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이름 있는 한 고등학교를 최우등으로 졸업한 한 교포의 아들이 하버드 의과대학에 지원하였습니다. 결과는 그만 불합격이었습니다.
자식 교육에 목숨을 거는 한국 어머니가 그 학교에 가서 전 과목 A를 받은 아들이 왜 떨어졌느냐고 항의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그 학교 당국에서 당신의 아들은 고등학교 성적은 미국에서 최고입니다. 성적만으로는 당연히 합격입니다.
그러나 고등학교에 3년을 다니는 동안 한 번도 헌혈한 적이 없습니다. 의사가 되겠다는 사람이 남을 도우려는 마음 없이 지식만 가지고 어떻게 의사가 될 수 있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불합격 시켰습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께 크게 죄를 지었습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도무지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영원한 형벌과 멸망에 처할 수밖에 없는 죄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를 불쌍히 여겨주셔서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아무 조건 없이 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자녀로서 신분을 가지고 살면 이웃을 긍휼이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긍휼을 베풀지 않는 자는 심판이 있습니다(약 02:13).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이 말씀을 중심으로 「나는 긍휼이 여기는 자입니다.」라는 말씀을 강론하겠습니다.
1. 긍휼이 무엇입니까? |
0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긍휼(矜恤)이라는 단어는 요즘 그리스도인 외에는 잘 쓰지 않습니다. 그러면 먼저 긍휼이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헬라어의 원문(ἐλεήμων 엘레에몬) 의미는 동정, 불쌍히 여김 이런 뜻으로 27회 정도 사용되는 말입니다.
긍휼도 하나님의 긍휼과 사람의 긍휼은 다릅니다. 사람의 긍휼은 그냥 동정입니다. 하나님의 긍휼은 사랑과 은혜와 용서가 포함되는 동정입니다.
우리가 평소에 사용하는 말로 표현하면 가엽게 여기다, 불쌍히 여기다, 자비를 베풀다. 라는 뜻입니다. 조건 없는 하나님 사랑을 실천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나타내 보일 때가 많습니다. 인간의 양심 가운데 있는 인류애(人類愛) 때문입니다.
약한 자를 보면 도와주고 싶은 측은지심이 바로 긍휼입니다. 믿지 않아도 이런 마음으로 남을 도와주고 사랑을 베푸는 분이 많이 있습니다. 불교에서는 자기의 유익만을 구하지 말고 받은 은혜를 나누며 살라는 의미에서 자비를 많이 강조합니다.
불신자나 타 종교가 말하는 측은지심이나 자비심은 성경이 말하는 긍휼과는 다릅니다. 세상 사람의 긍휼은 대부분 자기 의를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반면 성경이 말하는 긍휼, 오늘 말씀에서 전하는 긍휼은 그 출발점이 내가 아닌 하나님 아버지입니다. 하나님의 공의와 나라를 이 땅에 이루기 위함입니다.
기독교의 초점은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 사랑을 실천하는 데 있습니다. 그 사랑의 실천이 바로 긍휼입니다. 예수님은 긍휼의 증표로 친히 십자가의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탈무드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이웃집에 가서 낫을 좀 빌려오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아들이 이웃집에 갔다 와서 하는 말이 아버지, 그 집에서 낫을 빌려줄 수 없다고 합니다. 이 말을 들은 아버지는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며칠 후에 바로 그 이웃 사람이 낫을 빌리러 왔습니다. 추수할 곡식이 많아서 낫이 필요하니 급히 좀 빌려달라는 요청입니다.
마침 아들이 이 광경을 보고는 아버지가 어떻게 하시는가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이웃에게 선뜻 낫을 빌려줍니다. 그러자 아들이 아버지에게 묻습니다.
아버지, 며칠 전에 제가 낫을 빌려 달라고 할 때 저 집에서는 빌려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아버지는 왜 빌려주십니까? 그러자 아버지가 아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저 집에서 빌려주지 않았다고 우리도 빌려주지 않으면 그것은 복수하는 거란다. 내가 필요할 때 당신은 내게 낫을 빌려주지 않았지만, 나는 당신에게 낫을 빌려줍니다. 하고 말하면 그것은 증오이다.
그러나 거절당한 것을 다 잊고, 과거와는 상관 없이 그냥 낫이 필요하다니까 빌려주어야겠다는 마음으로 빌려주면 이것이 긍휼이란다. 긍휼은 복수가 아닙니다. 사랑과 관용과 용서입니다.
엡 02:04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김삼일 가족 여러분, 누구를 긍휼히 여겨야 합니까? 이 순간에도 고통당하고 있는 우리의 이웃입니다. 우리는 더러 나의 관점에서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합니다. 남의 죄와 허물을 들춰내면서 자기의 의를 드러내기도 합니다.
그러나 긍휼히 여기는 것은 바로 상대방의 입장에 서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 사람의 입장이 되고 그 상황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를 생각해 본다면 가치 있는 일이 될 것입니다.
2. 나는 긍휼히 여기는 자입니까? |
0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옛날 로마인들은 덕목으로 지혜, 정의, 절제, 용기의 네 가지를 말했습니다. 긍휼은 그들의 덕목 속에 들어있지 않았습니다.
유대인도 타인에 대해서는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매우 약했습니다.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 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선민이 오히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긍휼과 자비를 외면하였습니다. 비판과 정죄하는 일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유대인과 로마인이 이웃에게 베풀지 않은 긍휼이 얼마나 가치 있는 덕목인가를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잘 알고 지킨다는 바리새인들을 책망하실 때 가장 강하게 지적하신 일이 바로 긍휼의 결핍입니다. 한 번은 예수님께서 세관에서 일하던 마태를 제자로 부르실 때입니다.
마태의 집에서 식사하시자 바리새인들이 제자들에게 너희 선생은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잡수시느냐? 하고 물었습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마 09:13 너희는 가서 내가 긍휼을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하신 뜻이 무엇인지 배우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
성 프랜시스(St. Francis 1182~1226)는 이탈리아 중부의 작은 도시 아시시(Assisi)에서 태어난 청빈(淸貧)의 대명사로 알려진 사람입니다.
이 분의 일화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전해져 옵니다. 어느 추운 겨울날 한센씨 병을 앓는 한 사람이 프랜시스를 찾아와서 하룻밤을 재워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그 얼굴과 손을 보니 모두 문드러져 있습니다. 또 해어진 신발 사이로 상한 발가락이 보였습니다. 그런데도 프랜시스는 자기 옷을 벗어 그를 감싸 안고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따뜻한 물로 진물 나는 그의 상처를 정성껏 씻어주었습니다.
그리고 저녁 식사를 극진히 대접한 후 하나밖에 없는 한 칸 방에서 함께 잠을 잤습니다. 그날 밤 프랜시스의 꿈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프랜시스의 손을 잡으며 프랜시스야, 오늘 대접 잘 받았다. 고맙다. 깜짝 놀라 프랜시스가 잠에서 깨어보니 같이 잠을 자던 나환자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 향기만 진하게 났다고 합니다.
살다 보면 때로는 우리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억울하게 누명을 씌울 때도 있습니다. 견딜 수 없는 고통을 안겨주기도 합니다.
김삼일 가족은 그런 상황을 만날 때 어떤 마음을 품습니까? 미움과 증오의 감정이 마음에 자리를 잡을 것입니다. 긍휼과 사랑의 마음은 그만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면 결과가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마귀의 종노릇에 얽매일 것입니다. 이럴 때 예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마 05:38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39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며
40 또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41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 리를 동행하고.
우리를 긍휼하게 여기셔서 예수님을 알게 하시고 믿음을 선물로 주신 은혜를 기억하십시오. 그 은혜와 사랑을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주님의 긍휼히 여겨주심을 실천하십시오.
3. 긍휼히 여기는 자는 긍휼히 여김의 복을 받습니다. |
0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이 말씀을 잘 이해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먼저 다른 사람을 긍휼히 여겨야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시는 조건이 따르는 말씀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긍휼히 여겨주셨습니다. 따라서 우리도 당연히 이웃을 긍휼히 여겨야 합니다. 나의 처지에서 조건이 없어야 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우리에게 이웃을 긍휼히 여길 수 있도록 변화시켜 주셨습니다. 우리가 이웃을 얼마든지 긍휼히 여길 수 있습니다.
요즘 시대를 눈물이 점점 말라가는 시대라고 말합니다. 바꾸어 말하면 긍휼이 점점 메말라가는 시대라는 말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주변을 보십시오. 긍휼의 흔적들이 줄어들고 있음을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다는 말씀을 무게 있게 받읍시다.
김삼일 가족은 이 말씀을 따라 긍휼함을 받는 일에 마음을 두지 마십시오. 긍휼을 베푸는 일에 마음을 두십시오. 긍휼을 베풂으로 복을 받은 한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1992년 4월 29일 미국 LA에서 흑인 폭동이 일어났습니다. 이 일은 한인 교민들에게 큰 충격과 상처를 안겨주었습니다. 한인과는 무관한 일입니다. 로드니킹이라는 한 흑인을 백인 경찰관들이 무리하게 체포하면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체포 장면이 폭로되면서 흑인들의 인종차별에 대한 불만에 불을 지른 결과가 되었습니다. 특히 경찰들을 재판하는 과정에서 무죄 판결을 하였습니다. 그러자 흑인들의 항의가 폭동으로 변했습니다. 이 폭동으로 많은 한인 상가와 한인 타운이 약탈과 방화의 큰 피해를 받았습니다.
그 원인은 폭동이 일어난 곳이 한인 타운과 가까운 곳입니다. 거기다 평소에 흑인들이 한인 교민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이 있었습니다. 흑인들을 상대로 장사하면서 흑인들을 무시하고 돈을 많이 번 후에는 인색하게 구두쇠 노릇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폭동의 혼란 중에서도 피해를 보지 않은 한인 상가가 몇 곳 있었습니다. 이런 가게들은 오히려 흑인들과 주민들이 가게 앞에서 보호하고 지켜주었습니다. 알고 보니 이 가게 주인들은 평소에 어려운 흑인들을 긍휼히 여겼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흑인 중에 돈이 없어서 장례식 걱정하는 것을 알고 찾아가 장례식을 치르게 해 주었고, 가난한 집 아이는 자식처럼 돌 보고 공부를 시켜주었습니다.
흑인들이 고마움을 기억하고 이 폭동의 혼란 가운데서도 자원해서 그런 가게들은 골라서 보호해 주었다고 합니다. 심은 대로 거두는 법칙입니다.
긍휼을 베풀면 그만한 긍휼을 받을 수 있습니다. 평소에 사랑의 긍휼을 베푼 것이 이런 큰 환난 앞에서도 긍휼히 여김을 받게 된 좋은 예입니다.
약 02:13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긍휼이 없는 곳에는 생명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불쌍히 여김이 없는 곳에는 치유의 역사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참된 긍휼은 상대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공감하는 일입니다.
우리는 누군가가 나를 정말로 포근히 안아 주길 원합니다. 진심으로 따뜻하게 사랑해 주기를 원합니다. 그런 마음으로 안아 주는 사람이 곁에 있기를 원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마음으로는 사랑받기를 원합니다. 김삼일 가족도 사랑을 그리워합니다. 성도 여러분 먼저 안아 주십시오. 그러면 그분도 나를 따뜻하게 안아 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안아 주신 것처럼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안으십시오. 우리 모두 하나님 앞에 감히 설 수 없는 죄인입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의 자녀로 세움을 받고 교회를 믿음으로 섬기고 있습니다. 이 모두가 긍휼히 여김을 받은 증거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
작은 글이 하나 있습니다. 퇴근길에 남편이 불쑥 노란 국화꽃 한 다발을 내밀었습니다. 당신한테 주는 가을 편지라는 말을 덧붙이면서.
남편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아내는 가슴이 콩닥거렸습니다. 아무 이름도 붙지 않은 날, 생일도 결혼기념일도 아닌 날, 꽃을 선물 받아보기는 처음이기 때문입니다. 꽃병에 꽂아두자 남편도 흐뭇해합니다. 다음 날 퇴근길에 남편은 또 꽃을 사 왔습니다.
문제는 그 후에 생겼습니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퇴근하는 남편의 손엔 어김없이 국화 꽃다발이 들려 있었습니다. 마침내 집안이 온통 꽃으로 가득 찼습니다.
꽃밭이 되었습니다. 꽃을 둘 마땅한 장소도 없게 되었을 무렵 아내에게 의심이 생겼습니다. 혹시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다른 이유로 꽃을 사 오는 것은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오늘도 꽃을 사 오면 꼭 따져봐야지 하고 잔뜩 별렀습니다. 다행히도 이날은 꽃을 사 들고 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꽃 대신 옷에 넣는 고무줄과 옷핀, 좀약을 좀 사 들고 들어왔습니다. 아내는 어이가 없어 말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다음 날도 또 다음 날도 남편은 마찬가지였습니다. 더는 참을 수 없는 아내가 남편에게 당신 도대체 왜 그래요?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남편이 그 내막을 이야기합니다. 얼마 전부터 회사 앞 골목에 할머니 한 분이 어린 손녀를 데리고 나와 장사하는데, 처음엔 국화꽃을 팔더니 사흘 전부턴 목판에 고무줄, 옷핀 같은 걸 늘어놓고 팔았습니다. 남편은 그것이 너무 딱해서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사 왔습니다.
긍휼은 하나님의 성품이며 이 긍휼이 가장 잘 나타난 것이 십자가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잊힌 곳을 향해 가기를 원하십니다.
아직 눈물 자국이 마르지 않은 사람을 찾아가서 껴안고 사랑과 긍휼 베풀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를 통해서 긍휼을 보여주기를 원하십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그런 삶으로 살기를 축원합니다.
'은혜의 강단 > 2015년 말씀' 카테고리의 다른 글
[팔 복 ⑥] 나는 마음이 청결한 자입니다(마 05:08). (0) | 2015.05.30 |
---|---|
[성령강림주일] 성령님의 강림 목적이 무엇입니까?(행 02:01~04) (0) | 2015.05.23 |
[어버이주일] 부모님께 효도를 생활화합시다(출 20:12). (0) | 2015.05.09 |
[어린이주일] 우리 아이는 천국의 주인공입니다(막 10:13~16). (0) | 2015.05.02 |
[팔 복 ④] 나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입니다(마 05:06). (0) | 2015.04.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