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강단/2023년 말씀

우리 모두 진한 사랑을 합시다(요 13:34~35).

복을받는 교회와 나 2023. 9. 30. 1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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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일 미워하는 사람이 있으면 이렇게 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네 원수를 친구처럼 사랑하라. 그러면 너는 하나님의 친구가 될 것이다. 네게 무관하고 낯선 사람일지라도 사랑하라. 그러면 하나님 가까이에 있게 될 것이다.

네 마음에 끌리지 않는 사람도 사랑하고 네 마음에 받아들이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너를 영접하실 것이다. 너를 미워하는 사람에게 선을 행하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을 네게 넘치도록 부어 주실 것이다.

너를 용납하지 않는 사람을 초청하라. 하나님께서 네게 영광의 문을 넓게 열어 주실 것이다.

 

사람은 사랑 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하거나 다른 사람에게서 사랑받아야 하는 존재입니다. 만일 사랑하는 사람이 없고 사랑을 받을 사람이 없으면 두 달을 넘지 못해서 조현병에 걸린다고 합니다. 결국은 파멸의 자리에 이릅니다.

사람이 먹는 것과 입는 것 그리고 잠을 잘 수 있는 곳이 해결된다고 해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고 사랑받으며 사는 존재라는 말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넉넉하고 풍요롭다고 해도 사랑을 주고받을 수 없다면 세상을 살아갈 힘을 잃게 됩니다. 마침내 실의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진정한 출발은 교회에 출석하는 날이나 세례를 받는 날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를 나의 구주로 신뢰하고 거듭나는 날부터입니다.

 

복을받는교회 가족 여러분, 우리가 거듭나면 그때부터 교회의 진정한 공동체 회원이 됩니다. 공동체에 속하여 신령한 경험도 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는 신앙인에게 신앙 성장에 도움이 될만한 환경을 제공하여야 합니다. 공동체 안에서 성도 간의 관계를 사랑으로 묶어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 말씀 제목을 우리 모두 진한 사랑을 합시다.로 정했습니다. 말씀을 들으면서 내가 먼저 사랑의 분위기를 띄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주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사랑을 명하십니다.

 

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한서신 바울서신 베드로서신을 보면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이 반복되어 나옵니다. 우리는 그중에 중요한 말씀 34절을 함께 읽었습니다. 이 말씀에는 사랑의 명령과 사랑의 본과 또 우리가 사랑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이유가 들어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는데 그 근본 의미는 사랑을 한번 해 보라는 권면이 아니라 명령입니다.

 

복을받는교회 가족 여러분 사랑의 명령을 아십니까? 아니 어떻게 사랑을 명령할 수 있습니까 라고 반문하실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 예수님께서 분명히 사랑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정말 주님께서 사랑하라고 명령하셨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당연히 순종해야 합니다.

 

사람에게 왜 사랑의 명령이 필요합니까? 우리의 감정이 허락하지 않는 사람까지도 사랑을 나누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랑의 명령을 앞에 놓고 하나님, 저 사람만은 사랑할 수 없습니다. 제발 저 인간은 제외해 주십시오. 라고 대답할 수도 있습니다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감정을 아시고 누구든지 사랑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우리의 부족함과 사랑을 잘 실행하지 못함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사랑하라고 명령하시는 이유는 우리에게 순종할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사랑을 나누지 못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사랑을 결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할 수 없다는 것은 핑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거듭난 신앙인은 얼마든지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데도 하지 않으면 그것은 불순종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따라서 어떤 사람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모든 사람을 사랑하려는 결심을 굳게 합시다.

 

사랑의 시작은 결심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즉흥이 아닌 굳은 의지의 사랑은 하나님 명령에 순종하려는 마음에서 출발합니다.

주님께서 사랑하라는 명령 앞에 덧붙이신 말씀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새 계명입니다. 무엇과 비교해서 새 계명입니까?

옛 계명 즉 모세의 율법 중에 가장 대표적인 십계명과 비교해서 새 계명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새 계명을 주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옛 계명인 율법을 통해 죄인 됨을 깨닫기 위함입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구원받은 우리가 사랑으로 예수님의 삶을 실천하기 위함입니다.

 

 

2. 주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의 본이 있습니다.

 

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이 말씀에서 예수님의 모범 된 사랑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13장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일로 시작합니다. 이어 사랑을 행동으로 보여주신 다음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는 말씀으로 결론을 내립니다.

주님의 사랑은 말과 이론이 아닙니다. 구체성 있는 섬김입니다. 37절을 중심으로 예수님과 베드로 행적을 비교하면서 사랑의 주님을 만나 보겠습니다.

 

37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베드로가 어떻게 고백합니까? 주님을 위하여 자기 목숨까지도 던지겠다는 고백입니다. 주님을 위해 목숨을 버리겠다니 굉장한 사람 아닙니까? 이런 결심은 아무나 할 수 없습니다. 베드로의 행동을 요 13장을 통해 좀 더 자세히 보겠습니다.

요한복음 13장은 다락방을 배경으로 벌어지는 일입니다. 이 다락방은 주님께서 제자들과 더불어 마지막으로 만찬을 드시기 위해 빌린 장소입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어떤 집을 방문하면 발을 씻겨 주는 관습이 있습니다. 유대 지방은 특별히 사막 지대에 위치하여 약 6개월은 건기(乾期)에 접어듭니다.

 

또 신은 샌들을 신습니다. 종일 사막의 먼지 구덩이를 다니면 발이 매우 더러워집니다. 그래서 손님을 맞이할 때 우선 발을 씻을 물부터 내어놓습니다. 이런 일은 주로 종이 합니다. 따라서 집마다 현관에 물동이와 대야를 준비해 놓습니다.

그러나 지금 예수님과 제자들이 모여 있는 다락방은 빌린 장소입니다. 대야와 물동이와 수건은 준비되어 있지만 그곳에 한 가지가 없습니다. 종입니다.

 

이런 환경이다 보니 아무도 자리에서 일어나 주님의 발을 씻길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주님의 발을 닦아 드릴 제자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러니 베드로가 주님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겠다고 한 말이 얼마나 허망에 그치고 만 말입니까?

사실 예수님과 열두 제자는 좀 지저분한 채로 식사하는 때가 종종 있었습니다. 저녁 식사가 한창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주님께서 일어나셨습니다.

 

04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05 이에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닦기를 시작하여 06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으시나이까 0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후에는 알리라.

 

발을 씻을 물도 대야도 수건도 있으나 제자들이 발을 씻길 생각을 하지 습니다. 자기들은 종이 아니므로 발을 씻길 필요를 느끼지 못합니다.

바로 이 순간 예수님께서 종의 자리에 서셨습니다. 제자들 모두가 종의 자리에 서지 않자 주님께서 직접 제자들의 발을 씻기기 위해 종의 자세로 일어나셨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주님께서 종의 자리에까지 이르사 이 땅에 오셨음을 평소에도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마 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모두가 상전은 될지언정 종의 자리에 내려가지 않고 있을 때 주님께서 친히 종의 일을 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주님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겠다고 고백합니까? 그러면서도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 사람이 바로 우리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추상적인 고백은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반면 봉사의 자리에서 이웃의 발을 씻겨 주는 사랑의 실천은 말처럼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미국 서부 개척 시대에 타고 다니던 역마차도 좌석 구분이 있었다고 합니다. 오늘날의 기차나 비행기처럼 특별석을 지정해 놓은 것은 전혀 아닙니다. 어떻게 좌석의 등급을 매겼을 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그 구분은 이렇습니다.

일등석 마차 표를 산 사람은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마차에 앉아 있을 수 있습니다. 마차가 달리는 도중 혹 바퀴가 빠졌을 때도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있습니다.

이등석 표는 마차가 고장 났을 때 일단 내려 길옆에 서서 구경하는 사람입니다. 이에 비해 삼등석 표는 마차가 고장 나면 팔을 걷어붙이고 마부와 함께 수리해야 하는 사람입니다. 교회 안에도 일등 신자, 이등 신자, 삼등 신자가 있는 것 같습니다.

일등 신자는 항상 대접받기를 좋아합니다. 이등 신자는 잘해 봐, 하면서 구경만 합니다. 3등 신자는 주방에서 열심히 일하고 자나 깨나 이름 없이 빛도 없이 또 일합니다.

팔짱만 끼고 구경하는 사람은 천국에서 받을 상이 과연 있을 것인지 잘 생각해 보십시오. 나는 주님을 위하여 목숨을 기꺼이 드리겠습니다.

이렇게 고백하면서도 자기에게 주어진 봉사의 직무는 소홀히 하는 베드로를 위해 주님께서 친히 종의 도를 보이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주님께서 친히 겉옷을 벗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그 모습처럼 너희들도 서로 사랑하라는 사랑의 본보기입니다.

 

 

3. 주님의 제자된 증거는 사랑입니다.

 

35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우리가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면서 서로 사랑해야 하는 이유를 35절 말씀이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①옛날 소크라테스의 제자를 자처하는 사람들은 나는 양심대로 산다. 나는 정직하게 산다. 를 그의 제자 된 증거로 삼았습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은 그들의 율법을 지키며 그 율법을 보존하는 것으로 그들이 바리새인인 것을 나타내었습니다.

주님 당시에 광야에서 공동체 생활하던 에세네파의 제자들은 절제 생활과 금욕을 실천하며 자기들이 에세네파의 제자인 것을 자랑했습니다.

 

그러면 주님의 제자 된 증거는 무엇입니까? 35절 말씀을 따라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그리스도의 제자 된 유일한 표지입니다.

주님은 너희들이 성경을 가지고 다니면 내 제자인 줄 알리라. 너희들이 찬송을 잘 부르면 내 제자인 줄 알리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고 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여러분에게 어떤 분입니까? 철저하게 사랑을 외치시고 실천하신 분이십니다. 사랑 때문에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분입니다.

 

우리가 세상을 바꾸는 힘을 상실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주님께서 가르치신 사랑을 직접 몸으로 실천하지 못한 데 있습니다.

왜 우리 주변을 복음으로 물들이지 못합니까? 교회가 진정한 능력을 나타내지 못합니까? 전도하는 수고에 사랑이 함께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영혼을 돌보고, 사랑하고, 우리 마음을 내어주고, 이웃의 발을 씻어 주는 진정한 사랑이 수반되지 않으면 전도는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참된 전도 폭발은 한 영혼을 향해서 주님께서 하신 구체적인 사랑을 보여줄 때 가능합니다. 수건을 들고 제자들 발을 씻겨 주는 사랑을 실천하지 못하면 영혼의 앉은뱅이가 됩니다. 오직 사랑이야말로 모든 일에 열매를 맺게 합니다.

이 위대한 메시지를 기록한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과 요한 일이삼서를 통해 줄곧 사랑을 강조합니다. 요한서신에 제일 많이 나타나는 표현이 무엇입니까? 서로 사랑하자. 입니다.

 

요일 04:0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오늘의 말씀을 맺습니다.

 

엡 05:01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02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 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사 친히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사랑해 주셨습니다. 우리도 이제부터는 서로 주님 안에서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어떤 일을 당하여도 서로 사랑으로서 문제를 풀고 열어가야 합니다. 충돌하면 안 됩니다. 서로 양보하여야만 합니다.
상대가 양보 못 하면 내가 하여야 합니다.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오는 탕자를 외면하지 않고 맞아주셨던 아버지의 심정으로 말입니다.

 

1971년에 뉴욕포스트의 피트 해밀(Pete Hamill) 칼럼니스트는 자기가 들은 한 전과자의 이야기를 재구성한 귀향(Going home)이라는 글을 신문에 발표했습니다.

이 이야기는 다음 해에 「리더스 Reader's Digest」 잡지에 게재되었고, TV 드라마로도 제작되어 미국 전역뿐만 아니라, 온 세상에 명성을 크게 얻었습니다.

미국에 빙고라고 하는 한 남자가 플로리다로 가는 버스를 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몇 시간 동안 아무런 말도 없이 침울하고 근심에 싸여 있습니다. 너무도 초조하게 보이기도 해서 한 친절한 사람이 그에게 다가가 물었습니다. 무슨 근심이 있어서 이렇게 초조하고 안절부절못합니까?

 

그러자 빙고는 마침내 굳게 닫힌 입을 열고 자기의 마음을 이야기하였습니다. 나는 죄를 짓고 4년 동안 뉴욕 교도소에서 감옥생활을 하다 형기가 만료되어 자유의 몸으로 집으로 돌아가는 중입니다.

나는 너무 부끄러운 일을 저질렀기에 4년 전에 아내에게 나를 잊어버리고 다른 사람과 결혼하라고 권유했습니다. 그 후로 3년 동안 아내로부터 소식도 일절 없었습니다.

 

그러나 출소 일이 다가오고 딱히 갈 데도 마땅치 않아 일단 집으로 돌아가기로 작정했습니다. 내 집은 브로크릴이라는 마을에 있습니다. 그곳은 차가 지나다니는 길가에 자리 잡고 있고 마을 어귀에는 큰 참나무가 하나 있습니다.

나는 아내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습니다. 내가 이 차를 타고 지나갈 때 당신이 나를 받아준다면 마을 어귀의 참나무에 노란 손수건 하나만 매달아 놓아주시오. 그렇게만 해 준다면 그것이 나를 영접해 주는 표시인 줄 알고 집에 들어갈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에 손수건이 없으면 이미 당신은 다른 사람과 결혼한 줄로 알고 그저 지나쳐서 갈 곳으로 가겠노라고 했습니다. 이제 내가 살던 집에 거의 다 왔는데 걱정입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차 안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다 초조해졌습니다. 모두 창밖을 바라보면서 참나무가 보이기를 기다렸습니다. 마침내 차 안에서 함성이 터집니다.

그 큰 참나무에 온통 노란 손수건으로 매달아 놓았습니다. 손수건 하나만 묶어 놓으면 혹시 남편이 못 보고 지나갈까 봐 아내가 그 나무에 온통 노란 손수건을 묶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노란 손수건은 용서와 포용과 사랑의 표현입니다. 부끄러운 과거를 용서해 주고, 고달픈 세월을 마다하지 않고 남편을 기다려 준 아내의 지극한 사랑입니다.

이 감동의 이야기는 1973Tony Olando & Dawn이 만든 노래 오래된 참나무에 노란 리본을 달아주세요. 가 크게 히트하면서 모두가 기억하는 감동 스토리로 남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무엇을 초조하게 기다립니까? 우리 앞에 있는 무엇을 생각합니까? 무엇을 걱정합니까? 상대방이 나에게 다가와 주기를 기다립니까?

만약 나에게 이야기 속 빙고의 아내처럼 용서를 구하는 누군가의 편지나 문자 메시지가 온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혹은 나로 인하여 상처를 입은 누군가에게 나는 용서를 구하는 편지를 쓸 수 있습니까? 쓴다면 어떤 내용을 담을 수 있습니까?

 

오늘은 누군가의 상처를 닦아 줄 깨끗한 노란 손수건 한 장을 내 마음에서 꺼내 놓을 수 있는 날이 되면 좋겠습니다.

내가 기다리는 노란 손수건을 상대방도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내가 먼저 포용하고 사랑하면서 살아가면 됩니다. 조금 손해를 본다고 생각하며 살면 됩니다.