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단/2018년 말씀

내 백성아 바벨론에서 나오라.(계 18:01~05)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18. 10. 20. 0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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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623일 태국 북부 치앙라이의 16세 이하 축구 클럽 유소년팀 선수 12명과 25세의 남자 코치 1명이 훈련을 마치고 관광차 한 동굴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급작스러운 폭우로 물이 불어나 동굴 안쪽 길을 막으면서 실종되었습니다.

태국 당국에서는 전문 잠수부를 동원하여 실종자를 찾아 나섰는데 다행히도 열흘 만에 13명 모두 동굴 안에 생존해 있는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들을 발견한 곳은 동굴 입구에서 5km 넘게 떨어진 곳으로 전문 잠수부도 6시간이 걸릴 만큼 물이 차 있는 거리입니다.

세계 여러 나라의 장비와 인력이 동원되어 실종 17일째인 710일에 전원 구조되었습니다. 처음에는 완전구조를 이루기까지 최대 4개월이 걸릴 것으로 예상하였으나 태국 구조 당국의 각별한 노력으로 기간을 대폭 단축하였습니다.

 

유소년팀 축구 선수 실종 사건, 일단 이곳 동굴에서 나오므로 살길이 열렸습니다. 반면 동굴 속에 계속 갇혀 있다면 햇빛을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런 세상의 일, 육신의 일은 나오기 위해서 노력하고 좀 도와주면 해결이 됩니다.

이보다 더 시급하고 중한 일이 있습니다. 세상 향락과 어둠의 세력에 사로잡혀 죽음의 도시와 같은 바벨론에서 나오는 일입니다. 어둠과 죄악의 세계 바벨론에서 나오지 않으면 죽음입니다. 나오면 영생입니다. 그래서 말씀의 제목을 내 백성아 바벨론에서 나오라. 로 정했습니다. 은혜받는 귀한 시간 되기를 바랍니다.

 

 

 1. 바벨론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02 힘찬 음성으로 외쳐 이르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이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들이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바벨론(Βαβυλών Babylon). 히브리어 바벨(בָּבֶל)에서 유래하였으며 혼란이란 뜻입니다. 바벨론은 B.C. 2,250년경 바그다드 남쪽 80km 지점 유프라테스강 언저리에 있던 고대국가 갈대아의 수도로 그 구역이 약 890ha입니다(1ha 3,025). 10:10 절에 의하면 니므롯이 시날 땅에 자리를 잡고 도시를 건설한 곳이 바벨론이며, 이곳에서 거대한 바벨탑 건설을 진행하였습니다

그러나 바벨탑을 쌓는 목적이 하나님을 대항한 결과가 되자(11:01-09) 하나님께서 공사에 참여한 자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였습니다. 공사는 저절로 중단되었습니다. 수메르인들의 기록에도(B.C. 2,250), 아카드의 사르곤 왕에 의해 파괴된 이 도시의 신전을 니므롯이 복구하였다고 나옵니다. 이 도시는 우르 제3왕조 때에(B.C. 2,150-2,050년경) 셈족 계통의 아모리인에 점령당했고 후에는 바벨론 제1왕조의 수도가 되었습니다.

 

바벨론 제1왕조 함무라비 왕은(B.C. 1,750년경) 이 도시를 복구시키고 그 영향력을 크게 확장 시켰으며, B.C. 1,600년경 히타이트(Hittite)족에 의해 함락되었습니다. 후에는 바벨론이 카시트의 통치하에 들어갔다가 계속하여 앗수르와 엘람의 침범을 당했고, B.C. 1,124년경 느부갓네살 1세에 의해 재건되었습니다. B.C. 689년 신 앗수르 제국의 산헤립 왕에 의해 정복당했다가 이내 멸망하고 갈대아인 나보폴랏살이 B.C. 626년에 새로운 왕조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느부갓네살 2(왕하 24:01)에 중건되었고 이 느부갓네살 2세가 유다 왕국을 멸망시키고 유대인들을 포로로 잡아갔는데 그곳이 바벨론입니다. 이후 세월이 흘러 B.C. 539년 페르시아의 고레스왕이 일어나 벨사살 왕을 죽이고 고레스 칙령을 선포하여(05:30) 이스라엘은 포로에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바벨론은 묵시문학에서 하나님 나라를 대적하는 로마 제국, 세상나라, 멸망 당할 사탄과 그 왕국, 우상 숭배와 배교(背敎) 등으로 상징됩니다(벧전 05:13; 17:05). 성경은 바벨론을 유다 왕국을 멸망시키고 유대인을 포로로 끌고 간 정복자의 관점에서 기록합니다. 그 후 많은 세월이 흘러 신약시대에 와서 베드로가 다시 바벨론을 등장시킵니다.

 

벧전 05:13 택하심을 함께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 내 아들 마가도 그리하느니라.

 

베드로가 말한 바벨론에 대하여 문자대로 볼 것이냐 아니면 상징으로 볼 것이냐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이에 대해서는 세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첫째는 베드로가 직접 메소포타미아 지방의 바벨론에 가서 전도하였다는 견해입니다(Calvin). 그러나 베드로가 그곳에 가서 전도하였다는 정확한 근거가 없고, 초대 교회의 전승에 의하면 베드로는 로마에 있었으므로 타당성이 없습니다.

둘째는 애굽의 한 도시라는 견해입니다(Strabo, Josephus). 그러나 베드로가 이곳도 방문하였다거나 가서 전도하였다는 확실한 근거가 없습니다. 셋째는 로마를 가리킨다는 견해입니다(Lenski, Stibbs, Kelly, Blum). 이 세 가지 견해 중 바벨론을 은유(隱喩)의 표현으로써 로마로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합니다.

 

그러면 베드로가 로마의 권력을 바벨론에 비유한 것은 지금은 기독교를 박해하는 막강한 세력일지라도 그 세력 역시 때가 되면 무너진다는 의미입니다. 사도 요한도 이 바벨론을 은유의 표현으로써 세상의 악과 쾌락을 상징하는 로마로 보았습니다. 결국, 바벨론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든 악의 총칭으로 보아야 합니다.

 

 

 2. 바벨론에 계속 머물면 멸망입니다.

 

04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부터 다른 음성이 나서 이르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가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요한계시록은 일곱 인, 일곱 나팔, 일곱 대접으로 구성되어 사탄과 최후의 전쟁을 기록한 성경입니다. 장차 일어날 마지막 때의 현상을 기록한 이 계시록에 세상의 쾌락을 상징하는 바벨론이라는 단어가 8번 나옵니다.

하나님의 천사가 바로 이 바벨론에서 나와야 살길이 열린다고 선언합니다. 장소뿐만 아니라 악의 생활에서 떠나야 살길이 열린다는 음성입니다. 그러나 이 음성을 외면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곧 멸망할 도성에서 나와야 살길이 열린다고 소리쳐도 전혀 나오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왜 나오지 않습니까? 믿음의 눈으로 보면 멸망의 성이지만 세상의 관점, 육신의 관점으로 보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는 행복의 요람이기 때문입니다. 계시록을 기록한 요한은 요한102:15~17절에서 바벨론 문화의 3대 특징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요일 02: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대적하는 세속 문화를 압축한 것으로 한마디로 바벨론이라고 합니다. 바벨론은 타락과 부패와 반기독교 세력이고, 물질 중심의 세속 문화, 이방 문화이기 때문에 세상을 상징하는 단어가 되었습니다. 그러면 바벨론으로 불리는 세상 문화가 영원히 지속이 될 것 같습니까? 사도 요한은 세상 문화에 대해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잠깐 지나가는 것이라(요일 02:17)고 안내합니다

바벨론 문화는 천지창조와 더불어 에덴동산에서부터 존재하였습니다. 사탄이 하와에게 선악과를 따 먹도록 유혹하였던 전략을 보십시오. 3가지 특징으로 접근을 하였습니다.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마음을 가지게 하였습니다. 바로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입니다.

 

03:06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 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사탄이 예수님의 공생애 직전 사십일 금식을 한 후 찾아와서 시험할 때에도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이었습니다(04:01~10). 멸망의 도성 바벨론에서 나오라 하는 데도 계속 세상의 문화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자에 대하여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01:11 화 있을진저 이 사람들이여, 가인의 길에 행하였으며 삯을 위하여 발람의 어그러진 길로 몰려갔으며, 고라의 패역을 따라 멸망을 받았도다.

 

또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행적과 그 결과를 보십시오. 삼촌 아브라함과 사이에 의리를 배반하고 소돔으로 간 길이 잘 되었습니까(13:05~13)? 이내 모든 재물을 잃고 아내까지도 소돔 성에서 나오다 소금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몸은 그곳에서 나왔으나 그 마음이 여전히 그곳에 머무르고 있었기에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롯의 처를 기억하라는 말씀입니다(17:32).

 

 

 3. 나도 멸망의 도시 바벨론에 머물고 있습니까?

 

04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부터 다른 음성이 나서 이르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가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세상의 쾌락을 상징하는 단어 바벨론이 계시록에 8(14:08, 16:19, 17:05, 18:02, 10, 14, 15, 23) 나온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가운데 중심되는 구절을 읽겠습니다.

 

14:08.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18:02), 10. 화 있도다. 화 있도다. 큰 성, 견고한 성 바벨론이여. 21 이에 한 힘 센 천사가 큰 맷돌 같은 돌을 들어 바다에 던져 이르되 큰 성 바벨론이 이같이 비참하게 던져져 결코 다시 보이지 아니하리로다.

 

세상의 쾌락을 상징하는 바벨론, 소돔과 고모라와 같은 죄악의 도시에 대한 하나님의 준엄한 메시지, 심판의 메시지가 있습니다. 그의 죄는 하늘에 미칠 정도로 극에 달하였다. 나는 그 죄를 두고 볼 수 없다. 동시에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가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05).

 

거기서 나와(ἐξέρχομαι 엑셀코마이). 하나님께서 속량 사역을 통하여 택한 백성에게 은혜를 베푸시는 증표입니다(51:45). 하나님은 속량함을 받은 자기 백성에게 큰 성 바벨론의 죄악에 젖어 들지 말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합당한 삶을 살라고 하십니다. 바벨론이 왜 무너집니까?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이 모이는 것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의 모이는 중심지이기 때문입니다. 18장은 앞으로 바벨론이 멸망한다는 예언장입니다. 그러면 바벨론에 대하여 왜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라는 과거형을 사용합니까? 아직도 바벨론은 건재하는데 말입니다. 왜 과거 시제인 무너졌도다. 라는 말을 반복합니까? 멸망의 임박성과 확실성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곧 이루어질 것이 확실하면 과거 시제로 표현하는 문학의 기법 때문에 이렇게 표현하였습니다.

 

아프리카를 비롯한 여러 지역에서 서식하는 뱀 중에 가장 무서운 뱀이 방울뱀이라고 합니다. 이 뱀은 무서운 독을 가지고 있어서 물리면 치명상을 입습니다. 이 방울뱀이 다람쥐를 잡아먹는 특이한 방법이 소개되었습니다.

다람쥐가 있는 곳에 가서 꼬리를 흔들며 청명한 방울 소리를 냅니다. 그러면 나무 위에 있던 다람쥐가 방울 소리를 듣고 호기심이 나서 소리 나는 곳을 쳐다 봅니다. 곧 방울뱀과 눈이 마주치게 되는데 그 순간 다람쥐는 겁을 먹고 꼼짝을 못합니다.

이때 방울뱀이 입을 크게 벌리고 덤벼들 듯한 자세를 취하면 다람쥐는 스스로 놀라서 비실거리다 나무에서 떨어져 기절합니다. 그 순간 방울뱀은 한입에 삼켜 버립니다.

 

사탄이 우리에게 접근하는 방법도 이와 유사합니다. 사탄이 에덴동산의 하와에게 광명한 천사로 가장하여 달콤한 말로 접근했습니다. 그 순간 선악과는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여 결국 따 먹었듯이 우리에게도 같은 원리로 찾아와서 속삭입니다.

넘어가면 한입에 삼킴을 당합니다. 사탄의 사정권에 들지 않도록 말씀의 무장을 하여야 하며 남의 소리, 진리에서 이탈한 자의 소리를 지혜롭게 차단하십시오

 

벧전 05:0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09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목적이 이끄는 삶의 반대가 있습니다. 욕심이 이끄는 삶, 야망이 이끄는 삶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신령한 목적이 이끄는 삶을 삽니다. 반면 신령한 세계를 모르는 사람은 욕심이 이끄는 삶, 바벨론의 삶을 삽니다. 악한 영에 붙잡히면 사탄과 즐거움의 밀월이 시작됩니다. 죄에는 달콤함이 숨어 있습니다. 그 달콤함 때문에 악령에게 서서히 잡힙니다. 일단 잡히기 시작하면 헤어나오기가 매우 힘이 듭니다.

김해삼일교회 가족 여러분, 성도는 예수님께 붙잡힐 때가 아름답습니다. 예수님께 붙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쫓아갈 때가 즐겁습니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 사람은 욕심이 이끄는 삶을 살지 않습니다. 바벨론의 생활을 다 청산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돌아보면 아직도 바벨론의 생활 찌꺼기가 남아 있어서 그것이 내 믿음 생활을 방해합니까? 오늘 다시 한번 그 생활을 온전히 폐기하십시오. 다시는 돌아보지 마십시오. 바벨론 생활의 근처에도 가지 마십시오. 그리하여 김삼일 가족의 믿음이 더욱 굳건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