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단/2018년 말씀

하나님께 돌아오면 살길이 열립니다.(호 06:01~03)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18. 9. 22. 1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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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 왕국 이스라엘(B.C.991-722) 최고의 번영과 몰락을 함께 체험한 선지자가 있습니다. 소선지자 12명 중 첫 번째 이름 올린 호세아(הושֵעַ) 입니다(B.C.750-715). 이 호세아가 선지자로 부름을 받았을 때는 북 왕국 13대 왕 여로보암 2세의 통치 기간(왕하 14:23~17:41)으로서 최고의 평화와 번영을 누릴 때였습니다.

이스라엘을 둘러싸고 있는 여러 나라가 이스라엘에 공물(貢物)을 바쳤으며, 정치가나 백성들은 이런 번영과 평화가 오래 갈 줄 알았습니다. 반면 호세아 선지자는 번영과 평화가 오래 가지 않을 것이라고 역설했습니다. 왜냐하면, 물욕에 현혹되어 하나님까지도 자기들 세상 욕심에 이용하는 일은 망하는 것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B.C. 745년경 앗수르에 디글랏 빌 러셀 3세가 즉위하자 정세는 급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앗수르 왕조의 가장 강력한 정복자로서 B.C. 738년에는 오히려 이스라엘의 16대 왕 므나헴이 그에게 공물을 바치게 되었습니다.

므나헴의 뒤를 이은 17대 왕 브가히야(2) 그리고 18대 왕 베가가 등장하면서 앗수르 세력에 대항하고자 다메섹의 아랍제국들과 군사동맹을 맺었습니다. 그러나 무의미했습니다. 이런 역사의 소용돌이에서 호세아 선지자는 이스라엘에 고난이 닥친 이유는 하나님을 버리고 우상을 섬겼기 때문이라고 진단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왕국의 상황을 정리하면 물질의 풍요와 빈곤과 은혜의 고갈 시대입니다. 우상을 섬기는 일로 하나님을 잊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이에 호세아 선지자는 이방의 세력을 동원하여 이스라엘에 징계를 내리시는 하나님 앞에 회개하며 돌아오면 살길이 열린다고 선포합니다.

그런데도 믿음의 감각이 둔해진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심판은 먼 훗날에나 있을 것으로 생각하며 계속 우상의 길로 달려갔습니다. 그러면 멸망의 길밖에 더 있습니까? 오늘 말씀은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우리의 믿음에 대한 경고의 음성으로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제목을 하나님께 돌아오면 살길이 열립니다. 로 정했습니다.

 

 

 1. 고난의 자리입니까? 여호와께로 돌아갑시다.

 

01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찢으셨으나 도로 낫게 하실 것이요 우리를 치셨으나 싸매어 주실 것임이라.

 

호세아 선지자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하나님께로 돌아가자. 돌아가야 살길이 열린다고 강력하게 권합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민족에게 전하는 말씀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기는 백성에게 전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로 돌아가자는 이런 직접 문구는 01절에 이어 애 03:40 절에도 나옵니다.

 

03:40 우리가 스스로 우리의 행위들을 조사하고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돌아가자(שׁוּב 슈브). 문제를 풀어가는 출발점은 우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데 있습니다. 돌아가야 다음 순서를 다시 풀어갈 수 있습니다. 왜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한다고요? 현재의 고난을 풀어가는 출발점이기 때문입니다. 간절함과 정성이 없이 그저 형식과 외식에 빠지면 하나님을 잃어버립니다. 우상에게 마음을 빼앗김으로 하나님을 잊어버렸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신앙이 어떠한지를 압축해 보겠습니다.

 

첫째, 율법의 문자에 갇혔습니다. 스스로 계율과 법조문을 만들어서 이것은 하지 말아라, 하라, 이것은 먹어라, 먹지 말라. 이런 식으로 문자에 갇혔습니다. 그러다 보니 문자 속에 들어 있는 신령한 뜻은 관심 밖의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둘째, 낡아빠진 전통에 갇혔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이라 가르치는지, 하나님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는 뒷전이고, 옛날부터 그렇게 해 왔으니 지금도 무조건 그렇게 하자는 겁니다. 변화를 시도해야 하는 개혁의 가치가 전혀 없습니다.

셋째, 형식과 외식에 갇혔습니다. 겉모양은 다 갖추었는데 내용이 없습니다. 신령한 부분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고 오직 물질주의로 나아갔습니다. 자신의 영혼을 돌아보는 일, 자신이 믿음의 자리에 있는가를 돌아보는 일에는 무관심했습니다.

 

신령한 생활에 관심 없이 습관을 따라 제사를 지내다 보니 믿음이 파선되었다는 말입니다. 이제는 하나님을 믿는 것처럼 보이는 알맹이 없는 생활에서 돌아서야 합니다. 외식의 자리에 계속 머물고 있으면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만신창이 된 추악한 모습, 믿음의 자리를 떠나 세상 길로 나아가던 모습을 돌이켜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 길만이 살길입니다.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 없이 반복하는 기도는 외식의 기도이고, 하나님을 떠난 자리에서 성경을 읽는 것은 영의 양식이 아니고, 믿음 없이 봉사하는 일은 몸만 피곤하게 합니다.

 

김삼일 가족 여러분, 예수님의 책망 대상이 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처럼 혹 내가 그런 책망의 대상은 아닙니까?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돌아가야 합니다. 세상 길로 나아가면 결국에는 파멸이 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지켜야 할 믿음의 길에 이런 법도가 있습니다.

 

08:11 내가 오늘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법도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리지 않도록 삼갈지어다. 12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되며 13 또 네 소와 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14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

 

 

 2. 여호와께로 돌아오면 살려주십니다.

 

02 여호와께서 이틀 후에 우리를 살리시며 셋째 날에 우리를 일으키시리니 우리가 그의 앞에서 살리라.

 

이틀 후에, 셋째 날에라는 문장을 보십시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돌아오기만 하면 고난의 흔적을 속히 지워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어떤 사람이든지 죄와 허물을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오면 하나님은 그 쓰러진 자리에서 일으켜 주십니다. 하나님은 회개하고 돌아오는 자를 육신만 살리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해주시겠다고 선언하십니다(26:19; 37:01-14).

그의 앞에서(פָּנִים 파님). 앞이라는 명사을 보십시오. 누구 앞이라는 말입니까? 하나님의 얼굴 앞입니다. 왜 얼굴이라는 단어가 나옵니까? 하나님의 보살펴주심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신령한 관계를 말할 때 표현하는 용어가 바로 얼굴입니다. 하나님의 얼굴 앞이란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대면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사람이 과연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있습니까? 과연 맞대응 할 수 있느냐 말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일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다고(33:20) 하셨습니다. 삼손이 나실인으로 태어나는 과정에서 마노아가 그의 아내에게 우리가 하나님을 보았으니 반드시 죽을 것이라(13:22) 하였습니다.

야곱과 기드온도 여호와의 사자를 대면한 후 죽을 줄로 여겼고(32:30; 06:22, 23), 이사야도 여호와의 영광을 본 후 화로다. 하고 부르짖었습니다(06:05). 그런데도 성경은 곳곳에서 하나님의 얼굴과 그의 능력을 항상 구하라고 하며(105:04), 솔로몬이 일천 번째를 마쳤을 때 하나님은 이런 복을 주셨습니다.

 

대하 07:14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

 

그러면 하나님의 얼굴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우리처럼 얼굴이라는 외형이 없습니다. 그런데도 성경은 하나님의 팔, 하나님의 손, 하나님의 눈, 하나님의 등, 하나님의 얼굴 등 외형이 있는 것처럼 표현합니다.

이는 사람이 하나님을 더 친밀한 관계로 이해하고 만나기 위한 의인법(擬人法)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얼굴을 찾는 자의 기도를 들으시고 그들의 죄를 사하시며 그들의 땅도 고쳐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죄를 사한다는 말과 땅을 고친다는 말은 서로 연관된 문장입니다.

 

사람이 먼저 죄 사함의 은혜를 입어야 평화와 고침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하나님이 땅을 고쳐주신다는 의미는 토지를 바꾼다는 뜻이 아닙니다. 농경사회에서 땅을 고치는 것은 토양의 환경을 개선하여야 합니다. ()한 땅은 객토(客土)하거나 시비(施肥)를 해서 기름진 땅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당시는 의식주를 비롯한 전반 생활이 토지의 소산물에 의존하던 농경사회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징계로 인해 토지의 소산물이 황폐해졌을지라도 그 소산물을 회복시켜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3. 하나님께 돌아왔으면 신령한 관계를 잘 유지하여야 합니다.

 

03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그의 나타나심은 새벽빛같이 어김없나니 비와 같이, 땅을 적시는 늦은 비와 같이 우리에게 임하시리라 하니라.


힘써 여호와를 알자(יָדַע 야다). 안다는 것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몸부림치는 체험을 통하여 깊이 아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전에는 하나님을 잘 섬겼는데 자신도 모르게 세상 욕심에 이끌려 우상을 숭배하는 자리에 빠졌습니까? 그 자리를 탈출하십시오.

이제부터 하나님을 떠난 자리가 아니라 섬기는 자리에 좌정하십시오. 이제부터 지난 시절 하나님을 섬기는 그 자리를 회복하십시오. 이제부터 우리 모두의 삶을 주장하시는 하나님, 믿음으로 나아가면 복을 주시는 하나님을 이론이나 지식이 아닌 체험으로 만나십시오.

 

우리가 왜 하나님을 힘써 알아야 한다고요? 하나님의 은혜가 새벽빛같이 임하시기 때문입니다. 새벽빛이란 어두움을 반드시 물러가게 하는 밝음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은혜가 확실하게 임한다는 보증서와 같습니다. 새벽빛같이 임한 후에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는 실제 현장이 무엇입니까?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내려주시는 은혜입니다. 

(גֶּשֶׁם 게셈)와 같이. 여기 비는 10월 초부터 2월 사이 파종할 때 흡족하게 내리는 비로(10:09, 13) 이를 이스라엘에서는 이른 비라고 합니다

늦은(מַלקוֹשׁ 말코쉬) . 3월과 4월에 내리는 비로 이를 늦은 비라고 하며, 곡식을 여물게 함으로 복을 상징하는 비입니다. 이처럼 만물을 소생하게 하는 겨울비와 봄비처럼 하나님은 자기를 힘써 아는 백성에게 풍요로운 은총과 복을 내리시기를 원하십니다(26:04; 11:14).

 

11:14 여호와께서 너희의 땅에 이른 비, 늦은 비를 적당한 때에 내리시리니 너희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얻을 것이요.

 

03절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알아야 할 부분이 무엇입니까? 먼저 우리의 상태부터 점검하여야 합니다. 사람은 남의 부족을 잘 알지만 자기 부족은 모릅니다. 나는 잘못했습니다. 라는 사람이 드뭅니다

자기만이 잘났고 유능하다고 여깁니다. 하나님을 향한 지식과 믿음이 없으므로 망함을(04:06) 깨닫지 못합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일명 탕자 비유 아시지요? 작은아들이 먼 나라(아마 당시 상황으로 보면 로마일 것 같음)로 가서 자기 나름대로 사업을 펼치다 폭삭 망했습니다. 이후 많은 고민과 갈등 속에서 지내다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단합니다. 그때 작은아들 심정을 누가는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15:18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19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아버지와 관계 회복을 진정으로 원하여 작은아들이 돌아올 때 아버지는 이미 지난 모든 일을 용서하셨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아버지는 집 나간 작은아들이 돌아오기를 진작부터 기다리다가 먼저 알아보고 달려 나와 맞아 주었습니다.

우리의 주위에 하나님과 교회를 떠나서 세상의 쾌락과 즐거움에 빠진 사람이 있습니까? 혹 우리도, 나도 육신은 아닐지라도 마음은 그렇게 된 것은 아닙니까? 하나님의 자녀를 부르시는 하나님의 세미(細微)한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이런 고백으로 돌아와야 합니다. 하나님은 회개하며 돌아오는 자를 신령한 자리로 이끌어 주십니다. 하나님과는 이런 신령한 관계를 잘 유지하여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김삼일 가족 여러분, 하나님은 내 심령이 아무리 황폐되었어도 고쳐주십니다. 하나님은 내 가정이 아무리 위기에 처해 있어도 고쳐주십니다. 하나님은 사업이 어려운 지경에 있어도 고쳐주십니다. 하나님은 탕자와 같은 자리에 있어도 돌아오면 다시 아들의 자리에 앉혀주십니다.

돌아와서 기도하고 치료를 기다리는 자에게는 꾸짖지 않고 고쳐주시는 하나님을 오늘 우리 모두 만나시기를 축원합니다. 구약시대 이스라엘에서는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회개하고 돌아올 때 옷을 찢었습니다. 그러나 요엘 선지자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으라고 합니다.

 

02:13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진정한 회개는 마음을 찢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데서부터 시작됩니다. 오 예수님 내가 옵니다. 못 박히신 십자가 앞에 그 큰 사랑 눈물에 겨워 울며울며 돌아옵니다. 이 찬양을 부르면서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 통회 하는 마음입니다(51:17).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환난과 고통의 자리에 있을지라도 상한 마음으로 돌아오면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러나 돌아오지 않으면 하나님은 그 은혜 베푸시는 얼굴을 숨기십니다(31:18). 김삼일 가족 여러분, 하나님께로 돌아갑시다. 세상에 속한 마음 버리고 돌아갑시다. 회개하고 돌아오기만 하면 새 힘을 주시는 하나님, 회복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앙망하시기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