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단/2008년 말씀

불합격 후에 왜 계속 실패합니까?(창 04:01~15)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08. 8. 9.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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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하루는 사탄의 졸개들이 리비아 사막에 사는 어느 성직자를 유혹하여 무너뜨리고자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리하여 그 성직자 육신의 정욕을 건드려도 보고 의심과 두려움의 화살로 맹공을 가해 보았습니다

그런데도 그 사람은 죄를 범하지 않은 채 요지부동의 자세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졸개들의 완패에 화가 치밀어 오른 사탄은 직접 나서서 말합니다. 너희들 전략은 너무 시대에 뒤떨어졌어. 내가 하는 것을 잘 보라고 하면서 직접 시범을 보입니다. 사탄은 그 성직자에게 가서 귀에 대고 이렇게 속삭입니다

이봐, 당신 동생은 벌써 알렉산드리아의 주교(主敎)가 되었다고. 이 말은 들은 성직자의 얼굴은 금세 험악해지면서 먹구름이 드리워지기 시작했습니다. 사탄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그의 졸개들에게 말하기를, 시기 바로 이거야. 거룩하게 살려고 하는 사람에겐 이게 최후의 무기지 하면서 성직자를 무너뜨린 후에 의기양양하였습니다. 신앙인은 세상에서 머무는 동안 특별히 인간관계를 잘 맺으면서 살아야 합니다.

 

인간관계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그런데도 그 인간관계를 잘 맺지 못하고 살아간다면 그 이유가 무엇 때문입니까? 시기와 질투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시기와 질투를 적절히 조정하지 못하면 마지막엔 파멸을 맞을 수가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오늘 말씀은 우리가 아주 잘 아는 가인과 아벨 형제의 제사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 제사에서 가인이 드린 제사는 하나님께 불합격되었습니다. 반면 아벨이 드린 제사는 하나님께 합격이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가인은 자기의 아우 아벨의 합격 된 제사를 시기하여 돌로 쳐 죽여 버리는 끔찍한 일을 저지릅니다(08). 저는 이 사건을 우리의 일상생활에 적용해 보겠습니다. 왜 신앙인이 하나님께 합격의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지를 진단하기 위해 불합격 후에 왜 계속 실패합니까?라는 제목을 정했습니다.

 

 

 1. 믿음의 정성으로 합격 불합격이 결정됩니다.

 

03 세월이 지난 후에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렸고 04 아벨은 자기도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더니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제사는 인간에게만 주신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총이요 특권으로서 아담은 이 제사 원리를 가인과 아벨에게 정성스레 가르쳤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반드시 찾게 됩니다. 이런 마음이 생기는 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증거의 표현입니다

03, 04절을 보면 가인과 아벨도 때가 되어 제각기 가정을 이루어 스스로 제사를 지낼 수 있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각각 자신의 직업을 따라 예물을 준비하여 하나님께 제사를 올렸습니다. 그런데 가인과 아벨 형제가 드리는 제사의 결과가 서로 다른 결과로 나타났습니다.


04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05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가인의 제사는 불합격이고 아벨의 제사는 합격입니다. 왜 이런 결과가 나오게 되었습니까? 혹시 하나님께서 사람을 차별하신 겁니까? 아닙니다. 가인과 아벨이 드린 제사의 차이는 학자들에 따라 여러 견해가 있습니다

다양한 해석(피의 제물의 유무)을 내릴 수 있지만, 그 어떤 해석도 완벽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하나 알 수 있는 것은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에 있어서 믿음의 정성이 한쪽에는 모자란다는 점입니다. 제물의 차이도 아니고 양의 많고 적음도 아닙니다. 믿음으로 드렸느냐? 아니면 형식으로 드렸느냐의 차이점입니다. 이 사실을 뒷받침하는 단서를 히브리서가 제공합니다.

 

11:04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언하심이라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우리가 이런 제사를 현재 적용한다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로 보아도 됩니다. 그렇다면 나는 하나님 앞에 드리는 예배에 대하여 혹 실패하는 일은 없습니까? 남들은 한창 은혜를 받고 기뻐하는데 나보다 늦게 교회에 들어왔고, 직분도 늦게 받은 사람이 성도들로부터 더 인정받음에 질투하는 일 말입니다. 시기와 질투로 인한 행위는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에서 언제나 실패합니다. 이런 분은 신령한 은혜의 자리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신앙 리듬이 무너져 굴절된 삶에 갇히기 때문입니다.

 

 

 2. 가인은 시기심과 질투를 극복하지 못했습니다.

 

05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사람은 인간관계에서 자기 마음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면 먼저 얼굴빛부터 변합니다. 다음에는 분노가 따라옵니다. 그다음에는 시기와 질투로 넘어갑니다. 마지막에는 죽이고자 하는 무서운 마음까지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감정을 다시 잘 추스르면 큰 문제로 발전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가인은 자신이 드린 제사와 그 예물이 하나님 앞에 불합격되자 그만 분노를 내뿜었습니다

성경은 분노의 감정 그 자체를 꼭 죄라고 단정하지 않습니다. 화를 내는 것은 불완전한 인간의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04:26)고 하였습니다. 분 냄과 죄가 구별된다는 말씀입니다.

일상생활에서 성격이 급한 사람이나 화를 잘 내는 사람을 만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일시로 윽박지르듯 화를 내는 사람은 그래도 괜찮은 경우입니다. 그러나 화를 내는 것이 오래 가서 그것이 마음속에 분노로 자리 잡으면 곤란합니다. 그 분노의 감정을 해결하지 못하면 그때는 그 분노가 죄의 자리로 들어갑니다. 이 분노에 사로잡힌 사람을 우리는 흔히 한() 맺힌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 한 맺힌 사람에게는 자칫하면 악신(惡神)이 임하여서 죄의 자리에 들어가기 쉽습니다. 바로 이런 자리에 이르지 않도록 각자가 자기의 마음 관리를 잘해야 합니다. 김삼일 가족 여러분 08절 말씀을 우리 다 함께 큰 소리로 읽어봅시다.

 

08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에게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 죽이니라.

 

가인이 분노한 다음에 즉 심히 화가 난 다음에 어떻게 처신을 하였는지를 잘 나타내 주는 말씀입니다. 그는 분풀이를 아우에게 하였습니다. 흔히 말하는 분풀이 이게 문제입니다. 이 분노(憤怒)가 심령으로 들어가서 소화가 안 되니 가인의 마음이 병이 들었고 살인의 자리에까지 이르렀습니다

하나님께 사랑을 받지 못한 원인이 자기에게 있습니다. 그런데도 이 책임을 아우에게 돌려 자신도 죽고 남도 죽이고 마는 비극을 초래하였습니다. 가인은 믿음으로 제사를 올리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이렇게 되었습니다(11:04). 그러면 제사를 재정비하고 믿음의 자리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어디에다 대고 분풀이를 한다는 말입니까? 성도 여러분, 내가 화가 난다면 그것은 내 인격의 부족함 때문이지 다른 누구 때문도 아닙니다. 내 마음이 불안한 것은 세상 때문이 아니라 내가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블레셋의 골리앗 장군을 무너뜨리고 개선할 때 여자들이 부른 노래 가사를 보십시오.

 

삼상 180:7 여인들이 뛰놀며 노래하여 이르되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한지라. 08 사울이 그 말에 불쾌하여 심히 노하여 이르되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그가 더 얻을 것이 나라 말고 무엇이냐 하고.

 

다윗을 향한 사울 왕의 질투와 시기심은 결국 악신이 임하였습니다. 왕으로서의 체통과는 상관없이 오직 다윗을 제거하겠다는 일념으로 삼천 명의 특공대까지 조직하였습니다(삼상 24:02).

 

 

 3. 가인은 하나님께로 돌아설 마지막 기회를 놓쳤습니다.

 

09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그가 이르되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하나님의 물음에 가인이 어떻게 답을 합니까?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이니까? 이는 분명히 하나님께 대한 불평과 항의와 원망의 소리입니다. 이 질투, 이 불평, 이 원망이 가인의 길을 더욱 불행으로 재촉하고 있습니다.

지키는 자니이까? 돌보는 자, 시중드는 자, 파수꾼 등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가인은 형으로서 마땅히 아우 아벨을 돌아볼 책임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가인이 아우 아벨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말은 피를 나눈 형제간의 관계성을 단절하는 언행이 아닙니까?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물으실 때 하나님께서 가인의 행한 일을 몰라서 물었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닙니다. 바로 가인 자신의 행한 일과 자신의 위치와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 있는 마지막 길을 열어주시려고 묻는 사랑의 물음입니다.

가인에게는 아우 아벨을 돌로 쳐 죽인 죄를 자백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이는 대단히 큰 은혜의 기회로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회개하고 용서를 구하기는 고사하고 오히려 하나님께 내가 내 아우 아벨을 지키는 자입니까 하면서 불평과 원망을 내뱉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가인의 행동을 직접 지적하십니다.

 

10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네 아우의 핏소리가 호소하느니라. 사람 살려. 라는 비명입니다. 피가 하나님께 호소한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무죄한 자의 피 흘림을 그냥 넘어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37:12~15). 드디어 하나님께서 09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 10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라는 음성을 듣고도 돌아설 기회를 넘긴 가인에게 피 소리의 결과를 엄중히 선고합니다.

 

11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 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12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하나님께서 토양의 생산력을 제어하사 가인에게 정당한 노동의 소출을 허락지 않겠다는 뜻입니다(11:17). 땅을 제2의 고향으로 여겼던 고대인들의 사상에 비추어 볼 때 가인과 땅과의 관계를 단절시킨 이 형벌이 얼마나 큰 저주의 성격을 띠고 있는지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자연계로부터 내어 침을 당한 가인이 이제는 인간관계도 배척당한다는 선언입니다. 이런 선언을 받는 자체가 자업자득입니다. 인간관계를 가인 자신이 이미 파괴하였기 때문에 그 결과 일평생 동안 죄의식에 사로잡혀 심적으로 쫓기는 생활 할 것을 암시합니다.

 

13 가인이 여호와께 아뢰되 내 죄벌이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


너무 무거우니이다. 받아들이다, 감당하다 에 대한 역부족이라는 뜻이 아닌 부과 된 형벌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못하겠다는 뜻입니다. 죄를 짓고도 하나님께 반문하였던 가인의 뻔뻔스러움(09)을 회상시켜 주는 구절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인은 자신에게 미칠 형벌에 대해 면해 보려 할 것이 아닙니다. 마땅히 자신의 죄에 대해 애통하며 괴로워해야 합니다(06:05; 23:41).

 

14 주께서 오늘, 이 지면에서 나를 쫓아내시온즉 내가 주의 낯을 뵈옵지 못하리니 내가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될지라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인간이 자기 죄 문제를 처리하지 못하고 죄책감을 해결하지 못할 때 스스로 하나님을 등지고 하나님의 얼굴을 멀리하여 하나님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곳으로 떠나가기 마련입니다.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 성경의 난해한 절 중 하나입니다. 이유는 당시 아담과 하와 외에 가인에게 복수할 또 다른 사람의 존재 여부 때문입니다01장부터 본 장에 이르기까지의 기록 중에는 아담과 하와, 가인과 아벨 이 네 인물만이 언급되어 있을 뿐 다른 사람은 아무도 보이지 않습니다.

이에 대한 해석은 세월이 흐르는 동안 아담과 하와는 자녀를 계속 낳았으며, 가인과 아벨 외에 또 다른 형제들이 곳곳에 많이 살고 있었습니다. 다만 이들은 하나님의 구속사(救贖史)에 필요한 인물만을 특별히 선택하여 기록하는 성경의 특성상 특별히 언급되지 않았을 뿐입니다.

 

15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 하시고 가인에게 표를 주사 그를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하게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가인을 낯선 고장으로 유랑하게 하시면서 이마에 표적을 주셨는데 이 표적이 어떤 의미를 지닙니까? 형벌이나 심판의 표시입니까? 가인이 받은 표는 사랑의 표시이고 은혜의 표시입니다. 그가 죄를 지은 것이 사실이고 하나님께 형벌을 받은 것도 틀림없습니다. 그런데도 그에게 특별한 표를 주어서 아무도 그를 해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아직도 가인을 향한 하나님의 애정과 보호가 따르는 은혜입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사람들과의 대인 관계를 어렵게 만드는 것은 거창한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소한 감정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질투심을 잘 극복한 훌륭한 신앙인도 있습니다.

 

F. B 마이어. 그는 미국에서 한동안 목회를 하다 고향인 런던으로 돌아와 웨스트민스터 채플에서 목회하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런던에는 유명한 설교가 찰스 스펄젼 목사가 사역하고 있었고, 또 캠벨 몰간이라는 훌륭한 목사가 미국에서 오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마이어는 자기 마음에 스펄젼이나 캠벨 몰간에 대한 질투가 있음을 발견하고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어느 날 성령님의 감동이 왔습니다.

기도 중에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른 마이어는 고향으로 돌아오는 캠벨 몰간의 환영식을 자기 교회에서 성대하게 치러주었습니다. 그리고 캠벨 몰간이 섬기는 교회를 찾아가 설교를 들으면서 하나님, 이 설교가 제게 은혜가 되기를 원합니다. 하고 기도하였습니다.

마이어의 전기傳記)에는 이런 기도 내용도 있습니다. 하나님, 친구인 몰간과 스펄젼의 교회를 놀랍게 복을 내리어 주시옵소서. 그 교회에 차고 넘쳐 교인이 남아돌면 우리 교회로 보내 주십시오. 이런 중심으로 목회를 하니 마이어 목사는 두 동료 목사와 함께 성공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