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한 이야기/푸얼차(普洱茶)

푸얼차(普洱茶)의 유래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07. 12. 18. 1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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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화편(史話篇)

이 사화편은 원저자와 상의하에 아주 간략하게 풀이하여 쓰기로 합의함에 따라 요점만 발췌 번역하였음을 양지하시기 바랍니다.
◈ 상,주 나라시대(商,周 時代)
화양국지(華陽國志)와 파지(巴志), 운남성차엽진출구공사지(雲南省茶葉進出口公司志)에 의하면 사천(四川), 운남(雲南), 귀주(貴州) 등 삼성(三省)이 8개 소수민족이 분포(分布)되어 살고 있었고 상,주(商,周)나라 때 운남차(茶)를 공납(貢納)했다는 기록이 있다.

◈ 한나라 시대(漢朝 時代)
한무제가 운남(雲南)지역의 왕을 전왕()이라하고 인(印)을 하사하였다. 고채(苦菜) 일명 차(茶),일명 선(選), 일명 유동(遊冬)이라고도 하며 익주 곡산에서 나고 겨울에도 죽지 않는다.


◈ 삼국 시대(三國 時代)
기원 225년 촉(蜀)나라 승상 제갈 공명이 후주에게 올린 천하명문으로 알려진 출사표(出師表)에 "오월(五月)에 도로(渡瀘)하고 심입불모(深入不毛)하여"라고 표현한 곳이 오늘날 차의 고향으로 알려진 운남성 서쌍반나지역인 맹해현의 남나산과 망지산 등 천하 명차의 고장인 육대(六大)차산 지역이다.

"한화운남 차사(閑話雲南 茶事)"중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공명차산(孔明茶山), 전설에 삼국(三國)시대 재갈공명이 남정길에 오늘의 맹해 남나산을 지날 때 병사들이 수토불복(水土不服)하여 눈병이 생기자 공명이 가지고 다니든 지팡이를 남나산 상(上)에 꽂으니 이 지팡이가 차나무로 바뀌어 길고 넓은 찻잎이 나와 이를 따서 달여 장병들이 �고 마시니 쾌유되었다."

이후로 남나산을 공명산이라 부르고, 또 다른 설은 동남에 푸어현의 무영수산이 있는데 그 지산이 공명이 화살을 만들었던 기전처(寄箭處)라 하고, 산에는 제풍대(祭風臺:제사를 지내는 곳)가 있고, 산상에는 큰 차나무가 있어 이것을 제갈무후가 남긴 유종(遺種)이라고도 하며, 변방민족이 제사를 지낸다.

 

또 다른 전설에는 운남의 6대 차산 중의 하나인 유락산(攸樂山)을 공명산이라 부른다. 지금도 이곳 주민들은 매년 음력 7월 23일 공명탄신일에 향을 피우고, 등(燈,일명 공명등)을 들고 차조회(茶祖會)라 부르는 행사를 거행하고 있다고 하며 특히 이 지방의 소수민족들은 제갈공명이 차나무를 심기 시작한 것으로 전해와 이를 믿고 제갈공명의 탄신일에(음력 7월 23일) 제사를 올리고 차조(茶祖,차의 조상)로 공경하고 있다.

◈ 당나라 시대(唐 時代)
기원 862년 함통 3년 번작(樊綽)의 만서(蠻書)에 은생성 경계의 모든 산에는 차가 난다. 특별한 제조법은 없고 이곳 사람들은 후추 계피 생강 등과 함께 끓여 마신다"는 고증(考證)이 있다.

청나라 원복(院福)의 푸얼차기(普 茶記) 중에 푸얼차는 옛날 은생부에 속해 있고 서번에서 보차를 쓰다. 은생성 당시 어떤 종류의 차(茶)가 이곳 운남에서 자랐는지 근거는 없으나 은생성 지역이 운남 대엽차종의 원시(原始)차종이며 푸얼차종이라는 데는 원복(沅福)의 서(書)에서 보나 내가 여러 자료를 통해서 살피건대 믿고 싶다. 은생성은 현재 사모(思茅)와 서쌍(西雙)반나지역이다. 일찍이 당나라 때 차를 멀리 서번(西蕃)지역까지 팔았고 서남 지역으로 소로가 여러 곳으로 뻗어있어 실제로 이를 "사차지로(絲茶之路)"라 불렀다.


◈ 송나라 시대(宋 時代)

이석(李石)이 쓴 "속박물지(續博物志)에 "차는 은생의 모든 산에서 나고 어느 때나 채취하며 후추, 생강과 함께 끊여 마신다."는 말은 번작의 기록과 대동소이하다. 그러나 차신(茶神)으로 받드는 육우(陸羽)의 "다경"에는 운남성의 은생부 차가 누락되어 있어 유감이다. 당, 송시 고조된 차 문화와 중화민족의 차를 마시는 풍습으로 차마시장(茶馬市場)이 번창하였고 "차"와 서번지역의 "말"을 교환 교역하였고 서역과도 상업교역이 빈번하였다."서번의 보차를 쓰다"는 용어는 확실한 사실이다.


◈ 원나라 시대(元 時代)

원. 명 이전에 푸얼차를 마시기는 했지만 푸얼차라는 지정된 이름과 기록이 없는 차로 마셨다. 원나라때 푸얼부(步日部)라고 하는 지명이 있었는데 후에 이 푸얼부가 전음되어 푸어부(普部)로 되었다.

원나라 조정에서 푸어부로 이름이 지어진 후에도 운남 푸얼차의 명칭은 없었고 "푸차(普茶)"라고 불렀다. 서장. 서강. 신강 등지의 육식위주 민족에게는 지방을 분해해주는 푸차가 필수식품이 되었다. 이 푸차의 이름이 국내외로 널리 알려지게 되어 명나라 말기에 이르러 푸차의 이름을 푸얼차로 불려지게 되었다.


◈ 명나라 시대(明 時代)

1620년 만력 년간 사조제의 "전략()"에 "선비와 서민이 모두 푸차를 마시고 쪄서 단차를 만든다"고 명나라 말기 방이지(方以智)의 유고(遺稿)를 아들 방중통(方中通).방중이(方中履)가 선고(選稿)한 물리소식(物理小識,1664)에 "푸얼차 증지성단 서번시지(普 茶 蒸之成團 西蕃市之)"라고 정식 푸얼차의 이름이 문서(文書)로 명기되었다. 명태조 주원장이 목동시절 차를 찌고 만드는 일을 너무 쾌락위주로 사치한 것을 보고 1391년 명하여 성단차를 못하게 하고 산차로 공차토록 하여 푸어차 발전이 일시 주춤하였다.

푸얼부로 개명한 이래 점점 운남성은 차의 집산지가 되었고 상인의 감각과 푸얼차와 푸얼부가 연계되어 차명 또한 널리 알려지고 "차마대도(茶馬大道)"가 서장을 거쳐 인도까지 열려 동서왕래(東西往來)가 빈번하였고 차마교역이 활발하였다.


◈ 청나라 시대(淸 時代)

푸얼차가 환골탈태(換骨脫胎)하여 국내외를 막론하고 널리 즐겨 마셨고 궁중에서도 이를 좋아하게 되었다. 이때가 최고의 푸어차 전성시대였다.

푸얼차에 관한 내용들은 12월 18일 16시 08분에 찬하명차(011-482-5695) 연락하여 게제하도록 허락을 받고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