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ble/성경역사

.사해 두루마리 사본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11. 2. 6. 2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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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7년부터 1969년까지 약 20여 년 동안 사해 서북부 유대 광야에서 '유대 광야 두루마리' 혹은 사해 두루마리로 불리는 구약 사본들이 발견되었다. 모두 열한 개의 동굴에서 「에스더기」만을 제외한 구약의 모든 옛 사본들이 여러 종류 발견되었다.
거기에서 발견된 여러 종류의 사본들은 주전 2세기로부터 주후 1세기에 속하는 사본들로서 현존하는 히브리어 맛소라 본문보다 천년 이상이나 더 옛 것일 뿐만 아니라 구약 본문이 확정되기 이전의 본문 상태를 반영하는 것이기 때문에 구약 본문사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쿰란 지역에서 발견된 사해 사본을 비롯한 발굴 문헌들 중에 해독되고 공개된 모든 자료를 마이크로휘쉬 자료에 담아 대한성서공회 성서학 문헌정보 자료실에 비치하여 관심을 가진 이들이 볼 수 있도록 하였다.


유대 광야 두루마리의 발견은 20세기에 발견된 다른 어느 고고학적 발견보다도 성서학계에 커다란 흥미와 충격을 준 사건이었다. 1947년 겨울의 그 엄청난 발견은 사실 우연이었다. 사해 서북부 유대 광야는 근 2천여 년 동안 아무도 정착해 본 적이 없는 불모지이다.
다만, 기원전에 한때 엣센파라고 하는 유대교의 한 종파가 이 일대에서 살았을 뿐이고 지금은 아랍 유목민이 계절을 따라 옮겨 다니는 황량한 들판에 불과하다. 아랍 유목민의 한 목동이 잃어버린 양을 찾아 계곡을 훑다가 우연히 한 동굴에서 단지 안에 보관되어 있는 다음과 같은 사본들을 발견하기 시작했고, 그 후 수많은 단편이 이 일대의 동굴에서 발견되었다. 


1947년 봄 한 베드윈(Bedouin) 소년은 잃어버린 염소를 찾아 나섰다가 사해의 서쪽 해안의 절벽 지대의 한 동굴 속의 항아리에 보관되어 있던 양피지에 기록된 구약성서의 두루마리(Scroll) 사본들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때까지 서기 1008년에 기록된 레닌그라드 사본(Leningrad Codex)이 가장 오래된 구약성서의 사본이었는데 이 사해 사본은 그보다 무려 1100여년이나 앞선 서기 전 100년을 전후하여 기록된 것이어서 성서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게 되었다.


1951∼6년에 걸쳐 프랑스의 성서 고고학자 드보(R. De Vaux)는 쿰란 언덕에 위치한 유적지를 발굴하여 이곳이 요세프스를 비롯한 고대의 역사가들이 언급하고 있는 유대교의 한 종파인 엣세네(Essene) 집단의 수도원임을 밝히게 되었다.
수도원은 원래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으며, 이 보다 높은 지점의 계곡에 댐을 건설하여 겨울철의 우기에 흘러내려 오는 빗물이 수로를 따라 수도원의 물 탱크에 자동적으로 저장되었다. 한 주간 중 평일에는 근처의 수많은 동굴 속에서 기거하던 엣세네 수도자들이 안식일에는 이곳으로 내려와 물로 씻는 정결 예식과 성서 연구를 하였고 공동의 식사를 위한 대형 식당과 주방, 성서를 베끼는 필사실 등이 이곳에 갖추어져 있었다.


유대 광야에서 선교하던 세례요한이나, 근처의 요단강에서 그로 부터 세례를 받고 광야에서 40일간 금식기도 했던 예수도 이 공동체로부터 깊은 영향을 받았으리라 추정하고 있다.
쿰란 주변 11개의 동굴에서 발견된 사해 사본들 가운데 두루마리(scroll) 형태로 잘 보존되어 있는 것은 불과 10개 뿐이다.
나머지는 수천 개의 조각들로 발굴되었다. 이들 중 약 1/4은 구약 사본이며 나머지는 구약 주석, 신학서, 쿰란 공동체의 규율집 등으로써, 대부분 양피 가죽이나 파피루스 위에 고대 히브리어로 적어 놓은 것들이다.



1.<사해사본>이란 무엇인가
?

금세기 중엽에 그노시스 세계, 헤브라이즘 세계 및 헬레니즘 세계에 있어서 각각 극히 중요한 대 발견이 있었다. 그것은 즉, 첫째 1946년(1945년이라고도 한다)에 나일강변의 한 촌락 나그.하마디(카이로의 남쪽 약 570킬로,옛 케노보스키온)에서 그노시스파의 서고를 발견했고, 둘째로 뒤에 말할 1947년의 사해 사본의 발견이며,셋째로, 크레테섬 크노소스 및 그리스 본토에서 출토된 선문자 B가 1952년에 영국 건축가 마이켈,벤트리스(1922-1956)에 의하여 해독되고, 이것이 기원전 1400년대의 가장 오래된 그리스어라는 것이 판명된 일이다.


사해 사본이 발견된 경위는 이렇다. 1947년 봄(1945년 이었다고 한다) 사해의 북서부 사막의 구릉지대 쿰란에서 베두인(아랍계 유목민)이 양과 염소를 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무리에서 이탈한 한 마리의 염소를 찾기 위하여 한 양치기 청년이 반 쯤 허물어진 벼랑의 동굴에 돌을 던졌더니 무엇인가가 깨어지는 소리가 났다.
이튿날 그 청년은 사촌 형제와 함께 그 동굴로 기어 올라가 보니 좁은 동굴 속에는 항아리의 파편이 흩어져 있으며 안쪽에는 뚜껑이 덮인 항아리 여덟개가 있었다. 그러나 그 중 일곱 개는 빈것이었고 나머지 한 개의 항아리 속에는 큰 두루마리 한 권과 작은 두루마리 두 권이 들어 있었다.

이 두루마리는 결국 베들레헴의 고물상에게 넘어가고, 그 해 12월에 예루살렘의 헤브라이 대학이 이 세 두루마리를 사들이게 되었다. 그후 사해의 서북 연안의 동굴은 베두인들이나 고고학자들에 의하여 답사되고 매년 계속해서 발견이 있었다.

와디,쿰란 지역의 동굴 발견은 1956년 봄까지 11개 곳(1956년에 발견)이었으며, 발견의 순서에 따라서 1(1Q,Qumran Cave1)에서 11까지 번호가 매겨졌다. 그 밖에 와디,므라바트 지역의 동굴, 킬베트.밀드 지역에서 발견된 사본들,그리고 킬베드,쿰란과 아인.페스카 폐허에서 발견된 사본들은 모두 대단한 가치가 있는 것들이었다.

일반적으로 사해 사본 또는 사해 문서라고 부르는 것은,1947년에서 수년 간에 걸쳐서 사해의 서북 연안과 서안에 펼쳐져 있는 <유다의 황야>의 동굴이나 폐허에서 발견된 고사본들을 말한다. 발견한 장소나 사본의 내용과 성격 등은 여러가지이며, 그 정리와 분류는 끝나지 않았다. 현재까지 간행된 사본과 단편들을 대별하면 다음과 같다.

(1) 와디.쿰란 지역의 11개 동굴에서 발견된 사본들

(2) 와디.므라바아트(쿰란의 남쪽 약 16킬로미터,예루살렘의 동남남 약 24킬로미터)지역의 동굴들에서 발견된 사본 단편들(대부분은 2세기 전반, 특히 유대인의 대로마 제 2차 반란(AD 132-135년)시대에 속하는 것이며, 이 반란의 지도자 발,코호바에 관한 사료도 포함되어 있다.
(3) 킬베트.엘밀드(예루살렘의 동남쪽 약 14킬로미터)지역의 유적(비잔틴 시대의 수도원 자리)에서 발견된 신약성서의 사본 단편들(AD 5-8세기에 속하며, 쿰란 사본들과는 직접 관계가 없다.)
(4) 아랍인 베두인들이 가지고 온 출처 불명의 사본 단편들.

이것들 중에서 사해 사본이 중심이 되는 것은 (1)의 쿰란 사본들이다. 사본의 종류는 600종이나 된다고 하며, 두루마리의 형태를 갖추고 있는 것도 10권 이상이 되며, 특히 동굴 1에서 발견된 이사야서 전권(54난의 양피지로 돼있으며,전장 7.34미터,폭 평균 26센티미 터,각 난은 평균 30행.이사야 66장이 전부 들어있다)과 동굴 4에서 발견된 키므엘기는 귀중한 것이다.
사본들의 연대는 대개 기원전 3세기 중엽에서 쿰란 종단의 본거지가 로마군에게 점령된 기원 67년에 걸쳐있다.
기원전 3세기에서 기원전 2세기 초에 기록된 사본은 대부분이 구약성서의 사본이다. 대부분의 두루마리 연대는 성서의 사본도 쿰란 종단 문서도 기원전 2세기말 이후, 특히 기원 전후의 그 시기에 속한다 <사해사본>중에서 오래된 것은 와디.므라바아트에서 발견된 파피루스 단편들이며 기원전 8세기의 것이라고 한다.
발견된 많은 사본이나 파편을 양피지, 파피루스 ,동판,오스트라카등에 기록되어 있다.



2.<쿰란 사본들>은 무엇을 말하는가?

쿰란 사본들은 구약성서 정전.외경,주해서 및 쿰란 종단이라고 하는 유대교의 한 종파의 종교 문서로 나뉘고,이것을 다시 분류하면 다음 네가지 문서로 대별된다.

(1) 구약성서 정전의 사본들(단편을 포함)
전체의 약 4분의 1이 되고 에스델기를 제외한 구약 각서가 있다. 신명기 이사야서,소예언서,시편등의 사본은 10종 이상이 된다. 주요한 것은 성마르크 수도원 소유의 <이사야서>의 두루마리(완본)와 헤브라이 대학 소유의 <이사야서> 단편, <시편> 단편 등이다.
(2) 구약성서의 외경(또는 위경)
여러가지 단편이 출토되고 있으나 가장 많은 것이 요엘서, 에녹서 등이다.
(3) 구약성서의 주해서
창세기,시편,이사야서,호세아서,미가서, 나훔서,스바니야서,하박국서 등의 주해서의 단편들이 출토되고 있다. 가장 완전한 형태로 출토된 하박국서 주해서는 가장 흥미 깊고 중요한 것이다.
(4) 쿰란 종단의 종교 문서

사해 사본을 남긴 사람들의 종교 집단의 조직, 목적 계율, 의식 등을 기록한 <종규 요람><종단 계율제요>라고도 한다. <회중규정>, <축복기도문>, <감사의 시편>등의 예배식문에 속하는 문서, 그 밖에 <빛의 아들들의 싸움의 규칙>, 아람어로 된 <외경 창세기>등이 있다.
그리고 1952년 3월에 발견된 동굴 3 속에서는 성전의 보물표와 그 숨긴 장소등을 기록한 이른바 <동의 두루마리>가 발견되었으나 이 리스트가 성전의 보물이었는지,또는 쿰란 종단의 재산이었는지,아니면 허구적인 것이었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동굴 1에서 남쪽으로 약 1500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폐허는 오늘날 킬베트,쿰란<쿰란의 폐허>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 지역은 이미 1851년에 F.두.서씨에 의하여 답사되었고 <사해사본>의 발견과 함께 이 폐허는 다시 주목을 받게 되었다.

1951년에서 56년까지에 6회에 걸쳐서 예루살렘의 도미니코파 성서학원 원장 롤런,두.워 신부와 요르단 왕국의 고적 보존국장 G.L.하딩의 지도 아래 킬베트.쿰란의 발굴 조사가 실시되고 그 전모가 밝혀졌다.


3.<쿰란의 폐허>는 어떻게 발굴되었는가?

두.워 원장이 얻은 결론에 의하면 ,킬베트,쿰란의 역사는 다음에 네 시기로 나누어진다.

(1) BC 8-7세기(철기시대 제II기)
(2) BC 2세기말-AD 68년까지
(3) AD 68-90년경 (로마군의 점령)
(4) AD 132-135년(유대인의 대로마 제2차 반란시에 유대인 저항군이 점거)


(1)의 시기에 속하는 것으로는 벽의 일부와 토기,오스트라카(ostraca)의 단편이 출토되고 있을 뿐이다.

(2)의 시기에 속하는 유적은 쿰란 종단의 본거지로서 공동 목적을 위해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주요 건물은 북서쪽 구석에 견고한 성루가 있는 30미터 * 37미터의 장방형 건물이며, 안뜰을 둘러싸고 동서남북으로 작은 방이있고, 집회실, 사경실,식당,부엌 등이 있다.
그리고 부근의 와디.쿰란에서 물을 끌어오기 위한 수로,7개의 저수조, 6개의 욕실 등이 있고, 이것들은 쿰란의 종단의 교리나 생활을 아는데 중요한 단서가 된다. 여기에 쿰란 종단이 형성된 것은 요하네.하르카누스(BC 135-104)시대였던 것 같다. 그후 기원전 31년에 이 근처 일대는 대지진을 만나 포기되었다. 이것은 건물의 균열로 알 수 있으며, 프라비우스.오세퍼스도 이 사실을 전하고 있다. 쿰란 사본들을 만들어 낸 쿰란 종단은 그후 재건된 것 같다.
곳은 기원전 4년의 헤로데 대왕의 죽음에서 기원 7년경까지 사이에 재건되고 건물의 개축이 있었다.
(3) 의 시기는 유대 반란 제 3년에 시작된다. 출토품 중에는 반란 제2년과 제 3년의 날짜가 새겨져 있는 화폐 70여매와 로마군의 화살촉 등이 들어있다. 로마군은 1세기 말까지 주둔하고 있었던 것 같다.
(4) 의 시기에 속하는 층에서 출토된 로마의 화폐에 의하면 로마 점령군이 약 10년간 이곳에 주둔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후 단기간이기는 하지만 이 유대인의 제2차 대로마 반란(AD 132-135)때에 발.코호바를 수령으로 하는 저항군이 일시 이곳에 진를 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두.워는 건물의 동쪽에 있는 묘지들을 시굴했다. 또 제분소,빵 굽는 곳, 도기 공장 등의 작업장도 발견했다. 이상의 모든 점으로 봐서, 이 폐허는 유대교의 어느 종교 집단의 본거지이며, 종단의 구성원은 부근 동굴이나 천막에 있는 일시적인 건물에 살면서 이곳을 도장으로 삼고 있었던 것 같다.


4.<사해사본>의 발견은 무엇을 가져다 주었는가?

<종규 요람> 에 의하면,쿰란 종단의 단원은 자원해서 인적이 떨어진 이 유대 황야에 모여서 임박한 종말을 바라보며 메시야의 내림을 기다리는 종단의 엄격한 계율에 따라 생활하고 있던 사람들이다.
사경은 그들의 중요한 임무의 하나였기 때문에 그들에 의하여 구약성서 각서 및 구약성 외경의 대부분이 양피지, 파피루스,동판 등에 필사되어 남겨졌다.
<사해사본>의 발견은 좁은 의미의 성서학이나 성서 고고학 분야뿐아니라, 특히 유대교의 공인된 교정본으로 정착되기 이전의 구약성서의 본문 비판학은 물론, 기원전후의 유대교 역사나 유대교와 헬레니즘의 교섭, 원시 그리스도교단과 유대교와의 관계 등의 제 분야에 새로운 빛을 던져주고 있다. <사해사본>의 연구는 전문가들의 국제적인 협력체제 아래 계속되고 있다.
쿰란 종단의 단원들에 의하여 필사된 구약성서의 사본들은 세계 최고의 것으로 높은 학문적 가치를 가지고 있으며 현재 예루살렘의 이스라엘 박물관(국립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스라엘 박물관은 예루살렘의 중심부에서 멀지 않은 나베.샤난<고요한 집>이라는 이라고 하는 언덕 위에 있으며 22에이커의 부지에 60년의 역사를 가진 옛 베자렐 미술관 (주로 유대인의 민속 자료,슈나고게의 비품등의 종교 사료,16-20세기의 근대 서구 미술작품)과 성서,고고학 박물관(주로 시리아,팔레스타인을 중심으로 한 오리엔트 고고 출토품)을 포함한 본관과 사해 문서들을 소장한 고문서관이 있으며, 그 중간에 현대 조각을 배치한 조각 정원으로 돼있다.

그 밖에 창고, 연구실, 수복용 시설 등이 있다. 이 조각 정원의 설계가 그 규모면에서 전후 최대인이 이스라엘 박물관은 1964년에 창립되고 이듬해 1965년에 개관했다. 그 내용은 광범위해서 고고학적, 미술학적, 민속학적 제 요소와 근대 미술관적 제 요소를 겸비하여 인류 문화유산을 통해서 미래의 전망을 하게 하는 총합적인 민족의 미술관이다.
박물관 안에서 중요한 위치에 있는<고문서관>에는 사해 문서 및 기원 2세기의 발.코호바의 반로마 봉기 관계의 고문서들이 소장되어 있다.
이 고문서관은 지상으로는 흰 돔과 장방형의 검은 외벽을 보일 뿐이고 중요한 부분은 지하로 들어가 있다. 그 내부는 이중의 포물선 돔으로 돼있으며, 그것은 굴곡이 있는 거대한 항아리 같이 생겼다. 소용돌이 치는 굴곡은 천장 꼭대기에 있는 약 1.8미터의 구멍까지 위로 뻗혀 있으며, 그 구멍에서 하늘 빛이 실내로 비쳐 들어온다. 고문서의 역사의 중요성을 재현해 주는 것 같은 설계와 구조의 건물이다.
 


사해(死海)두루마리의 개념과 역사적 배경.

사해두루마리란?
사해 근방의 동굴에서 발견된 두루마리로 된 성경과 기타 종교적 문헌을 말한다.
  

사해두루마리의 발견된 경위와 발견된 내용물. 
1947년에서 1956년 사이 예루살렘에서는 동쪽, 여리고에서는 남쪽에 있는 사해 근방 와디쿰란(the wadi Qumran) 그리고 키르벳 쿰란(khirbet Qumran)과 와디 무라바이트(wadi Murabb'at) 등에서 구약의 사본을 비릇하여 여러 가지 하나님을 경배하는 외경들, 그리고 Qumran 지역에 살았던 사람들(엣세네인으로 추정)의 기록과 그 사회의 규범 등의 문헌이 발견되었다.

(1) 첫 번째 발견 경위.
(a) 1947년 봄에 아랍 사막의 유목민인 '타아미레 베두인지파(Ta'amir도 bedouin tribe)'에 속한 '무하마드 아드딥(Mohammed Edh-Dhib)이란 사람이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던 중에 사해의 서북쪽 2km 지점 황무지인 유대광야의 '와디 쿰란' 지역의 가파른 암벽에서 동굴을 하나 발견했다.
그는 잃어버린 양이 그 동굴에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그 안에 돌을 던졌을 때 그는 무엇인가가 깨지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그는 무서워서 그날 하산했다가 다음날 친구와 함께 용기를 갖고 동굴까지 올라왔다. 그 동굴에 들어갔을 때 몇 개의 항아리 안에서 양피지(양가죽), 그리고 파피러스(papyrus: 종이 대신 사용했던 갈대로 만든 것) 두루마리들이 기름칠한 헝겁으로 쌓여진 채 들어 있었다. 그들은 이것들이 골동품으로 가치가 있을 것이라 생각해서 그 두루마리를 갖고 하산하였다.

(b) 그들은 이곳에서 
(1) 구약성서 이사야서의 전부[(1QISa) 이사야서의 전부 길이가 23피트, 히브리어],
(2) 하박국의 주석[(1QpHab) 길이가 5피트, 넓이 5인치],
(3) 빛의 아들들과 어둠의 아들들의 전쟁[과거, 현재의 전쟁과 미래의 예상전쟁(IQM)], 
(4) 쿰란 사회의 훈련고본(1QS), 
(5) 외경 창세기 [타멕서러고도 함, 아람어(1QC)], 
(6) 감사찬송[감사를 표시하는 시편(1QH)],
(7) 이사야서의 단편(IQI뉴), 즉 7개의 두루마리를 첫 번째 동굴(CaveⅠ)에서 발견했다. 이것을 학술용어로 (Q1)이라 한다.

(c) 1947년 이른 여름 수리아의 정통 교회 대 주교인 마르 아라나시우스 예수에 사무엘(Nar Athanaasius Yeshue Samuel)은 그 두 소년으로부터 7개 중 4개의 두루마리를 샀다. [상기 (b)의 (1)(2)(3)(4)]

(d) 남은 3개의 외경 창세게, 감사찬송, 이사야서 단편 1개를 히브리 대학교 팔레스틴 고고학 전문가의 슈케닉(Eleazer L. Sukenik) 교수가 베들레힘의 중간 상인으로부터 매입 했다. 

(e) Samuel 주교는 1048년 2월 18일 수요일 예루살렘에 있는 동안 연구소 미국학교(American school of Oriental Reseearch)에 4개의 두루마리를 보내서 연구소장 서리 John C. Trever(존 시트레버)와 Willim Brown Lee(윌리마 브라운 리) 박사가 연구해 본 결과 고고학적 가치가 있음을 알았다. 그들은 당대 유명한 히브리 고고학자이며 고대 셈어(semitic)의 최고 권위자인 John Hapkins(존 합킨스)대학교의 윌리암 에프 알브 라이트(Willim F. Albright) 박사에게 이사야서 두루마리 일부분을 35mm필름에 복사하여 보냈다. 아르라이트 박사는 조사 결과 BC150년 경으로 추산했다. 

(f) 그 후 탄소 14측정법 [c 14- 카본 테스트 14(Carbon-14 test)라고도 함=방사능 방출 정도에 따라 연대를 알 수 있는 방법)으로 사해 두루마리는 BC 200년 -AD100년 사이의 고문서로 판명되었다. 

(2) 2번째와 3번째 발견.
첫 번째 발견된 두루마리들이 탄소 14측정법[Carbon-14 testing]으로 고고학적 자료로서 가치가 있다는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자 예루살렘 고고학자들은 발굴대를 조직하여 유다의 광야의 동굴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이 답사들은 이스라엘과 아랍의 치열한 전쟁을 지연 되기도 했으나 고고학자들의 집념과 노력으로 본격적인 탐사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상상할 수 없는 성서적 문헌이 발견되었다. 

(a) 1949년 불란서의 뻬르 드 보씨(Fere Roland de vaux)와 팔레스틴 고고학 박물관 지배인 랑게스터 하딩(Gerold Lanster Harding)그리고 도미니카의 성서 학교 회원들은 1947년 아랍의 목자 무하마드 아드딥에 의해서 발견된 Cave-Ⅰ을 다시 확인했다. 그 동굴은 길이가 26피트, 넓이가 6피트 였으며 그곳에서 파피러스와 양피지의 두루마리 부스러기 600여개와 깨어진 도기, 아마포 조각등을 발견했다. 
팔레스틴의 습한 기후는 이와 같은 사본을 보존하는 데 적절하지 못한 지역이나 이 사본들이 나온 동굴은 비가 거의 안오는 유대 광야에 위치하고 있어서 참으로 건조한 지역이었다. 그러므로 다행히 발견된 두루마리들은 보존상태가 퍽 양호했던 것이다. 뻬르 드 보 교수는 발견된 40개의 큰 항아리 중에서 많은 것을 원상대로 회복시키는 데 성공했다. 전혀 손상이 없었던 AD68년 경의 원상의 2개 항아리는 현재 히브리 대학에 소장하고 있다. 

(b) 그 후 많은 성서 고고학자에게 자극이 되어 1952년부터 본격적인 탐사가 시작되어 11개의 동굴에서 각 자료들이 나왔다. 그 중에서도 4번째 (4Q)에서 382개의 사본 단편이 발견되었는 데 그 중 약 100개의 단편은 구약 성서의 사본이었다. 이 단편에는 구약성서 에스더서를 제외한 모든 히브리 성서의 사본이 있었다. 특히 이사야서는 12개, 시편은 10개, 신명기는 14개의 복사판이 있었다. 또한 11번째 동굴(11Q)에서는 시편과 레위기의 거의 완전한 두루마기가 발견되었다. 
Khirbet Qumran(킬벧쿰란)지역에 사해시[(死海市) the city of Salt Sea]를 발견하고 중요한 건물터, 유물들을 많이 발견했다. 거대한 회의장, 수 백 개의 그릇, 대장간, 의자, 책상, 잉크병, 보석, 유골, 여자용 귀고리, 동전 750개(BC 135~AD 68) 등이다.

(c) 2차와 3차 발굴에서 중요한 종교적 단편 문헌은 다음과 같다.
1) 구약 성서 중 에스더서를 제외한 모든 구약 성서의 단편
2) The Book of Enoch (에녹서)
3) The Book of Noah (노아서)
4) The Testament of Levi (레위의 복음)
5) The Testament of Naphtali (납달리의 복음)
6) The Sayings of Moses (모세의 노래(작은 신명기)
7) The Scroll of the Patriarchs (축복사의 두루마리)
8) The Temple Scroll (신전 두루마리)
9) The Psalms of Joshua (여호와의 시편)
10) A Vision of Amram (아므람의 시현)
11) The Prayer of Nabonidus (나보나이더스 기도)
12) The Book of Mysteries (신비의 책)
13) The assumption of Moses (모세의 승천기)
14) David's Poem (다윗의 시편)
15) Jubilees (작은 창세기)
16) Tobit ( 토비트; 천주교 제2 정경)
17) Ecciesiasticus (집회서; 천주교 제2 정경)
18) Epistle of Jeremy (이레미아서; 천주교 제 2정경)
19) Micah Commentary (미가서 주해서)
20) Psalms Commentary (시편 주해서)
21) Isaiah Commentary (이사야서 주해서)
22) Genesis Commentary (창세기 주해서)
23) Hosea Commentary (호세아서 주해서)
24) Nahum Commentary (나훔 주해서)

(d) 특히 유물 중에서 1952년 봄 동굴 3(Q3)에서 산화된 길이 32인치의 동판(The Copper Scrolls)을 3개 발견했다. 이 동판은 화확적 처리되어 원문을 회복되었고 다음과 같은 놀랄만한 사실이 발견되었다. 이것은 Hebron(헤브론)과 Nablus(나블러스) 사이에 200톤 정도의 금과 은으로 된 보물이 거의 60여 곳에 땅속 16피트에서 -18피트 깊이에 묻혀 있다 한다. 이곳에 묻힌 금과 은으로 된 보물이 대부분 신전에서 사용되는 도구이다. 아직 탐색대들이 이 보물을 찾지 못했으나 앞으로 계속 조사해볼 가치는 크다. 중요한 기록을 동판에 기록하고 유사 시에 비밀이 땅속에 묻어 비밀리에 보존시킨 것은 기록을 중요시 여기는 하나님의 택한 백성의 성역의 하나이다.

(e) 발견된 동전의 종류와 그 연대

Description of Coins Number.
Antiochus Ⅶ, 136, 130, 129 ................... 3
John Hyrcanus, 135-104,....................... 14
Alexander Jarnaeus, 103-76 B.C................ 38
Hasmoneans, uncertain......................... 15
Antigonus (Nattathias), 40-37 B.C.............  2
Herod the Great, 37-4 B.C...................... 1
Tyre, 29 B.C................................... 1
Herod Archelaus, 4 B.C - A.D. 6 ............... 6
Procurators under Augustus..................... 3
Procurators under Tiberius..................... 7
Agrippa Ⅰ, A.D. 37-44........................ 23
Procurators under Claudius..................... 5
Procurators under Nero........................ 15
First Revolt, Year 2, A.D. 67-68...............11
Caesarea under Nero, A.D. 67-68................ 8
Dora under Nero, A.D. 67-68.................... 1
Dora, same type, date missing.................  1
Vespasian, A.D. 70............................  1
Ashkalon, A.D. 72-76..........................  1
Same type, date effaced, surcharged "X"........ 1
Judaea capta under Titus, after A.D. 79........ 3
Agrippa Ⅱ, about A.D. 86...................... 1
Second Revolt, A.D. 132-135................... 13
Byzantine (two coins on the surface)..........  3
Arab (one coin on the surface)................. 2


사해 두루마리를 그들은 어떻게 보존했으며 현재 발견된 사해 두루마리를 이스라엘 정부는 어떻게 보존하고 있는가?


(1) 쿰란 사회에 살았던 사람들은 자기들의 조상에 관한 기록과 자기들의 중요한 생활 기록을 열심히 적는 습관을 갖고 있었으며 그것에 대한 훈련이 잘 되어 있었다. 그들은 양피지, 파피러스에 기록하여 에집트 장례 의식 때 쓰는 방부제와 비슷한 방부제를 발라서 후손을 위해 잘 보존시켰다. 특히 그 기록들을 방부제를 칠한 헝겊으로 잘 싸서 항아리에 집어 넣어 보존키도 했다. 또한 가장 중요한 기록은 놋쇠판에 기록하여 유고시에는 땅속에 묻어 보존시켰다. 양피지나 파피러스에는 특수한 검정색 잉크나 붉은색 잉크로 기록했고 놋쇠판은 손을 직접 팠다.

(2) 오늘날 발견된 사해 두루마리 및 쿰란 유적에서 발견된 유물 중 일부는 미국,  영국, 프랑스 등지에 있지만 대부분이 이스라엘 정부에서 소유하고 있다. 특히  이스라엘의 국회의사장 왼쪽에 사해유물 박물관을 지었다. 그 건물 모양은 쿰란 동굴에서 발견된 항아리처럼 만들어서 사해 유물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 박물관의 내부는 특수한 실린더 장치가 되어 있어 전쟁, 화재, 천재지변 시에는 모든 중요한 유물들이 자동적으로 지하에 들어가 보존되게 되어있다.


사해 두루마리들이 현대 성경에 미친 영향.


우리의 구약성서가 하나님 말씀임을 증거.

사해 두루마리 발견으로 오늘날 우리의 구약성서는 대체로 잘 번역되고 잘 기록 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완전한 것이 아니다. 더 연구하여 원문 회복에 노력해야 하면 필요한 수정을 가해야 한다. 사해 두루마리를 통해 구약성서 중 에스더서를 제외하고 신명기, 시편, 이사야서 등을 중심으로 대부분이 발견되었다. 
우리가 지금까지 현대 성경을 만드는 데 근본적 자료로 사용해 온 맛소라사본(Masoretic text)이나 칠십인역 사본(Septuagint), 벌케이트(Vulgate)사본과 이번에 발견된 사해 두루마리와 비교해 볼 때 서로 다른 부분이 많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원문을 회복하고 필요한 수정을 가해야 하며 완전한 변역에 노력해야 한다. 특히 구약성서의 마지막인 말라기서는 BC400전의 기록이다. 예수님이 오실 때까지 하나님의 말씀은 약 400년 동안 없었다. 그러나 사해 두루마리를 통해서 그 공백을 상당히 메꿀 수 있다. 오늘날 많은 신학자들은 요한계시록 22장 18절-19절의 구절을 잘못 이해하고 현대 우리 성경에서 일획일점도 빼지고 말고 더하지도 말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요한이 받은 계시 중에서 빼지도 말고 더하지도 말라는 말이지 성서의 전 부분의 말은 아니다. 즉 고대 원문과 상이한 부분으로 수정이 필요한 부분이 있을 시는 가감한 수정을 가해야 한다. 그리고 필요한 경전을 받아 드리는 열린 마음의 문이 필요하다.


외경에도 하나님의 참된 말씀이 많다.

(1) 많은 오늘날 기독교 성서학자들은 정경[正經: Canon, 현재 우리가 갖고 있는 구약 39권과 신약 27권] 그것만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정경이냐 외경이냐를 결정하는 것은 인간이다. 인간의 결정은 유한하며 절대적인 진리가 아니다. 
가령 신앙에 큰 도움을 주는 책일지라도 다른 외경이나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되는 경전을 읽는 것을 금하게 하고 탐독하는 자를 이단시 취급한다. 그러나 사실상 외경[外經: Apocrypha]에도 정경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이 많으니 성신의 도움으로 분별력 있기 읽어 신앙에 큰 발전을 갖는 것은 현명한 일이다. 외경 중 많은 부분이 정경을 해석하고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사해 두루마리에서 발견된 많은 외경은 오늘날 신학 해석에 큰 발전과 전환기를 부여해 주고 있다. 특히 오늘날 창세기를 읽을 때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많고 생략 된 부분이 많이 있는 데 여기서 발견된 외경 창세기는 큰 도움을 주고 있다. 또한 시편도 우리가 갖고 있는 성경에는 150편이 있으나 사해 두루마리에서는 무려 4,050편이나 된다. 

여기에 참으로 진귀한 하나님의 무궁한 섭리를 발견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예언자들을 통해서 그의 비밀을 말해주고 있으며 인간의 힘으로 하나님의 입을 막을 수 없다. 인간이 갖고 있는 편견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이 아 니라고 규정한다면 그것은 큰 잘못이다. 외경을 연구해 보려고 하지도 않으면서 신학자들은 자기 나름대로 성경을 해석하고 있다. 이것은 참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성경에 일획 일점도 더하지 말라고 강조하면서 편견과 아집으로 구구한 자기 이론과 학설로 성경을 해석하여 수만 권의 주석서를 읽히게 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위한 신앙인가 자기 명성을 높이기 위한 방법인지 알 수 없다. 이러기보다는 근거 있는 예언자의 기록인 참된 외경을 분별력 있게 읽고 연구하여 정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받아야 하며 진리를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2) 사해 두루마리 발견으로 하나님 말씀은 요한이 요한복음 21장 25절과 같이 "예수께서 하신일을 낱낱이 기록한다면 이 세상이라도 그 기록된 책들을 다 두기에 부족하리라고 생각한다."는 말을 실감케 한다. 
하나님 말씀이 얼마나 이 세상에 있는 가 우리는 알 수 있다. 가령 신약성서에 예수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실 때 택한 12제자의 기록 중 마태, 요한, 베드로, 야고보의 기록이 있다. 그러나 그 밖의 제자들이 기록이 신약성서 27권 중에 포함되지 않았으니 나머지 제자들의 기록들은 없다고 보장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정경의 규정은 인간이 했기 때문에 외경 중에 하나님의 말씀은 무한히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에녹서는 욥기 다음에 있었으나 구약성서를 정경과 외경으로 구분할 때에 에녹서가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는 이유로 에녹서를 정경에 삽입하지 않았다는 신학적 이론은 사해두루마리 발견으로 더욱 확고히 되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간의 지혜로 구분할 필요가 있을 수 있지만 외경을 무시하거나 경시하는 태도는 무한한 하나님의 말씀을 공부하는데 한계점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물론 외경 중에는 신빙성이 없는 책도 있다. 그러나 성신의 도움으로 분별력 있게 읽을 때 큰 유익을 얻을 수 있다.

(3) 신약성서의 형성과정을 살펴봄으로써 더욱 잘 이해될 수 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신약성서 27권이 정경으로 인정된 과정은 다음과 같다.
로마의 콘스탄틴(Constantine) 대제가 왕위에 올라 A.D. 313년 종교 자유의 칙령을 선포하고 A.D. 325년 기독교를 중심된 종교로 삼고 원로원의 반대와 귀족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의회를 비잔틴(Byzantium)으로 옮겨 여기를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 즉 새 로마(new Rome)라고 부르고 새 기독교 제국의 수도로 정했다.
콘스탄틴 대제가 즉위하자 즉시 명령한 것이 각 곳에 흩어진 그리스도의 가르침 즉, 마태복은, 야고보서, 배드로후서, 요한계시록, 여러 사도들의 편지 등을 모아서 한권의 책으로 만드는 일이다. 콘스탄틴 대제는 그 당시 가이사랴의 감독이며 교회 역사가인 유세비우스 (Eusebius AD 264-340)를 수석 종교 고문으로 택하여 흩어진 성경을 한권으로 집권하는 일을 다음과 같이 명했다.
"나는 그대에게 성문서 50권을 복사하도록 명령한다. 그 준비와 사용은 교회 교육에 가장 필요하도록 하며, 준비된 양피지에 휴대할 수 있는 형식으로, 기술 좋은 복사기들이 일기기 쉽게 기록하기를 바란다. (중간 생략). 그대는 그것을 운반하기 위하여 마차 두 대를 사용할 수 잇고 그 사본은 잘 되었을 때 나의 검열을 쉽게 받을 수 있다. 이 일을 그대가 감리하는 교회의 집사에게 위임해도 좋다. 그가 여기에 도착하면 후한 대접을 해주겠다. 하나임의 가호가 사랑하는 그대에게 있기를 바란다."

유세비우스는 흩어진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쓴 편지나 복음서를 수집하는 일을 위해 갖은 역경과 어려움을 갖게 되었다. 그 당시 기차와 비행기나 라디오도 없었다. 인쇄술도 알려져 있지 않아 손으로 쓴 파피루스(Papyrus) 사본을 수집하는 일이었으므로 잘 보관된 사본을 찾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결국 사도들이나 제자들이 쓴 원본은 한권도 찾을 수 없었고 원본을 손으로 베껴쓴 사본을 수집했다. 유세비우스는 널리 조사하여 어떤 책이 교회에서 일반적으로 인정되고 있는지 알아냈다.

1) 보편적으로 인정된 책: 27권 중, 2)를 제외한 것.
2) 논쟁을 일으킨 책: 야고보서, 베드로후서, 유다서, 요한 2,3서
3) 논쟁이 많은 책: 27권 중  삽입시키지 않음. 그 책의 수는 수십권이다. 결국 1)과 2)를 합한 27권을 정경(Canon)으로 택하여 양피지(羊皮紙)에 가록하여 50권을 만들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갖고 있는 신약 27권이다. 이 책은 그 후 칼타교회(AD 397년)에서 27권을 정식으로 공인하여 세계 교회가 통일하여 사용케 되었다.
결국 성서는 정경을 어떻게 규정하느냐에 정경과 외경으로 구분되는 것이다.  말일성도 예수 그리스도교회에서는 몰몬경, 교리와 성약, 값진 진주를 정경으로 규정하고 성경과 전혀 반대됨이 없이 상호 보충적, 그리고 체계적이고 정통성 있는 신학적 이론을 확립시키고 있다.
또한 천주교회에서는 토비트, 유딧, 에스델, 지혜서, 집회서, 바룩, 다니엘, 마케베오상, 마케베오하를 정경으로 삼고 있다. 신앙인으로 더 높은 차원에서 마음의 문을 열고 폭 넓게 지혜와 하나님의 오묘한 진리를 탐구하려는 열망을 갖을 필요가 있다.

    출처 : 스타우로스 원어 성경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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