➋지옥은 분명히 있습니다(눅 16:19~31).
지난 주일에 이은 말씀입니다.
3. 지옥에서는 어떤 소리가 납니까? |
24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땅 위의 생활은 때로는 장탄식하는 일이 있을지라도 돌이킬 수 있는 때가 있습니다. 또한 돌이키기만 하면 사는 길도 있습니다.
눅 15:11~32절을 보면 일명 탕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가 아버지께 자기 몫으로 돌아올 유산을 미리 받아 나가서 허랑방탕하여 탕진한 자입니다.
후에는 먹을 것이 없어서 돼지죽을 먹으며 후회하면서 지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께 돌아옴으로 문제를 해결하였습니다. 반면 이 부자는 음부에서 탄식하며 후회하지만 어떻게 길이 없습니다.
세상에서의 회개와 후회는 유용합니다. 생명의 길입니다. 음부에서의 후회와 탄식은 영원히 돌이킬 수 없는 영원한 불못 영벌입니다.
그곳에서 나올 수 있는 길 자체가 막혀버렸습니다. 구원의 기회가 완전히 사라져 버렸습니다. 이제 지옥에서 들리는 고통의 신음 소리가 어떠한지를 함께 들어 보겠습니다.
①지극히 작은 물 한 방울 구하지 못해 고통받는 소리가 납니다.
24 불러 이르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괴로워하나이다.
부자가 세상에서 살아 있는 동안은 날마다 호화롭게 연락하던 사람이 아닙니까? 최고의 음식을 날마다 배불리 먹으면서 대문간에서 기숙하고 있는 나사로에게는 개에게나 주는 음식 찌꺼기 정도를 던져 주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이제는 한 컵도 아닌 손가락 끝의 지극히 작은 물 한 방울이라도 있으면 자기의 혀가 서늘할 것이라는 희망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사람 팔자 정말 알 수 없습니다. 금은보화 속에 묻혀 살던 부자가 물 한 방울 때문에 극심한 갈증을 느끼고 있으니 말입니다.
죽은 자의 간절한 소원은 한 방울 물에 불과합니다.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던 그 부자가 어쩌다 한 그릇 물도 아닌 한 방울 물이 소원이 되었습니까? 물 한 방울에 그렇게 매달려야 합니까? 그만큼 그 음부 즉 지옥의 고통이 견딜 수 없음을 증명합니다.
②나사로가 있는 낙원으로 건너가게 해 달라는 소리가 나옵니다.
24절의 숨겨져 있는 내용 보겠습니다. 부자가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통스럽게 지내니 낙원으로 건너가기를 소원합니다. 라는 말입니다. 이어 낙원에서 이런 답이 전해옵니다.
26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텅이가 놓여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물 한 방울에 매달릴 만큼 뜨거운 불길 속에서 죽지도 못하고 목마른 고통을 당합니다. 너무나도 처참한 상황입니다.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상황입니다. 더 놀라운 사실은 죽은 자의 그 간절한 소원이 일체 거절되고 있습니다.
한 방울의 물도 허락되지 않을뿐더러 음부와 낙원을 서로 오갈 수 없습니다. 큰 구렁이 가로막고 있습니다. 이는 더 이상의 변화가 있을 수 없습니다.
지금 부자가 있는 곳에서 나사로가 있는 낙원까지 건너올 수 없다는 절망의 대답만 전해집니다. 죽음 후에는 구원의 기회가 전혀 없다는 뜻입니다.
마 25:10 그들이 사러 간 사이에 신랑이 오므로 준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11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주소서 12 대답하여 이르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③지상의 가족을 전도하여 달라는 소리입니다.
27 이르되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28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부자가 세상에서는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잔치하며 지냈습니다. 그러나 지옥에 와서 보니 세상일 모두가 일장춘몽과 다름없습니다. 부자는 이제 자기 형제 다섯 명만이라도 이 고통스러운 곳에 오지 않기를 원합니다.
그 대안으로 나사로가 살아 나가서 자기 형제에게 간증하고 전도하면 될 것이라고 요청합니다. 부자로 살다가 지옥에 온 이 사람은 사후의 세계를 가볍게 여깁니다. 죽은 자가 잠깐 나가서 전도할 수 있는 일이 어디 가능하기나 한 일입니까?
이런 일은 절대 불가능한 일입니다. 다섯 형제가 믿고 이곳에 오지 않을 것처럼 여기는 자체가 사후의 세계를 아주 가볍게 여기는 일입니다.
29 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30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나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 하리이다. 그러나 31절 말씀은,
31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고 선언합니다.
모세와 선지자들은 하나님 말씀 즉 성경을 말합니다. 성경 통해서 믿지 않으면 어떤 이적이 일어나서 사람의 시선을 끌어도 허사입니다. 이적 보고 믿는 사람은 이적 떠나면 역시 떠납니다.
요 06:66 그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인생이 무엇입니까? 아침 이슬과도 같은 존재입니다. 잠깐 있다가 사라지는 안개와 같은 처지란 말입니다(약 04:14). 우리가 모두 짧은 인생을 후회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삽시다.
4.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생활하였던 부자가 왜 지옥에 갔습니까? |
창 0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믿음의 가족 여러분, 주의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하는 일이 있습니다. 날마다 호화스럽게 생활하며 살던 부자가 왜 지옥에 갔습니까? 부자가 지옥에 간 것은 사실이나 부자로서 생활한 일 때문에 지옥에 간 것은 아닙니다.
그런 일은 성경의 진리에 전혀 맞지 않습니다. 지옥 가는 데 있어서 물질의 부유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또한 나사로가 천국에 간 것도 역시 가난하였기 때문도 전혀 아닙니다.
①부자는 메시아를 바라보는 삶을 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창 03:15 절에서 나타내 보인 메시아를 바라보지 못하고 생명 길에서 이탈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사람은 이스라엘의 메시아 정신을 망각한 사람입니다.
②부자는 이웃에 대한 사랑 눈이 감겼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압축하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또한 이스라엘 백성이 살아가는 삶의 가치관입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자 곧 고아와 과부를 돌아보는 사랑 실천입니다.
신 15:11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가 네게 명령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땅 안에 네 형제 중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
그런데 이 부자는 자기만 알았습니다. 대문간에서 걸식하며 지내는 환자, 생명이 경각에 달린 나사로를 구제의 눈과 사랑의 눈으로 보지 못했습니다.
하루에도 수없이 대문간을 출입하면서 이웃사촌 나사로의 모습을 그저 무관심하게 보아 넘겼습니다. 오히려 눈살을 찌푸리며 쫓아내라고도 말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그의 삶의 가치관은 하나님 나라와는 거리가 먼 삶입니다.
부자는 자기의 소유물이 자기만의 향락을 위해 사용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미처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큰 죄가 되는지도 몰랐습니다.
우리 속담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상전이 배부르면 종들의 배고픔을 알지 못한다. 아마 이 부자도 자기의 부유가 사랑의 눈을 가린 것 아니겠습니까?
자기 집 대문 앞에 누워 지내는 거지 나사로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하였습니다. 나사로를 눈살 찌푸리는 정도로만 생각한 것 같습니다.
굳이 자기가 나사로를 직접 돌아보아야 할 책임이 있음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생각만 하면 무엇 하며 동정심을 가지면 무엇 합니까?
자기는 화려한 옷을 입고 친구들과 잔치를 벌이며 인생을 즐겼습니다. 그러면서도 나사로가 배고파하고 온몸이 헐어 개가 핥아먹고 있음을 더럽게 보았습니다.
나사로 속에 있는 하나님의 형상을 보지를 못함으로 부자의 사랑의 눈이 감겨 버렸습니다. 그의 집에서 울려 나오는 풍류 소리가 하나님의 심판을 삼켜 버렸습니다.
이 말씀을 듣는 우리는 이 사람처럼 막대한 재산을 소유한 거부가 아닙니다. 이 부자의 이야기가 나와는 상관없는 문제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 비유를 통하여 주님은 적당하게 풍요와 쾌락을 즐기며 자기만의 행복을 위해서 나눔이 없는 삶을 사는 자에게 베풂의 삶을 살라는 메시지입니다.
믿음의 가족 여러분, 오늘 우리의 주변에 굶주리며 신음하는 이웃은 없습니까? 우리가 돌보아야 할 나사로는 현실의 바로 지금 누구입니까?
북한 땅에는 수백만 명의 동포들이 정치 문제, 경제 문제로 무너지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곁에는 실업대란과 경제 한파로 정치 혼란으로 생존을 걱정하는 신음이 곳곳에서 새어 나옵니다.
③부자는 남다른 부(富)를 가지고도 감사할 줄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가 그렇게 많은 부를 가지고도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았으며 본문 어디에서도 감사의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학 02:08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세상의 재물은 하나님께서 주셔야만 있습니다. 열심히 일해서 벌었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은 것이면 나의 소유물로 자리 잡지 못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자기가 소유한 부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를 표현하는 자세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대단히 안타까운 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에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며 하나님께 예물을 드릴 때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쁘게 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유형무형 재산을 소유하더라도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로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 마음을 가질 때 염려와 욕심에서 해방될 수 있습니다.
고후 09:07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④사후의 일에 무관심했기 때문입니다.
부자는 세상에서 잘 사는 것만 생각했을 뿐 내세(來世) 문제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직 그에게 관심거리가 있다면 어떤 옷을 입을까? 어떤 음식을 먹을까? 내일은 어떤 잔치를 베풀까? 라는 육신 생활의 향락 거리입니다. 그것이 유일한 흥밋거리였습니다(19).
세상에서의 육신의 쾌락만 생각하면 곧 가게 될 내세에 대해서 심령 감각이 무디어집니다. 하나님도 보이지 않습니다. 믿음의 감각이 점점 무디어져 갑니다. 지옥에 간 것은 죽음의 문제 장래의 문제에 관해서 관심을 두지 않은 증거입니다.
그저 세상 재미에 빠진 것으로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현실의 우리 주변에도 빠진 자가 많습니다. 돈에 빠진 자, 부귀영화에 빠진 자, 춤과 도박, 마약, 여자 등 향락에 빠진 자가 많습니다. 이런 것에 마음을 빼앗기면 생명의 주님을 모실 공간이 없습니다.
결국 부자는 스스로 천국 가는 길을 저 버렸기 때문에 지옥에 갔습니다. 세상에서 살 때는 경제 문제로 아쉬운 소리 한번 해 본 적이 없던 사람입니다.
가난이 무엇인지 모른 채 능라주단(綾羅綢緞)으로 몸을 감고 장구 소리 꽹과리 소리가 자기 집에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의 삶이 이렇게 바뀔 줄이야 어디 상상이나 하였겠습니까? 그래서 사람에게는 세상의 일도 중요하지만, 장래 일은 더욱 중요합니다. 사람이 장래 일을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자기에게 생명줄과 같습니다. 이 생명줄 관리를 잘해야 합니다.
시 103:15 인생은 그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과 들의 꽃과 같도다.
여기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는 온 인류가 가고 있는 두 가지 길의 안내장입니다. 생명의 양식으로 받아야 할 말씀입니다.
성도 여러분, 문제는 죽음 이후의 일입니다. 세상에서 사는 것이 어렵기는 해도 그럭저럭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죽음 이후에는 내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내세를 부정하며 생활했던 어리석은 부자처럼 살지 마십시오. 현실에 마음을 빼앗겨 나만을 위해 살아가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않게 하십시오. 사후의 일을 미리 관리를 더욱 잘하십시오.
영원히 고통스러운 장소 괴로움과 고통만이 있는 유황불 뜨거운 불못에 들어가지 않도록 지금부터 신앙의 재출발을 다짐합시다. 인생 관리를 다시 잘 정돈합시다.
어차피 우리 인간은 때가 되면 다 세상을 떠납니다. 내가 내일 살아 있을 것도 때와 시간의 관점에서 보면 불확실한 미래입니다.
믿는 자들에게는 또 하나 확실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손으로 짓지 아니한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는 일입니다.
고후 05:01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현실에도 무수한 부자와 나사로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낙원 아니면 음부라는 영원한 곳을 향해 세상을 떠나게 될 것입니다.
믿음의 가족 여러분, 주님과 함께 지낼 처소가 예비 되어 있습니까? 그날은 나에게 순식간에 다가올 것입니다. 종말이 감각을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마 24:40 그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41 두 여자가 맷돌질을 하고 있으매 한 사람은 데려가고 한 사람은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 42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
요 0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주님께서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 14:16) 라는 말씀처럼 예수님을 따라가면 구원의 길, 구원의 진리, 구원의 생명을 잃지 않습니다.
본문을 살펴볼 때 나사로의 이름은 나오는데 부자의 이름은 나오지 않습니다. 이 부자의 이름이 본래 없어서입니까? 그것은 아닙니다.
거지 나사로는 구원받았기 때문에, 그 이름이 생명책에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나옵니다. 부자는 구원받지 못했기 때문에 그 이름이 생명책에 없습니다. 그래서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다.
전해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이 부자의 이름은 다이브스(Dives)입니다. 그런데 이 이름의 뜻이 라틴어로 부자(dives)라는 의미입니다.
라틴어 성경(불가타역)에서 번역할 때 부유한 사람이라고 표현한 것이 부자의 이름처럼 굳어져서 다이브스가 되었습니다. 실제 인물보다는 부자를 칭하는 상징입니다. 오늘 말씀은 다이브스와 나사로의 삶의 결과를 소개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소개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부자 다이브스는 돈이 많은 사람을 대표하기보다 세상 살기가 너무 좋아서 하나님을 모실 수 없는 사람을 상징합니다.
부자로 살았던 이 사람이 음부의 세계에서 지금도 계속 탄식하는 소리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껄, 껄, 껄의 신음입니다. 어떻게 들리는지 한 번 들어 볼까요?
①이럴 줄 알았으면 하늘 가는 길을 찾았을 껄. ②진작 메시아를 영접하고 이웃 사랑을 실천하면서 살 껄. ③이런 세계가 있는 줄을 알았으면 나사로에게 먹을 것을 줄 껄. ④그랬으면 지금 물 한 모금을 얻어 마실 수 있을 껄. ⑤내 형제 다섯을 진작 전도할 껄.
믿음의 가족 여러분, 지옥 현장을 살펴보는 말씀을 통해 부자의 고통스러운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영의 귀가 열리시기를 바랍니다.
찰스 스펄젼 목사(Charles Haddon Spurgeon, 1834~1892) 하나님의 달력은 오늘이요 마귀의 달력은 내일이라고 하였습니다. 오늘 예수님을 만나십시오. 내일로 미루지 마십시오.
어느 한 장로님이 연세가 드셔서 운명할 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꿈을 꾸다가 그만 천국과 지옥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것을 보고 온 장로님은 놀라서 많은 것을 회개하였습니다. 특히 목사님께 잘못한 것 같아서 목사님을 찾아뵈어 용서를 구하고 목사님과 화해하였습니다.
장로님이 목사님에게 꿈 이야기를 하였더니 잠시 후에 목사님께서 그 장로님을 서재로 부르시고는 심각하게 물었다고 합니다. 장로님, 정말 천국이 있기는 있는 것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