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의 분열 왕국 시절 북 왕국의 격동기(激動期)를 풍미했던 두 선지자가 있었습니다. 열혈 선지자 엘리야와 그의 제자 엘리사입니다. 엘리야 선지자는 자기의 사명을 마친 후 죽음을 맞지 않고 불수레를 타고 하늘에 오른 특별한 인물입니다.
바로 그 승천의 현장에 엘리사가 있었습니다. 그때 엘리야는 엘리사가 자신의 후계자임을 보여주기 위해 자신이 입고 있던 외투를 던져주었습니다. 자신의 능력과 할 일을 엘리사에게 넘겨준다는 상징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엘리사의 외투(Elisha's mantle)라는 말이 생겼습니다. 이제 엘리사가 엘리야의 후계자는 되었지만, 아직 길갈, 벧엘, 여리고 이 세 곳에 있는 선지 생도들 즉 신학생들은 엘리사가 엘리야의 후계자인지 잘 모르고 있습니다.
신학생들 외 사회인들도 엘리사를 엘리야의 후계자로 인정을 해야 할지 결정을 하지 못할 때입니다. 사회로부터 검증대에 올라 있는 셈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엘리사가 벧엘에 있는 신학교를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조롱하는 무리가 떼를 지어 몰려와서 엘리사의 약점인 신체를 빗대어 대머리여 올라가라 대머리여 올라가라 이렇게 조롱을 합니다. 그러자 엘리사가 이들을 저주하면서 하나님께 기도하자 암 곰 두 마리가 나와서 이 조롱하는 42명을 찢었습니다.
본문은 성경에서 난해한 본문 중의 하나입니다. 기독교를 비판하는 사람에게 자주 인용되는 본문인데 어떻게 사랑의 하나님을 말 할 수 있느냐는 비판입니다. 너무 잔인한 일이라고 말합니다. 내용을 액면 그대로만 보면 충분히 오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뜻을 깊이 헤아려 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오히려 당연한 일입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을 좀 더 깊이 살피면서 「대머리여 올라가라 대머리여 올라가라.」 이 제목으로 말씀을 강론하겠습니다. 은혜의 시간 되기를 축원합니다.
1. 대머리여 올라가라 대머리여 올라가라 |
23 엘리사가 거기서 벧엘로 올라가더니 그가 길에서 올라갈 때에 작은 아이들이 성읍에서 나와 그를 조롱하여 이르되 대머리여 올라가라 대머리여 올라가라 하는지라.
거기서 벧엘로 올라가더니. 벧엘(ל?תי?)은 하나님의 집이란 뜻을 가진 유서 깊은 역사의 고장입니다. 그런데 솔로몬 왕이 죽은 후 남북이 분열되는 과정에서 여로보암이 열 지파를 데리고 북쪽 벧엘과 단에 금송아지 형상을 세웠습니다. 이때부터 벧엘은 하나님의 집이 아니라 우상숭배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반면 이곳에 엘리야가 금송아지 숭배에 맞서는 벧엘 신학교를 세워서 운영하였습니다.
이 벧엘 신학교를 엘리사가 순방하러 가는 중입니다. 신학생들을 격려하며 자신이 엘리야의 후계자가 되었음을 공개하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벧엘에 사는 작은 아이들이 엘리사를 조롱하는 일이 발생합니다.
대머리여 올라가라 대머리여 올라가라.신체 비하 조롱입니다. 율법에는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머리를 깎지 않습니다(신 14:01). 그럼에도 이런 조롱을 하는 것은 비 신사 행위요 결례 중의 결례입니다. 지금 엘리사의 대머리는 자연 발생 현상으로서 함부로 신체를 비웃고 조롱하는 일은 예의에 크게 벗어나는 일입니다. 있어서는 안 되는 일입니다.
대머리여 올라가라(עֹלֶ֣ה). 같은 말을 두 번이나 반복하는 것은 그만큼 엘리사를 무시하는 표현입니다. 대머리여 올라가라는 말은 너희 선생 엘리야는 불수레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며? 그럼 너도 함께 올라가지 무엇 하러 여기에 왔느냐는 조롱입니다.
이로 보아 엘리야의 승천 사건은 인근에 소문이 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 하나님의 권능을 불신앙하고 비꼬면서 조롱을 일삼는 자들이 누구입니까? 벧엘 성에서 떼를 지어 나온 작은 아이들입니다. 작은 아이들이란 어린아이부터 청년까지 광범위하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문맥의 흐름을 보아 청년들을 의미합니다. NIV는 이들을 청소년(youth)이라 번역하였고, 이 청년들이 하나님의 사람 엘리사에게 감히 야, 대머리야, 꺼져 라는 말은 욕 중의 욕입니다. 젊은 청년들의 철없는 장난으로 여길 일이 아닙니다.
이미 말씀을 드린 대로 벧엘은 금송아지 숭배의 중심지입니다. 이런 지역에서 보고 듣고 자란 청년들이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하고 선지자까지 함부로 무시합니다. 당시 금송아지 우상숭배에 빠진 북이스라엘이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우습고 천하게 보고 있는지를 충분히 짐작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무례한 현장을 통해 엘리야의 후계자로 세움을 받은 엘리사는 당시의 사회로부터 리더십이 검증을 받는 검증대 위에 서 있음을 실감합니다. 중요한 것은 엘리사를 조롱하는 저들의 행위가 단순히 선지자 한 개인에 대한 놀림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도전으로 봐도 됩니다. 이때 엘리사는 능력의 선지자 엘리야의 뒤를 이은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엘리야의 승천 현장에서 그 일을 본 사람도 있고 보지 못한 사람도 있습니다.
엘리야의 승천에 대한 소문은 자자했기에 조롱하는 자들이 엘리사에게 너도 올라가라. 네 스승도 하늘로 올라갔잖아? 너도 올라가 봐. 이런 식입니다. 영안이 어두워질 대로 어두워져 있는 저들이기에 기적을 믿지 않을뿐더러, 다시 재현을 통해서 이곳에서 꺼지라는 조롱입니다. 결국은 하나님을 얕보는 말입니다.
2. 엘리사는 여호와의 이름으로 조롱하는 자들을 심판하였습니다. |
24 엘리사가 뒤로 돌이켜 그들을 보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주하매 곧 수풀에서 암곰 둘이 나와서 아이들 중의 사십 이명을 찢었더라.
엘리사 선지자가 조롱하는 자들을 향해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주를 하자 즉각 수풀에서 암곰 두 마리가 나와 무리 중 42명을 찢었습니다. 24절은 언뜻 보기에 참 의아스럽게 여겨지는 사건입니다.
자기를 놀렸다고 젊은 사람들을 저주하여 죽게 하는 일이 과연 하나님의 선지자가 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의문입니다. 애들이 그 정도 놀린 것 가지고 너무 심하지 않은가? 라는 생각도 가질 수 있습니다.
이런 동정심을 갖는 것은 아이들이라는 단어의 오해 때문입니다. 이 아이들은 길거리에서 소꿉놀이나 하며 노는 아이들이 아니라 상당히 큰 아이들, 주먹을 휘두를 수 있는 정도의 청년들입니다. 이들이 집단으로 그것도 우발이 아닌 고의로 엘리사 선지자를 희롱합니다.
대머리여 올라가라. 대머리여 올라가라. 상당히 계산된 조롱과 위협으로서 결코 가볍게 넘어갈 일이 아닙니다. 엘리야의 후계자 됨을 부정하는 위협과 조롱입니다. 이미 하나님은 엘리사를 엘리야의 후계자로 삼았고, 갑절의 영감을 구할 때 그 영감도 허락하셨습니다.
엘리야가 승천하면서 떨어뜨린 엘리야의 겉옷도 받았습니다. 요단강을 건너 돌아오는 과정에서 그 겉옷으로 강물을 치자 강물이 엘리야가 친 것처럼 갈라짐으로 후계자 됨이 증명되었습니다(왕하 02:14).
그런데도 벧엘에 거하는 청년들이 무리를 지어 나와서 엘리사를 협박하고 조롱합니다. 엘리사는 이 일을 하나님에 대한 도전으로 보았습니다. 엘리사가 뒤로 돌이켜 그들을 보고. 젊은이들의 집단 배교행위를 예의주시했습니다.
그들의 실상을 꿰뚫어 보았습니다. 그들의 말과 행동에 들어있는 불의를 보았습니다. 하나님을 철저하게 무시하는 사상과 행동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을 조롱하는 일은 그 배후의 하나님을 조롱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엘리사는 저주를 선언하였습니다. 엘리사 자신의 사적 보복이 아닙니다.
대하 36:16…. 그의 선지자를 욕하여 여호와의 진노를 그의 백성에게 미치게 하여 회복할 수 없게 하였으므로 17 하나님이 갈대아 왕의 손에 그들을 다 넘기시매.
하나님은 엘리사의 저주를 따라 조롱하는 자들을 즉각 심판하셨는데 24절을 보시면 아이들 42명을 찢었다고 나옵니다. 아이들이 42명이라면 계획된 집단행동의 현장에 더 많은 자가 있었다는 의미로 봐도 되겠습니다.
사람의 관점으론 엘리사가 한 번쯤은 조롱하는 무리를 관용하여 참아 주거나 점잖이 타일렀으면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 사건이 던지는 메시지의 강력한 핵심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사람을 감히 불신자가 놀림감으로 삼고 조롱하면 절대 안 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세움을 받은 사람을 절대 무시하거나 배척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이는 당시 여호와를 떠나 우상숭배에 빠진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이며, 이제 사역을 시작한 엘리야의 후계자 엘리사의 신적 권위를 뒷받침해 주는 현장입니다.
3. 엘리사는 지도자의 검정을 통과하였습니다. |
25 엘리사가 거기서부터 갈멜산으로 가고 거기서 사마리아로 돌아왔더라.
벧엘의 청년들이 왜 엘리사에게 대머리여 올라가라고 하면서 욕지거리를 합니까? 벧엘에 들어오는 것까지 막아섭니까? 그 부모들의 탈선 된 믿음 때문입니다. 벧엘은 본래 하나님의 집이고 그들은 본래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집에서 태어났고, 하나님의 집에서 자랐는데도 왜 우상의 길을 걸었습니까? 북 왕국 첫 왕 여로보암이 백성들에게 예루살렘 성전제사에 가지 못하도록 막았기 때문입니다. 출입을 허용하면 결국은 북 왕국이 흔들릴 것 아닙니까? 그래서 여로보암이 통제하면서 자구책으로 금송아지 두 개를 만들어 벧엘과 단 두 곳에 설치해 놓고는 이것이 하나님이라고 선포했습니다. 보이는 하나님을 만든 셈입니다.
왕상 12:28 이에 계획하고 두 금송아지를 만들고 무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다시는 예루살렘에 올라갈 것이 없도다.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올린 너희의 신들이라 하고 29 하나는 벧엘에 두고 하나는 단에 둔 지라.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집 벧엘이 금송아지 숭배 센터가 되었습니다. 이런 환경에서 태어난 청년들이 엘리사에게 대머리여 올라가라 대머리여 올라가라. 라고 조롱하는 모습은 그들의 부모가 금송아지 우상숭배 신앙으로 키운 결과입니다.
벧엘의 청년들은 하나님의 집에 살면서도 하나님을 섬길 줄 모르고, 금송아지를 섬기며 살았습니다. 지역 이름인 벧엘과는 거리가 먼 생활을 하였습니다. 이런 우상의 문화 속에서 어쩌면 그들의 부모가 오늘의 이 불상사를 뒤에서 조종한 것은 아닐까요? 이쯤 되면 벧엘 신학교와 학생까지도 멸시하였을 것입니다.
시 105:15 이르시기를 나의 기름 부은 자를 손대지 말며 나의 선지자들을 해하지 말라.
벧엘 신학교 학생들은 그들 나름대로 금송아지 우상 숭배자들을 정죄하고, 회개를 재촉하였을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서로 반목하고 질시하는 일밖에 더 있겠습니까? 그래서 벧엘에 사는 사람들 대부분이 엘리야와 엘리사를 좋지 않게 보았습니다.
엘리사가 엘리야의 후계자가 되어 온다고 하니 부모들은 그들 자식에게 엘리사 거부 운동을 조장한 것처럼 보입니다. 악한 충동입니다. 심판에 능하신 하나님은 언제 어디서든지 어떤 도구를 사용하여서라도 심판을 하십니다(계 06:12~17). 믿음의 사람은 악한 충동 대신 거룩한 충동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 속담에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말이 있습니다. 어른들이 하나님의 종을 공경하면 자녀들이 그대로 배우고 공경합니다. 어른들이 하나님의 종을 비방하고 헐뜯으면 자녀들 역시 그대로 배워 비방하고 헐뜯습니다.
김삼일 가족 여러분, 부모가 하나님의 종을 비방하면 그 자녀들은 더욱 악화게 됨을 아십시오. 왜냐하면, 부모는 하나님의 종이 잘하는 면을 인정하면서 잘못한 면만 놓고 비방하지만, 자녀들은 그 비방하는 것만 듣기 때문에 하나님의 종이 다 잘못된 줄 알고 거역합니다.
엘리사가 벧엘을 거쳐 갈멜산으로 갔습니다. 엘리야의 친척들이 있는 곳으로 엘리야의 승천 소식을 알리기 위해서입니다. 이어서 사역의 근거지 사마리아로 돌아왔습니다. 엘리사는 은둔 생활을 한 스승 엘리야와는 달리 왕궁이 있는 사마리아에 살면서 사람들과 사귀고 교제하며(왕하 05:09; 06:32), 때로는 왕의 친밀한 상담자 역할을 하였습니다(왕하 06:09).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
로마의 율리아누스(Flavius Claudius Julianus, 331-363) 황제는 기독교에서 이교도로 바뀐 배교자 중의 한 사람입니다. 그는 페르시아와 전쟁 중에 기독교인 장교 한 분을 만났습니다. 황제는 그 기독교 장교에게 자네가 따르는 그 목수 양반, 요새는 무엇 하지? 하고 빈정대었습니다.
그때 기독교 장교가 웃으며 대답하기를, 저도 전해 들은 이야기인데 요즘 우리 목수님께서는 황제를 위하여 관(棺)을 만들고 계신다던데요 하였습니다. 그 일이 있은 지 며칠 후 황제는 한밤중에 습격을 받아 죽게 되었습니다. 그는 죽어 가면서 마지막으로 남긴 말이 갈릴리 사람이여, 그대가 나를 이겼소. 하였습니다.
엘리사 선지자는 하나님의 이름과 거룩함이 모독을 받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즉각 불량배와 다름없는 청년들을 여호와의 이름으로 저주하여 심판을 받게 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어떤 사건을 대할 때 현실의 기준으로 이해하려 합니다.
수천 년 전의 사건을 오늘의 관점으로만 보면 상당한 오류가 일어나기 쉽습니다. 그 시대의 정치 경제 문화의 배경을 살피고 이해야 합니다. 오늘 우리를 향한 상징의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의 집, 교회 안에 있는 무신론자, 회의론자, 반신론자를 경고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몸인 교회 안에 있으면서도 물질우상, 지식우상, 자기 우상을(이기주의) 섬기는 자들을 향한 경고의 음성입니다. 지금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욕되게 하고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 시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라 칭하면서도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일을 많이 일으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이웃들, 인종이나 피부 때문에, 국적 때문에 욕하고 비하하고, 또 주의 종을 대적하고 기름부은 자를 멸시하는 일은 심판의 씨앗을 심는 일입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이 따릅니다. 김삼일 가족 여러분, 하나님 앞에서 경건한 믿음으로 살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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