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리 그레이엄(Billy Graham 1918.11.7.) 목사가 학생 시절 자유주의 성향의 문서를 읽고 거기에서 성경을 비판하는 소리를 듣고 신앙이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도무지 성경을 가지고는 설교를 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고민하던 어느 날 밤 성경을 들고 시카고에 있는 휘튼 대학교 숲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여러 가지 학문을 접하다 보니 저의 마음에 성경에 대하여 의심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설교를 할 의욕을 잃어버리기 시작했고 마음에 의심이 가득 찼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이때 하나님께서 자기를 향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고 회고하였습니다.
말씀을 신뢰하라. 말씀을 사실 그대로 선포하라. 그가 조용히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이런 결단을 하였습니다. 인간이 알면 얼마나 알 수가 있겠는가? 하나님의 진리보다 내 생각이 더 클 수가 있다는 말인가?
그러면 오히려 내가 성경을 해부하려는 것이 아닌가? 아니다. 내가 성경의 거룩한 말씀 때문에 내 생각과 내 모든 논리를 심사받아야 하겠구나.
이런 결단을 하고 나서 기도하기를 하나님, 저는 이제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읽는 그대로 선포하겠습니다. 라고 하였다고 합니다.
이때부터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유명한 설교 스타일이 생겨났습니다. 그것은 성경은 말하기를,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라고 합니다.
김해삼일교회 가족 여러분, 오늘 살펴보는 예수님의 제자 빌립도 많은 생각을 하고 확인하고 계산까지 하는 대단히 신중한 사람입니다.
그러면서도 진리를 배우는 데 있어서 주님께서 말씀하시면 일단 거기에서 내 생각을 접고 그대로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입니다(요 14:08~10).
성도 여러분, 빌리 그레이엄 목사처럼, 빌립처럼 하나님의 말씀 앞에 내 생각을 접고 그저 순종하면서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말씀 제목을 「신중하고 결단력 있는 빌립」으로 정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 모두 믿음의 결단력 있는 일꾼으로 자리 잡기를 축원합니다.
1. 빌립(Φίλιππος)의 기초 이력서 |
43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44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
주소는 갈릴리 지방 아름다운 해변 마을 벳새다(고기 잡는 집)로서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등과 함께 동향인입니다.
학력은 특별히 랍비 교육받은 흔적은 보이지 않고 유대인의 기본교육 회당교육에다 다소 조금 더 앞서는 교육을 받은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 증거로는 잠시 후에 살펴볼 이름의 의미와 당시 바리새파의 보수권 영향 아래서 그 부모가 가진 진보주의 성향 때문입니다.
가정 배경은 부모나 형제 이름이나 족보에 관하여 성경은 일절 침묵합니다. 다만 초대 교회 문서에 의하면 그는 스불론(레아의 6남) 지파 출신이라고 전합니다.
여기서 빌립이라는 이름의 의미가 중요합니다. 당시의 헬라 문화의 영향을 짙게 받은 진보 성향의 부모이었을 것으로 짐작합니다.
그래서 더욱 전통과 보수를 지향하는 유대교보다 개혁을 부르짖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앞에 더 마음의 문을 열었을 것 같습니다.
2. 왜 빌립이 헬라식 이름을 사용합니까? |
44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
열두 제자 가운데 빌립 외에는 모두 유대식 이름을 사용합니다. 그런데 빌립만이 유대식 이름이 아닌 헬라식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에 대해 당시의 문화를 살펴보는 것이 빌립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당시 정치 체제는 로마의 황제 체제나 문화유산은 헬라의(헬레니즘) 영향권입니다. 따라서 웬만한 사람은 사회생활 편리를 위해 유대 식 이름과 헬라(혹 로마)식 이름을 가졌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볼 때 빌립의 부모는 유대인입니다. 반면 아들은 헬라 문화권에서 잘 적응하여 살기를 바라는 뜻에서 헬라식 이름을 지은 것 같습니다.
빌립이 유대식 이름은 없이 헬라식 이름만 사용하는 것은 유대교 상황에서 의외입니다. 왜냐하면, 유대식 이름이 없는 것은 유대교를 떠나는 것과 같습니다. 당시 많은 사람이 두 가지 형태의 이름을 사용하였습니다(행 06:05~06).
유대인은 자녀 이름을 정할 때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이름을 택했습니다. 따라서 주어진 이름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믿었습니다. 그러면 빌립의 부모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이름을 제하고 헬라식 이름을 사용한 것은 상당한 진보주의 성향입니다.
빌립이 성장한 가정 배경은 상당히 자유주의의 성향을 띤 가문으로 보아도 별 무리는 아닐 것입니다. 그러면 좋은 의미의 헬라식 이름이 있는데 굳이 전투 스타일 이미지가 있는 빌립(말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이름을 지었습니까?
그 이름만이 최고입니까? 여기에 대해서 나름대로 짐작 가는 일이 있습니다. 당시 빌립의 이름을 가진 유명한 인물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자기보다 아들이 더 유명합니다. 그 아들은 역사에 등장하는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왕입니다(AlexanderⅢ. B. C. 356~323).
이 왕의 세력은 팔레스타인 지역에까지 미쳤습니다. 빌립이 태어난 곳도 이 알렉산더 왕의 지배와 영향력 아래에 있는 땅입니다.
특별히 팔레스타인의 북쪽 벳새다 마을을 인근으로 한 갈릴리 북쪽 일대는 알렉산더 왕이 직접 통치하였습니다. 그리고 1세기의 벳새다 고을 통치자 중에 빌립이라는 이름의 지도자도 있었다고 합니다. 유명한 사람은 위대한 인물로 존경받기 마련입니다.
각 가정에서 아들을 가진 부모치고 누구나 아들 중에 그런 인물이 되기를 원하는 마음은 가지기 마련입니다. 또한 유명한 이의 이름을 따르는 일도 흔한 일이었습니다.
이런 문화를 따라 빌립의 아버지도 자기 아들이 장차 귀한 인물이 되기를 바라 마음으로 당시 유명했던 인물 빌립의 이름을 따 지은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3. 주님과의 첫 만남의 순간 |
43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빌립에 관하여 연구하려고 할 때 자료가 빈약합니다. 주님과의 첫 만남 등 중요한 일에 대하여 오병이어 기적 외에는 공관복음에 기록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는 성경 기자가 빌립의 생활이나 성장 과정을 알 수 없어서 기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 특별한 일이 아닌 이상 활동상을 기록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고요.
있다면 오직 사도 명단에 나오는 이름입니다. 반면 요한복음에는 빌립의 행적이 4회에 걸쳐 상세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요한복음의 기록자 요한이 친구 빌립과 함께 자랐기 때문입니다. 평소 성격이나 생활 습관 등 장단점을 잘 알고 있기에 특징을 나름 남긴 것 같습니다.
그러므로 공관복음 기자는 빌립에 대해 침묵할 때 요한만이 친구 빌립에 대해 지면을 할애해 준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여기 이튿날이라고 쓰인 그날의 전날은 안드레와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나 제자가 되기로 한 날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실 때 한 방향을 따라 부르시지 않았습니다. 제자들 성향을 따라 제각기 다르게 부르셨습니다. 안드레가 예수님께 들은 말이 무엇입니까?
무엇을 구하느냐(요 01:38)고 하셨습니다. 반면 베드로가 예수님께 나아왔을 때는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요 01:42) 하시며 새 이름부터 주셨습니다.
그리고 나다나엘이 나아왔을 때는 이는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요 01:47). 하셨습니다. 제각기 처음 대화 나누는 주제가 다르고 상당한 대화를 통해서 예수님과 처음 만남이 시작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빌립에게 처음부터 단도직입으로 나를 좇으라고 강경하게 명령하십니다(요 01:43). 어떤 다정한 대화를 나누려는 자세가 아닙니다. 또 어떤 선택 명령도 아닙니다. 그런데 빌립은 예수님의 이 명령에 무조건 따릅니다.
4. 전도자의 삶을 사는 빌립 |
45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빌립이 예수님을 만나서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이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이 오랫동안 기다리던 메시아이심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즉시 메시아 되신 주님을 따라 섬기며 살기로 결단합니다. 자기가 만난 메시아에 대한 진리의 기쁨을 지체할 수가 없어 그의 친구 나다나엘을 찾아갑니다.
45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여기서 그이라는 말은 특정한 한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 빌립이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도 성경을 믿고 그 기록대로 메시아 오기를 기다리는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빌립은 자기를 향해 나를 따르라(43) 말씀하신 분이 직감으로 메시아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후 바로 친구 나다나엘을 찾아가 예수님을 소개합니다.
빌립은 자기가 만난 예수 그리스도 그분에게 인생 전부를 투자할 가치가 있음을 알았습니다. 알고 난후 주저하지 않고 따라나섰습니다. 이런 일을 위대한 삶의 변화라고 합니다.
전도는 가까운 곳에서부터 출발하여야 합니다. 지체해서도 안 됩니다. 한 영혼을 천하보다 귀하게 여기시는 예수님의 마음이 빌립에게 전이(轉移)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받은 빌립은 전도의 열정을 품고 나다나엘을 찾아갔습니다.
우리 믿음의 가족 여러분, 주님을 사랑하고 또 우리의 부모나 형제 이웃을 사랑한다면 그들을 주님 앞으로 인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정확한 성경 지식이 바른 전도를 하게 합니다. 전도에 있어서 성경 지식이 전부는 아닙니다. 그러나 정확히 알아야 바르게 전할 수 있습니다. 이제 빌립의 전도를 받은 나다나엘이 말합니다.
46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나다나엘의 말에 빌립이 어떻게 답을 합니까? 와서 보라고 말합니다(46). 복음이 무엇입니까?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 선포이지 설득이 아닙니다. 지혜로운 빌립은 나다나엘에게 직접 와서 예수님을 한번 확인해 보라고 권합니다.
이 말이 중요합니다. 와 보아야 모든 일이 풀리는 것 아닙니까? 예수님도 요한과 안드레가 찾아와서 랍비여 어디 계십니까? 라고 물었을 때 와 보라 하셨습니다(요 01:39). 우리도 내 주위의 사람들을 일단 교회로 데리고 오는 일에 진력합시다.
5. 중요한 일에는 신중하게 판단하는 빌립 |
요 06:07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수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따라와서 벳새다의 들판을 가득 채운 날입니다. 이미 해가 지는 석양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오병이어의 현장입니다. 예수님께서 빌립에게 묻습니다.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06:05)?
굶주린 이들을 그대로 보낼 수 없지 않으냐는 질문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고 했습니다(06).
예수님께서 몰라서 물으신 것이 아닙니다. 빌립의 마음을 아시면서도 이런 상황에서 빌립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 가를 알고자 하심입니다.
그때 그 자리에 김삼일 가족이 있었다고 가정하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 것 같습니까? 아마 이렇게 반응하지 않았을까요? 기도합시다. 곤란할 때 제일 쉬운 답입니다.
아니면 배고픈데 여기서 집회만 하고 있을 때입니까? 속히 끝내고 집에 가면 좋겠습니다. 하고 말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면 빌립은 예수님의 질문에 뭐라고 답을 합니까?
07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한눈에 들판에 모여든 큰 무리를 보면서 최소한 경비와 어느 정도 떡이 있어야 하는가를 계산해 내었습니다. 그때 모여든 군중의 수효가 얼마나 되었습니까? 여자와 아이 외에 오천 명입니다. 먹고 남은 양이 열두 광주리입니다(마 14:21).
여자와 아이 외에 장정을 다 합하면 상당한 인원입니다. 그런데 그 많은 인원의 한 끼를 대강 채우기 위해서 이백 데나리온 정도 떡이 필요하다는 수치(數値)는 매우 치밀한 계산입니다.
그러나 이왕이면 빌립이 이 상황 속에서 주님, 저의 계산은 이렇습니다. 주님께서 역사하시면 전혀 다른 상황이 전개될 것입니다. 혹은 한 삼백 데나리온 정도의 떡은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하고 말했다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김해삼일교회 가족 여러분, 사업도 그렇습니다. 현실 환경과 주변 여건 그리고 나의 타산으로 이 정도까지 가능합니다. 이런 타산 위에 주님께서 역사하시면 놀라운 복이 옵니다. 주님께서 하셔야만 합니다. 라고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조금 더 나아가 이번에는 요 12:20 이하를 보겠습니다. 이 배경은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신 그다음 날입니다.
요 12:20 명절에 예배하러 올라온 사람 중에 헬라인 몇이 있는데 21 그들이 갈릴리 벳새다 사람 빌립에게 가서 청하여 이르되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여기 등장하는 헬라인은 이방인(異邦人) 즉 외국인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제가 앞서 말씀을 드린 대로 빌립은 헬라식 배경이 있다고 했습니다.
아마 그런 이유로 헬라인 몇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 중 대화하기가 제일 쉽다고 여긴 빌립을 먼저 찾아가게 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에게 면담을 원한다고 부탁합니다. 이때 빌립이 이들의 말을 듣고 알아서 즉석에서 된다. 안 된다. 말을 해 주면 됩니다.
그러나 빌립은 그렇게 답하지 않고 안드레에게 가서 면담 요청을 했다고 말합니다. 안드레는 비서실장 격이기 때문입니다. 빌립과 안드레가 예수님께 가서 보고합니다.
여기서 빌립은 어떤 상황을 만났을 때 성급히 결단하지 않고 단계를 거쳐 처리하였습니다. 매우 신중한 사람입니다. 이제 빌립에 대하여 요한복음 14장 06절부터 나오는 이야기로 좀 더 살펴보겠습니다.
요 14:0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주님은 이 유명한 말씀을 하시고 07절에서 너희가 나를 깨달으면 아버지 하나님도 깨닫게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하나님이 내 마음속에서부터 믿어진다는 이 말씀 앞에 갑자기 빌립이 이렇게 말합니다.
요 14:08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
이 말씀은 하나님을 한번 보여 주세요. 그러면 죽어도 한이 없겠습니다. 이런 빌립의 모습에서 궁금하면 꼭 확인하고 싶어 하는 스타일을 알 수 있습니다.
자세히 계산하고 확인하는 이 사람 정말 철저한 사람입니다. 나는 그대로 하나님을 믿을 수 없습니다. 눈으로 보아야 믿을 수 있습니다. 라는 스타일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지요. 그러고 보면 빌립은 실증주의 사고자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를 내게 보여 주십시오. 빌립의 이 물음에 예수님께서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너는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여 달라고 하느냐고 말씀하십니다.
많은 것을 확인하고 싶어 하면서도 주님께서 말씀하시니 네 알겠습니다. 하고 멈추었습니다. 더는 이유를 달지 않습니다. 주님 말씀이 이해되었기 때문입니다.
빌립의 전해지는 이야기를 살펴보겠습니다. |
빌립이 어떻게 일하다가 어떻게 죽었는가에 대해서 성경에서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다만 1세기의 여러 문서를 통해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은 소아시아를 중심으로 선교하다가 히에라폴리스라는 한 도시에서 순교하였다고 전해집니다.
당시 박해자들은 빌립에게 몰매를 가하고 십자가를 지워 못 박아 죽였다고 합니다. 훗날 그의 유해는 로마로 옮겨졌는데 로마에는 빌립을 기념하는 기념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그리고 그에게는 딸 넷이 있었는데 이들 역시 믿음을 지키다 순교했다고 전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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