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단/2024년 말씀

서로 사랑의 손을 잡을 때입니다(갈 02:01~10).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24. 5. 18. 2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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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저널 515일 자 기사에 대통령, 조국과 악수5년 만에 첫 대면” “윤 대통령, 법요식 행사 후 조국 대표와 악수이런 기사가 실렸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15일 서울 종로구 조계사에서 행사를 마치고 퇴장하면서 조 대표와 악수하며 눈인사를 나누었다는 내용입니다.

다음 내용은 특별한 대화는 나누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정치적인 의미가 있는 기사입니다. 악수는 누구나 자연스럽게 하는 일 아닙니까?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이런 기사를 사진까지 첨부하여 실었습니까?

그만큼 관계가 불편했다는 뜻입니다. 제가 이런 기사를 이야기하는 것은 정치에 관한 일을 나타내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솔직히 이분들 저의 감성에 별로 맞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이런 기사를 인용하는 것은 나름대로 이유가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악수의 의미에 대해 강론하기 때문입니다. 대인관계에서 문제를 풀어 가는 실마리는 서로 간의 인사입니다.

인사에 의해 사람은 많은 영향을 받습니다. 또 인사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서로의 느끼는 정도 달라집니다. 나라마다 인사하는 방법이 다릅니다.

예를 들면, 얼굴과 얼굴을 어긋나게 하며 포옹하는 인사, 입맞춤, 손등의 키스, 악수 등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이 가운데 악수가 제일 무난하고 편한 것 같습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교회에 오셔서 반가움을 전하기 위해 여러 형태의 인사를 하셨을 것입니다. 인사치고는 아무래도 악수가 제격이지요.

 

09절을 잘 보십시오. 사도 바울이 바나바와 함께 디도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의 상황을 설명하는 부분입니다. 이때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들인 야고보와 원 사도인 게바 요한 등을 만났는데 이들이 자기들과 악수하였다고 전합니다사람이 만나 악수하는 일, 흔한 일 아닙니까?

그런데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기록해 놓았는지 그 의미를 살펴보겠습니다. 그래서 말씀 제목을 서로 사랑의 손을 잡읍시다.로 정했습니다.

 

 

1. 사도들이 바울을 이방의 사도로 인정하는 악수입니다.

 

09 또 기둥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나와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하였으니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그들은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사도(使徒 πόστολος)란 예수님께서 복음을 세상에 전파하기 위하여 선택한 열두 명 제자에게 붙여진 명칭입니다(10:0204; 06:1316).

사도 뜻은 보냄을 받은 자, 혹은 대리자라는 뜻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도 하나님의 사도라 칭하였습니다(03:01). 누구나 사도가 되는 것이 아니라 기준이 있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직접 부름을 받고 3년 동안 훈련을 받아 파송을 받은 자. 권능을 부여받아서 직권적 능력을 행하는 자.

예수님의 시종 행적에 대한 목격자(24:38; 01:22; 고전 09:01).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열두 제자를 넘어서 특별 사역자도 사도라 칭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직접 위임받은 사람은 사도라 불렀습니다(14:14, 고전 09:01~02, 01:19). 이들은 초대교회에서 상당한 역할을 하였고 기독교 화장에 크게 쓰임을 받았습니다. 교회의 창설 직원으로서 성경 정경(正經)과 신조(信條)의 확립에 역할을 하였습니다.

 

바울서신을 보면 기독교를 박해하던 바리새인 출신 사울이 기독교로 개종하였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이방인의 사도다. 하면서 선전하고 다닙니다. 이 일로 교회마다 성도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바울의 사도직에 대한 의문이 예루살렘의 원 사도들에게 보고되었습니다. 사도의 사이비(似而非)론과 치리론 까지 등장하는데도 바울은 계속 나는 사도라고 주장합니다.

 

롬 11:13 내가 이방인인 너희에게 말하노라. 내가 이방인의 사도인 만큼 내 직분을 영광스럽게 여기노니.

 

바울은 자기가 남긴 여러 편지 서두에 꼭 자기는 사도라고 밝힙니다. 이 자격은 사람이 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으로 주님께서 주셨다고 밝힙니다이런 상황에서 바울과 바나바가 예루살렘을 방문하였을 때 원 사도들이 서로 교제의 악수를 청하였습니다.

바울의 사도권을 더 이상 거론하지 않고 인정해 주는 표시입니다. 복음의 조화와 일치를 이루는 사랑의 악수입니다결국 바울의 사도권에 대해 더는 문제 삼지 않겠다는 표시입니다. 함께 복음 전하는 동역자임을 인정하여 서로 존중히 여기는 뜻으로 악수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도 주님 안에서 혹 서로 의심하고, 시기하고, 헐뜯은 일들이 있습니까? 만일 있다면 그런 일들을 긴급히 정리하여야 합니다.

구원의 은혜를 아십니까? 복음의 비밀을 간직하고 살아갑니까? 그러면 성도 간에 사랑의 교제를 나누는 일에 삶의 에너지를 쏟읍시다. 이제부터 사랑의 교제를 나누며 사랑의 손을 잡아야 합니다. 이런 악수의 삶 속에 하나님의 복이 임합니다.

 

 

2. 각기 받은 사명대로 복음을 전하자는 악수입니다.

 

09 또 기둥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도 내게 주신 은혜를 알므로 나와 바나바에게 친교의 악수를 하였으니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그들은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

 

복음을 전하는 데 국경이 없습니다. 개인의 이념과 사상이 달라도 주님 안에서 능히 하나가 되어 충성할 수 있는 것이 기독교입니다. 그러므로 09절은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끼리 서로 간에 주님 안에서의 역할을 분담하자는 악수입니다.

주님께서 부르시고, 구원의 은혜를 허락하심은 내가 받은 구원의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 전하기 위함입니다. 나 혼자만 간직하고 누리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롬 01:14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15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바울은 주님께서 자기를 사도로 세워 주신 목적을 고백합니다. 그것은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복음의 불모지를 개척하기 위함이라는 고백입니다나는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이 무엇인가를 돌아봅시다.

우리 믿음의 공동체 여러분 모두가 받은 귀한 사명이 있지 않습니까? 나는 나의 어떤 능력으로 복음 전파에 참여할 수 있을 것인지 생각해 보시라는 뜻입니다.

 

전도자로서 뜨거운 열정이 있습니까? 복음 전파를 위해 뒤에서 열심히 중보 기도로 동참합니까? 이웃에게 사랑의 봉사자로 다가갑니까?

교회 안에도 복음 전하는 여러 단체가 있습니다. 각 전도회 등, 나는 어느 부서 어느 위치에서 어떤 일로 복음 전파에 동참합니까?

모두가 한길로 갈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제각기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재능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제각기 신앙의 특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롬 12:04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

 

시각 장애인으로 제17대 국회의원을 지낸 정화원(鄭和元 1948.7.8.~) 씨의 블로그에 이런 다짐의 글이 올려져 있습니다. 아름다운 세상을 볼 수는 없지만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 수는 있습니다.

좋은 말입니다. 우리가 제각기 받은 은혜를 따라 복음의 아름다운 일터를 만들어 갑시다. 지금은 여러 분야에서 나의 능력을 발휘하여 선교의 꽃을 피워야 할 때입니다.

 

고전 04:01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02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귀하게 쓰임 받던 사도들, 굳은 악수 하면서 각자 받은 재능대로 복음을 전하고자 하던 일꾼들은 모두 다 주님의 나라를 든든히 세우는 데 크게 이바지하다 세상을 떠났습니다.

 

 

3. 서로 돕고 협조하자는 상부상조의 악수입니다.

 

10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을 기억하도록 부탁하였으니, 이것은 나도 본래부터 힘써 행하여 왔노라.

 

복음의 초창기 예루살렘교회 성도들은 생활이 대부분 궁핍(窮乏)했습니다. 사회에서 소외당하는 서민층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다고 고백하거나 신앙 공동체에 가는 일은 단체나 가문에서 출회(黜會) 당하기 일쑤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흉년과 핍박이 겹쳐 올 때 그 곤경을 극복하기가 무척 어려웠습니다. 경제의 위협과 생명 위협을 감당해야 하는 고난이었습니다.
혹독한 시련을 만날 수밖에 없었는데 이러한 때 이방 교회에서는 예루살렘 모체 교회를 돕자는 분위기가 조성되었습니다. 바로 이 분위기를 지금 바울이 주도하고 있습니다.

 

가난한(πτωχός) 자들. 이에 해당하는 의미는 궁핍을 뜻하는 일상용어입니다. 돈이나 재산이나 생활 수단이 거의 없다는 뜻으로 쓰인 단어입니다.

누가복음에서 걸인에게도 사용되었습니다(16:20). 당시 가난한 자들은 복음 전파와 함께 구제의 주요 대상이었습니다(11:05).

초대교회 시절 구제의 일은 논쟁의 대상이 아닙니다. 당연히 행하여야 하는 임무입니다. 모두가 인지하고 있는 일입니다. 교회는 당연히 감당했던 일입니다(24:17).

 

나도 본래 힘써 행하여 왔노라. 바울이 언제부터 구제를 실행해 왔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의 사역 가운데 구제의 일은 여러 번 등장합니다.
바울은 1차 선교여행 때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교회가 모금한 구제 헌금을 가지고 예루살렘에 올라도 간 일이 있습니다(11:29, 30). 여러 곳에서 바울의 구제 일이 나옵니다(15:25~27).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볼 수 있습니까?

 

바울의 구제는 이웃에게 생색(生色)내는 구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구제에 대한 교훈을 여러 차례 남기면서도(12:13; 04:28; 딤전 06:18) 자기 의를 내 세우지 않았습니다.

가난한 자를 돕는 일에 게으르지 말고 그 일을 위하여 정직하게 살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이런 선행이야말로 살아있는 믿음이요(02:14~17) 믿음의 진실성을 측정하는 기준입니다.


요일 03:17 누가 이 세상의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닫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하겠느냐?

 

성도는 서로 간에 상부상조 손을 잡아야 합니다. 교회는 믿음의 공동체로서 사랑의 교제를 나누어야 합니다. 교회는 상부상조하는 가운데 성숙해 갑니다. 반면 서로 불화하는 곳에는 복음 전파가 멈추고 교회는 쇠하여 갑니다.

믿음으로 함께 교제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예수님의 지체입니다. 서로 간에 도와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물질로, 기도로, 말로, 몸으로 도와야 하는 그 의무는 매우 중요합니다.

 

과거 60년대 한강 다리에 잠깐만 참으세요. 라는 표지판이 있었습니다. 한강 다리에서 투신하는 사람이 많아서 이를 만류하는 글입니다. , 조금만 참으면 됩니다.

못 견딜 만큼 힘든 상황을 맞이한 한 남자가 자살을 결심했습니다. 그러고는 침울한 표정으로 종이 위에 자살이라는 단어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한참 글자를 이어 쓰다가 한순간 입가에 미소가 번졌습니다. 그리고 힘차게 자리를 박차며 일어났습니다.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종이에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자살자살자살자살자살자, 자살자, 살자, 살자, 살자신실한 성도는 외로운 자를 붙들어 주는 일을 해야 합니다. 서로 격려하면서 신앙의 길도 함께 가야 합니다.

우리는 형제가 어려움이나 고통, 슬픔의 현장에 놓일 때 적극 위로하고 도와야 합니다. 이 일이 주님의 뜻임을 한시라도 잊지 맙시다.


고전 12:26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하느니라. 27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오래전의 이야기입니다만 우리나라의 88올림픽의 성공 배경을 아십니까? 이는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이 실패로 끝난 때로부터 유래합니다.
모스크바 올림픽이 어떻게 실패했습니까? 이유는 당시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기 때문입니다. 미국 측에서 인권을 짓밟는 곳에 어떻게 참여할 수 있느냐며 카터 대통령이 올림픽에 참가할 선수들에게 출국증을 내주지 않았습니다.

그러고는 서방 온 세계를 선동하여 모스크바 올림픽 보이콧 운동을 벌여서 결국은 반쪽 대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는 미국은 인권을 귀하게 여기는 나라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도 역시 참여하지 않았습니다. 4년 후인 1984L. A 올림픽 역시 상업적인 면에서는 성공이었으나 반쪽 대회로 실패를 기록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이번에는 소련을 비롯한 동유럽에서 4년 전의 일에 대한 보복으로 보이콧 운동을 전개하였기 때문입니다. 일종의 정치 논리입니다.


이후 소련에서 개혁 진보 인물인 Mikhail Gorbachev(1931.3.2.~2022.8.30.)가 나왔습니다. 한편 미국에서는 Ronald Reagan.(1911.2.6.~2004.6.5.) 대통령이 집권할 때였습니다.

양국 대통령이 중거리용 전술 핵무기 감소를 위한 군축회의가 미국에서 열렸습니다. 그 회의 끝에 레이건이 고르바초프의 손을 잡고 이렇게 말합니다.
이보시오, 우리 88올림픽 성공시킵시다. 라는 제안의 악수를 청하였습니다. 이때 만일 레이건의 손을 고르바초프가 치고 외면하였다면 어찌 되었겠습니까?

 

고르바초프는 레이건 손을 잡고 흔들면서 굳은 악수를 하였습니다. 그 뒤 소련에서 전략 무기 감축 회의차 레이건 부처가 참여하였습니다. 이번에는 그 회의 끝에 고르바초프가 이보시오, 우리 88올림픽 성공시킵시다. 는 말을 하면서 레이건에게 악수를 청했습니다.

레이건 역시 동서 화해의 분위기를 살려 화답의 손을 잡으므로 우리나라 88올림픽이 성공되었습니다. 1980, 5.17의 부정적인 일도 당시 많이 해소되었습니다.

우리도 화해의 악수를 해 봅시다. 행복의 악수, 문제를 풀어가는 악수를 합시다. 공동체를 아름답게 가꿉시다. 공동체 안의 성도를 잘 섬기는 믿음의 가족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