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시대 때 그러니까 1529년 2월 경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의 기치를 내걸고 일어났을 때 많은 어려움과 함께 협박도 있었습니다. 이때는 로마 황제 카알 Ⅴ세가 전 독일 제후국들의 종교적 분열을 저지하기 위하여 로마 가톨릭 식으로 예배드릴 것을 강요하던 중이었는데 하루는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마틴 루터에게 한 통의 편지가 날아 왔습니다. 그 내용은 네가 믿는 신앙을 포기하지 않으면 너는 죽는다는 메시지입니다.
마틴 루터가 이 편지를 받고는 얼마나 불안하였던지 종교개혁을 포기할까 말까라는 생각으로 흔들렸습니다. 이런 상황속에서 루터가 하나님의 말씀을 펼쳐 들었는데 바로 시편 46편입니다. 그는 이 말씀을 읽고 또 읽으면서 외치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나님, 이 자유의 신앙, 나의 이 신앙만큼은 절대로 포기하거나 세상의 어느 것과도 바꾸지 않겠습니다. 하나님, 나는 오늘 여기에 서 있습니다. 당시 루터가 그렇게 담대히 서 있을 수 있도록 힘을 준 말씀이 오늘 읽은 본문의 말씀입니다.
1. 오늘 말씀의 배경을 보겠습니다. |
왕하 19:14 히스기야가 사자의 손에서 편지를 받아보고 여호와의 성전에 올라가서 히스기야가 그 편지를 여호와 앞에 펴 놓고.
시편 46편이 기록 될 때의 배경을 보면 이스라엘은 우리나라처럼 남북으로 나누어져 있었는데 북쪽은 이스라엘, 남쪽은 유다라고 불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강대국 앗수르가 쳐들어와서 북 왕국 이스라엘이 함락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아니 하나님을 섬기는 민족이 멸망할 수 있습니까?
예, 멸망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성경은, 하나님을 섬기는 민족이 생활 지침인 말씀을 이탈하여 우상의 길, 멸망의 길로 나아갔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8년이 지난 지금 앗수르가 남쪽 유다 왕국까지 쳐들어옴으로 예루살렘이 크게 위기를 당하는 긴박한 상황이 벌어집니다.
지금 유다 왕국의 수도 예루살렘이 함락 직전이니 얼마나 국가적인 위기의 상황입니까? 피를 말리는 상황인데 이때의 일들이 왕하 18장에 자세히 나옵니다.
왕하 18:14 유다의 왕 히스기야가 라기스로 사람을 보내어 앗수르 왕에게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나이다 나를 떠나 돌아가소서 왕이 내게 지우시는 것을 내가 당하리이다 하였더니 앗수르 왕이 곧 은 삼백 달란트와 금 삼십 달란트를 정하여 유다 왕 히스기야에게 내게 한 지라. 15 히스기야가 이에 여호와의 성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은을 다 주었고 16 또 그 때에 유다 왕 히스기야가 여호와의 성전 문의 금과 자기가 모든 기둥에 입힌 금을 벗겨 모두 앗수르 왕에게 주었더라.
앗수르 왕이 요구한 그 막대한 금과 은을 바침으로 국가의 경제가 바닥이 나고 말았는데 그렇다면 이제 국가의 위기가 끝이 난 겁니까? 아닙니다. 은금을 다 받아 챙기고 돌아간 산헤립 왕은 얼마 후 다시(2차) 대군을 이끌고 유다를 침략하여 예루살렘 성을 완전히 포위했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을 조롱하면서 하나님도 별 수 없으니 너희들은 빨리 나와서 항복하라며 큰 소리로 위협을 합니다(왕하 18:28~31). 이어서 앗수르 왕 산헤립은 두 번째 편지를(첫 편지. 왕하 18:19~35) 또 보내어서 이스라엘을 조롱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섬기는 여호와도 다른 신들처럼 내게 패할 것이니 괜히 하나님을 의지하다 손해보지 말고 빨리 항복하라는 지극히 교만한 모습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왕하 19:10 너희는 유다의 왕 히스기야에게 이같이 말하여 이르기를 네가 믿는 네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앗수르 왕의 손에 넘기지 아니하겠다 하는 말에 속지 말라. 11 앗수르의 여러 왕이 여러 나라에 행한 바 진멸한 일을 네가 들었나니 네가 어찌 구원을 얻겠느냐?
상황이 이렇게 심각한 위기로 변하자 히스기야 왕은 앗수르 왕이 보내온 그 편지를 직접 들고 성전에 들어가서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기도의 내용이 왕하 19:14~19절에 나오는데 하나님, 하나님을 훼방하는 앗수르 군대에서 우리를 구원해 주십시오.
그래야만 모든 민족들이 하나님만 홀로 참 신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지 않겠습니까? 하며 기도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히스기야 왕이 이사야 선지자의 지도를 받으면서 비로소 사람의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께 간절히 매어 달리고 있다는 점입니다.
왕하 19:14 히스기야가 사자의 손에서 편지를 받아보고 여호와의 성전에 올라가서 히스기야가 그 편지를 여호와 앞에 펴 놓고.
15 그 앞에서 히스기야가 기도하여 이르되…. 16 여호와여 귀를 기울여 들으소서….
이 시편 46편은 그러니까 한 발 한 발 죄어오는 그 앗수르 군대의 말발굽 소리를 들으면서 고라 자손 중의 한 경건한 사람이 하나님께 상황을 기도한 내용을 책으로 옮겨 놓은 것입니다.
2.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가는 힘이 어디서 나옵니까? |
05 하나님이 그 성 중에 계시매 성이 흔들리지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무엇이 힘이 드는 일입니까? 힘들다는 그것이 너무 풀기 어려운 일입니까? 대단히 심각하다고 느껴집니까? 그러나 그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아니 문제가 아니라고요?
예, 진짜 문제라면 05절 말씀처럼 하나님이 그 성중에 계시매 라고 고백 할 수 없는 그 무딘 심령이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직장에, 나의 사업에, 나의 생업의 터전에, 나의 생활 여건에 거하심을 믿습니다. 라고 고백하지 못하는 그것이 진정한 문제라는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앗수르 왕 산헤립이 침공해 들어온 바로 그 위기의 현장에서 울려 나오는 고요함의 장면을(02,03절) 같이 읽도록 합시다.
02 그러므로 땅이 변하든지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에 빠지든지 03 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흔들릴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02,03절은 시적 표현인데 그러나 말 그대로 청천벽력 같은 사건이 터진 것은 분명하며 지금 이 순간은 누가 뭐래도 절체절명의 긴박한 상황입니다. 계속 앗수르의 군대는 시시각각 옥죄어 오는데도 04절을 보면 조금도 두려워하는 모습은 없이 평안의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이런 자세를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04 한 시내가 있어 나뉘어 흘러 하나님의 성 곧 지존하신 이의 성소를 기쁘게 하도다.
포위된 예루살렘 성안의 표정을 보십시오. 너무나 평화로운 모습이지 않습니까? 02,03절에서 그렇게 세차게 몰아치던 폭풍우의 현장이 있었지만 이제는 고요한 호수와 같이 잔잔한 상황으로 전환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혹 전쟁이 끝나간다는 소식이라도 왔다는 말입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한 시내가 있어 나뉘어 흘러. 라는 표현은 끊임없이 흐르는 물줄기를 말합니다(시 74:15). 그러나 성소가 있는 예루살렘에는 이와 같은 잔잔한 강이 흘러가는 곳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 말은 평화의 도성을 묘사하는 시적 표현입니다. 아니 앗수르의 침략을 받은 예루살렘이라면 현재의 처지가 분명히 풍전등화와 같은 상황인데 어떻게 이런 평화로움으로 표현할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고 하나님의 보호가 있는 곳이라면 아무리 세상의 풍랑이 덮쳐 와도 평화를 깨뜨리지 못하기 때문에 이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따라서 앗수르의 침략으로 인해 위기의 상황을 맞을지라도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뒷받침 되는 한 고요한 물줄기와 같이 위기의 상황을 해결하여 평안함을 누리게 하겠다는 약속입니다.
지금 밖에는 원수들이 포위망을 좁혀오는 심각한 상황임에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겠다는 이 고백 속에 들어 있는 신뢰와 담대함을 보면서 무엇을 느낄 수 있습니까?
바로 하나님이 뒷배경만 되어 주신다면 누구든지 이와 같은 평화를 누릴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오 주 없이 살 수 없네(시온의 찬미 127장).
①내 맘속에 있는 참된 이 평화는 누구도 앗아갈 수 없네. 주는 내 마음에 구주되시었네. 오 주 없이 살 수 없네.
오 주 없이 살 수 없네. 주님이 날 구하시네. 주님 없는 세상 평화 없네. 오 주 없이 살 수 없네.
②평화 없는 세상 고통과 싸움뿐 사람들 모두 두려워 해. 평화의 주님이 다시 올 때까지. 오 주 없이 살 수 없네.
3.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입니다. |
01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 07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는 나올 수 없는 고백입니다. 적군의 함성이 들려오고 펄럭이는 적군의 깃발이 보이는 바로 이 절박한 현실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는 고백이 과연 가능하겠습니까?
46편의 저자 고라의 자손이 우리 보다 담력이 세어서 이런 고백을 하는 겁니까? 아니면 어디서 이런 담대함이 나올 수 있습니까? 하나님을 피난처로 믿는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옛날 이스라엘에서는 예루살렘에 어떤 큰 어려운 일이 생기면 선지자들이나 하나님의 사람들은 자연 동굴이 많이 있는 유대 광야로 피난을 합니다. 거기에 들어가면 안전하고 평안히 지낼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다윗도 사울 왕의 손길을 피해 바로 엔게디 근처의 바위로 된 동굴로 피신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자연 동굴 중에 큰 것은 운동장만한 크기가 되는 것도 있어서 쫒는 사람과 쫒기는 사람이 같이 동굴에 들어가서도 서로 찾을 수 없는 경우도 있습니다.
삼상 24:02 사울이 온 이스라엘에서 택한 사람 삼천 명을 거느리고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찾으러 들염소 바위로 갈새 03 길 가 양의 우리에 이른즉 굴이 있는 지라 사울이 뒤를 보러 들어가니라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그 굴 깊은 곳에 있더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인생살이도 피난처가 필요한 때가 있습니다. 인생의 모든 상황이 항상 형통함만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는 피난 가는 것이 최선의 방법 일 수가 있으며 또 편히 쉼을 받는 바로 그런 쉼의 안식처가 필요한 때도 있습니다.
문제는 피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일 때 과연 우리에게는 피할 곳이 있느냐는 겁니다. 정말 그런 피난처가 있다면 그 사람은 대단히 행복한 인생이라고 말 할 수 있습니다.
내 삶이 벼랑 끝에 몰릴 때, 이제는 더 나아갈 힘도 없는 마지막 코너에 몰릴 때 성도 여러분은 피난처가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까? 위기와 고난을 만나면 토끼는 토끼 굴로 뛰어들고, 사슴은 늪지대의 울창한 보호막으로 달아나고, 두 살짜리 어린아이는 아빠의 바짓가랑이에 매달립니다. 성도 여러분은 위험을 느끼고 피난을 가야만 할 때 어디로 피합니까? 사람은 누구나 안락한 자리에서 살고 싶어하지만 과연 그런 안정된 자리는 정말 가능한 것일까요?
솔직히 세상을 살면서 걱정과 근심 그리고 무거운 짐이 없는 사람이 그 누구이며, 시험도 괴로움도 없는 사람이 그 누구이겠습니까? 그래서 우리에게 피난처는 필요한 겁니다. 삼일 가족 여러분, 우리게는 소망 가득한 위로의 피난처가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혹 슬픔에 잠기어 절망이 오는 것 같습니까? 두렵습니까?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란 안전한 피난처가 있습니다. 위험이 닥치고 시험이 와도 우리를 보호해 주는 피난처로, 인생 살다가 지치고 용기가 없어질 때 혼자 울지만 마시고 영원한 이 피난처로 나아오십시오.
그 분은 01,07,11절 말씀이 소개하는 피난처 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예배를 드리는 분 가운데 나는 지금 너무나 지쳐서 쉼이 필요합니다. 더 이상 갈 데가 없습니다. 라고 말하는 분이 계신다면 반드시 이 음성을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시 18:01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02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
10 이르시기를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 지어다 내가 뭇 나라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내가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리라 하시도다.
오늘 예루살렘 성을 포위한 이 앗수르 군대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왕하 19:35절을 보면 하룻밤 사이에 185,000 명이나 죽임을 당하는 심판을 당하였습니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 지어다. 라는 말씀이 그대로 체험되어졌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예배를 마치고 우리는 또 삶의 현장으로 나아갈 때 이와 같은 믿음의 역사가 성도 여러분의 삶 속에 일어나서 생기 있는 믿음의 용사가 되길 원합니다.
혹 막다른 골목에 처한 그때는 하나님이 역사하실 시간입니다. 온 천하가 무릎 꿇고 경배드리는 그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고 살아갑시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때로는 가불이라는 것을 합니다. 별로 좋은 현상이 아닙니다만 어쩔 수 없어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나 그런 가불 말고 또 다른 가불을 하여야 합니다. 그러면 어떤 가불 말이란 말입니까?
현찰 가불이 아니라 미래를 가불하는 것입니다. 내가 세운 앞날의 꿈들, 그 시간이 10년 혹은 한참 후의 것일지라도 그 이뤄질 것을 미리 내다보면서 기뻐하는 것이 여기에 속한다 할까요? 신령한 미래를 가불하여 미리 기쁨을 소리치고, 감사를 미리 소리치고, 몇 년 후의 목표 달성을 미리 소리친다면 그 비전은 어쩌면 시간이 더 당겨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단 하나, 잃어버려서는 안 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는 그 믿음 안에서 이런 미래의 비전을 내다 보고 즐기며 추진하십시오. 그런 믿음의 비전으로 살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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