하나 더 추가한다면 마지막 때에 내가 분명히 부활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내가 부활한다는 사실을 성경으로 알 수 있습니까?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신 예수님께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고(11:25), 사도 바울도 부활을 이렇게 전합니다.


고전 15:12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사람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3. 이제 나는 부활의 증인으로 살겠습니다.

 

08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빨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알리려고 달음질할 새.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 이는 무덤에서의 사건과 천사의 메시지를 들은 여자들의 혼합된 심리 상태를 잘 보여줍니다. 평행 구절인 막 16:08절에는 여자들의 상태를 몹시 놀라 떨었다고 나옵니다.

무덤에서 나와서는 도망을 치면서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새벽에 여자들 몇이서 초자연의 빈 무덤 사건을 목격하고 천사로부터 메시지를 들을 때 얼마나 두려웠겠습니까? 그 충격이 대단했을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 부활의 사건을 통해 여자들은 부활의 증인의 삶으로 새롭게 출발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증인의 사명을 깨달은 여자들의 모습을 보겠습니다.

 

알리려고 달음질할 새. 예수님이 부활하신 그 기쁨을 나누기 위해 지체하지 않고 달리는 모습에서 우리의 사명도 이러해야 함을 깨닫습니다. 기독교의 생명력은 체험과 확신에서 나오는 것이지 생각과 이론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세상에 속한 모든 종교는 세상에서의 의미를 찾지만 기독교는 부활의 증인의 삶에서 그 영원한 가치를 찾습니다. 부활을 믿는 성도, 부활에 참여함을 확신하는 성도들은 부활의 소식을 한 곳이라도 더 전하려고 달음질 합니다.

지금 몇 여자들이 두렵고, 무섭고, 놀라워하면서도 부활의 증인으로서 달음질 하는 이 순간에 가룟 유다를 제외한 열 한 제자들은 어디서 무엇을 합니까? 주님을 위해서 목숨까지도 걸겠다고 다짐하던 베드로와, 주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받는 제자라고 자부하는 요한은 어디에 있습니까?

 

예루살렘 한 곳에서 두려움에 싸여 숨죽이고 있습니다. 어쩌면 그 집은 마가 요한의 다락방일지도 모릅니다. 평소에 주님을 따르며 헌신하던 여자들에게 위로와 함께 좋은 소식을 들려주어야 할 자들은 바로 제자들 아닙니까?

그런데 반대로 여자들이 제자들에게 부활의 소식을 들려주려고 달려갑니다. 천사로부터 부활의 증인으로서의 사명을 받은 여자들이 제자들과 함께 가야 할 곳은 갈릴리입니다. 갈릴리는 어떤 곳입니까?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하나님의 나라를 시작하였던 장소입니다. 제자들과 동고동락하며 지내던 장소입니다. 부활의 증인의 사명을 가지고 달리던 여자들을 도중에서 만난 예수님께서 내가 먼저 갈릴리로 갈 터이니 제자들과 곧 오라고 하십니다(09).

이제 예수님이 없는 무덤,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무덤을 떠난 여자들, 사명자로 달리는 모습을 보십시오. 큰 기쁨을 안고 달립니다. 마태복음 초반의 예수님 탄생기사를 통해서 이방인 동방박사들이 느끼는 기쁨을 아십니까? 예수님의 탄생을 예고하는 별의 인도로 예수님이 있는 곳에 왔을 때 매우 크게 기뻐하였습니다.

 

02:09 박사들이 왕의 말을 듣고 갈 새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서 있는지라 10 그들이 별을 보고 매우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김삼일 가족 여러분, 구원의 큰 기쁨이 있습니까?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을 누립니까? 예수님으로 인한 구원의 은혜가 나를 사로잡습니까? 우리의 마음에 자리 잡은 슬픔과 어두움과, 죽음의 두려움을 주님 앞에 내려놓으십시오.

이제는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복음의 현장으로 갑시다. 영혼의 중매자의 사명을 띠고 갑시다. 무엇보다 기쁨의 삶을 회복합시다. 예수님은 부활의 증인의 사명을 감당하는 첫 장소를 갈릴리로 정해 주셨습니다. 제자들과 갈릴리로 가서 사명을 감당하라고 하셨습니다.

왜 여자들에게 이 사명을 주셨습니까? 여자들은 갈릴리의 동네방네를 다니면서 부활의 소문을 퍼뜨리는 은사가 있기 때문입니다(?) 조금 원색으로 표현하면 여자들은 입이 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서양의 조크 중에 여자들이 제일 좋아하는 차는 어떤 차인가 라고 물으면 BMW라고 말합니다. 자동차 유명 메이커지만 여기에는 입이 큰 여자라는 뜻이 있습니다(Big Mouth Woman).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종교개혁가 루터(Martin Luther,1483.11,10~1956,2,18)의 학창시절 이야기입니다. 당시 독일 고학생들은 노래를 잘하면 남의 집 창문 밖에서 노래를 부르고 돈을 받아 학비를 마련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노래가 너무 엉망일 경우나 창문 안에 있는 주인의 성품이 곱지 못하면 무안을 당하고 빈손으로 쫓겨날 수도 있습니다. 한 번은 루터가 어느 부잣집 창문 아래서 큰 소리로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런데 노래를 시작하자마자 체격이 크고 무섭게 생긴 사나이가 창문을 척 열고 바라보더니 뛰어나왔습니다. 루터도 얼마나 놀랬는지 막 도망을 쳤습니다.

자신의 노랫소리가 듣기 싫어 주먹질이라도 할 것 같은 예감이 들어서입니다. 루터가 도망을 치자 그 사나이도 계속 쫓아왔습니다. 결국 발이 느린 루터는 붙잡히고 말았는데 공포에 떨고 있는 루터에게 그 사람이 돈뭉치를 내밀었습니다. 루터는 그때를 회고하면서 나는 목소리가 별로 좋지 않다. 라는 열등의식으로 노래를 하다 보니 그 사나이가 뛰어나오는 것도 자기를 해치기 위한 것으로 여겼다고 했습니다.

 

이어 루터는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두려움의 안경을 끼고 세상을 보면 세상만사가 다 걱정과 염려로 가득 차 있다. , 두려움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 모든 것이 두렵고, 즐거움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 모든 것이 즐겁습니다. 나는 영혼의 중매자가 될 수 없다는 이 열등의식을 깨뜨리는 일이 중요합니다. 부활의 증인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 죽어가는 영혼이 보입니다.

영혼의 중매자의 눈으로 세상을 보면 데려올 영혼이 보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의미는 다시는 죽지 않는 생명으로 사는 일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를 위한 구원의 근거가 됩니다(고전 15:17~18, 20). 부활의 능력을 힘입음으로 새로운 생명을 얻습니다(06:03~04). 우리를 의에 참여시킵니다(04: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